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들의 보편적인 공감이 가능했던 까닭

 

이들이 만든 요리만 83가지란다. 그 중 80가지는 차승원이 만든 것이다. 이 정도면 화려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삼시세끼>는 지금껏 요리를 내놓으면서 그 요리가 화려하게 느껴진 적은 별로 없다. 그저 친근하고 그 옆자리에 나도 앉아서 한 숟가락 들고 싶을 정도의 편안함. 그것이 <삼시세끼>의 밥상이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차승원과 유해진 그리고 손호준. 이 기본 반찬(?)에 정우와 추성훈이라는 특별한 재료까지 얹어지니 <삼시세끼>의 인물 차림은 화려할 수밖에 없었다. 갖가지 예능에서 자신만의 지분을 확실히 갖고 있는 차승원이었고, 워낙 입담 좋기로 소문난 유해진이었다. 여기에 최근 예능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도 뜨고 있는 손호준까지. 하지만 이 화려한 캐스팅이 <삼시세끼>에서는 그리 도드라진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만재도라는 섬에 사는 보통 사람들 같은 느낌이 들 정도.

 

만 가지 재물이 있다는 만재도. 그러니 잡을 물고기도 채취할 것도 넘치고 넘쳤다. 놀래미에 우럭, 게는 물론이고 여러 음식의 훌륭한 식재료가 되어 주었던 홍합, 배말, 다시마, 미역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하지만 요리만 83가지를 했어도 유해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으로 차승원이 부러 차려준 콩자반을 얘기하듯, 또 차승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으로 제일 소박하고 가짓수도 적었던 눌은밥에 된장찌개 계란말이를 얘기하듯, <삼시세끼>의 밥상은 소박함이 묻어났다. 만재도 사람들이 일상에 먹을 법한 밥과 찬들.

 

그러니 이 소박하고 보통의 어촌 삶에서 뭍에 나갔다 온 차승원이 사온 돼지고기로 만든 제육볶음은 섬사람들 마음처럼 먹는 이를 뿌듯하게 만들 수 있었고, 하루 한 시간 반 장사한다는 물건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만재슈퍼 사장님 덕분에 가까스로 산 새우깡 맛동산 한 봉지가 그리 귀하게 다가올 수 없었다. 이렇게 지독히도 평범하고 보편적인 정서에 닿아 있는 세계. 화려하기보다는 일상적이었던 그 세계였기 때문에 <삼시세끼>는 그토록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차승원과 유해진 그리고 손호준 세 연기자가 술 한 잔을 놓고 하는 연기론에 대한 이야기는 그래서 흥미롭다. “배우는 보통사람의 특별한 직업일 뿐이야. 내가 특별한 게 아니라 직업이 특별할 뿐이고 나는 보통사람인거고. 그래야지 접근할 수 있거든. 그래야지 보편적인 거에.. 왜냐하면 대중이 보고 대중이 공감해야 되니까. 나와 다른 별개의 사람을 보는 게 아니니까.” 유해진의 이 진술은 그들이 생각하는 연기의 세계와 바로 이 <삼시세끼>의 세계가 조응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그들은 만재도에서 연기를 한 게 아니지만 그들의 일상에 대한 자세는 이미 연기에 대한 그들의 생각 속에 녹아 있었다. 결국 특별한 것보다는 일상이 오히려 더 소중하고 그 안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근데 멋진 거는 되게 단편적이야. 우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연기를 해야 사람들한테 울림을 줄 수 있거든.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계속적으로 일상에 던지는 거지.” 톱배우지만 지극히 일상으로 내려와 차줌마가 된 차승원은 단편적인 멋진 것을 추구하려 하지 않았다.

 

제 자신을 연예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냥 배우란 직업이 일반인들에 비해 약간 특수한 직업일 뿐이지.” 손호준이 예능에서 그리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바로 그의 진술 그대로다. 그는 연예인 같지 않은 순수함을 보여준다.

 

<삼시세끼>의 힘은 바로 일상에서 나왔고, 보편적인 것에서 더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제목이 왜 <삼시세끼>인가를 떠올려 보라. 제 아무리 특별한 사람도 삼시 세끼를 먹는다. 그 일상에 대한 긍정과 찬미. 그것이 바로 <삼시세끼>의 세계가 가진 특별함이다.

 

'앵그리맘' 김희선 무리수 설정이지만 판타지 강한 까닭

 

잔혹한 학교 폭력을 당한 딸을 가진 엄마들의 마음은 어떨까. 온몸에 멍투성이 피투성이가 된 딸을 보는 그 마음도 똑같이 멍투성이 피투성이일 게다. 폭력이 벌어져도 쉬쉬하기 바쁜 학교와 피해자보다 가진 자들의 눈치를 더 보는 교육당국, 그래서 오히려 피해자들의 침묵을 강요하는 현실과 처벌을 받아도 피해자가 또다시 보복을 당하게 되는 상황 속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엄마들은 무너져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앵그리맘(사진출처:MBC)'

<앵그리맘>은 그 피해 학생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다. 딸 오아란(김유정)이 심각한 학교 폭력에 내몰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엄마 조강자(김희선)는 법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박진호(전국환) 소년부 판사를 찾아가지만 거기서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학교 폭력과 대항해 끝까지 싸웠던 한 엄마의 오열. 결국 아이가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조강자는 법 또한 딸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현실에 발길을 돌린다.

 

그런데 이 조강자의 다음 행보는 엉뚱하다. 딸의 문제를 해결하고 복수하기 위해 여고생으로 위장해 학교에 들어가는 것. 그녀는 한 때 잘 나가던 전설의 주먹이다. 여고생들의 성희롱을 일삼는 선생님을 혼내주기도 하고, 학교 짱을 단 한 방에 쓰러뜨린 인물. 학교에 잠입한 조강자는 딸의 책상에 새겨진 저주의 말들에 오열하고 딸을 괴롭히던 여고생들을 한방에 제압해버린다.

 

딸의 복수를 위해 여고생으로 잠입하는 <앵그리맘>이라는 설정은 무리한 점이 많다. 먼저 여고생을 딸로 둔 애엄마가 제 아무리 동안이라도 여고생으로 학교에 전입해 들어온다는 게 현실적일 수는 없다. 그나마 최강 동안인 김희선이 그 역할을 맡았으니 어느 정도는 보게 되는 것이지만 이 무리수는 <앵그리맘>이 제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거의 만화 같은 상황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조강자가 폭력에 맞서는 건 또 다른 폭력이다. 그녀 역시 학창시절의 주먹이 아니었던가. 물론 정의의 주먹이라고 말하겠지만 그래도 폭력은 똑같은 폭력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적이고 판타지적인 설정이지만 학교의 폭력 문제는 냉엄한 현실이다. 그 현실의 고통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이다. 그런 교육 시스템 전체의 문제를 단순히 폭력의 문제로 다루고 그 해법 또한 단순한 폭력으로 보여주는 건 드라마라도 너무 지나치다고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많은 무리수들에도 불구하고 <앵그리맘>에 대한 판타지는 꽤 크다는 점이다. 현실성 없는 이야기이고, 올바른 해법이라고도 말할 수 없지만 이처럼 판타지가 큰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드라마가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현실이 이렇게 부조리한 교육 시스템에 어떤 조처나 대안을 전혀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앵그리맘>은 벽처럼 느껴지는 현실 앞에서 잠시지만 강력한 판타지가 된다.

 

거기에는 이런 현실에 무력하기만 한 엄마들의 자식들에 대한 부채감이 들어가 있다. ‘보호자가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저 스스로 싸울 수밖에 없다는 조강자의 자각은 그래서 엄마들의 부채감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조강자라는 판타지는 이 부채감을 먹고 탄생한 것이다. 시스템이 해결 못하는 걸 직접 뛰어들어 해결하는 엄마라는 판타지.

 

물론 <앵그리맘>은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심지어 만화적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실을 건드리는 면이 존재한다. <앵그리맘>의 판타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공고한 현실을 그것이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것이 심지어 엄마가 여고생이 되는 무리수마저 허용하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수목극 점령한 <착하지>의 세대적인 안배와 공감대

 

KBS <착하지 않은 여자들>에는 세 세대별로 각기 다른 관전 포인트가 있다. 그 첫 번째는 강순옥(김혜자)과 장모란(장미희)의 복잡 미묘한 심리전이다. 사라진 남편을 사이에 두고 본처와 내연녀인 두 사람의 관계는 앙숙인지 동지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면이 있다. 처음 만나자마자 강순옥이 장모란의 가슴을 발로 차버린 것에서 드러나듯 거기에는 넘을 수 없는 앙금이 깔려 있지만, 그럼에도 시한부 인생인 장모란을 집으로 초대해 좋은 약과 밥을 챙겨 먹이는 강순옥에게서는 여성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의 정 혹은 동지의식 같은 것이 느껴진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사진출처:KBS)'

아마도 강순옥과 장모란의 이런 관계는 그 연령대의 시청자들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공감가는 것이 될 것이다. 즉 이 나이대의 시청자들이 자주 봐왔던 불륜이라는 익숙한 소재가 들어와 있지만, 거기에 대한 접근방식은 새로운 면이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불륜 코드라고 하면 본처와 내연녀가 드잡이를 하는 설정이 하나의 클리셰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틀에 박힌 이야기에서 벗어나 있다. 남성을 중심으로 두고 보면 대결구도가 되지만 동시에 여성들만의 관점으로 보면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점도 생긴다는 것이 이 드라마의 다른 관점이다.

 

강순옥의 딸 김현숙(채시라)은 중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성취와 회한 같은 것들이 관전 포인트다. 레이프 가렛의 열혈 팬이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고등학교 퇴학을 당하게 된 그녀는 자신을 도둑으로 몰아세운 편견 덩어리 선생님 나현애(서이숙)에게 사과를 받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뒤늦게 생각해보니 자신의 굴곡진 인생의 시작점이 거기서부터 비뚤어졌다는 걸 알고는 분노하게 된 것.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자식교육에 집착하는 김현숙이라는 중년의 캐릭터는 중년의 나이에 이르러 어떤 상실감을 가진 여성들의 그 답답함을 대리해주는 인물이다. 그녀를 끝까지 지지해주는 친구 안종미(김혜은)와의 끈끈한 우정이나, 전시회에서 그녀를 모욕하던 나현애의 머리채를 잡고 사과하라고 하는 장모란과의 부모 자식 관계와는 사뭇 다른 또 다른 인간적인 관계는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만든다. 여기에 남편 정구민(박혁권)과의 은근한 멜로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관전포인트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청춘들의 멜로가 빠질 수는 없다. 김현숙의 딸 정마리(이하나)의 이루오(송재림)와 이두진(김지석) 사이에 벌어지는 화학작용은 젊은 시청자들이 흐뭇해지는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검도 도장을 하는 이루오에게 배경음악을 잘못 보내줘 엉뚱하게도 자신의 호감을 드러내게 된 정마리의 이야기는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든다. 또 엄마와 그렇게 각을 세우고 있는 나현애가 이두진의 모친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복잡미묘하게 만든다.

 

<착하지 않은 여자들>MBC <킬미힐미>를 제치고 또 SBS <하이드 지킬 나>를 따돌릴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이런 김혜자, 채시라, 이하나로 대변되는 각기 다른 세대를 그들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공감시키는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혜자가 어르신들의 공감대를 끌어간다면, 채시라는 중년이 겪는 상실감과 성취 욕구를 그리고 이하나는 젊은 세대의 사랑을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세대적인 안배와 다층적인 공감대는 <착하지 않은 여자들>의 가장 큰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살인의뢰>, 범죄물에 담긴 사형제에 대한 질문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살인마에 의해 희생되고 그 시신조차 찾을 수 없게 된다면 그 무너지는 억장과 고통을 과연 시간이 치유해줄 수 있을까. 심지어 그 살인마가 죄를 뉘우치기는커녕 세상을 비웃으며 버젓이 교도소 안에서 잘 살아가고 있다면? 아마도 당사자만이 그 고통을 알 수 있을 것이지만,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인의뢰>는 이 고통스러운 피해자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담은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살인의뢰>

여기 출연한 김상경은 과거 <살인의 추억>의 그 형사를 떠올리게 하는 어딘지 탱자 탱자 형사 일을 하는 인물처럼 등장한다. 연쇄살인이 벌어지고 있지만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한다. 다만 살인범의 단서가 아니면 살인범 비슷하게 생긴 놈이라도 잡아오라고 쪼아대는 반장 때문에 등 떠밀려 현장을 하릴없이 도는 그런 인사다. 그런데 이런 한가로움은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이 그의 안온한 삶은 송두리째 깨져버린다.

 

살인을 즐기는 초유의 연쇄살인마의 잔인함과 그를 쫓는 형사들의 이야기는 <살인의뢰>가 전형적인 범죄물이라는 걸 말해준다. 실제로 영화는 그 범죄물의 전개양상인 격투와 추격 같은 액션들이 전체 내용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 살벌할 수밖에 없는 범죄물이 사형제에 대한 담론을 담아내고, 그간 상대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던 피해자들의 고통을 강도 높게 다루면서 이야기의 정서는 조금씩 변해간다.

 

처음에는 피와 살이 튀는 잔인한 살육과 보복의 이야기처럼 다가오지만 차츰 그 연쇄살인마를 죽이려고 하는 이들의 간절한 심정에 동조하게 되면서 영화는 먹먹하게 보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그러면서 그 먹먹함은 자연스럽게 현재 우리네 사형제가 갖고 있는 모순과 부조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무엇 때문에 살인마들은 저렇게 보호받으며 살아가고 있는데(그것도 아주 잘) 피해자들은 이토록 깊은 고통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피폐해져야만 하는 걸까.

 

우리네 영화판에서 살인마가 등장하는 범죄물들은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와 식상해진 게 사실이다. <살인의 추억>이 어떤 깊이 있는 울림을 가진 범죄물의 시작을 보여줬고 <추격자>가 장르적으로 성공한 이후 우리는 무수히 많은 싸이코패스들이 등장하는 범죄물들을 접했다. 그 범죄물들은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기도 했던 흉흉한 연쇄살인사건과 맞물려 대중들에게는 부채감과 분노를 풀어내는 일종의 대체물처럼 흥행을 가능하게 했다. <아저씨> 같은 영화는 범죄물에 이제 판타지적 요소를 덧붙여 현실에 부재한 정의를 대리하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이 쏟아진 범죄물들의 리스트에 <살인의뢰>가 올라간다는 건 결코 좋은 시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인의뢰>는 기존의 범죄물이 주는 분노와 카타르시스적인 효과 이상의 새로운 정서를 제공해주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피가 튀는 끔찍한 범죄물을 보면서 마음 한 구석이 아려지는 경험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극화된 면이 있지만 <살인의뢰>는 범죄물 그 이상의 진지한 질문을 담아낸다. 사형제 폐지라는 어찌 보면 당연한 인권적인 선택처럼 보이는 이야기는 사실 이 영화를 통해 들여다보면 전혀 피해자의 인권은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해준다. 이런 문제제기를 어떤 주의 주장이 아니라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정서적인 틀로 전해주고 있다는 것. 게다가 범죄물이 가진 장르적 재미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건넨다는 건 이 영화가 가진 중요한 성취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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