‘달인’, 몸 개그와 짧은 개그의 만남

리모콘이 생겨난 이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혹은 ‘서론-본론-결론’ 형태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끊임없이 공격받아왔다. 이제 시청자들은 발단에서부터 뜸을 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시작이 지루하면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손가락에 의해 여지없이 잘려져 나간다. 그러니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나 서론은 점점 축약되고 있다. 그것이 드라마건 방송 프로그램이건 김수현 작가 식으로 표현하면 “베토벤의 ‘운명’처럼 처음부터 짜자자잔 하고” 시작한다. 사실, 너무나 서사구조에 익숙해져버린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서론은 너무 뻔한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척’하고 보여주면 ‘착’하고 알아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방송 프로그램들 속에서도 이런 서론이 사라지는 징후를 가장 잘 보여주는 분야가 개그 프로그램이다. ‘개그 콘서트’로 촉발된 이 새로운 경향은 무수히 많은 개그맨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짧은 시간을 준다. 그리고 거기서 웃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린다. 물론 그 일차적인 가위질은 PD가 한다. 하지만 이차적인 가위질은 바로 시청자들의 리모콘에 의해 일어난다. ‘개그 콘서트’의 많은 개그 코너와 개그맨들이 ‘마빡이’같은 자신들의 처지를 호소하는 아이템을 들고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짧은 시간 내에 웃기지 못하면 시청자들의 기억에서 편집될 수밖에 없는 개그맨들의 강박증을 잘 보여주었다.

짧은 개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개그맨들은 여러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몸 개그와 그 속에 드러나는 자학경향이다. 주목받지 못했던 임혁필이 땅거지로 등장하면서 후에 세바스찬으로 인기를 얻게 되는 과정은 그 자학개그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 시기 박준형은 무를 갈았었고, 정종철은 옥동자로 못생긴 얼굴을 한껏 과장했다. 중요한 것은 이들 초창기 ‘개그 콘서트’의 공신들이 보여준 개그에 서사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웃음은 ‘서사 속의 반전’이 주는 웃음이라기보다는 자극적인 장면과 함께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키는 몸 개그(자학경향이 있는)에서 비롯됐다.

이러한 몸 개그의 극단을 보여준 것은 지금은 사라져버린 ‘웃음충전소’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무대개그가 가진 한계를 정교한 세트와 야외촬영의 교차편집으로 뛰어넘으려 했던 ‘웃음충전소’는 녹화방송이었지만 무대개그가 보여주었던 극단적인 몸 개그의 경향을 끌어들였다. ‘타짱’은 전후맥락 상관없이 무조건 상대방을 웃기기만 하면 이기는 대전개그를 보여주었고, ‘막무가내 중창단’은 의미와 상관없이 노래 가사의 일부분을 몸으로 보이는 개그를 선사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지만 곧 ‘웃음충전소’는 폐지되었다. 이유는 무엇일까. 개그 프로그램의 새 패러다임은 몸 개그에 있었다기보다는 무대개그가 가진 순간적이고 ‘짧은 개그’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사라져버린 ‘웃음충전소’의 코너들 중, 주목해야할 코너가 있다. 그것은 김병만이 선보인 ‘따귀맨’이다. 이 코너는 ‘웃음충전소’라는 프로그램이 사라지기도 전에 단 몇 회로 끝나버렸는데, 정확하게 몸 개그와 짧은 개그의 접합점을 모색했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주인공을 패러디한 복장의 김병만은 그 분장만으로 모든 서사의 설명을 지워버리고 곧바로 정의의 사도로서 악당들에게 무차별 따귀를 날리는 장면을 보여준다. 바로 이 단순함과 명쾌함은 김병만 개그가 가진 특징을 이루었다. “저거 개그야 무술이야?”할 정도의 몸 개그를 통해 단순하고 과장된 몸이 보여주는 순간적인 웃음을 포착해온 김병만이 ‘달인’이라는 짧은 개그에서 폭발력을 보여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코너와 코너 간에 잠깐 쉬는 시간을 활용한 듯한 이 코너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더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짧은 시간 속에 순간적 웃음을 전달하려는 노력은 그만큼 더 높은 집중도를 요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꾸만 짧아지는 개그의 경향은 거꾸로 말하면 시청자들의 긴 서사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드라마 같은 기본적으로 짧으면 안 되고 길어야 성공하는 분야가 있지만 이것은 드라마가 가진 산업적인 성격과 그 요구되는 진정성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즉 드라마는 자못 진지한 마음으로 보지만, 개그는 쉬는(오락) 목적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진지한 접근이 거부감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논리적인 서사에 대한 거부는 상당부분 디지털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아날로그 문화가 가진 ‘처음부터 중간 과정을 다 봐야 끝을 볼 수 있는’ 서사의 특성은 디지털 문화로 오면서 ‘아무 곳에서나 중간 중간 끼어들어 볼 수 있는’ 하이퍼 텍스트적인 속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성향이 기술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술이 성향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 프로그램으로 적용되어 ‘개그 콘서트’처럼 분절적인 구조의 개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점이 있다. 기본적으로 분절적인 구조를 이루려면 프로그램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개그 코너들이 저마다의 개성과 특성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개성의 정점에는 당연히 캐릭터화된 개그맨이 존재해야 한다. 갈갈이 박준형과 마빡이 정종철 같은 한 코너의 캐릭터로서 부각된 개그맨들은 설명 필요 없이 즉각 웃음폭탄을 날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짧은 개그에 그만큼 유리하다.

‘개그 콘서트’로 촉발된 무대 개그 전성시대 이후에 방송 3사가 경쟁에 들어가고 현재 결과적으로 무대 개그가 하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개성이 잘 포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개성의 출현(너무 많은 캐릭터들) 때문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다지 눈에 뜨일 정도로 보이지 않는 개성들의 소소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결과적으로 분절된 구조를 분절된 느낌으로 전달하지 못하는 코너들은 이제 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 덩어리 속에서 발 하나를 빼고 나온 ‘달인’의 돌출이 눈에 띄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개그 프로그램의 분절화는 시대의 요청이지만 지나친 경쟁구도로 인해 과도하게 생산되는 것은 문제다. 바로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개그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숙제가 될 것이다.

‘드라마시티’, 왜 살려두지 못하나

왜 짧으면 안되는 걸까. 우리네 문화 중에서 짧은 것들은 왜 대부분 퇴출의 위기에 직면하는 것일까. 문학에 있어서 단편소설이 그렇고, 영화에 있어서 단편영화가 그렇다. ‘이 시대 마지막 단막극’, ‘단막극의 멸종’이라는 비장한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가 이미 이 ‘짧은 것들’에 대한 선호를 일정부분 포기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KBS가 폐지를 결정한 단막극 ‘드라마시티’의 마지막 방송이 일주일 남짓 남겨진 가운데, 방송작가협회와 KBS PD협회의 철회 성명에 이어 노희경 강은경 이금림 박정란 주찬옥 정성주 등 드라마 작가 57인이 ‘드라마시티’를 살려내라는 성명서를 냈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그것도 방송 3사를 통틀어 한 시간밖에 할애되지 않고 있는 단막극은 이들의 표현대로 멸종될 위기에 처한 셈이다.

이리저리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드라마시티’를 폐지시키려는 이유는 한 마디로 ‘돈이 안되기 때문’이다. ‘드라마시티’는 시청률이 보장되지 않고, 또 광고게재를 위해 계산될 수도 없기 때문에 방송사에게는 손해다. 돈은 투입되나 이익은 창출되지 않는다. 기업의 입장에서 이익 안 되는 사업에서 발을 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것은 KBS 같은 공영방송에서는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KBS 스스로 자신들의 결정이 경제적으로는 합리적이나 윤리적으로는 비합리적이라는 걸 자인하고 있는 셈이다.

단막극의 효용은 한 방송사의 효용보다는 사회 전체의 효용으로 봐야 한다. 단막극은 이미 코드화된 소재와 기법을 가지고 상업적으로만 치닫는 장편 드라마들의 세상 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실험의 장이다. 흔히들 드라마 하는 사람들은 “남의 돈 갖다가 예술 하려고 하지마”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드라마는 개인 혼자의 작품이 아니다. 여기에는 수많은 제작진들과 방송 관계자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막대한 제작비가 투여된다. 하지만 이런 상업적인 드라마들만 제작해서는 드라마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정체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드라마시티’ 같은 창구를 없애버리면 새로운 피, 즉 신진 작가들이 수혈될 수 있는 곳이 사라지게 된다.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내는 단막극은 이런 점에서 효용성을 발휘한다. 여기서는 적어도 새로운 생각의 작가나 PD들이 예술(적어도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으로서 KBS가 끝까지 단막극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사회적인 효용성을 위해서이다.

공영방송인 KBS의 입장에서 보면 단막극의 존립은 그 자체로 자신들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상업방송이 하지 않는 영역을 하고 있다는 가장 상징적인 프로그램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기적인 이익이 아닌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단막극의 폐지는 오히려 손해가 될 공산이 크다. 방송사의 정체성은 몇몇 프로그램의 성공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KBS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손익계산을 해본 결과 그들은 폐지를 선택했다. 그것은 이제 공영방송이 더 이상 지금의 방송환경에서 생존하기 어렵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송은 그 자체가 이제 공익성보다는 오락성, 상업성으로 점점 인식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점이 이 짧은 것들(단편 형태의 문화들)로 하여금 문화소비자들이 원하는 그 상업적인 조건을 갖추지 못하게 하는 걸까. 현재 장편 형태의 문학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들은 점점 본연의 미학에서 멀어져 스토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문학에서의 문체나, 영화에서의 영상미학, 드라마에서의 대사가 갖는 언어미학은 종종 스토리가 가진 상업성에 가려 사라져가고 있는 추세다.

따라서 문학으로 된 작품이 영화가 되고 드라마가 되는 것은 잘 들여다보면 바로 이런 스토리가 가진 상업성에 의존한 바가 크다. 문체가 뛰어난 단편소설이 좀체 장편영화화 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이 그렇지는 않지만 장편들이 대부분 상업성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상황 속에서 반대에 위치한 단편들은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두 쉽게 변환이 이루어지는 장편들의 특징인 ‘스토리 지향’은 거꾸로 말하면 이들 서로 다른 장르들이 가진 고유의 미학이 아니라는 말도 된다는 점이다. 드라마가 드라마로서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이야기가 멋지기 때문만이 아니라 드라마만이 시도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를테면 드라마만이 갖는 대사의 묘미 같은)’이 멋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문학이나 영화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그 어떤 것’은 대부분 짧은 구조 속에서 더 잘 드러난다. 짧다는 것은 군더더기가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본래 그 문화만이 갖는 장점을 가장 극대화해야되는 상황을 말해주기도 하는 것이다. 단막극 폐지가 말해주는 것은 바로 이 하나의 장르를 장르이게 하는 방법적인 틀이 적어도 드라마에서는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분명 멸종이다.

우리는 ‘단막극 폐지’를 보면서 ‘또 사라지는군”하는 체념적인 말로 수동적인 반대를 한다. 몇몇 거기에 밥줄이 달려있는 사람들 - 예를 들면 작가협회 같은 - 은 극렬히 반대하지만 그것은 이 거대한 돈의 조류에 급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방송사를 비롯한 매체들 속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이것은 그냥 많은 프로그램들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이제 ‘단막극’이라는 형식 자체가 TV에서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하나. 일주일에 한 시간. 그 짧은 시간 동안의 비상업적 방송도 이제는 더 이상 묵인하지 못하는 시대인가.(이 글은 서울예대 학보에 쓴 글을 조금 수정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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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성은 쇼의 생리지만, 지나치면 리얼리티를 없앤다

‘무한도전’의 ‘무모한 도전’시절, 출연진들이 삽을 들고 포크레인과 도전을 했을 때, 시청자들은 왜 저들이 저런 무모한 짓을 할까 의아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 몸 개그를 유발할 수 있는 가학적인 설정은 이제 그것이 ‘웃기다’는 것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무한도전’의 황사대비특집에 대한 예고장면에서, 정형돈의 얼굴에 한 초록색 물감칠에 대한 네티즌 의견이 엇갈리는 건, 이 가학성이 어디까지 왔고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시청자들은 그 장면에 정형돈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가학적 설정은 이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 복불복 게임으로 대변되는 ‘1박2일’의 가학적인 장면들은, 단지 누가 한 겨울에 밖에서 잘 것인가 같은 비교적 보이스카우트 시절을 연상케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진 그들은 간장이나 까나리 액젓을 통째로 들이마시거나, 보기에도 위험천만인 겨울철 높은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생계 버라이어티쇼라는 ‘라인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출연진들의 실제상황, 즉 생계가 거기서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에 그 자극적 상황이 종종 진정성으로 연결되는 미덕이 있을 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가학성은 출연진들과 연출자와의 묘한 대결구도까지 만들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김태호 PD를 종종 ‘악마’라고 부른다. 자신들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빠뜨리고는, 그들이 그 상황 속에서 허우적댈 때 오히려 연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출연진들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박2일’에서 멤버들은 어느 순간 잘 대해주면, ‘이건 또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식으로 의심을 한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상황과 반응이지만, 그래서 실제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지만, 그래도 웃음 끝에 씁쓸한 구석이 남는 건 왜일까.

단지 가학적인 장면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쇼에 포함된 가학적 상황과 그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기실, 현실사회 속에서의 우리네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는 그 모든 상황들이 통제되는 것에 만족한 웃음을 지을 수 있지만, 그 상황의 중심부에 서게 되는 밑바닥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도무지 자기 앞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로 하여금 묘한 가학-피학적 심리상황을 만들어낸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피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속에 가학적인 앙금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TV쇼는 이런 상황을 역전시켜 그 현실의 앙금을 털어 낸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의 멤버들을 우리는 위에서 보면서 즐긴다. 밑에 있는 그들은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는데 그 상황 자체가 가학적일수록 우리는 더 리얼하게 느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쇼가 끝났을 때이다. 그 순간 시청자는 바로 저 TV 속 캐릭터들이 처한 현실 상황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끄트머리에 남는 씁쓸함의 정체이다.

그러니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설정하는 상황의 지나친 가학성이 왜 논란을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학적인 장면을 보는 시청자의 마음 속에는 가학-피학의 양면성이 존재하는데, 지나친 장면은 오히려 그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가진 가학성은 쇼의 생리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피곤한 삶을 살아온 시청자들에게 그 짧은 시간의 일탈을 위한 가학성을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 지나친 상황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하여 불편하게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나 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전성시대는 이 시대의 현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구석이 있다.

지위가 올라도 일은 더 많아진 이 시대의 엄마들

확실히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진 시대다. 그래서일까. 주말극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건 여성들이다. 그 여성들이라 함은 TV 앞에서 리모콘을 들고 있는 여성들이기도 하고, 그 TV 속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들이기도 하다.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일상은 따라서 이 시대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가늠하게 해준다. 과연 이 시대의 여성들은 사회진출도 많아지고 위상도 높아진 만큼 덜 피곤한 삶을 살게 된 걸까.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일상은 노동 그 자체다. 자식들 때문에 늘 뿔이 나있으면서도 손에서는 일을 놓지 않는다. 그녀는 그 누구도 대신 감당해줄 수 없는 뿔을 저 스스로 끌어안고, 툴툴대면서도 늘 가족들의 밥상을 차리고,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며, 시아버지 뒷바라지를 하고, 노처녀로 늙어 가는 딸의 반찬까지 챙긴다. 세상이 여성들의 손을 들어주었다고는 하지만 이 엄마의 일상은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그만큼 보수적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는 마치 리얼리티쇼를 보는 듯한 현실의 리얼함을 담고 있다. 드라마 진행과는 전혀 상관없는 대사들, 예를 들면 ‘동네의 한 가게 주인이 무슨 일을 당했다’는 걸 가지고 떠는 수다들이 마구 캐릭터들을 통해 쏟아져 나올 때면 이거 진짜 상황 아냐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어쨌든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엄마의 일상이 갖는 피곤함은 보수적 시선에 의해 그려져서가 아니라 실제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 조금 나이를 낮춰 이 시대의 젊은 엄마들은 어떨까. ‘천하일색 박정금’의 형사 박정금(배종옥)은 참 치울 것이 많은 엄마다. 일터에 나가면 나쁜 놈들을 세상에서 치워 깨끗하게 만들어야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일상이 만들어내는 자잘한 삶의 부스러기들을 치워야 한다. 그녀는 이른바 이 시대의 워킹맘을 대표한다. ‘워킹맘’이라는 그 뉘앙스는 참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이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노동에 찌든 여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게다가 박정금의 가정은 피곤한 일상에서 파김치가 되어온 엄마의 피로를 풀어줄 만큼 편안하지가 못하다. 새엄마를 들인 아버지와 아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다, 아파트 청약에 사기를 맞아 외간남자들과 같이 살아가야 하는 처지다. 게다가 어린 자식을 잃어버린 그녀는 늘 그 죄의식에 살아가야 한다. 즉 그녀는 육체의 피가 튀는 일터와 정신의 피가 튀는 가정을 가졌다. 그녀는 진정으로 쉴 곳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게 없는 건 아니다. 달라진 건 엄마들이 아니라 이들 엄마들 주변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한자의 가족들은 저마다 엄마를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면서 이해하려 애를 쓰고 또 그걸 보듬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과거에 가부장적인 가족에서 자라났을 시아버지에서부터 저 막내딸과 심지어는 사위까지 포함해서 그렇다. 모두들 김한자의 노동과 맘 고생을 의식하면서 그녀의 투덜거림을 진정으로 걱정한다.

박정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변호사인 한경수(김민종)와 의사인 정용준(손창민)에게 그 고충을 이해 받는다. 한경수는 그 자신이 버려진 고아였기에, 아들을 잃은 그녀를 이해하고 그러면서 점점 그 동병상련의 마음은 애정으로 변해간다. 사기분양으로 함께 살게된 초등학교 동창 정용준은 자기가 무슨 남편이나 된 듯 그녀를 챙긴다. 정용준의 형인 정용두(박준규)가 주부 역할을 하고, 박정금의 어머니가 집안 어른 역할을 하는 그녀의 집은 이 시대의 유사가족을 형성한다. 이 안에서 남녀간의 과거적 역할은 역전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환타지다. 현실이 채워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작가의 희구인 셈이다.

주말극을 엄마들이 쥐고 있다고 해도 그 TV 바깥이나 안쪽의 엄마들은 모두 여전히 피곤하다. ‘엄마가 뿔났다’는 이것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고, ‘천하일색 박정금’은 이것을 환타지로 그리고 있을 뿐이다. 이 피곤해진 엄마들이 말해주는 것은 이렇다. 과거 전통적인 가치관과 현재의 가치관이 공존하는 가정 속에서 엄마들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은 그만큼 더 많아진 노동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노동에서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 엄마들을 바라보는 주변의 시선들이 달라졌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지금의 과도기를 넘어 언젠가는 좀더 편안해진 그녀들을 기대할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단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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