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나는 신데렐라, 그 변주는 어디까지?

주말극을 신데렐라가 장악했다.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쏟아져 나오는 드라마들은 저마다 신데렐라를 내세우며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잡아놓고 있다. 그 시청자의 대부분은 아줌마. 그래서일까. 신데렐라도 아줌마의 눈높이에 맞춘 버전으로 변주되는 양상이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는 정도를 넘어 아예 신데렐라의 남녀 구도를 역전시킨 ‘행복합니다’에서부터, 이혼녀 워킹맘으로 일상이 고통이지만 그 일상을 이해해주는 능력 있는 남자들에 의해 사랑받는 워킹맘 신데렐라, ‘천하일색 박정금’, 역시 이혼녀에 조기폐경 진단까지 받으며 악다구니를 쓰며 살지만 톱스타와 스캔들에 빠지는 억척맘의 신데렐라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까지. 도대체 이 변주된 신데렐라의 어떤 점이 우리네 아줌마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는 걸까.

‘행복합니다’- 신데렐라, 되기보다는 키운다
‘행복합니다’에서 박서윤(김효진)은 재벌집 딸. 그와 사랑에 빠진 이준수(이훈)는 그녀에 의해 천거된 남자다. 기존 신데렐라 이야기를 뒤집은 이 드라마의 스토리에서 주목해야할 인물은 이 맹랑할 정도로 당당한 박서윤이란 캐릭터다. 트렌디 드라마의 고질적인 수동적 여성 캐릭터와 비교한다면 정 반대에 서 있는 이 캐릭터는 뭐든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상황을 헤쳐나간다. 반대하는 엄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저 스스로 언론에 열애설을 배포하고, 그것도 모자라 더 반대하면 아예 임신설을 퍼뜨리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게다가 그녀의 이런 막가파식 행동은 합리적이기까지 하다. 재벌그룹 자제와의 결혼설로 올라갔던 회사의 주가가 서민적인 남자, 이준수와의 열애설로 떨어질 것이라 고심하는 가족들에게 그녀는 오히려 이런 발표가 기업의 서민적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심어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설파한다. 이런 합리적인(?) 설명은 결국 그녀가 자기 회사를 위해 재벌과 결혼시키려는 엄마와 다를 것 없이 결혼이 사랑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도 활용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지만, 어쨌든 그녀의 이런 설득은 영리한 면이 있다.

과거 트렌디 드라마에서 늘 당하고, 울고, 그러면서 참고, 결국에는 남성에게 매달리던 수동적 캐릭터는 이 여성에게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이준수에게 오히려 거꾸로 프로포즈를 하는 상황에 이르러서는 성 역할만 바꾼 트렌디 드라마를 연상케 만든다. 여성들은 이제 수동적으로 신데렐라가 되는 입장보다는 신데렐라를 키우는 걸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전제가 있다. 여성의 위치는 이미 남성이 끌어 올려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거나 그 이상이라는 것. 이것은 현실에서 적어도 심적으로는(물론 사회 시스템은 다를 수 있다) 여성들이 남성과 놓여졌을 때 느끼는 동등함 혹은 그 이상의 우월감을 말해주기도 한다.

‘천하일색 박정금’ - 이해 받고 싶은 신데렐라
‘천하일색 박정금’이 특이한 것은 남녀 간의 성 역할 구분이 희미해진 세계를 이미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박정금(배종옥)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관습적으로 활용되었던 마초적인 남성 형사라는 틀을 깨는 배려 깊은 여성 형사라는 점은 주목해봐야 할 문제다. 물론 ‘히트’같은 드라마를 통해서도 이러한 여성성을 가진 여형사가 등장했지만, 박정금은 워킹맘으로서의 일상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 구체적이다. 게다가 그녀는 자식을 잃어버린 엄마다. 그러니 그녀가 일하는 형사라는 칼부림의 현장 속에서도 모성이라는 여성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박정금이 남성들의 세계 속으로 뛰어들어와서도 여성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남녀 성 역할 구분에 있어서 그만큼 유연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박정금과 대척점에 서 있는 불량주부(?) 정용두(박준규)의 설정은 그것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다. 물론 그만큼 극단화되어 있지 않지만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두 남자, 한경수(김민종)와 정용준(손창민) 역시 여성성을 가진 남성들이다. 한경수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려진 인물로 아이를 잃어버린 아픔을 가진 박정금과 동병상련을 갖고 있다. 그의 캐릭터는 ‘떠나지 못하는’ 인물로 상정되어 있는데 여기서 ‘떠나지 못한다’는 말은 ‘상처주지 못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한경수를 여성성에 머물게 하는 이유다. 정용준 역시 의사로서 돈을 벌기보다는 약자를 위해 봉사하고 거기서 기쁨을 얻는 인물로 상처를 보듬어주는 한경수의 캐릭터와 유사한 점이 있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에서 신데렐라는 어디서 발생할까. 이 드라마는 빈부 격차에서 벌어지는 신데렐라는 없다. 막연히 형사라는 직업과 의사, 변호사라는 직업 사이의 간극이 느껴질 뿐이다. 그 능력 있는 남성들이 이제 나이 들고 집 안팎으로 힘겨워하고 있는 워킹맘 박정금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해해주고 사랑해준다는 점에서 신데렐라는 등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상 요즘처럼 능력 있는 여성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돈보다 더 강한 환타지를 제공한다. 이해 받고 싶은 것이다.

신데렐라의 변주, 트렌디의 역할 바꾸기?
아무리 통속적인 작품이라 할 지라도 그 속에는 사회적 모순 같은 것들이 담겨져 있기 마련이다. 주말극을 장악한 신데렐라의 변주는 그런 점에서 지금 시대를 바라보는데 의미가 있다. 지금의 신데렐라들이 과거의 신데렐라를 거부하고 새로운 신데렐라를 꿈꾸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신데렐라 콤플렉스라는 틀 안에서의 이야기에 머물 뿐이다. ‘행복합니다’나 ‘천하일색 박정금’이나 이 시대의 달라진 모습을 포착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신데렐라 콤플렉스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공공연히 신데렐라의 아줌마 버전이라 자처하고 있는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은 이제 이 신데렐라의 변주가 하나의 장르적 재미의 틀로 안착하는 징후로 읽혀진다.

주말극을 장악한 신데렐라에 대한 열광은 그만큼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과거와는 다르게 사회에 진출해 살아가는 여성들의 욕구와 좌절을 에둘러 말해준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아쉬움이 남는 것은 이러한 새로운 신데렐라가 어쩌면 젊은 시청층이 뉴미디어로 점점 빠져나간 자리에 들어서는 또 다른 중년 트렌디의 시작인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달라진 신데렐라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속의 새로운 의미에 천착하지 않고 여전한 공식 속에서 단지 트렌디의 역할 바꾸기에만 골몰할 때, 그것은 저 몰락한 트렌디 드라마의 뒤를 고스란히 따라가게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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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게임’, 이 시대의 진정한 소통이란

인터뷰라는 단어는 대충 세 가지 의미로 쓰인다. 첫째 고용주와 지원자 사이의 대면, 둘째, 기자가 기사 대상을 두고 하는 면담, 셋째, 그런 정보를 가진 기사 혹은 방송. 하지만 이제 이 단어에는 한 가지 의미가 더 덧붙여져야 할 것 같다. 그것은 ‘진정한 소통’이다. SBS의 ‘인터뷰 게임’은 이른바 정보통신의 시대라는 현재, 오히려 더욱더 단절되어있는 그 소통의 물꼬를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풀어보려는 프로그램이다. 이른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할 때 그 한 길 사람 속을 파고드는 프로그램.

40세의 김진영씨가 인터뷰를 통해 알고싶은 것은 아내의 마음이다. 그는 아내와의 깊은 갈등 끝에 이제 파국의 벼랑 앞에 서 있다. 그는 어눌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서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전한다. 한 때는 그렇게 살가웠고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는 아내와 자신이 왜 이렇게 끝자락에 서 있는 지, 그는 진정 알고싶다. 그래서 그가 인터뷰하는 것은 아내 주변의 인물들이다. 그것은 아내의 선배이기도 하고 직장상사이기도 하며 아내의 친구, 부모 혹은 아내가 찾아간 한의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아내에 대해 질문을 해온 김진영씨가 알게된 사실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내가 왜 그런가’하는 궁금증에서 시작됐지만, 결과적으로 알게된 것은 바로 오히려 몰랐던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아내에게는 상처가 되고 있었고, 아내는 때론 그 상처를 갖고서도 남편을 두둔하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장모가 그녀에게 불만조로 남편이 술을 끊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는 오히려 남편을 감싸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뷰를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김진영씨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내의 진심이 자신의 폐부를 찌른 것이다.

그것은 똑같이 김진영씨의 아내에게도 전달된다. 우습게도 그것은 이 ‘인터뷰 게임’에서 한 인터뷰의 내용, 즉 수집된 정보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아내의 진심을 알게 된 남편이 결국 아내와 대면해 몇 시간 동안 대화를 통해 얻은 것은 거의 없다. 결국 그 파국이 예상될 즈음에 남편의 한 마디가 그것을 바꾼다. 그것은 자신이 아내의 상황을 알기 위해 수 차례 인터뷰를 해왔으며, 그를 통해 “당신이 힘들었겠구나”하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단순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순간에 아내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결국 진심은 논리나 말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터뷰 게임’은 보여준다. 그것은 오히려 그 진심을 담은 행위, 즉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알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인터뷰를 하는 그 행위 자체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인터뷰라는 형식은 그 내용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 입증된다. 기존의 기자들이나 PD의 인터뷰가 어떤 정보라든가, 재미를 추구하는 목적이 뚜렷했기에 그 내용이 중심이었다면, ‘인터뷰 게임’이 보여주는 것은 그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뷰 게임’의 인터뷰 형식은 여타의 인터뷰하고는 다르다. 여타의 인터뷰가 목적하는 것이 주로 정보라면, 이 프로그램의 목적은 진심이다. 따라서 인터뷰 형식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적확한 정보나 재미를 전달하는 장면 위주의 편집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행위 그 자체가 된다. 프로그램이 정보전달에 있어 날려버릴 수 있는 불필요한 장면들을 빠른 장면으로 그대로 돌려 보여주거나, 사운드를 죽인 상태로 화면이라도 전달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이 정보성이 없는 행위가 담긴 장면들은 보통의 인터뷰에서는 편집되는 장면이거나 버려지는 텍스트가 되겠지만 사실 말 이면의 진심을 포착하기 위해서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인터뷰 게임’은 정보통신의 시대라는 소통의 기기가 극대화된 시기에 오히려 소통 부재가 되는 현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이 주목하는 것은 인터뷰를 하는 자나 당하는 자의 진술이 아니다. 그것은 대신 그 인터뷰를 하는 행위 속에 담긴 마음이 된다.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신 옆에서 늘 투덜대는 아내나, 늘 웃고 있는 아버지, 늘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 같은 분들에게서 그 말로서만 들었던 이야기는 진심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진심은 오히려 그분들이 투덜대면서도 밥을 차리고, 웃으면서도 쉴 새없이 손을 놀리며 일을 하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늘 노심초사하는 그 행위 속에 담겨 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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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에어’, 자기비판 통한 성장 이룰까

새롭게 시작한 SBS 수목드라마 ‘온에어’는 드라마에 관한 드라마다. 즉 드라마의 관계자인 PD, 작가, 배우, 매니저를 주축으로 해서 벌어지는 연예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드라마를 제작해나가는 과정이 이 드라마의 주 내용이라는 것이다. 최근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거기 출연하는 배우는 물론이고 작가나 PD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높아있는 상황이며, 제작현장은 더더욱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연예계에 대한 뒷이야기까지 포함하면 이 드라마는 시작부터 이미 반 이상은 거두고 시작한 셈이다.

우리가 TV를 통해서만 보았던 드라마의 외관이 아니라, 이른바 드라마의 속살을 본다는 리얼리티적인 요소는 드라마 자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부분의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첫 회부터 ‘온에어’는 드라마계 혹은 연예계의 화려함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면을 과감하게 드러냈다. 나눠주기식의 연말시상식에 수상거부를 선언하는 오승아(김하늘), 그를 두고도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스타권력에 휘둘리는 방송사, 배우보다는 스타가 되려는 연예인들의 세태, 키워놓은 배우 빼가는 대형기획사 등등 많은 문제제기를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보다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드라마 제작의 현실이다. 오승아가 작가 서영은(송윤아)과 미드에 대해 나누는 대사가 흥미롭다. “미드는 그런 것 없이도 잘 되는데 왜 당신 작품엔 늘 신데렐라냐”는 오승아의 비판에 서영은은 “미드에도 신데렐라 설정은 있지만 거기에는 진짜 같이 하는 연기자들이 있다”고 맞서는 장면은 우리네 트렌디 드라마에 대한 논쟁을 떠올리게 만든다. 첫 회를 통해 보여지는 작가와 배우 그리고 PD, 매니저까지의 면면을 보면 도대체 이런 식으로 어떻게 우리네 드라마가 만들어져왔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게 한다.

정작 작품에 대한 논의는 없고 PD와 작가, 그리고 배우들의 신경전만 난무하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시도보다는 되는 배우를 캐스팅하고 적당히 되는 소재를 잡아 넣으면 된다는 식의 제작자 마인드에, 진정한 배우의 길보다는 손쉬운 스타의 길을 찾아가는 배우들의 세태는 우리네 드라마가 왜 그 나물에 그 밥이 되어왔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또한 방송사고라 할만한 연예대상에서의 수상거부 사태에 대해서조차 시청률 잣대로 판단하는 방송사의 태도나, 서영은의 첫 작품이 낮은 시청률이지만 작품이 좋았다는 말에 오승하가 시청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분은 드라마에 대한 시청률 지상주의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그런데 ‘온에어’가 이런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의 문제점들을 속속 드러내는 이유에는, 결국 이 사분오열된 제작팀들이 다시 뭉쳐 이 문제들을 넘어서는 어떤 대안을 제시하겠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 즉 이 드라마는 어떤 면에서는 우리 드라마가 가진 문제점의 인식 위에서 그 문제를 넘어서는 과정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좋은 의도를 가진 드라마가 그들 스스로 비판하는 트렌디의 틀에 빠지지 않는 것이다. 만일 몇몇 디테일들이 등장하다가 점차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트렌디한 멜로구조로 따라간다면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자가당착에 빠지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걱정이 앞서는 것은 수많은 좋은 기획의도를 가진 드라마들이 중간에 가서 어떤 이유에선지 그 의도를 버리고 편안한 시청률 올리기 공식으로 돌입하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던 탓이다. 부디 이 드라마가 우리네 드라마 전체에 대한 어떤 발전적인 대안이나 상을 제시하는 드라마였으면 좋겠다. 그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시청률은 당연히 따라오지 않겠는가.

바보와 버려진 신발, 그리고 서민들

어느 동네나 유명한 바보 한 명쯤은 있게 마련. 그 바보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그냥 그런 존재는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렸던가. 너무 더러운 그 모습에 벌레 쳐다보듯 피했던가. 혹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던가. 대부분은 이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이 지나치거나 벌레 보듯 도망쳤던 바로 그 바보가 주인공이다.

신발을 닮아버린 바보, 승룡이
영화 ‘바보’의 바보, 승룡이(차태현)는 늘 맨발이다. 그 맨발을 지켜주던 낡은 신발이 있지만 칠칠치 못하게 늘 잃어버리고 만다. 구멍난 낡은 신발은 바로 바보 승룡이 자신을 닮았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마저 바보가 되었으며, 그런 바보에게 어머니는 동생마저 맡기고 떠나지만 정작 승룡이는 웃을 뿐이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세상의 더러움을 막아주고 소중한 발을 보호해주면서도 늘 버려지는 신발처럼.

바보는 늘 버려져왔다. 부모에게서 버려졌고(물론 부모는 승룡이를 버리지 않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승룡이 혼자 남겨졌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돌봐주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동생 지인이(박하선)에게도 버려졌다. 영화가 굳이 그걸 보여주진 않지만 가족이 이럴진대 타인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 버려진 바보, 버려진 신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어릴 적 친구였던 지호(하지원)와 상수(박희순)다. 지호(하지원)는 바보와의 재회에서 버려진 승룡이의 신발을 주워온다. 의사인 지호의 아버지는 승룡이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늘 찾아와 문진을 해준다. 자신이 태워먹은 학교 피아노 때문에 대신 누명을 쓰고 학교를 떠난 승룡이에게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수(박희순)는 늘 바보 곁을 맴돌고 기꺼이 자신의 신장을 승룡이의 동생에게 떼어준다. 그들은 바보의 맨발 같은 삶에 신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길거리에 버려진 더럽고 낡은 신발 같은 바보 승룡이의 마음이다. 바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 즉 덜떨어졌다는 부정적 의미와 착하다는 긍정적 의미는 작품에 의해 주목된 승룡이를 통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며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는 바보의 위대성이다.

모든 이들을 위해 웃으며 선택하는 바보의 죽음은 마치 예수의 희생을 연상케 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지호는 비로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상수와 희영(박그리나)은 술집생활을 청산하고 각각 토스트 가게와 은행안내원을 하게 되며, 동생 지인(박하선)은 새 생명을 얻게된다.

진심을 전하는 반복의 힘
영화가 바로 이 바보가 가진 진심의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것은 어눌하지만 반복되는 진술과 장면들을 통해서다. 바보는 많은 어휘를 알지 못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 말의 무게를 더한다. 상수에게 “동생을 돌봐달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할 때,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이 차츰 정색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반복의 문법을 통해 관객에게 진심을 말한다. 이것은 강풀의 만화가 가진 장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강풀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마디의 반복되는 말로 전하는 말의 힘을 아는 작가다.

학교에서 아픈 동생을 업고 가려는 바보를 막아서며 당신 누구냐고 묻는 선생에게 “얘는 제 동생이구요, 저는 지인이 오빠 승룡이에요”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와서 바보의 사망신고를 하러 온 지인이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반복해서 “이 사람은 제 오빠구요. 저는 이 사람 동생이에요”라는 화답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의 힘은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 아저씨의 승룡이네 집으로 신발을 던지는 장면의 반복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인상적이다.

버려진 신발을 계속해서 주워와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고물상 아저씨와, 지인이의 반복된 진술은 모두 타인으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제 더럽고 비천하며 어딘가 덜떨어진 사람으로서만 치부하던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선입견은 이 즈음에 와서는 나의 오빠이자 나의 동생, 친구, 가족 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지인의 대사와 고물상 아저씨의 장면은 세상에 버려진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비천한 사람들의 죽음이 사실은 바로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바보에게 빚진 당신의 삶
‘바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진짜 육체적인 장애를 겪는 바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매일 매일이 힘겹지만 불평 없이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바보들을 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힘없고 가난하며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층적 차별의식에 차별 당하면서도 늘 이 땅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들었던 우리네 착한 서민들을 닮았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숨쉬며 버젓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바보들, 승룡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영화는 바로 우리가 삶을 빚진 그들에 대한 채무의식을 승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승룡이가 하는 일거수 일투족은 거꾸로 우리가 승룡이에게 저지른 그 죄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 버려진 수많은 낡은 신발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항변도 없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는 버려진 그 신발들을 귀하게 주워서 주인에게 던져주는 영화 속 고물상 아저씨의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 그 버려진 것들에게 빚진 바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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