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팀원 집착 버리고 유연해져라

예능 프로그램의 지존이었던 ‘무한도전’의 시청률 하락을 갖고 요즘 말들이 많다. 인터넷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무한도전’이 한계에 봉착했다느니, 군 복무로 빠져버린 하하의 빈자리가 크다느니 하면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태호 PD는 “시청률 하락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시청률 보다 중요한 건 실험성”이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시청률 하락에 대해 스스로 ‘나들이가 많아지는 봄철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석을 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시청률에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김태호 PD가 가진 지금의 문제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대박 났던 아이템을 반복하기보다는 실험성에 중점을 둔 아이템들을 계속 발굴할 것이며, 이 점이 ‘무한도전’만의 차별성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지금의 ‘무한도전’을 있게 해준 힘이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시청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청률 하락은 김태호 PD가 말하듯 봄철 한 때의 소소한 현상에 불과할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것은 ‘무한도전’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한도전’은 특별한 프로그램 형식이 없는 자칭 ‘무형식’ 프로그램이다. 물론 ‘무한도전’이라는 틀이 존재하지만, 그 안에는 기존 프로그램들이 갖던 특별한 진행방식 같은 정해진 형식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불리는 것이다. 바로 이 ‘무형식’은 그간 짜고 치는 고스톱 같던 대본에 맞춰 진행되던 프로그램에 식상한 시청자들을 끌어 모은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이 ‘무형식’은 과연 장점만 있는 것일까.

시청자들의 요구를 잘 살펴보면 이율배반적인 구석이 있다. 시청자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 진짜 리얼한 상황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리얼한 상황이야 무형식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편안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일관된 형식, 즉 프로그램의 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바로 그 일관된 형식을 찾기가 쉽지 않다. 팀원들은 어떤 때는 무도장에 갔다가, 어떤 때는 하하의 집에 간다. 이 두 형식 간의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이것은 물론 저 김태호 PD가 말하는 ‘실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일관된 형식이 부재하다는 점은 또한 ‘무한도전’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한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리얼리티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무한도전’처럼 그것이 일관된 형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 번을 기약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댄스스포츠를 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던 ‘무한도전’이 인도를 간다고 해서 똑같이 박수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일관된 형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아이템에 따라 시청자들의 호응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무한도전’이 형식을 버리고 대신 취한 것은 캐릭터다. ‘무한도전’은 프로그램의 일관성을 형식이 아닌 등장하는 캐릭터로 유지해나간다. 즉 ‘무한도전’은 매 회마다 계속 상황이 바뀌고, 상황에 따른 형식 또한 바뀌는데, 여기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캐릭터다. 이것이 유난히 ‘무한도전’의 캐릭터 의존도가 높은 이유이다. 캐릭터 의존도로 치면 여타의 리얼버라이어티쇼들도 마찬가지로 높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무한도전’만큼은 아니다.

예를 들어 ‘1박2일’은 지상렬이나 김종민, 노홍철 같은 캐릭터가 빠져나가도 새로운 멤버가 들어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반면, ‘무한도전’은 하하 한 명이 빠져나가는 것에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무한도전’ 멤버들이 그만큼 결속력이 강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그것은 ‘무한도전’의 캐릭터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1박2일’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에는 없는 그 무엇이 ‘1박2일’의 캐릭터 의존도를 낮춘 것일까.

그것은 ‘1박2일’이 적어도 ‘여행’이라는 편안한 일관된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도를 가거나 가거도를 가고, 제주도를 가거나, 혹은 서울 한강 둔치를 간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여행이라는 틀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시청자들이 ‘1박2일’에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어디가 됐든(여기서 어디는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아이템이다), 여행 그 자체다. 이것은 무슨 무슨 특집이라고 매번 홍보해야 하는 ‘무한도전’이나 ‘라인업’이 갖지 못한 ‘1박2일’만의 장점이다. 이 ‘1박2일’이 가진 ‘일정한 틀(여행) 안에서의 무형식(리얼리티)’은 저 이율배반적인 대중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해결책이 된다.

‘무한도전’의 도전상황은 바로 그 ‘무한도전’만의 장점이었던 무형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형식은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청자들을 만족시켰지만, 동시에 어떤 편안한 틀을 요구하는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성격 자체이기도 하다. 도전이란 고정된 틀이 아닌 늘 새로운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니까.

이런 분석을 하는 것은 ‘무한도전’이 그간 우리네 예능 프로그램에 끼친 영향력을 깎아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지금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한도전’ 역시 변화해야할 시기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무한도전’은 지금의 ‘도전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좀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어떤 ‘도전의 형식’이라도 갖추어 그 안으로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편안한 리얼리티’를 마련해야 한다. 요즘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캐릭터가 이끌어 가는 게 분명하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캐릭터로부터 계속되는 애드립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일관된 상황, 즉 프로그램 형식이다.

이렇게 한다면 ‘무한도전’은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다양한 외부의 캐릭터들이 이 열려진 형식 속으로 마음껏 들어와 제 기량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틀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특정 방송사가 특정 개그맨을 붙들어맬 수 없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무한도전’이 발굴한 캐릭터들은 ‘해피투게더’ 같은 어느 정도 형식이 갖추어진 쇼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될 수 있다. ‘무한도전’은 지금 바로 그 만만찮은 도전 상황에 서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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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의 밥상은 늘 훈훈하다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자식들 때문에 뿔이 잔뜩 났다. 늘 부엌에서 살다시피 밥을 짓는 그녀가 울면이 먹고싶다며 시아버지를 조른다. 중국집에서 시아버지가 사주시는 울면을 먹으면서 그녀는 소녀처럼 즐거워한다. 한편, 뿔난 그녀가 마음에 걸려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붕어빵을 사 가지고 그녀를 찾는다. 울면이나 붕어빵은 흔하디 흔한 음식이지만 이 드라마 속에서는 그것이 마음을 전해준다. 그 마음은 그걸 만들거나 사주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걸 먹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김한자가 답답하다며 남편 나일석을 졸라 저녁 드라이브를 간 곳은 다름 아닌 딸이 일 때문에 잠을 자곤 하는 오피스텔이다. 그녀의 손에는 반찬그릇이 들려있다. 그리고 그 집 앞에서 그녀가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딸이 먹고 내놓았을 배달음식 그릇들이다. 마침 오피스텔에는 딸이 만나는 이혼남, 이종원(류진)이 함께 있었는데 그는 재빨리 이층으로 몸을 숨긴다. 그런데 그 빈자리에서도 엄마는 다른 사람의 흔적을 쉽게 찾아낸다. 그 흔적이란 다름 아닌 두 개의 커피 잔이다.

음식은 늘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고, 그걸 먹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수현 작가는 우리 생활 속에서 바로 이 음식의 흐름, 음식의 법칙을 가장 잘 아는 작가다. 전작이었던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화영(김희애)과 지수(배종옥)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나누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부엌과 그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본처를 버리고 아내의 친구와 살림을 차린 홍준표(김상중)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지수가 해주던 음식. 뻔뻔스럽게도 그는 지수를 찾아와 밥을 차려달라 하고, 그런 뻔뻔스런 남자에게 그래도 지수는 밥을 차려준다.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특히 드라마의 화자가 엄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달리 음식에 대한 묘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막내딸과 사귀는 재벌집 아들이 불쑥 찾아왔을 때도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저녁거리였다. 여기서 저녁거리를 차려주는 엄마는 그 자체로 딸의 남자친구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재벌집 아들과 헤어지겠다 마음먹고 회사에 사표까지 낸 후 집으로 돌아온 막내딸에게 엄마는 밥을 먹으라 권하지 않는다. 이유는 “마음이 더 아플테니 밥이 넘어가겠냐”는 것이다. 그런 엄마를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 막내딸이 “나는 괜찮아”하고 말하자 엄마가 먼저 하는 이야기가 “괜찮으면 밥 먹어”이다. 엄마의 사랑은 밥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때론 ‘밥 먹는 것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고은아(장미희)의 결혼반대에 대해 그녀의 아들 김정현(기태영)은 단식투쟁을 한다. 결국 사흘을 굶는 아들 앞에서 고은아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강한 여자라 해도 한 아들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식이 굶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허락을 받아낸 김정현에게 그래도 자신이 받은 치욕 때문에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나영미(이유리)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도 역시 밥이다. 그녀는 김정현이 죽을 각오로 사흘을 굶었다는 말에 와락 눈물을 쏟아낸다. 그녀 역시 미래의 엄마이다.

자신의 집안에서의 반대 때문에 힘겹게 했던 일들에 대해 사죄를 하는 김정현에게 “네가 승낙을 얻어왔어도 반대한다”는 나일석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 역시 밥이다. 자기 딸과 결혼하기 위해 사흘을 굶었다는데 아무리 나쁜 녀석이라도 세상의 어떤 아빠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까. 말은 반대한다 말하면서도 나일석은 그 나쁜 녀석에게 먹일 죽이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 죽 한 그릇이 전하는 의미는 아무리 많은 말로 해도 다 채워지기가 어렵다.

김수현 작가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툭툭 던져지는 말이나, 늘 행해지는 행동들에서도 그 독특한 뉘앙스의 의미들을 잘 찾아내는 작가다. 그래서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서 나오는 명대사란 실상은 그다지 거창한 수사가 별로 없다. 그냥 일상 용어일 뿐인데, 그것이 특정한 상황에 콕 찍힐 때 놀라운 울림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독 그녀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음식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그것이 아무리 매일 먹던 밥이나 죽이더라도 김수현이 차려놓은 드라마 상황이라는 밥상 위에 올려지면 특유의 훈훈한 맛을 전한다. 그것은 마치 매일 매일 먹는 밥이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엄마의 온기 같은 것이다. 이것이 김수현 작가가 매번 차리는 밥상이 훈훈한 이유고,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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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나 배우 뒤에 숨겨진 진짜 문제들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 ‘온에어’의 한 장면. 작가 서영은(송윤아)과 배우 오승아(김하늘)가 언쟁을 벌인다. 작가 서영은이 “우리나라 배우들은 연기 못해도 CF 많이 찍으면 스타인 줄 알지만, 미국 배우들은 쓰지도 않는 제품 홍보하는 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자 여기에 맞받아 오승아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는 작가님은 왜 작품마다 PPL로 도배를 하죠?”

‘온에어’는 확실히 이런 우리네 드라마들이 가진 문제점들을 끄집어내는 대사들이 많다. 서영은 작가와 이경민(박용하)PD가 벌인 시청률과 진정성 논쟁도 그 중 하나다. “시청률도 중요하지만 작품에는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서작가 작품에는 명대사만 많을 뿐 진정성이 없다.”고 이경민이 말하자 “드라마의 반이 구성이라면 나머지 반은 대사다. 95%의 상투성에 5%의 신선함만 있으면 된다.”고 서영은은 반박한다. 그대로 토론 프로그램에 올려놓아도 될만한 이야기들이다.

분명히 과거에는 없던 소재이고, 대사들이다. 무엇보다 액자소설처럼 드라마를 비판하는 드라마라는 점이 흥미를 끈다. ‘온에어’의 기획의도를 인터넷을 통해 보면 이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인 기획과 내용으로 이제는 ‘공산품이 되어버린’ 우리네 드라마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어 그런 문제를 만들어낸 사람들의 비판적인 발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 문제의 원인제공자로서 작가, PD, 배우, 그리고 스텝들(매니저를 포함한 연예계 관계자들까지)이다.

이경민 PD는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가 하고자하는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이경민 PD의 캐릭터는 대사 속에서 등장하듯이, 대충 시청률을 의식해 공장에서 찍어내는 듯한 드라마가 아니라, 진정성이 살아있고 통일성이 있으며 메시지가 일관되어 결과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드라마를 추구하는 인물이다. 여기에 장기준(이범수)이란 매니저는 결과적으로 이경민 PD를 드라마 밖에서 지원하는 인물이다. 그는 스타가 아니라 배우를 키워내고 싶은 매니저다.

우리네 드라마의 문제가 도출되는 것은 작가 서영은과 배우 오승아를 통해서다. 그들은 이른바 속된 말로 뜰대로 뜬 인물들이다. 아쉬울 것 없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우리 드라마가 한류바람을 타고 활개를 칠 때의 그 의기양양함을 닮았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지금 우리 드라마들의 문제점도 똑같이 닮았다. 이 드라마에서 제시되는 이들의 문제는 ‘초심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서영은도 그렇고 오승아도 그렇다. 그러니 이 드라마는 이들이 초심을 찾아가는, 그래서 본래 열정이 있었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될 공산이 크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은 우리네 드라마의 문제가 작가나 PD, 혹은 배우 때문에 생겨난 것일까 하는 점이다. 과연 그들이 초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우리 드라마의 문제가 생겨난 것일까. 오히려 그것은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의 잘못된 시스템이 초래한 문제가 아닐까. 쪽대본이 난무하고, PPL로 도배되고, 시청률만 되면 다 된다는 식의 드라마들은 사실, 사전제작제가 이루어지지 않고, 지나친 규제중심의 광고제한으로 오히려 편법광고를 만들고, 시대에 잘 맞지 않는 시청률조사 시스템에 경도된 시청률 지상주의의 결과가 아닐까. 오히려 작가나 PD 혹은 배우는 그 희생자가 아닐까.

여기서 처음 언급했던 장면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 무분별한 PPL을 비판하는 대사가 나오는 그 장소(아마도 떡으로 삼겹살을 싸먹는 음식점)조차 여러 번 대사나 장면을 통해 홍보된 곳이란 점이다. 이 아이러니는 우연한 것일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우연한 것이라면 드라마를 비판하는 이 드라마조차 그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 된다. 반대로 그것은 어쩌면 작가나 PD에 의해 의도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엔 이런 시스템에 대한 나름대로의 저항을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라고 자기 작품이 상품으로 도배되는 걸 바라겠는가.

혹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쩌면 그것은 민감한 기자들을 낚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요즘 드라마들은 논란 또한 관심으로 전이시키는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이 드라마가 제작되고 방송되고 홍보되는 시스템은 참 견고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글조차 그 특정 장소를 더 홍보해주는 꼴이 되니까.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의빈성씨가 다모가 된 까닭

주말극을 장악한 이른바 줌마렐라(아줌마 신데렐라)가 있다면, 사극에도 신데렐라는 예외가 아니다. MBC 월화 사극, ‘이산’에서 훗날 의빈성씨가 될 성송연(한지민)과 정조(이서진)의 사랑이 그렇다. 그것도 그 신분의 벽이 그저 양반과 천민의 수준이 아니다. 천민과 왕과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 그야말로 극과 극의 만남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설정이 이렇다 보니 우리가 신데렐라 드라마에서 익숙하게 보이는 이야기들이 빈번히 등장한다. 눈에 가장 잘 띄는 것이 늘 있게 마련인 반대하는 시어머니다. 이산을 위해서라면 한 목숨 기꺼이 바칠 듯하던 그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송연이 다모라는 그 신분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의 의빈성씨는 적녀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사육신 중 하나인 성삼문을 배출한 조선시대 명문가의 하나인 창녕 성씨 중 찬성 벼슬에 올랐던 성윤우의 딸이다. 적어도 다모 같은 천민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산’은 드라마이기 때문에 약간의 사실의 변용이 허용된다고 하더라도 왜 굳이 도화서 다모 같은 천민으로 의빈성씨를 설정했는지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법하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는 도화서 다모라는 직업이 가지는 특성 때문이다.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그림은 어진(임금의 초상화)과 의궤(행차도 같은 의식을 기록한 것)였다. 그러니 사극으로서 도화서 화원이라는 직업은 여러 모로 매력적인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화원은 그 그림 자체도 흥미를 끌게 하지만, 무엇보다 모든 행사에 나간다는 점, 그것도 그림으로(요즘으로 치면 사진 같은 것이다) 남긴다는 점이 그렇다. 사극의 극적인 전개를 위해서 이 그림이라는 기록은 추리극 같은 효과를 내기도 하고 때론 사건 해결을 위한 확실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 화원이 아닌 다모는 신분을 한 단계 낮추면서 또한 당대로서는 성차별을 겪기 마련인 여성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볼 때 가장 약자에 해당하는 존재가 된다. 물론 이런 설정은 성장 드라마를 만들어내기 위한 발판이다. 드라마 상에서 성송연은 남자 화원들보다 뛰어난 입지전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다분히 현대여성들의 환타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의빈성씨를 굳이 다모로 설정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신데렐라의 사극 멜로 버전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현대극에서 신데렐라야 빈부 차이에서 거의 비롯되지만, 사극은 그 신분 차이까지 포함하기 때문에 극이 갖는 환타지는 더 커진다. 이렇게 보면 다모라는 직업의 선택에는 두 가지 고려가 들어있다. 그것은 저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서 말하는 전문직에 대한 요구가 첫번째요, 직업의 천한 신분으로 인해 생기는 보다 강력한 신데렐라 설정이 두번째다. 이렇게 보면 역사왜곡의 문제는 남겠지만, 드라마적으로 봤을 때 의빈성씨를 다모로 설정한 것은 다분히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 효과가 배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는 문제는 지금부터다. 성송연은 이 다모라는 신분으로 어차피 의빈성씨까지 올라가야 하는 드라마 속의 과제를 안고 있는 캐릭터다. 그렇다면 이 과정이 더 중요해진다. 다모에서 화원의 지위까지 성장한(물론 신분상으론 여전히 다모지만) 성송연은 이제 어떻게 의빈성씨가 될 것인가. 앞부분의 성장은 성송연 혼자 가진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진 것이라 현대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충분한 공감이 된다. 허나 의빈성씨가 되는 과정 역시 그러할까. 그것은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과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전형적인 신데렐라 멜로를 따라갈 것인가. 그것이 그저 신데렐라의 사극 버전이 될지, 아니면 능동적인 현대 여성의 사극적인 변용이 될지는 두고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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