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골 때리는 그녀들’, 여성 스포츠예능의 색다른 진화

 

최근 들어 <골 때리는 그녀들>이 화제다. 연예인들이 팀을 꾸려 여자 축구에 도전한다는 소재 자체도 흥미롭지만, 특히 이 프로그램이 화제가 된 건 여기 출연하는 이들이 보이는 진심 때문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축구에 빠져들게 만들었을까. 

골 때리는 그녀들

<골 때리는 그녀들>, 파일럿의 문제들을 단박에 날린 건

지난 설 연휴에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등장했던 SBS <골 때리는 그녀들>은 최고 시청률 10.2%(닐슨 코리아)를 기록할 정도로 독보적인 성공을 그려낸 바 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이 정규행을 일찌감치 예고한 건 아니었다. 몇 가지 심각한 논란의 요소들이 등장했고, 무엇보다 10%가 넘는 시청률에는 명절이라는 특수한 시점과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스포츠예능이라는 소재가 맞아 떨어진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지난 6월 정규로 돌아온 <골 때리는 그녀들>은 평균 6%대로 낮지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높지도 않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중요한 건 시청률보다는 논란의 요소들을 어떻게 지워내고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논란의 요소는 엉뚱하게도 ‘여성 예능’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작했지만, 오히려 여성출연자들을 소외시키는 프로그램의 감수성 부족한 상황들에서 비롯됐다. 축구에 도전하는 출연자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뛰는데, 이들을 중계하는 이들의 말들에는 ‘성차별적’ 요소들이 담겨 있었다. 칭찬처럼 한 것이지만 “남자축구 못지않다” 같은 부적절한 멘트들이 해설에 들어갔고, 무엇보다 전직 국가대표나 국가대표 가족으로 구성된 ‘국대패밀리팀’은 ○○○의 며느리, ○○○의 아내로 소개됐다. 심지어 운동복에도 그런 식의 표기가 들어가면서 출연자 자신으로 오롯이 소개하지 않은 방송에 대한 질타가 이어졌다. 전반적인 예능 프로그램의 여성 출연자 성비가 현저히 낮기 때문에, 여성 연예인들이 팀을 꾸려 벌이는 여자축구는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도전으로 여겨졌지만 정작 ‘질적인’ 면모를 보이지 못하면서 생긴 한계였다. 

 

하지만 이러한 파일럿의 문제를 단박에 날린 건 다름 아닌 출연자들이었다. 파일럿에서 그저 새로운 체험 정도로 참여했던 출연자들은 당시 경기를 하면서 점차 축구 자체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날아오는 공을 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내고, 여러 명이 팀을 이뤄 패스를 주고받으며 결국 골을 이뤄내는 그 과정은 이들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파일럿에서 발톱이 빠진 한혜진은 곧바로 “저희 정규 언제 할 건데요?”라고 물을 정도로 열정을 보였고, 정규방송이 정해지자 파일럿에서 1승도 못하고 전패를 기록했던 모델팀 FC구척장신은 절치부심해 누가 시키지도 않은 훈련에 매진했다. 파일럿에서 승승장구하며 절대강자로 떠올랐던 FC불나방(<불타는 청춘> 멤버들로 구성)에 결승에서 일방적으로 진 FC개벤져스는 복수전을 꿈꾸며 열정을 불태웠다. 이런 열정들이 모여 진심을 만들었다. 정규 프로그램으로 돌아온 <골 때리는 그녀들>은 그래서 예능이라기보다는 이들의 진심이 담긴 축구 한 판의 묘미를 제대로 담아내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끌었다. 

 

이게 뭐라고... 목숨 걸고 뛰는 출연자들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집중!”을 서로 외치고, 날아오는 축구공을 머리로 받고, 가슴으로 트래핑하며 패스하고 슈팅을 날리는 그 모습들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FC개벤져스, FC불나방, FC국대패밀리, FC월드클라쓰, FC구척장신, FC액셔니스타의 감독을 각각 맡은 황선홍, 이천수, 김병지, 최진철, 최용수, 이영표 역시 자세가 달라졌다. 처음에는 예능을 한다 생각했지만, 차츰 감독들 간에도 승부욕이 피어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팀원들이 너무나 승리를 갈망하는 모습이 절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패배한 후 그 아쉬움에 쏟아내는 팀원들의 눈물은 감독들의 각오로 이어졌고 그래서 더 열정적으로 축구를 가르쳐주면서 진짜 팀으로서의 끈끈함과 공동의 목표 같은 게 세워졌다. 

 

물론 축구 자체가 낯설었던 이들이 이런 단기간의 훈련으로 엄청난 기량을 보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기량과 상관없이 보이는 이들의 승부욕과 골이 들어갔을 때의 환희와 골을 먹었을 때의 아쉬움은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 게다가 절대강자인 FC불나방과 이 팀을 이끄는 ‘절대자’ 박선영의 존재는, 다른 팀들과의 팽팽한 대결구도를 만들면서 경기를 더욱 쫀쫀하게 해줬다. 또한 파일럿 당시 한 번도 이기지 못한 FC구척장신의 절치부심 1승을 향한 혼신의 경기나, FC개벤져스의 FC불나방에 대한 리벤지 매치 역시 특별한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줬다. 매 회 경기 중심으로 대부분의 방송분량이 채워줬지만, 그것만으로도 몰입감이 생긴 이유였다. 

 

스포츠 예능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스포츠 예능이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 중 가장 큰 건 스포츠 자체가 더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흔히들 ‘각본 없는 드라마’라 부르는 스포츠는 그 경기가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그 결말을 알 수 없는데다, 엎치락뒤치락하는 변수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점에서 강력한 몰입감을 만들어낸다. 그러니 제 아무리 스포츠를 예능으로 가져와 재밌게 구성하려 해도 그 ‘각본 없는 드라마’의 극성을 이겨내긴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포츠 예능들은 확실히 달라졌다. 먼저 예능보다는 스포츠에 더 방점을 찍기 시작했다. KBS <씨름의 희열>은 물론 씨름 경기에 오디션 프로그램의 형식을 차용했지만, 그 목적은 예능적 재미가 아니라 씨름의 묘미를 좀 더 깊이 담아내기 위함이었다. 선수들의 장기를 먼저 알고 경기를 보고, 거기 들어간 기술을 여러 차례 슬로우모션으로 보여주며 설명을 더해주자 씨름은 프로그램 제목처럼 시청자들에게 희열을 주는 스포츠로 다가왔다. JTBC <뭉쳐야 찬다>는 처음에는 전직 스포츠 레전드들이 모여 하는 조기축구라는 예능적 설정으로 시작했지만, 뒤로 갈수록 경기 하나를 통째로 중계해 보여주는 스포츠 자체를 보여줬다. <골 때리는 그녀들>도 마찬가지다. 파일럿에서는 여자축구에 도전하는 출연자들의 예능적인 상황들을 보여줬지만 정규방송에서는 오롯이 축구 자체의 묘미와 여기에 진심인 출연자들에만 집중했다. 이러니 스포츠의 ‘각본 없는 드라마’는 예능이어서 가능한 다양한 편집들을 통해 훨씬 강화된 힘을 발휘하게 됐다. 전후반 각각 10분씩 뛰는 경기지만 <골 때리는 그녀들>의 축구가 박진감 있게 느껴지는 건 이런 예능적인 편집들을 통해 가능해졌다. 

 

<골 때리는 그녀들>은 축구를 잘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됐고, 그걸 보다보면 축구의 진짜 묘미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으로도 자리했다. 혼신을 불사른 경기에서 지고는 쓰러져 눈물 흘리는 선수들을 찾아와 감독이 “이게 바로 축구야”라고 말하는 대목은 그래서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만든다. 심지어 경기 룰조차 잘 몰라도 지는 건 싫고 이기고픈 욕망이 큰 선수들이 그 경험들을 통해 조금씩 성장해가는 과정은 우리가 스포츠 중계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스포츠의 진짜 맛이 아니던가. 

 

물론 여전히 부지불식간에 습관적으로 나오는 성차별적 멘트들이 눈에 거슬리는 면이 있지만, 이것 역시 이런 경험을 하지 못했던 이들에게서 의도치 않게 생기는 실수들일 게다. 그런 실수들을 조금씩 바꿔나가면서 여성과 스포츠를 다루는 예능 프로그램들의 성장 또한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여자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에 진심인 이 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 만들어낸 변화의 파괴력은 그래서 결코 작다 말할 수 없다. (글:매일신문, 사진:SBS)

예능의 성패를 가르는 진정성의 힘

 

한때는 마니아들의 전유물처럼 치부되던 소재들이 예능의 트렌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낚시, 골프, 게임, 밀리터리 등이 그것이다. 물론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않지만 ‘찐팬’들의 막강한 힘이 느껴지는 이들 소재 예능이 주목받는 이유는 뭘까.

도시어부3

<도시어부>, 낚시에 미친 자들의 세계

한 때 예능에서 낚시는 금기시되는 소재였다. 이유는 잠깐 잡히는 그 순간에 비해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들이는 노동에 비해 나오는 방송분량이 적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거 KBS <1박2일>이나 <남자의 자격>에서 낚시를 소재로 잡았을 때, 낚시 자체보다는 복불복이나 토크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최근 시즌3를 방영하고 있는 채널A <나만 믿고 따라와, 도시어부(이하 도시어부)>는 이런 금기를 보기 좋게 깨버렸다. 종편 채널로서 시즌1에 5.3%(닐슨 코리아)의 최고시청률을 냈고 지금껏 3%에서 4%대의 시청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시청률은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 프로그램의 진짜 강점은 화제성이다. 낚시에 진심인 이른바 ‘찐팬’들의 열렬한 지지 덕분이다. 

 

이렇게 된 건 <도시어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덕화, 이경규 같은 진짜 ‘낚시에 미친 자들’이 출연하고 있어서다. 다른 방송이었다면 한 자리에 앉아 40시간 동안 촬영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하지만 이 ‘낚시에 미친 자들’은 40시간을 꼬박 잠도 안자고 낚시를 하고도 더 하면 안 되냐는 말로 제작진들의 귀갓길을 가로막는다. 그만큼 낚시에 진심이라는 것이다. 출연자들이 이러니 ‘찐팬’들은 오죽할까. 가끔 게스트가 출연해 여느 예능에서 하듯 주저리주저리 토크를 늘어놓으면 찐팬들의 “낚시나 하라”는 얘기가 쏟아져 나온다. 이수근은 처음 늘상 하던 대로 토크를 하다 욕 많이 얻어먹었다고 털어놓는다. 이런 낚시에 미친 자들과 거기에 빠져든 시청자들의 끈끈한 관계가 <도시어부>라는 ‘노동 강도 최강’의 예능 프로그램을 성공시킨 이유다. 

 

마니아들의 세계가 예능의 트렌드로 떠오르는 이유

한때 예능의 금기였던 낚시 같은 마니아들의 세계는 최근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골프 예능은 단적인 사례다. TV조선 <골프왕>을 시작으로 JTBC <회원모집 세리머니 클럽>, SBS <골프 혈전 편 먹고 072>, tvN D <스타골프빅리그>, 티빙 <골신강림>, MBN <그랜파> 등 골프 예능은 갑자기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한때는 부자들의 스포츠처럼 여겨져 서민들의 예능에는 어울리지 않는 소재였었지만, 최근 들어 골프는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골프 클럽이 그만큼 늘어났고, 가격도 적당해졌다. 특히 골프는 이 종목에 미쳐 준프로급 수준의 기량을 가진 연예인들이 적지 않다. 그들 역시 골프에 진심이다. 그래서 이들이 필드에 나가 벌이는 대결과 성장의 이야기는 특별한 예능적 조미료를 치지 않고도 충분히 몰입감을 준다. 

 

채널A <강철부대>는 물론 ‘밀리터리 예능’이 스테디셀러의 소재였지만, 보다 마니아적인 접근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밀리터리 마니아들은 물론이고 슈팅게임 마니아들까지 팬층으로 끌어들이면서 프로그램은 큰 화제성을 불러일으키며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파일럿으로 방영되어 괜찮은 반응을 얻은 후 정규로 돌아와 더 주목받고 있는 <골 때리는 그녀들>도 지금껏 잘 다뤄지지 않았던 여자 축구를 소재로 했다. 중요한 건 여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예능이 아닌 축구 자체에 진심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파일럿에서의 전패 굴욕에 절치부심해 자발적으로 연습에 매진하고 다시 경기를 치른 모델팀이 보여준 투혼 같은 걸 보다보면 그것이 단지 예능이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된다. 발톱이 빠져도 승부욕을 드러내고, 모델 다리에 여기저기 멍든 자국들이라니. 이러니 찐팬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특히 ‘여자 축구’라는 소재 때문에 ‘여자’라는 지점을 너무 강조하거나, 혹은 ‘○○의 아내, ○○의 며느리’식으로 불렀던 파일럿에서의 문제점들을 모두 수용해 변화를 보여줬고, 남녀라는 성별과 상관없이 ‘축구’ 자체에 집중한 면이 이 프로그램이 시청자들에게 공감대를 얻은 이유가 됐다. 

 

시청률이 성공의 지표? 이제는 팬덤이 생겨야

과거 금기시되던 마니아 소재들이 예능에서 새로운 성공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고, 예능의 성공방정식이 ‘진심이냐 아니냐’로 구분되는 이 변화는 어떻게 생겨난 걸까. 그건 ‘취향’이 점점 중요해진 시대에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어도 열성적인 찐팬(마니아)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방송 프로그램 성공의 지표가 시청률이 아닌 ‘팬덤’으로 바뀌어가고 있다. 즉 시청률이 높다고 해도 찐팬들이 모여 팬덤이 형성되지 않으면 성공한 프로그램이라 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시청률이 낮아도 팬덤이 형성되면 나름 성공한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TV조선의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인 <미스터트롯>과 <미스트롯2>의 성패를 들 수 있다. 두 프로그램 모두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미스터트롯>과 달리 <미스트롯2>는 성공한 프로그램이라 일컬어지지 않는다. 그 차이는 팬덤에서 비롯된다. <미스터트롯>은 여기서 배출된 톱7이 모두 강력한 팬덤을 만들었지만 <미스트롯2>는 누가 우승을 차지했는지조차 모르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찐팬은 이제 글로벌 네트워크로 연결되면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됐다. 방탄소년단의 팬덤 아미는 단적인 사례다. 유튜브를 통해 모여든 찐팬들이 각국에서는 적어도 글로벌하게 연결되면서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했고, 그 힘들이 모여 방탄소년단의 현재를 만들었다. 이 성공사례는 그래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방시혁 대표가 참여했던 Mnet <I-LAND>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이 아이돌 오디션 프로그램은 최고시청률이 겨우 0.7%에 불과했지만 오디션 과정에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팬 커뮤니티 플랫폼인 위버스를 통해 글로벌 팬덤을 확보했다. 이 팬덤의 힘은 여기서 배출된 아이돌그룹 엔 하이픈이 반년만에 빌보드 앨범차트에 18위로 입성하는 결과로 드러났다. 어째서 팬덤 확보가 새로운 성공의 지표가 되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이미 취향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디지털 네트워크로 묶여진 취향에 진심인 이들은 더 이상 마니아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만일 글로벌로 묶인다면 글로벌 스타가 탄생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니 이 취향에 진심인 자들을 매료시키는 건 ‘진심으로 미친 자들’이다. 이들이 보여주는 진정성이야말로 예능의 성패로 자리하게 된 이유다.(글:시사저널, 사진:채널A)

‘악마판사’의 통쾌함과 불편함은 어디서 오나

악마판사

또 다른 다크히어로의 탄생이다.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는 대놓고 주인공에 ‘악마’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모범택시>, <빈센조>에 이어 <악마판사>까지. 도대체 다크히어로들은 어쩌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게 된 걸까.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판사 작품 맞아?

사실 <미스 함무라비>를 쓴 문유석 작가는 우리에게는 ‘판사’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건 그가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 전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책을 통해 전 부장판사였다는 사실이 대중들에게 각인된 바 있고, 무엇보다 <미스 함무라비>가 바로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다뤘다는 점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새로 쓴 tvN 토일드라마 <악마판사> 역시 판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실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만 적어도 <악마판사>를 기점으로 문유석은 ‘판사’보다는 ‘작가’라는 직함이 더 어울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은 법정의 현실을 담은 <미스 함무라비>와는 사뭇 다른, ‘가상의 디스토피아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전 국민이 참여하는 라이브 법정 쇼’를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판사로서의 현실 경험보다는 작가로서의 상상이 더 드러나는 작품이 바로 <악마판사>다. 

 

본래 작품의 판타지는 현실의 결핍에서 비롯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가상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거기에는 현실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라이브 법정 쇼’에 처음 서게 된 JU케미컬 회장 주일도(정재성)는 독성폐수를 무단 방출해 한 마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다. 우리네 현실에서도 이런 유사한 사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모티브가 됐던 91년에 있었던 낙동강 페놀 방류사건이나, 여전히 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외로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그렇다. 그런데 이런 사건들을 야기한 가해 책임자들은 거기에 합당한 처벌을 받았을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하지만 <악마판사>에서 라이브 법정 쇼를 통해 강요한(지성) 재판장은 주일도 회장에게 금고 235년이라는 충격적인 판결을 내놓는다. 또 두 번째로 열린 라이브 법정쇼에서 엄마가 법무부장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안하무인 갑질을 일삼아온 피고는 ‘태형(때리는 형벌)’ 30대를 선고하고 그 과정을 생중계한다. 현실에서는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을 가상의 국가와 라이브 법정쇼 같은 설정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잠시간의 ‘사이다’를 안기는 것. 

 

이런 이야기 구조는 SBS <모범택시>와도 유사하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PD이기도 했던 박준우 연출자는 그 프로그램이 다뤘던 실제 사건을 허구의 드라마 속으로 가져와 그 가해자들에게 ‘사적 복수’를 가하는 무지개 운수팀의 사이다 액션을 그린 바 있다. 여러모로 문유석 작가는 이제 현실의 문제를 좀 더 가상을 빌어 풀어보려는 작가적 욕망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인다. <악마판사>는 바로 그런 욕망의 소산이다. 

 

이 라이브 법정쇼가 겨냥하고 있는 것

<악마판사>는 그러나 라이브 법정쇼라는 ‘사이다 법 정의’의 이야기만을 담고 있지는 않다. 강요한(지성)이라는 주인공을 ‘악마판사’라 세우고 있는 데는 그가 과거 어떤 불행을 겪었고 그래서 절치부심 복수극을 펼쳐가고 있다는 걸 드러낸다. 버려진 아이로 대부호의 집에 입양되어 살아온 강요한을 그의 배다른 형인 강이삭(진영)이 살뜰히 챙겨줬지만, 10년 전 그 막대한 유산을 사회적 책임재단에 전액 기부하려던 중 발생한 의문의 성당 화재로 인해 형 부부가 모두 사망하게 된 것. 강요한은 형의 딸 엘리야(전채은)와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고 그 기부를 전면 취소했다. 당시 화재 현장에 있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그래서 마치 강요한이 그 화재를 일으키고 그 재산을 모두 강탈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 날 성당에 있던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아이인 엘리야를 밟으면서까지 탈출한 그런 비정한 인물들이었다. 그들 사회적 책임재단 인사들은 지금도 이 가상의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이 되어 있었다. 대통령 허중세(백현진), 법무부장관 차경희(장영남), 사회적 책임재단 이사장 서정학(정인겸), 민보그룹 회장, 사람미디어그룹 회장 등등.

 

결국 <악마판사>가 보여주고 있는 구도는 사회적 책임재단으로 불리며 마치 나라 걱정을 하는 이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사적 이익에만 혈안인 이들에 대한 강요한의 처절한 복수극이다. 아직 그 실상이 드러나진 않았지만, 당시 성당의 화재와 형인 강이삭의 전 재산 기부 같은 사안의 이면에는 아마도 보이지 않는 사회적 책임재단의 음모가 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강요한이 하는 ‘라이브 법정 쇼’는 그래서 전 국민이 보고 참여하는 라이브 쇼라는 방식을 통해 실제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사법 정의를 구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극을 겪은 가족을 위한 복수극이 펼쳐지는 곳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악마가 판을 치는 다크히어로 전성시대

<악마판사>는 제목에서 느껴지듯 선한 주인공이 아닌 다크히어로를 그리고 있다. 그 크기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넓은 집이지만 텅 비어 있어 어딘지 음습하고 쓸쓸한 대저택은 거기 살고 있는 강요한이라는 다크히어로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는 마치 <배트맨>의 브루스 웨인을 닮았다. 고풍스런 대저택에서 살지만 고독하고, 어딘가 과거의 아픈 상처를 숨긴 채 살아가는 어두운 인물. 그래서 드라마는 초반에 라이브 법정 쇼로 전 국민적인 사랑과 지지를 받는 강요한이라는 인물이 그 모습과는 다른 ‘악마적인 면모’가 있다는 걸 슬쩍 드러낸다. 그의 등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십자가 모양의 커다란 화상의 흔적은 ‘요한’이라는 그의 이름과 묘하게 어우러지면서, 십자가를 진 채 저들 악마의 불길 속으로 뛰어든 다크히어로의 아우라를 만든다. 결국 그가 악마가 되기로 한 건, 그래야만 저 악마보다 더 한 사회적 책임재단의 가면을 쓴 어둠의 카르텔과 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악마판사>에서 단박에 <모범택시>가 떠오르고, 그 어두운 인물의 면면에서 tvN <빈센조>가 떠오르는 건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다크히어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어서다. <모범택시>의 김도기(이제훈)는 부모가 모두 살해당하는 일을 겪었지만 정작 가해자에 대한 미온적인 사법 처리 과정을 겪으며 ‘사적 복수 대행’이라는 선택을 하는 인물이다. <빈센조>는 이탈리아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로서 “악은 악으로 처단한다”고 말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 어쩌다 지금 정의를 메시지로 담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선이 아닌 악을 선택하게 된 걸까. 그건 이 정도의 강력한 대응이 아니면 저들끼리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심지어 ‘성실하기까지 한’ 악을 대적할 수 없다는 공감대에서 비롯된 일이다. 다크히어로는 그래서 어설픈 착함이 아니라 프로페셔널한 악함으로 저들과 싸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러한 다크히어로 전성시대의 밑그림에 어른거리는 대중들의 정서는 사법행정에 대한 불신이다. 도저히 용서하기 어려운 범법자들이 돈과 권력의 힘으로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법 위에서 오히려 법을 이용하는 행태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봐왔지 않은가. 그래서 서민들의 ‘무전유죄 유전무죄’라는 외침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현실 속에서 다크히어로는 탄생한다. 그들이 주는 사법 정의가 물론 일시적인 통쾌함을 선사할 뿐일지라도 잠시간의 사이다일 뿐일 지라도 그 시원함을 맛보고 싶어진다. 물론 그 통쾌함 뒤에 남는 건 이런 식의 가상까지 동원해야 하는 현실이 주는 불편함이지만.(글:매일신문 사진:tvN)

‘전원일기2021’이 보여준 연기와 삶의 이중주

전원일기

오랜 세월 한 역할의 연기는 그 사람의 삶을 어떻게 바꿔 놓을까. MBC 창사 60주년 특집 <다큐플렉스-전원일기 2021> 4부작이 막을 내렸다. 4부작의 분량으로 무려 22년간 방영됐던 <전원일기>가 남긴 발자취와 소회를 모두 담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일 게다. 하지만 이 짧은(?) 다큐를 통해 연기와 삶이 어떻게 서로 영향을 미치는가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건, 짧아도 충분한 가치를 증명했다 평가할 만하다.

 

이 가치증명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전원일기>의 김회장, 최불암이다. 최불암은 <전원일기>를 현재로 소환해낸 이 다큐의 시작을 열었고 마무리를 장식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라는 무거운 초상을 짊어진 채 김회장이라는 인물을 삼십대 후반의 나이부터 맡아 22년을 살아왔고, 그 후로도 그는 그 김회장으로 산 22년의 삶의 영향과 동력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었다. 

 

이 다큐를 통해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그가 어느 날 갑자기 KBS <한국인의 밥상>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을 하기 시작한 것도 그 <전원일기>의 김회장이 여전히 그의 가슴 한 켠에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점 도시화가 이뤄지고, 모두가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오고 있는 그 와중에 김회장은 마치 마음의 부채라도 있는 듯 여전히 농촌의 삶을 찾아 나섰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간 시골의 아주머니들과 어르신들은 반갑게 그를 김회장으로 맞아주곤 했다. 

 

몇 차례의 고사 끝에 인터뷰를 하게 된 김혜자는 여전히 최불암을 ‘선생’이라고 지칭했다. “저는 최불암씨가 선생님 같았어요.... 나는 연극영화과가 아니라서 공부를 안했다고요. 그니까 그 연기 공부한 거를 말해주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고.. 그래서 둘이 있을 때는 참 많이 ‘또 해줘 봐’ 그러면 인제 얘기해줘요.” 

 

지금껏 그저 최불암 하면 당연히 ‘국민 아버지’나 혹은 ‘최불암 시리즈’ 그리고 간간이 개그맨들이 “파-”하는 웃음으로 흉내 내곤 했던 그런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전원일기 2021>은 최불암이 얼마나 노력하고 준비된 연기자였는가를 잘 보여줬다. 예를 들어 “파-”하는 그 웃음도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크게 하하 웃는 것보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웃는 게 김회장이라는 인물에 어울린다는 판단에서 나온 연기였다. 그 연기는 놀랍게도 습관이 되어 최불암의 웃음이 되어갔지만.

 

4회에서 금동이 역할을 했던 임호나 영남이 역할을 했던 남성진은 모두 <전원일기>의 연기가 당시의 분위기와는 달랐다고 증언했다. 즉 당시만 해도 다소 과장된, 신파적인 연기가 많았다는 것. 하지만 <전원일기>는 그런 과장을 뺀 자연스러운 ‘메소드 연기’를 배우들이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 중심에는 바로 최불암이 있었다. 남성진은 처음 녹화를 할 때 최불암이 세트에서 등을 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에 놀랐다고 했다. 그건 세트 촬영이라도 모두 화면을 향해 있는 게 너무 ‘연극적’이라는 판단에 최불암이 보인 자연스러운 연기였다는 것이었다. 

 

당시를 술회하며 최불암은 <전원일기> 녹화하러 방송국을 찾았을 때 경비실에서 그를 보고는 “오늘 <전원일기> 녹화시네요?”라고 했던 일화를 들려줬다. 멀리서 봐도 김회장이 오는 것 같아서 경비하시는 분이 딱 알아봤다고 했다는 것. 그만큼 그 인물에 대해 몰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일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이런 그의 노력은 <전원일기>를 함께 했던 배우들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을 미쳤다.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마더>에서 전혀 다른 엄마의 모습을 연기해낸 바 있다. 그런데 그 엄마의 또 다른 얼굴 또한 <전원일기> 안에 이미 있었던 걸 다시 꺼내 쓰는 것이 아니냐는 제작진의 말에 동의했다. 최불암이 도움을 주기도 했고, 또 그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주변 배우들에게는 귀감이 되었을 터였다. 그 영향이 결코 작지 않았을 게다. 

 

<전원일기>는 거기 출연했던 배우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 인물을 오래도록 연기하면서 그 인물의 모습과 습관과 생각 같은 것들이 삶으로 전이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김혜정이나 이계인 같은 배우는 그래서 지금도 전원으로 내려가 그 삶을 이어가고 있었고, 이 작품에서 티격태격 연인으로 만난 김지영과 남성진은 실제 부부가 되었다. 김수미는 이 작품을 통해 갖게 된 그 일용네 이미지가 지금은 하나의 캐릭터가 되어 예능 프로그램으로 그 맥을 이어가게 됐다. 물론 안타까운 일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응삼’이라는 인물로 더 기억된 박윤배는 실제로도 일찍 이혼해 혼자 사는 삶을 살다가 병으로 먼저 떠났다. 

 

흔히들 연기는 삶과 동떨어진 어떤 ‘역할극’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다른 인물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삶 속에서 끄집어내 보여주는 게 연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는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20년이 넘는 세월을 했다면 더더욱 그럴 게다. 최불암은 김회장이 금동이를 입양하는 그 연기를 한 후 시청자들이 상찬하는 바람에 진짜 ‘어린이 재단’ 후원 일을 앞장서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연기란 그런 것이다. “파-”하고 웃던 웃음이 진짜 자신의 웃음이 되기도 하는.

 

되돌려 말하면, 우리 모두는 어쩌면 각자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연기할 것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지도 모른다. 그 연기는 가짜가 아니라 진짜다. 그래서 그 선택이 그의 삶이 되기도 한다. <전원일기2021>은 놀랍게도 이러한 ‘연기의 실체’를 끄집어내 보여줬다. 20년 넘게 연기해온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조명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러난 의외의 결과다. <전원일기>를 재조명한 것이지만, 그 과정에서 배우들의 삶을 통해 연기가 그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에둘러 보여주게 된 것. 이것은 배우가 아닌 우리네 보통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됐다. 나는 어떤 연기를 선택했고 그걸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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