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하기보다 빼기 나누기, 절실해진 삶의 다이어트

 

기계도 쉬지 않고 돌리면 과부하로 고장 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사람은 오죽할까.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이른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그 이름부터가 살벌하다.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난 어느 순간 무력감에 빠지는 상태. 이 상태에 빠지면 잠이 잘 안 오거나, 혹은 자꾸만 졸리고, 우울감을 넘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인지능력 저하’, 즉 시쳇말로 멍 때리는상황이 반복될 수 있어 자칫 사고의 위험까지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 이상씩 일에 몰두하다보면 생겨날 수 있는 증상이라고 하는데, 만일 이렇다면 우리네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이 증후군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루 10시간이 뭔가. 그것도 모자라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게 우리네 직장인들의 일상이 아닌가. 실제로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남녀 직장인 60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74.7%가 스스로를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작년 서점가를 강타한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은 그 제목만으로도 직장인들의 손을 잡아끈다. 직장인들은 그 멈춘다는 단어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 신드롬을 들여다보면 거기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일중독자들라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일중독자들은 심지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일 안하면 좀비 취급하는 사회의 노동 강박증이 얼마나 심각한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처럼 점점 컴퓨터 기능이 우리 몸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우리의 일상은 쉬면서도 쉬는 것이 아닌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움직이는 컴퓨터(?)는 움직이면서 우리를 일하게 한다. 끊임없이 전화가 울리고, 문자가 들어오고, 메일이 날아온다. 그 때마다 우리는 신경이라는 안테나를 곧추 세우고 일 속으로 빠져든다. 주말을 쉬고 났는데도 별로 쉰 것 같은 느낌이 영 들지 않는 건 사실 몸만 집으로 왔을 뿐 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되면 좀 더 단순한 삶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 된다. 뭔가 비워내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 이럴 땐 차라리 아무도 없는 산골 같은 데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게 상책이다. 최근 <12>부터 <꽃보다 할배>, <꽃보다 청춘> 등을 만들어 여행의 트렌드를 바꾼 나영석 PD가 새롭게 들고 온 <삼시세끼>가 잔잔한 열풍을 만들고 있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강원도 산골 농가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게 다인 이 프로그램이 케이블 채널로서는 놀라운 8% 시청률(이건 지상파도 흔치 않은 시청률이다)을 내고 있는 건 복잡한 세상에 대한 염증과 단순한 삶에 대한 욕구가 반영된 결과다. 아침 차려 먹고 나면 점심 준비하고, 점심 차려 먹고 나면 저녁 준비하는 삶. 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바로 그 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한 프로그램이 됐다.

 

다이어트 열풍이라지만 빼야할 건 살만이 아니다. 이미 일과 욕망으로 덕지덕지 살이 붙어버린 우리네 비대해진 삶 역시 다이어트 대상이다. 개발시대의 삶이 성장만을 목표로 하는 더하기의 삶이었다면 이제 21세기에 맞닥뜨린 우리네 삶은 빼기와 나누기의 삶이어야 한다. 비만이 성인병을 가져오는 것처럼, 삶의 비만은 정신적인 부작용을 초래한다. 번아웃 되기 전에 그 에너지를 나누고 빼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미생>의 청춘들

 

내는 생각한다. 힘든 세월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 <국제시장>의 덕수(황정민)가 던지는 이 내레이션은 아마도 이 영화가 하려는 대부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국제시장>은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한국전쟁부터 파독 광부, 베트남 전쟁 같은 우리네 현대사를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다.

 

사진출처: 영화 <국제시장>

덕수는 어린 시절 피난 중 흥남부두에서 막내의 손을 놓쳤고, 그 막내를 찾으러 간 아버지의 손을 놓쳤다. 그 트라우마는 그가 국제시장의 한 귀퉁이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영화는 덕수라는 인물의 특별한 사건을 다루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네 아버지들이 겪었을 현대사들을 그 자체로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위해 파독 광부가 되어 얼굴에 온통 탄가루를 뒤집어쓴 채 지하에서 일하는 덕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짠한 느낌을 준다. 또 그 힘겨운 시절에 만난 파독 간호사 영자(김윤진)와의 사랑은 그만큼 애틋해진다. 독일에서 돌아와서도 동생의 결혼자금을 위해 베트남 전쟁에 기술근로자로 가는 이야기도 덕수가 겪는 사건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충분히 눈물을 자아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영화는 덕수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다가도 문득문득 불편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그것은 이 영화가 다루지 않고 있는 현대사에서부터 비롯한다. 덕수가 겪는 이야기는 대부분 힘겨운 노동과 관련된 것들이다. 독일까지 가서 탄을 캐다 사고까지 당하는 이야기나, 베트남에서 총탄에 맞아가면서까지 덕수가 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일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일하고 있는 이유는 가장으로서 지켜야할 가족들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다루지 않는 역사들도 당연히 떠오를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당시 거짓 라디오 방송을 하며 제일 먼저 도망친 정치 지도자의 이야기나, 독일에 보내진 광부와 간호사들이 하루하루를 눈물로 보낼 때 정작 안에서는 개발시대의 부정과 비리들이 횡행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베트남에서 자행된 폭력들은 지울 수 없는 우리네 현대사의 오점들이다.

 

기술노동자로 베트남에 간 덕수가 거기 고립된 베트남 사람들을 데리고 탈출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 영화의 과잉된 감정과 부족한 역사인식을 드러낸다. 그 속에서 그들에게 총을 쏘아대는 이들은 마치 괴물처럼 치부된 베트남 사람들뿐이다. 하지만 과연 이 장면을 베트남 사람들이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지나친 편향이라고 얘기하지 않을까.

 

이 영화가 슬픈 것은 역사와 무관하게 떼어내 보여주는 각각의 사건들이 그 자체로 슬플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이산가족상봉의 이야기는 그 어떤 설명도 필요 없이 보는 이들을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것은 영화가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그 상황 자체가 만들어내는 슬픔이다. 하지만 이런 감정 과잉이 가라앉고 나면 그 이면에 놓여진 숨겨진 역사가 얼굴을 들이민다. <국제시장>이 불편해지는 지점은 여기서부터다.

 

결국 영화는 그 긴 세월을 돌아 현재로 이어진다. 덕수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라고 묻는다. 카메라는 방에서 오열하는 덕수와 거실에서 화목하게 웃는 가족들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그것은 이 영화가 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아버지들이 그 고생을 해서 이제 후세들이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여기에도 가려진 이야기가 존재한다. 잘 살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이 땅에는 왜 그리도 많은 미생들이 존재하는가. 아버지들은 그토록 노동 속에 점철되어 살아왔다지만, 그 아들들은 왜 노동의 현장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고 배제되는 잉여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아버지들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 살만해지는 삶을 살았다고 해도, 그 아들들은 왜 노력해도 안 되는 삶을 그저 버텨내며 살아야 할까.

 

윤제균 감독은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자식 세대와 아버지 세대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지사지<국제시장>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영화가 아버지라는 단어 하나가 주는 울림에 지나치게 기대다 보니 균형을 잃어버린 것이다.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토록 불편해질 수 있다는 것. 그것을 <국제시장>이라는 영화의 역사의식 부재와 편향은 보여주고 있다.

 

<미생> 신드롬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이제 <미생>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끝날 때가 다 됐지만 정작 주인공인 장그래(임시완)의 위치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물론 인턴으로 들어왔다가 겨우겨우 계약직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그에게 아직 정규직 소식은 없다. 오히려 그 정규직을 억지로라도 만들려고 위험성 있는 사업을 덜컥 하려는 오차장(이성민)과 그 사실을 알고는 퇴사를 고민하는 장그래가 갈등을 일으키는 중이다.

 

'미생(사진출처:tvN)'

그나마 만년 과장이었던 오과장이 오차장이 된 게 이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의 성취다. 물론 풋내기 신입사원이었던 장그래나 안영이(강소라), 장백기(강하늘), 한석률(변요한) 같은 인물들이 이제 제법 회사에 적응해 척척 자기 몫을 해내는 건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건 별로 없다. 그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미생들일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커다란 성취나 판타지를 보여주지 않는 <미생>이 왜 그토록 신드롬을 만들었는가를 의아해 한다. 하지만 <미생> 신드롬은 바로 그 커다란 성취나 판타지를 말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사실 직장생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커다란 성공이나 성취를 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저 그 힘겨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섣부른 판타지는 헛웃음을 만들 수밖에 없다. <미생>은 그런 점에서 보면 헛된 희망을 얘기하지 않은 드라마다. 거기에는 그 흔한 멜로적 성취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사회현실 속에서의 성취가 불가능하다면 멜로 같은 사적인 성취라도 취하는 것이 기존 드라마들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미생은 그런 곁가지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사원과 대리, 팀장 사이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냄으로써 그 미생으로서의 삶에 자그마한 숨통을 만들었을 뿐이다.

 

멜로도 없고 가족도 그렇게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 일중독자들의 세상이 그토록 우리를 잡아끌었던 건 거기에 직장인들의 디테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직장인이란 유리지갑월급쟁이과로과음으로 점철된 어떤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일 속에 푹 빠져 살아가는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미생>은 달랐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뻔하게 치부해 왔던 직장인들의 면면을 깊숙이 들어가 자세한 디테일로 그려냈다. 거기에 특별한 판타지는 없었지만, 바로 이 디테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위안과 위로를 주는 힘을 발휘한다. 누구도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던 삶을 조명해준다는 것. 그리고 그 미생의 삶에 나름의 가치 부여를 한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왜 직장인들에게 그토록 큰 공감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미생>의 인물들은 그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변함없음을 보여주지만, 이런 헛된 판타지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직장인들의 삶이다.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바둑에는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오차장의 이 말에서 방점은 우린 아직 다라는 단어에 찍힌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아픈 현실에 대한 공감. 그것이 <미생>이 신드롬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정의와 진실, 요즘 대중들의 갈망

 

센 놈들 잡으려면, 뭐가 필요한지 아냐. 다른 힘센 놈의 허락이다.”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최민수) 부장검사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를 강행하려는 구동치(최진혁)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이 대사 속에는 우리네 검찰이 처한 쓰디쓴 현실이 묻어난다. 정의를 구현해야할 검찰이 사실은 권력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을 <오만과 편견>의 문희만(그래서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부장검사는 보여준다.

 

'오만과 편견(사진출처:MBC)'

검사는 수사 중인 사건에 대해 외부에 공표할 수 없다. 죄송하다.” <펀치>에서 검찰총장의 인사청문회에 서게 된 신하경(김아중)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총장의 비리를 폭로하지 못했다. 전 남편이 자신이 데리고 살고 있는 딸 예린이(김지영)의 양육권을 갑자기 들고 나오며 그녀를 협박했기 때문. 이 장면 속에는 검찰이라는 조직이 가진 권력적인 속성이 묻어난다. 쟁취하기 위해서는 딸까지 볼모로 내세우는 것.

 

누군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은 피노키오가 진실만 말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또 사람들은 기자들도 피노키오처럼 진실만을 전한다고 생각합니다. 피노키오도 기자들도 사람들이 자기 말을 무조건 믿는다는 걸, 그래서 자기 말이 다른 사람들 말보다 무섭다는 걸 알았어야죠. 그걸 모른 게 송기자님의 잘못입니다... 13년 전 그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임팩트를 운운하시는 걸 보니 송기자님은 13년 전과 똑같은 기레기시네요.”

 

<피노키오>에서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자신은 기자로서 할 일을 했다 말하는 송차옥(진경)기자에게 그녀의 딸인 최인하(박신혜) 기자는 기레기라는 강한 표현을 쓴다. 여기에는 과잉 취재 경쟁 속에서 팩트보다 임팩트가 더 중요해진 우리네 언론의 현실이 묻어난다. 바로 그 임팩트는 어떤 경우에는 한 가족을 풍비박산 내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하다.” <힐러>의 정의로운 기자 김문호(유지태)는 노조파업 현장에서 분신한 노동자의 병원을 찾아 그렇게 말했다.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에 분신이라도 해서 자신들의 말을 들어달라고 했던 것이지만 아무도 병원을 찾지 않았다는 노동자의 이야기에 김문호가 기자로서 사과한 것. 물론 김문호라는 인물은 판타지에 가깝다. 그 판타지 속에는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라는 서민들의 갈증이 느껴진다.

 

최근 주중 드라마들은 왜 이렇게 연달아 검찰과 기자를 드라마의 소재로 다루고 있을까. 드라마가 대중들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보면 이 두 직종이 환기하는 건 정의와 진실에 대한 서민들의 갈망이다. 언젠가부터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권력기관처럼 받아들여지게 된 검찰에 대한 서민들의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오만과 편견>이나 <펀치> 모두 검찰의 비리 척결을 주요 주제로 다루는 건 그래서다.

 

한편 검찰만큼 믿지 못하게 된 것이 바로 언론이다. 팩트보다는 임팩트를 강조하고, 때로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권력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언론을 대중들은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피노키오><힐러>가 다루는 언론의 문제는 자기반성으로 가득 차 있다. 잘못된 언론의 뉴스나 조명하지 않는 사건들이 누군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이 그 밑바닥에는 깔려 있다.

 

검찰과 기자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대중들이 기대하는 건 정의와 진실의 승리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이들 드라마들이 과거와 달리 손쉽게 정의와 진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현실은 더 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이미 대중들이 실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같은 허구 속에서나마 카타르시스를 느끼기에도 버거운 현실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