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출연이 대선주자 이미지에 미치는 영향

집사부일체

정치인들에게 대중들이 카리스마가 아닌 친숙한 이미지를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선주자들의 예능 출연은 이제 하나의 통과의례처럼 자리하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이러한 흐름은 대선주자의 당락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칠까.

 

‘집사부일체’가 연 대선주자들의 예능행

SBS <집사부일체>는 ‘대선주자 빅3 특집’을 마련해 윤석열 전 총장, 이재명 지사 그리고 이낙연 전 대표를 ‘사부’로 모셨다. 물론 최근 들어 뒷심을 발휘하고 있는 홍준표 의원이 빠졌지만(그는 그래서 TV조선 <와카남>에 출연했다) 현 대선 경쟁의 유력한 인물들을 섭외해 그들의 정치인으로서만이 아닌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기획의도다. 시청자들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내년 치러질 대선 후보들이 어떤 사람인가를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로 보여서다. 이런 호기심과 기대감은 <집사부일체>의 급등한 시청률에 그대로 반영됐다. 3.6%(닐슨 코리아)였던 시청률은 7.4%(윤석열 편), 9%(이재명 편)로 훌쩍 뛰었다. 

 

워낙 네거티브 공방이 치열해지고 있는 현 시점이라 예능 프로그램이라 해도 어디까지 질문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있었을 듯싶다. <집사부일체>의 선택은 그 각각의 후보들에게 이익이 될 만한 옷을 입혀주는 것이었다. 윤석열 전 총장은 그간의 행적으로 인해 다소 날카롭고 권위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는데, 그래서인지 <집사부일체>는 그의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했다. 자택으로 초대해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를 직접 요리해 나눠먹고, “그냥 형이라고 해”라고 했던 장면이 인상 깊게 남았다. 또 사법고시 9수를 했던 일화를 통해 낙천적인 성격을 강조했다. 물론 대선주자로서 유권자들에게 자신만의 정책이나 생각을 제대로 들려주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윤석열 전 총장의 입장에서는 예능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를 최대한 드러냈던 건 사실이다. 

 

이재명 지사도 역시 친근한 이미지를 강조했지만 그가 <집사부일체>로 얻어가려는 건 유독 많았던 그와 관련된 구설과 이슈들을 오히려 풀어내보겠다는 거였다. 사이다 발언으로 정평이 난 이재명 지사는 그래서 친형 강제 입원, 형수 욕설 논란은 물론이고, 김부선 스캔들에 대한 해명에도 거침이 없었다. ‘욕설 논란’에 대해서는 형님이 자신을 진짜 간첩으로 믿고 있었고 어머니까지 협박하는 상황이라 욕을 했다고 선선히 인정하면서 이제는 화해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고, ‘김부선 스캔들’에 대해서는 “몸에 점이 없는 것이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훌륭한 재산”이라는 말로 신체 특정부위에 점이 있다며 ‘내연관계’를 주장한 김부선의 주장을 부인했다. 이재명 지사는 예능이 허용하는 ‘유머’까지 잘 활용해 논란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해명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대선 홍보영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인들의 예능행

대선에 미디어를 통해 비춰지는 이미지가 중요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건 2000년대 초반부터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002년 대선 홍보영상에서 고 노무현 후보가 ‘상록수’의 첫 구절을 통기타를 치며 부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대부분 정책 중심으로 만들어지던 홍보영상이 감성적인 이미지로 바뀌며 큰 반향을 일으켰던 사례다. 물론 이런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당시 노무현 후보가 대쪽 이미지를 가졌던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박빙의 대결을 벌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대선 후보의 미디어 이미지 전략은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 다음 대선이었던 2007년에도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데 있어 이른바 ‘욕쟁이 할머니 국밥집’ 홍보영상은 큰 힘을 발휘했다. 훗날 그 할머니는 사실 연기자였다는 게 밝혀졌지만 이 국밥집 홍보영상은 이명박 후보에게 친 서민 이미지와 더불어 경제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하지만 후에 <MB의 추억> 같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상영되면서 거짓 이미지 논란이 생겼고, 이미지 정치가 갖는 문제들이 부각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012년 대선에는 당시 유력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차례로 <힐링캠프>에 출연했다. 박근혜 후보는 국밥집 토크부터 썰렁 개그에 폭탄주 제조법까지 이야기하며 친근함을 드러냈고, 문재인 후보는 아내와 동반 출연해 부부애를 과시하는가 하면 특전사 시절의 식스팩 사진 공개는 물론이고 격파 실력까지 선보이며 인간미를 과시했다. 물론 이 때는 이미 예능 출연을 통한 소탈한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이 정치인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되고 있을 때였다. 2013년부터 방영됐던 JTBC <썰전>은 일찌감치 시사, 정치가 예능과 어떻게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가를 보여줬고, 2017년 대선에서는 당시 유력주자였던 유승민, 문재인, 안철수, 안희정 등이 출연했다. 그만큼 이제 정치와 예능은 일상적으로 섞이기 시작했고 이 흐름은 정치인들의 유튜브 개인방송 러시로도 이어졌다. 

 

정치인의 친근한 이미지? 부캐일 뿐

그렇다면 현재 정치인들이 방송이나 홍보 영상을 통해 부각시키려는 친근한 이미지들에 대해 대중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이번 <집사부일체>에 나오는 반응들을 보면 과거만큼 정치인들의 예능 이미지를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포장된 ‘거짓 이미지’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그 이미지가 그들의 정치인으로서의 행보와 밀접한 연관관계를 갖는다고도 생각하지 않는 것. 즉 예능의 이미지와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시선들이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 변화는 정치가 예능 같은 방송과 그간 지속적으로 밀월관계를 해옴으로써 지금은 거기서 보이는 서민적인 이미지의 효용이 과거만큼 크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 대선을 겪으며 그 때마다 나왔던 ‘친서민적 이미지’가 실제 정치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는 걸 경험하면서 갖게 된 ‘무덤덤함’이다. 

 

여기에는 또한 최근 본캐와 부캐를 나누어 보는 대중들의 달라진 시선도 작용하고 있다. 일상에서의 친근한 부캐가 정치인으로서의 본캐와는 다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예능에 출연한 대선주자들의 면면을 그저 저들의 부캐를 발견하는 재미 정도로 볼뿐, 본캐와 혼동하지는 않게 됐다. 결국 이러한 시선의 변화 속에서 대선주자들은 정책과 정치철학으로서 대중들의 선택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예능 출연은 일종의 대선주자들이 선 넘는 네거티브전으로 지친 국민들에게 보상하는 일종의 ‘서비스’라고나 할까. 적어도 한번쯤 웃을 수 있게 해준다는 것만으로도.(글:시사저널, 사진:SBS)

‘오징어 게임’과 ‘오십억 게임’ 그리고 아빠 찬스

오징어 게임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 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일뿐.” 곽상도 국민의 힘 의원의 아들 곽병채씨가 퇴직금 명목으로 50억 원을 수령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에 갑작스레 <오징어 게임>이 등장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현재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전 세계 83개국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아마도 곽상도 의원의 아들 역시 이 드라마를 봤던 모양이다. 

 

그가 ‘오징어 게임 속 말’이라고 했던 건 이 드라마에서 기훈(이정재)은 노모의 카드를 빼내 현금 서비스를 받은 돈으로 경마를 한다. 드라마 첫 회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오징어 게임>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제 456억을 두고 이른바 VIP들의 재미를 위해 경주마가 되어 죽고 죽이는 데스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질 거라는 예고. ‘오징어 게임 속 말’은 그래서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경쟁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박하게 목숨을 걸고 달릴 수밖에 없는 보통 서민들을 은유한다. 물론 저 경쟁 시스템을 만든 기득권자들에 대한 환멸에 가까운 냉소를 포함해.

 

하필이면 <오징어 게임>의 비유를 들었지만, 대중들은 그것이 결코 적확한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6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는 일이 상식적일 수 없어서다. 게다가 이런 그가 진정으로 ‘오징어 게임 속 말’처럼 절박한 청년이라 보기도 어렵다. 곽씨는 “제가 입사한 시점에는 화천대유는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며 “돌이켜 보면 설계자 입장에서 저는 참 충실한 말이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운전 중에, 또 한 번은 회사에서 쓰러져 회사 동료가 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했다”며 “일 열심히 하고, 인정받고, 몸 상해서 돈 많이 번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오징어 게임> 운운한 건, 설계자는 따로 있고 자신은 그 안에서 열심히 달린 것뿐이라는 걸 피력하기 위함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오징어 게임> 속 기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드라마를 본 분들은 알 수 있듯이 기훈이 그런 결과를 얻게 되는 건 보이지 않는 설계자의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운’이다. 하지만 곽씨가 하필이면 그 회사에 입사해 6년 가량 일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은 걸 어떻게 운으로 볼까. 본인 스스로도 ‘설계자’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대중들이 이 사안을 ‘아빠 찬스’로 보는 이유다. 

 

곽상도 의원은 공석에서 취준생들의 박탈감을 대변한 일이 있다. “수십 수백 대 1 경쟁 뚫고 어렵게 입사한 직원과 채용에서 탈락한 취업준비생과 그 부모들은 가슴을 치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평등, 공정, 정의를 물었다. 놀랍게도 <오징어 게임>에서 456억을 두고 벌이는 게임에 룰로서 제시되는 가치들이 바로 평등, 공정 같은 것들이다. 그것을 어기면 즉결심판에 처해진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을 끝까지 보다 보면 평등, 공정 같은 가치들이 일종의 ‘선언’일 뿐, 결코 실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경쟁사회라는 시스템 자체가 이런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시스템 꼭대기에서 오징어 게임의 말들을 내려다보는 기득권자들의 선언과는 다른 ‘내로남불’이 존재하는 한 더더욱.

 

며칠 전 벌어진 장제원 의원의 아들 노엘 사건 역시 청년들에게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게 했을 게다. 무면허 운전, 음주측정 불응, 경찰관 폭행 게다가 그는 이미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2017년 래퍼로 데뷔한 후 지금껏 그만큼 많은 범죄행위들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연예인도 드물다. 하지만 그는 그 때마다 버젓이 활동을 이어갔다. 이것이 어떻게 노엘이라는 한 연예인의 힘만으로 가능할까. 보통의 연예인이라면 수년을 자숙해도 복귀가 가능할까 싶은 수준이 아닌가. 여기서도 청년들은 두 단어를 떠올린다. ‘내로남불’과 ‘아빠 찬스’. 한때 조국과 그 딸을 ‘부모찬스’를 언급하며 맹공했던 장제원 의원에게 이제 고스란히 그 화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오징어 게임>은 ‘오십억 게임’이 되었다. 누군가 시작한 패러디는 지금의 청년들이 느끼는 분노와 허탈감을 가득 담은 일종의 놀이처럼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 뉴스 속 댓글들도 “미안해 아빠가 곽상도가 아니라서...”, “곽상도 아들로 못 태어난 죄”라는 글이 유행처럼 번져간다. “곽씨와 화천대유는 깐부 사이냐”,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은 목숨을 걸었는데, 곽씨는 무엇을 걸었나” 같은 <오징어 게임> 속 이야기를 꺼내와 분노를 표한다. 

 

지금 <오징어 게임>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건, 그 세계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대신 현실을 똑 빼닮은 그 세계를 냉소하고 있어서다. 어쩌면 우리는 저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결코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공정이나 평등을 부르짖는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기훈이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듯이, 태생적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아빠 찬스’가 그 사람의 ‘운’처럼 치부되는 경쟁사회 속에서 <오징어 게임>은 불쾌하지만 적어도 폭로의 쾌감을 선사한다. 

 

청년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그 정서 속에는 분노와 허탈감, 조롱, 냉소 같은 감정들이 깔려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징어 게임>은 지금 현재 현실 버전으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 그 누가 이 냉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건 어쩌면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게다. 전 세계의 청년들이 <오징어 게임>의 냉소에 열광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말처럼 뛰고 또 뛰는 서민들은, 게임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현실 버전의 경쟁 게임 속에서 몇몇 기득권자들의 즐거움(행복)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니.(사진:넷플릭스)

‘원 더 우먼’, 갑질, 시월드, 비리, 위선에 날리는 강력한 한 방

원 더 우먼

“다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깝쳐!” 교통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이 된 채 졸지에 재벌가 며느리 강미나(이하늬)가 된 비리검사이자 조폭 행동대장 외동딸 조연주(이하늬)는 꾹꾹 눌렀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자신이 진짜 며느리인 줄 알고, 재벌가 시월드에서 꼭두각시에 노예처럼 대접받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도 그러려니 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당하기만 했던 강미나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서는 뭐든 해왔던 비리검사이자 거의 조폭급의 싸움 실력으로 그들과도 결탁되어 있는 조연주다. 그의 본성이 터져 나오며 재벌가 시댁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란 듯이 일침을 가하는 장면은 마치 이 드라마가 패러디해 따온 제목 <원 더 우먼>의 그 슈퍼히어로를 떠올리게 한다. 

 

계속 무시하듯 장난치는 큰며느리의 아들에게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소리치고, 그런 그에게 얘가 장난 좀 한 걸 갖고 뭘 그러냐는 큰며느리에게도 똑같이 쏘아붙인다. 꼴에 남편이라고 끌어 앉히려는 한성운(송원석)에게 “이해? 말이 좋아 이해지 나보고 그냥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는 거잖아?”하고 일침을 가하고, 급기야 참지 못한 시아버지이자 한주그룹 회장인 한영식(전국환)이 큰 소리로 “조용히 못해!”하고 소리치자 주춤하기는커녕 더 큰 소리로 “언성 높은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아니 이게 무슨 노름판도 아니고 왜 갑자기 소릴 질러요? 아이고 깜짝이야!”하고 외친다. 이렇게 일일이 한 사람씩의 공격에 맞대응하는 모습은 마치 원더우먼이 빗발치는 총알들을 팔찌로 막아내고 공격한 자들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SBS 금토드라마 <원 더 우먼>의 이 속 시원한 사이다 장면은 이 드라마가 겨냥하고 있는 카타르시스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 순간 이 독보적인 여성은 노예처럼 시월드에서 핍박받아온 그 응어리를 마치 총알처럼 쏘아댄다. 과장된 코미디로 연출되어 있지만 마침 추석 명절을 보내고 온 며느리들 중에는 이 광경이 주는 시원함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여성 캐릭터가 겨냥하고 있는 건 시월드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세계만이 아니다. 마침 이 여성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며느리에게조차 갑질이 일상이 되어 있는 재벌가다. 남편은 대놓고 바람을 피고, 집안사람들은 유민그룹의 막내딸인 이 여성이 물려받게 될 유산에만 관심이 있다. 재벌가 며느리지만 가사도우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의 스케줄을 가진 이 여성은 그래서 재벌가라는 회사의 갑질 아래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 같은 위치를 드러낸다. 그러니 이 여성이 싸워나가는 건 시월드의 핍박만이 아니라, 갑질하는 세상의 핍박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쩌다 재벌가 며느리 강미나가 된 이 여성의 실체는 비리검사이자 조폭인 조연주다. 그러니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그 법 지식을 이용해 어떻게든 성공하려 애써왔지만, 이제 재벌가 며느리의 역할을 하게 된 그는 그 남다른 법 지식을 갖가지 비리와 위선으로 점철된 재벌가와 싸우는데 활용하게 된다. 물론 비리를 캐거나 혹은 후계자 승계구도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성혜(진서연) 같은 적이나 조폭들의 물리적인 폭력 앞에서도 그의 잠재된 능력(?)이 튀어나온다. 저도 모르게 조폭들을 때려눕히며 “나 왜 이렇게 잘 싸워?”라고 하는 대목은 코믹하게 그려져 있지만 이 독보적인 캐릭터의 무소불위를 잘 드러내준다. 

 

사실 <원 더 우먼>은 그 흔하디흔한 ‘왕자와 거지’ 코드와 기억상실 코드를 틀로 가져왔다. 다분히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 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익숙한 코드를 통해 축조해낸 무소불위의 여성 캐릭터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는 비리검사였으며 조폭이었지만 재벌가 며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 주먹, 돈을 모두 쥘 수 있는 캐릭터다. 중요한 건 이런 잠재적 능력을 이 여성 캐릭터가 무엇을 하는데 쓰는가 하는 점이다. 정의의 사도 같은 캐릭터와는 멀고 적당히 속물적이지만 불의는 참지 못하는 이 캐릭터는 저도 모르게 시월드와 싸우고, 갑질하는 세상과 싸우며,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해온 위선적인 기득권자들과 싸운다. 

 

물론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일주일 간 갑질하는 세상에서의 갖가지 스트레스와 피로를 한 몸에 안고 주말을 맞이한 시청자들에게 한 시간 동안의 시원시원한 사이다를 날려주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다. 특히 이 한 여성 캐릭터에 이러한 다양한 사회의 갑질 구조를 부여한 건 이 드라마의 신의 한 수라 할만하다. 여성과 약자들의 연대적 지지가 그 캐릭터 속에 자연스럽게 부여될 수 있어서다. 아마도 최근 등장한 여성캐릭터 중 독보적인(One) 여성 캐릭터(The woman)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사진:SBS)

‘오징어 게임’, 456명과 456억 사이

오징어 게임

(본문 중 드라마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시청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어린 시절 공터에서는 흙바닥에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아이들이 오징어 게임(당시에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렸다)을 하곤 했다. 맨몸으로 공수를 나눠 부딪치는 게임은 꽤 과격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선사했다. 밥 냄새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저녁 시간이 되어 엄마들이 아이 이름을 불러서야 겨우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으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이 어린 시절의 게임들을 모티브로 가져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변주해낸다. 빚에 쪼들리면서도 경마 같은 도박을 통해 일확천금만을 꿈꾸는 기훈(이정재)은 이혼 당한 후 힘겹게 생업으로 버텨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딸 생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처지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불쑥 게임을 제안한다. 딱지치기를 해서 이기면 10만원을 주고 지면 뺨 한 대를 10만원 값으로 때리겠다는 것.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두드려맞던 기훈은 결국 딱지를 뒤집고 돈을 번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받는다. 

 

<오징어 게임>의 이 시퀀스는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준다. 돈과 뺨 맞기의 등치는 앞으로 기훈이 그 낯선 곳으로 끌려가 하게 되는 오징어 게임의 핵심적인 룰이다. 456번을 달게 된 기훈은 자신이 그 게임에 참여한 마지막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 곳에 모인 456명과 돈을 놓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게 된다. 각 한 사람의 목숨은 1억 원으로 매겨진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이들이 지내는 합숙장소의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투명 공 안으로 그만큼의 돈다발이 쏟아져 쌓여간다. 456명의 목숨 값은 그래서 456억이고 끝까지 살아남는 최종 1인은 그 456억을 가져가게 된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점에서 살벌하지만, 이들이 하는 게임은 너무나 상반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심 게임들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부터 ‘구슬치기’, ‘오징어게임’ 같은 게임들이다. 요즘이야 각종 돈 들어가는(심지어 현질을 해야 하는) 인터넷, 모바일 게임들이 넘쳐나지만 당시만 해도 맨몸으로 쪽수만 맞으면 동네 어디서든 할 수 있었던 게임들. 그것도 너무 재밌어서 밤에 잠 잘 때조차 다음 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던 바로 그 게임들이다. 설마 사람까지 죽이겠어 하는 의구심은 첫 게임에서 무차별 살상을 겪고 난 후부터 살벌한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동심 게임이 피가 튀고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변화해가는 것. 

 

<오징어 게임>은 방영 전부터 표절 논란이 나왔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서바이벌 게임’류 콘텐츠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일본 영화 <배틀로얄>이 그렇고, <신이 말하는 대로>,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된 일본 드라마 <아리스 인 보더랜드>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간 것처럼 제시되는 미션들을 해결해야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류 콘텐츠들은 이제 계보를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이에 대해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이 “2008년부터 구상한 작품”이라며 “유사포맷이라 언급되는 작품은 그보다 훨씬 이후에 공개됐다”고 했다. 우선권을 따지자면 이 작품이 원조라는 주장이다.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오징어 게임>의 오리지널리티는 여기 등장하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게임들과 이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부여하는 한국적 정서가 아닐까 싶다. <오징어 게임>은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가상의 게임 상황을 가져오지만, 이 가상을 통해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이다. 

 

구조조정을 당한 후 가게를 열었지만 실패한 기훈(이정재), 서울대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지만 횡령과 사문서 위조로 쫓기는 신세가 된 상우(박해수), 탈북자로서 동생을 보육원에 맡긴 채 어머니를 데려오려 브로커를 썼지만 도망쳐버려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새벽(정호연), 머리에 뇌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일남(오영수), 조직의 돈에 손을 댄 일로 쫓기는 조폭 덕수(허성태), 임금체불로 실랑이를 벌이다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간 사장의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갖고 도망친 외국인 근로자 알리(트리파티 아누팜) 등등.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이들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이 살벌한 게임 속으로 가져온다. 이들 모두의 현실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돈이지만 그 양상은 구조조정이나 학력사회, 탈북자 문제, 조폭, 외국인 근로자의 현실 등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오징어 게임의 룰이 공정, 평등 같은 가치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결과에 따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만, 적어도 이 게임은 현실에서의 스펙 따위 필요 없이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어느 누구도 위계를 갖지 않는 평등함이 엄격한 룰로 제시된다. 물론 그건 허위다. 공정과 평등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인간의 장기를 밀매하는 끔찍한 비리들이 자행된다. 결국 이 세계도 겉으로 내세우는 공정과 평등 같은 가치의 룰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죽고 죽이는 잔혹한 서바이벌의 룰을 따라간다. 그 가치 기준은 돈으로 귀결된다. 

 

가상의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배신하는 이들의 면면은 그래서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게임에서 지면 즉결처분되는 상황은 그래서 우리네 현실 또한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 곳은 지옥이지만, 그 곳 바깥도 똑같이 지옥이다. 그걸 만드는 건 이 시스템을 굴리는 자들이고, 그 동력은 돈이다. 자본화된 사회가 만들어내는 머니 게임, 즉 돈과 사람의 가치가 등치되는 그 게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 

 

이야기는 빙 돌아서 다시, 아무 것도 없어도 맨 땅에 오징어 그림 하나 그려놓고 그토록 재밌게 놀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오징어 게임과, 이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오징어 게임을 병치해놓는다. 누군가에겐 재미이지만, 욕망과 좌절이 덧대진 누군가에는 목숨을 걸고 하는 서바이벌이 되는 세상. 456명이 456억으로 등치되는 세상. <오징어 게임>은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돌려놓는다. 매일 같이 생존을 위해 사회로 나가는 당신은 과연 어떤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느냐고. 그 어린 시절 순수한 재미와 몰입감을 줬던 삶의 게임인지, 아니면 그 순수함이 사라진 후 벼랑 끝에서 벌이는 욕망의 게임이지, 이 드라마는 묻고 있다.(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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