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의 열혈 탐사보도 팀장, 사이다 캐릭터의 귀환

트리거

“야 임마! 넌 사내새끼가 기집X 밑에서 일하냐, 쪽팔리게!” 다짜고짜 총부터 들이대는 사이비 종교 교주가 탐사보도 프로그램 ‘트리거’의 팀장 오소룡(김혜수)이 여자인 걸 알고는 남자 팀원에게 영 감수성 떨어지는 시대착오적 발언을 던진다. 그러자 오소룡이 여유있게 웃으며 말한다. “제가 또 보통 기집X은 아니거든요.” 디즈니+ 드라마 ‘트리거’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이 장면은 오소룡이라는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인물에 대한 기대감을 세워 놓는다. 그건 바로 이 진실을 알리는 탐사보도를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는 캐릭터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역할을 연기하는 김혜수에 대한 기대감도 빼놓을 수 없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김혜수가 하면 어딘가 다르다. 대체불가의 호방함이 캐릭터에 묻어난다. 그 인물이 시원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라면 그 청량감과 폭발력은 그래서 더 강력해진다. 

 

실제로 ‘트리거’의 첫 번째 에피소드로 등장하는 사이비 종교 단체와의 일전이 그렇다. 보도를 위해 패러글라이딩을 타고 높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벽을 넘어들어가는 장면은 현실성이 없지만, 김혜수가 연기하니 어딘가 그럴 듯해 보인다. 장전된 총구 앞에서도 “쏴봐”라고 외치며 눈 하나 까닥하지 않는 모습에서부터 시청자들은 이미 설득 당했다. 그러니 사실상 진실 보도에 대한 판타지적 욕망을 담은 ‘트리거’에서 시청자들의 마음은 오소룡이라는 인물을 입은 김혜수를 보자마자 마음을 정하게 된다.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김혜수 특유의 이 호방한 느낌은 처음부터 생겨난 게 아니다. 물론 어려서부터 태권도 유단자로 사범님 앞에 “태권!”하고 거수경례를 했던 시절부터 그 호방함은 내면에 장전되어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광고모델로 주목받아 영화 ‘깜보’로 연기자를 시작했을 때부터 그 어린 나이에 성인연기까지 맡는 대범함이 그냥 생겼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혜수가 처음 대중적인 배우로서 자리매김한 건 이런 호방함과는 사뭇 거리가 있는 청순 가련한 역할을 통해서였다. 바로 이명세 감독의 영화 ‘첫사랑’에서의 박영신이라는 인물이다. 이 역할로 김혜수는 최연소 청룡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첫사랑’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다. 물론 그런 이미지가 김혜수는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그래서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에서 젊은 미시족 연기로 변신을 시도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김혜수는 ‘섹시 이미지’로 주로 소비되는 성장통을 겪었다. 백상연기대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영화 ‘얼굴 없는 미녀(2004)’가 대표적인 그 사례다.

 

하지만 김혜수 본연의 호방함의 본색은 ‘타짜(2006)’를 통해 드디어 대중들을 매료시키기 시작한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유행어까지 만든 김혜수는 이 때부터 맡는 역할마다 자신만이 가진 스타일을 더함으로써 대체불가의 배우로 서게 된다. 드라마 ‘직장의 신(2013)’은 김혜수가 가진 시원시원한 여걸의 면모와 더불어, 코믹함과 카리스마를 넘나드는 다채로운 모습들을 미스김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줬다. 영화 ‘차이나타운(2015)’에서는 사채업자 대모로서 조직 보스 역할을 김혜수만의 느와르적 카리스마를 더해 꺼내 놓았고, 드라마 ‘시그널’에서는 차수현이라는 인물의 과거 젊은 시절의 신출내기 형사와 현재의 베테랑 형사팀장을 오가는 연기를 선보여 백상예술대상 여자 부문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김혜수는 청순함에서부터 코믹함과 더불어 관능미, 카리스마까지 소화해내면서도 어느 하나의 이미지에 고착되지 않는 연기자가 됐다. 무엇보다 김혜수에게서 주목되는 건 10대 시절부터 현재의 50대까지 하이틴부터 시작해 청년과 중년을 넘어오는 그 모든 과정들 속에서 대중들과 그 성장사를 함께 했고 그 속에서 자신만이 가진 색깔을 분명히 찾아냈다는 점이다. 똑같은 역할을 해도 그만의 매력이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건 그래서다.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변호사(하이에나)나 근엄하고 냉철하면서도 속으로는 따뜻한 진심이 숨겨진 소년부 엘리트 판사(소년심판)도, 또 심지어 조선시대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을 자식들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중전(슈룹)이나, 돈되는 거라면 뭐든 하는 팜므파탈의 밀수꾼(밀수)까지 김혜수여서 보다 매력적으로 그려진 인물들이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트리거’ 역시 이 흐름 그대로 김혜수표 열혈 탐사보도 팀장이 보여주는 매력이 강력한 기대감을 만들어낸다. 

 

본래 드라마나 영화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건, 당대의 갈증을 판타지로 채워주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 작품 속 인물들은 시대의 다양한 갈증들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김혜수가 시대의 아이콘처럼 보이는 건, 바로 그 갈증을 대변하는 인물들을 자기만의 색깔로 일관되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직장의 신’의 미스 김이라는 인물을 통해 비정규직 여성들의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줬고, ‘차이나타운’ 같은 작품에서는 남성 전유물로 여겨져온 느와르가 여성을 통해서도 충분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시그널’이 포기하지 않는 베테랑 형사를 통해 미제사건의 피해자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면, ‘하이에나’ 같은 작품에서는 성공을 향해 질주하며 사랑도 쟁취하고픈 현대여성들의 마음을 대변했다. 그러면서 이 역할 하나하나에 본인이 갖고 있는 호방한 면모들을 더함으로써 더 톡 쏘고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를 구현해냈다. 

 

많은 역할들 속에서 김혜수가 해온 연기의 면면을 보면 작은 것들에 연연하기보다는 보다 굵직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눈에 띤다. 물론 그렇다고 세세한 디테일을 중요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세심함들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시원하게 뻗어 나간다는 뜻이다. 흔히들 ‘호방함’이란 작은 것들을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김혜수를 보면 그것이 오해라는 걸 알게 된다. 디테일들을 갖고 있으면서도 목표를 향해 주저하지 않는 마음. 김혜수라는 대체불가 호방본색의 페르소나가 새해에 우리에게도 제안하는 매력이 아닐까.(글:국방일보, 사진:디즈니+)

배우의 연기와 우리의 삶

 

우리에게 스타란 무엇일까. 젊은 시절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던 연인이자, 언제나 피곤한 몸을 기댈 수 있는 넉넉한 어깨를 가진 친구 같은 존재일까. 우리와는 다른 별세계에 있으면서 가끔 우리에게 그 빛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꿈의 존재일까. 아니면 도무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우리와는 다른 신적인 아우라를 가진 존재일까. 그저 냉정하게 바라봐 자본주의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만들어낸 신을 대체하는 인간상품의 하나일까.

 

스타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극에서 극으로 달린다. 한없이 찬사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한없이 동경의 대상이 되다가도, 어느 순간 동정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가 비치는 그곳에는, 또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충격적인 자살 소식과 거의 폭력에 가까운 근거 없는 끔찍한 루머들이 떠다닌다. 스타와 소속사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 종종 발견되는 노예계약의 징후들은 대중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 신적인 존재가 노예였다니. 신과 노예의 사이. 지금 스타가 서 있는 자리다.

 

그들은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이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있어서 콘텐츠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따라서 그 콘텐츠가 캐릭터로 구현해 내는 판타지나 가상성은 사실상 우리가 받아들이는 그들의 실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실제 삶과는 유리되어 있다. 드라마 속에서 누구나 꿈꾸는 신데렐라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속사에 계약되어하기 싫은 일이라도 웃으면서 해야 하는 입장에 서 있을 수도 있다. 이 실제의 삶과 비치는 삶 사이에 혼란이 오게 되면 그 존재는 파탄으로 몰릴 위험이 있다. 자살은 꿈꿔왔던 삶과 현실의 삶의 괴리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따라서 스타란 기본적으로 이 극한의 정체성의 혼란과 존재의 괴리감을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유어 아너

이렇게 된 것은 스타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을 통해 물질화된 상품인간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삶과 상품으로써의 삶. 이것은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단지 스타만이 겪는 일은 아닐 것이다. 우리들은 저마다 집에서는 한 아이의 부모이고, 한 부모의 자식이며, 한 아내의 남편이자, 한 남편의 아내이지만, 집을 나서서 자본의 세상으로 출근하게 되면 연봉 얼마로, 회사 이름으로, 또 직함으로 구획되는 상품의 삶을 살게 된다. 그러니 스타란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표상하는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스타에게서 갖는 동경과 동정은 사실상 우리 스스로 자신에게 갖는 감정과 다르지 않다. 스타는 우리에게 그것을 대리하는 존재로 서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스타를 꿈꾼다. 그것이 딱히 저 TV와 스크린 속의 인물들이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스타가 되기를 누구나 바란다. 주목받고 싶고,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문제는 그 가치를 평가 내리는 기준이 돈으로 수치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질적인 가치가 양적인 가치로 등급 매겨지는 그 지점에 현대인들의 비극이 있다. 질적인 가치가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양적 가치가 부여되지 않으면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양이 질을 담보하는 시대다. 일단 양을 채워라! 그러면 질은 따라올 것이니!

 

지금과는 다른 삶에 대한 희구는 우리의 본능이다. 이미 주목받고 있는 스타들은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드러나지 않는 삶 속에 묻혀있는 이들은 거꾸로 모두의 주목을 받는 스타를 꿈꾼다. 변신 욕구는 우리의 본능이지만 팍팍한 현실에서 변신은 그다지 용이하지 않고 때론 용납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대체하는 존재로서 스타를 희구하게 된다. 스타에 대한 열광과 현실에 대한 낙담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그렇다면 스타를 희구하는 우리네 삶은 늘 그 자리에 머물러 현실을 낙담하면서 변신욕구를 스타를 통해 자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스타와는 다른 배우라는 존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대가 낳은 명배우라는 호칭이 어색하지 않은 메서드 연기의 대가 김명민의 목소리부터 들어보자. “제 이름이 아니라 캐릭터만 쭉 올라오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 작품을 했던 사람이 이 작품을 했다는 게 의심 갈 정도로 캐릭터의 차별화가 확실했으면... 사람들이 제 이름을 제대로 모르고 못 알아봐도 제가 배우의 길을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뿌듯하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아무리 스타라는 딱지를 갖다 줘도 저는 그거 거절하려고 그랬어요. 저는 그냥 배우로 불리고 싶었고 같은 배우들 사이에서도 ‘저 놈은 정말 연기 잘하는 놈’ 이렇게 인정받고 싶은 게 제 꿈이었어요.”

 

김명민은 이미 스타다. 하지만 그는 왜 그다지도 스타를 거부하고 배우를 고집하는 것일까. 스타와는 달리 배우란 실체이기 때문이다. 2009년 방영된 김명민이라는 연기자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MBC스페셜'의 타이틀은 아이러니하게도 '거기에 김명민은 없었다'였다. 아마도 이 표현은 연기자라면 최고의 찬사라고 여겨질 것이다. 작품 속에서 연기자가 배역의 이름이 아닌 자신의 이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을 지움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사람들, 바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다. 그러니 김명민이 자신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작업은 그 직업이 가질 수 있는 스타로서의 욕망을 덜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온전히 실체로 세워둘 수 있는 배우라는 길을 걸어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존재로 봤을 때, 양적 가치의 세상에서 질적 가치를 고집함으로써 그 존재를 실체로 만드는 과정이기도 하다.

연인

물론 연극의 시대에서 영상의 시대로 바뀌면서 연기의 방식도 다양해졌다. 메서드 연기가 국룰로 여겨지던 시대는 연극의 시대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극을 이끌어 나가야 하는 배우들에게 메서드 연기는 당연했다. 하지만 매번 찍은 걸 모니터로 확인해 가며 보다 효과적인 연기를 찾아나가는 요즘 같은 영상의 시대에 연기는 본인이 빠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효과도 중요하게 됐다. 김명민 스스로도 최근 들어 너무 지나치게 메서드를 고집하는 것이 대중들에게 부담을 주는 것 같다며 이를 덜어내는 연기를 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메소드 연기든 그렇지 않든 배우들의 연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이미 스타로서의 삶을 욕망하도록 강요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끝없이 수치로서 환산되는 자신의 양적 가치를 높여나감으로써 사회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인플루언서, 유튜버의 시대가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어느새 물질적 욕망으로서 우리 속에 들어와 있다. 이것이 생존이기에 우리는 경쟁을 해야 하고, 누군가 스타가 될 때, 누군가는 낙오되어 그 위를 부러움의 시선으로 올려다봐야 한다. 낙오되면서도 그 시스템을 탓하지 않고 자신을 탓하며 오히려 자신을 밟고 성공한 그들을 부러워하는 것.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스타라는 존재를 통해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교육시켜 온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스타는 허상이다. 그래서 그 존재는 좀체 변신하려 하지 않는다. 스타로 만들어준 그 신적 이미지를 왜 스스로 부수려 하겠는가. 그들은 스타로 군림하며 가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그들에게 지우는 짐 또한 혹독하다. 실체를 잃어버린 삶이나, 실제와 가상을 혼돈하는 삶은 늘 파탄으로 우리를 내몰기 마련이다. 하지만 배우들은 다르다. 스타가 가진 고정된 가짜의 신적 이미지는 배우라는 무한히 변신을 해야 하는, 그럼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거꾸로 부담으로만 작용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변신함으로써 그 속에서 자신의 실존을 찾아나간다.

 

우리는 각자의 삶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이다. 우리는 그 위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스타라는 자본주의가 마련한 시스템 위의 허상을 좇을 것인지, 아니면 배우라는 본연의 실존을 좇을 것인지는 모두 우리의 선택에 달린 문제다. 흔히 가십 정도로 치부하며 입에 오르내리는 스타 혹은 배우. 이 두 존재가 우리네 삶에 던져주는 질문은 이처럼 의미심장하다.

2024.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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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키드와 TV의 작은 역사  (0) 2025.01.09

‘원경’,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자의 쓸쓸함

원경

차주영이 이토록 매력적인 배우였던가. tvN, 티빙 월화드라마 ‘원경’의 힘은 이 배우의 아우라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특히 우아함 속에 슬쩍 드러나는 쓸쓸한 눈빛은 작품 속 원경(차주영)이라는 인물의 깊은 내면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그 눈빛은 마치 앞으로 자신이 마주할 비극적인 운명을 알면서도 피하지 않는 자의 쓸쓸함을 담고 있다. 

 

‘원경’이 흥미로운 건 조선 초기의 혼돈기를 다루면서 이성계(이성민)와 이방원(이현욱)이 아닌 원경왕후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점이다. 그 역사적 사실은 이미 여러 차례 사극으로 재현된 바 있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이처럼 관점을 바꿔 놓으니 또 다른 서사가 가능해졌다. 지금껏 주목하지 않았던 원경이라는 인물이 재조명되었고, 조선의 역사에 이 인물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가가 새삼 주목되게 했기 때문이다.

 

이 사극에서 이방원은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인물이다. 자신만의 조선에 대한 야망이 있었고, 그걸 펼쳐내기 위해 형제들마저 죽이는 난을 일으켰다. 여기에 격분한 이성계는 계속 해서 자신의 세력들을 동원해 이방원을 위협했다. 그건 왕의 입장에서 보면 역모에 해당하는 일이지만, 그 주축이 아버지라는 점은 이방원을 복잡한 심경 속에 빠뜨린다. 야망과 불안감 그리고 분노와 회한이 뒤섞여 흔들리는 그런 인물. 

 

이 인물을 붙잡아 주는 이가 바로 원경이다. 이방원이 감정이 폭발하고 마구 흔들리고 있을 때 원경은 흔들림 없이 차분한 모습으로 그를 붙잡아준다. 결단이 필요할 때는 이방원을 결심하게 만들고, 지쳤을 때는 기대게 해준다. 이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이방원을 위협할 때도 원경은 부자 관계인 그들의 연을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묘안을 내놓는다. 이성계 앞에 이방원 홀로 다가가게 한 것이다. 

 

하지만 이방원과 이성계가 그 깊은 갈등을 풀어내고 같은 목표를 갖게 되면서, 원경이 오히려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될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측된 일이다. 이방원은 이성계와 마찬가지로 권문세족들의 힘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려 했고, 그래서 특히 원경의 외척세력인 민씨 일가들과 대립하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원경은 이 사실을 알고 동생들인 민무구(한승원), 민무질(김우담)은 물론이고 아버지인 민제(박지일)에게도 자중하라는 조언을 해왔다. 

 

또 권문세력들의 힘을 누르기 위해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이방원과 새 조선을 만들어가겠다는 의지를 드러내지만, 원경의 이 마음이 자신의 집안 사람들과 같을 리가 만무다. 민무구와 민무질이 야망을 드러내고 그래서 결국 이방원에 의해 숙청되는 일이 예고된 이유다. 대범하기 그지 없는 원경이 동생들의 숙청까지는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이상의 위협이 다가올 때 과연 그것까지 받아들일 수 있을까. 

 

원경이 매력적인 건, 바로 그렇게 흘러갈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피하지 않고 걸어나가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 복잡한 내면을 차주영은 흔들리지 않는 차분한 어조와 어딘가 쓸쓸한 눈빛으로 표현해낸다. 이방원이 원경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후궁들을 들이고, 그들이 용종을 잉태해도 이 인물은 대담하고 대범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다. “왕자를 낳으면 내 아들로 알고 키우면 그만이네”라고 말하는 대범함이라니.

 

이토록 왕후로서의 대범함을 가진 인물이지만 남편 이방원에 대한 애증 또한 원경은 드러내는 인물이다. “그대는 결국 나의 사랑을 잃게 될 것이오”라고 말하는 이방원에게 원경은 “전하의 사랑을 잃는 것이 저를 잃을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사가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결국 원경이 보고싶어 찾아온 이방원을 맞이한다. 또 이성계와 일전을 벌이기 위해 떠나는 이방원에게 합방을 스스로 요청해 자신의 뜨거운 사랑을 드러낸다.

 

왕후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한 여인으로서의 모습을 모두 가진 이 인물이 이토록 매력적으로 그려질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차주영의 깊이 있은 내면연기 덕분이다. 특히 강인함 속에 언뜻 드러나는 쓸쓸한 눈빛은 이 인물에 대한 연민의 감정마저 느끼게 만든다. 흔들리지 않는 자에게서 언뜻 비쳐지는 감정만큼 보는 이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게 있을까. 차주영은 원경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걸 꺼내 보여주고 있다. (사진:tvN)

‘나완비’의 이준혁, ‘옥씨부인전’의 추영우,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에 쏠린 시선

나의 완벽한 비서

배우 이준혁과 추영우에 대해 쏠린 대중적 시선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다. 이준혁은 최근 출연하고 있는 SBS 금토드라마 ‘나의 완벽한 비서’로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글로벌 OTT 라쿠텐 비키에 따르면 이 작품은 전 세계 123개국에서 시청자 수 1위를 기록하며 이준혁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만들어내고 있다. 한편 JTBC 토일드라마 ‘옥씨부인전’으로 추영우 역시 대세 배우로서 급부상중이다. 이 작품에 이어 올해 방영될 차기작 세 편(중증외상센터, 광장, 견우와 선녀) 또한 기대를 모으고 있는 것. 

 

이 두 배우가 주목되는 건 역시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 작품 덕분이다. 올해 들어 시청률과 화제성에서 가파른 성장곡선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는 단연 이들이 출연하고 있는 두 작품이다. 물론 두 작품은 성격이 다르다. 하나는 오피스 로맨스물이고 다른 하나는 사극이다. 하지만 이 두 작품에는 공통되는 지점이 하나 눈에 띤다. 그것이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가 들어 있다는 점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은호(이준혁)는 딸을 홀로 키우는 싱글대디다. 딸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직장에서의 불이익까지 감수하고 육아휴직을 할 정도로 이 인물은 일단 가정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살림은 물론이고 가사까지 완벽하다. 아이를 위한 건강식은 물론이고 일정까지 착착 정리해 관리하는 프로 살림꾼이다. 그런데 이 완벽한 살림의 능력은 고스란히 비서로서의 능력으로도 발휘된다. 

 

엄청난 열정으로 스카우트라는 일에 뛰어들어 자수성가했지만 자기 관리는 도무지 하지 않는 강지윤(한지민)에게, 갑자기 나타난 비서 유은호는 그래서 구원의 존재가 된다. 보기만 해도 정신 사나워지는 사무실을 완벽하게 정리해주고, 처리해야 할 업무에 맞게 자료를 준비해주며, 실제 스카우트 업무에서도 전직 회사 인사팀에서 발휘했던 능력을 활용해 성과를 낸다. 그저 업무적인 도움만 주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강지윤이 기댈 수 있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이러니 강지윤에게 유은호는 저 숱한 드라마 속 재벌2세보다 더 한 판타지가 아닐 수 없다. 

 

유은호가 보여주는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는 현재 여성들의 달라진 욕망을 보여준다. 스스로 거둔 성취를 일의 영역에서도 느끼고 싶어하는 무수한 직장여성들은 이제 그저 돈많은 재벌3세가 판타지가 되지 못한다. 다른 세계의 저들과 어우러지는 것 자체가 피곤할뿐더러, 그것이 진정한 자아성취의 행복감을 주지도 못할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신 자신이 하는 일을 묵묵히 한 발 뒤에서 밀어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판타지가 훨씬 더 강력하다. 유은호 같은 남성 판타지가 단박에 여심을 사로잡은 이유다. 

옥씨부인전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는 ‘옥씨부인전’의 송서인(추영우)이었지만 천승휘로 또 성윤겸으로 정체를 바꿔가며 살아가는 인물에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본래는 송씨 집안의 자제인 줄 알았지만 기녀에게서 난 서자라는 사실을 알고 이 인물은 천승휘라는 전기수로서 살아간다. 송서인 시절부터 마음에 뒀던 노비 구덕이(임지연)를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이 인물의 사랑법이 독특하다. 물론 구덕이가 옥태영이라는 양반집 딸로 정체를 바꿔 성윤겸이라는 인물과 혼례를 이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천승휘의 사랑은 전면에 나서는 게 아니라 한 발 뒤로 물러나 도와주는 사랑이다. 

 

집 나간 성윤겸이 사망했다며 과부로서의 삶을 강요받을 위기 상황에 몰리자 천승휘는 성윤겸인 척 연기를 해 옥태영을 구해낸다. 얼굴이 비슷하게 생긴데다 천승휘가 타고난 연기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게 옥태영과 부부처럼 살게 된 천승휘는 집안 일을 도맡아 하며 외지부로 일하는 아내를 돕는다. 사극이라는 외형을 갖고 있지만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옥태영을 외조하는 천승휘의 남성 판타지가 도드라지는 지점이다. 

 

‘나의 완벽한 비서’의 유은호나 ‘옥씨부인전’의 천승휘를 통해 드러나는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건, 이 두 작품의 강력한 힘이 바로 이 판타지에서 나오고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 판타지를 실감하게 만드는 이준혁과 추영우의 호연이 바탕이 된 것이지만, 이렇게 연기와 역할이 맞아 만들어내는 판타지의 동력에는 현실적인 욕망이 공조하기 마련이다. 

 

일하는 여성들의 자기 성취에 대한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진 요즘이다. 물론 그 욕망은 육아나 가사 같은 여전히 힘겨운 현실에 부딪쳐 좌절되거나 꺾이는 일이 적지 않다. 그래서 생겨난 외조하는 남성 판타지는 아마도 향후에도 드라마의 중요한 동력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준혁과 추영우의 급부상이 단지 좋은 배역을 잘 소화해낸 것에 머물지 않고 신드롬적인 느낌을 주는 건 이런 현실이 밑그림에 깔려 있어서다. (사진:SBS,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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