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원일기’ 신드롬에 담긴 대중들의 다양한 갈증들

 

때 아닌 <전원일기> 열풍이다. 여러 케이블 채널에서 다시금 <전원일기>를 방영하고 있고, OTT에서는 인기드라마 순위 톱10에 오르기도 했다. 2002년에 종영한 <전원일기>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대중들의 어떤 갈증들을 담고 있는 걸까. 

전원일기

<전원일기>를 소환시킨 매체 환경 변화

최근 MBC <다큐플렉스>는 MBC 60주년 특집으로 ‘전원일기 2021’ 4부작을 내놨다. 1980년부터 2002년까지 무려 23년 간 방영됐던 농촌드라마, <전원일기>. 이 드라마를 재조명한 ‘전원일기 2021’은 19년 전 종영하며 각자의 길로 돌아간 <전원일기> 가족들이 다시 하나둘 얼굴을 보이며 만남을 갖는 시간을 선보였다. 드라마의 중심축이었던 최불암, 김혜자를 위시해 고두심, 박순천, 김용건, 유인촌, 김수미, 김혜정, 박은수 같은 반가운 인물들이 당시의 <전원일기>를 회고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MBC 60주년 특집으로 <전원일기>를 현재로 소환해낸 걸까. 이것은 최근 이 19년 전 종영한 드라마에 대한 의외의 관심과 반응들이 일종의 ‘신드롬’을 만들고 있어서다. <전원일기>는 MBC ON, 엣지티비, 채널 유, KTV 등 7개 채널에서 내보내고 있는 인기 드라마이고, 최근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웨이브와 네이버 시리즈온 등에서는 인기드라마 톱10에 오를 정도로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이건 최근의 달라진 방송 시청 환경의 영향이 적지 않다. 즉 과거 ‘TV 시대’의 시청이란 방영시간대에 맞춰 ‘본방’을 보는 방식이었지만, ‘OTT 시대’의 시청은 원하는 방송을 원하는 시간에 선택해 보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 따라서 본방 시간대에 올라가는 ‘현재의 트렌디한 드라마’만이 아니라, 과거에 방영됐던 명작 드라마들을 ‘취향별’로 골라보는 시청자들이 늘어난 것이다. 

 

특히 연령대가 높은 시청자들은 <전원일기> 같은 향수와 추억이 묻어나는 드라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OTT를 통해 해외에서 들어오는 자극적인 장르물들이 우리네 드라마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런 장르물들은 과거의 드라마들처럼, ‘콩나물 다듬으며’ 편안하게 보기에는 쉽지 않다. 더 큰 몰입을 요구하는 이들 장르물들은 연령대가 높은 시청자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데다, 드라마의 이야기 자체가 어렵게 느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일찌감치 이들 시청자들은 케이블 채널 등을 통해 지나간 옛 드라마들을 보기 시작했다. <전원일기>만이 아니라 <야인시대>, <태조 왕건> 같은 드라마들을 연달아 방영해주는 케이블 채널의 소비층으로 부상한 것. 여기에 OTT처럼 아무 때나 다양한 옛 드라마들을 선택해 볼 수 있는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시청은 더 편리해졌다. <전원일기>가 2021년에 다시 현재로 소환된 배경에는 이런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그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시청 패턴이 깔려 있다. 

 

<전원일기>, 젊은 세대들까지 끌어들인 마력

그런데 놀라운 건 <전원일기>에 대한 열광이 기성세대만이 아닌 젊은 세대들에게도 생겨났다는 점이다. ‘부모와 함께 보다가 빠져 들었다’는 이들 젊은 세대들은 <전원일기>의 무엇에 매료된 걸까. 여기서 주목되는 건 <전원일기>가 가진 ‘뉴트로적 매력’이다. 

 

레트로는 기성세대들이 과거에 겪었던 경험에 대한 추억이나 회고지만, 뉴트로는 그 과거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세대들이 그 옛 경험을 ‘힙하게(새롭게)’ 느끼는 것이다. 즉 젊은 세대의 관점에서 보면 <전원일기>의 다소 거칠고 때론 희미하게까지 보이는 영상들은 ‘빈티지적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낡은 것이 아니라, ‘시간의 가치’가 얹어진 것으로 재해석되는 것. 

 

하지만 젊은 세대들이 <전원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이런 외형적인 면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은 없는 ‘농촌드라마’라는 장르가 가진 유니크함이 있고, 그 안에 담겨진 김회장(최불암)댁 가족들이나 일용이네 가족들이 겪는 서사의 특별함이 있어서다. 이미 농촌조차 ‘전원도시’가 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도시로 떠나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에서 ‘농촌의 이야기’는 겪어보지 않은 젊은 세대들에게는 그 자체가 새롭고 특별할 수 있다. 

 

그래서 젊은 세대들은 <전원일기>의 굉장하지는 않아도 소박하면서 훈훈한 이야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떤 힐링을 느낀다고 말한다. 마치 ‘불멍’, ‘물멍’ 같은 편안함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23년 간 방영된 이야기는 그 세월만큼 거기 등장한 가족들에 대한 유대감을 만들어주기 마련이다. 물론 <전원일기>를 보며 자라온 세대라면 그 드라마 속 가족들이 실제로 나이 들어가는 그 과정까지 공유함으로써 더 큰 세대적 유대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따뜻한 가족애가 주는 편안함은 요즘처럼 핵가족화되고 나아가 나홀로 가구들이 급증하고 있는 세태에 오히려 더욱 강력한 유인으로 작용한다. 

 

대중들이 농촌, 자연에 갈증을 느낀다는 증거

<전원일기>가 2002년 종영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미 바뀌고 있는 현실 때문이었다. 도시화로 인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가는 이들이 급증했고, 농촌조차 전원도시로 변모했다. 당연히 라이프스타일도 바뀌었다. 도시의 세련된 삶이 대중들이 보고픈 것들이었고, 그래서 당대에 드라마들은 이런 삶을 담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를 경쟁적으로 선보였다. 이 때 등장했던 트렌디 드라마들은 지금의 한류 드라마가 뻗어나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가치관도 바뀌기 시작했다. 가부장적 사고관이 묻어날 수밖에 없는 <전원일기>의 가족 이야기들은, 물론 당대의 농촌의 삶을 리얼하게 담았던 것뿐이지만, 점점 개인이 중요해지는 도시적 삶의 방식 앞에 어딘지 구시대적인 느낌을 만들었다. 물론 <전원일기>도 이런 변해가는 세태를 반영해 변화를 추구하기도 했다. 전형적인 농촌 가옥의 세트는 전원도시의 개량된 가옥으로 바뀌었고, 젊은 세대들의 이야기도 소재로 활용되었다. 하지만 그런 변화가 <전원일기> 특유의 정서를 계속 이어가게 해주지는 못했다. 너무 오래도록 출연했던 배우들마저 이제는 하차를 원하게 되자 결국 <전원일기>는 종영했다. 

 

그렇다면 종영 후 19년이 지난 현재는 어떨까. 그런 시대의 변화 때문에 종영을 선택했지만 지금 다시 <전원일기>가 주목받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최근 몇 년 간 고도 정보화 사회로의 진입과, 급격한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오히려 거꾸로 자연과 농촌에 대한 갈증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현 대중들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전원일기> 종영 이후 KBS가 공영방송으로서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로 그 명맥을 이었지만 이마저 종영된 후 농촌드라마(전원드라마에 가까웠다)는 아예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드라마가 농촌을 떠나버린 이 시기에 거의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이 농촌과 자연을 찾아 떠났고 지금도 떠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박2일>부터 시작해 <삼시세끼> 같은 나영석표 예능 프로그램이 시골과 자연을 찾아 떠났고,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은 종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세상이 복잡해지고, 도시화될수록 대중들의 농촌과 자연에 대한 갈증은 그만큼 커졌다는 반증이다. 

 

<전원일기>가 지금 대중들의 마음속으로 들어오게 된 건, 갈증은 커졌지만 이를 채워줄 농촌드라마가 부재한 현실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를 만든다고 해서 그 갈증이 채워질 것 같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 달라진 농촌의 현실이 더 이상 저 <전원일기> 속 농촌 풍경이 주던 편안함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전원일기>는 그렇게 더 이상 우리가 볼 수 없는 ‘사라진 농촌’을 담은 작품으로서 더더욱 아우라를 드러낼 수밖에 없게 됐다. 

 

자극적인 19금 콘텐츠의 시대, <전원일기>의 가치

“딴 드라마들은 그 갈등의 잔해들이 있잖아. 욕하고 막 미워하고 이런 걸 아주 자세히 보여줘요. 그럼 사람들이 재밌어가지고 어머나 이렇게 욕하면서 봐요. 근데 이 드라마는요, 엄마, 아버지 그 다음에 또 험한 말하는 일용엄마까지요. 그 (갈등의) 잔해들을 주워요.” ‘전원일기 2021’에 출연한 김혜자는 인터뷰에서 <전원일기>가 왜 다른 드라마들과는 다른가를 ‘갈등의 잔해’라는 표현으로 설명했다. 이런 설명은 그가 <전원일기>를 ‘농촌드라마’가 아닌 ‘휴먼드라마’라고 강변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갈등이 있지만 그래도 애써 화해하는 모습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건, 이 작품이 얼마나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드라마의 이런 ‘휴머니즘’은 심지어 배우들의 삶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쳤다. ‘전원일기 2021’에서 최불암은 드라마 속에서 금동이를 입양하는 김회장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그 후로 지금껏 어린이재단을 후원하는 일을 하게 됐다고 했다. 즉 그건 드라마 속 김회장의 이야기였을 뿐이지만, 자신을 칭찬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실제로 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작품이 가진 휴머니즘이 시청자들을 움직였고, 그 시청자들의 반응이 배우들을 움직여 현실의 온도를 조금은 높여주는 선순환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 같은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깔고 있는 <전원일기>는 그래서 현재 점점 자극적으로 치닫고 있는 드라마들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OTT가 열리면서 해외의 자극적인 19금 드라마들이 쏟아져 들어왔고, 우리네 드라마도 이에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중이다. 물론 19금 드라마가 그 자극의 수위로 문제가 있다 말할 수는 없지만, 주제의식과 상관없이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 치닫는 이른바 ‘막장드라마’들은 <전원일기>와는 확실한 비교점을 만든다. 사람 하나 죽이는 건 예사로 일어나는 이들 막장드라마들 속에서, ‘갈등의 잔해를 줍는’ <전원일기>가 가진 가치가 새롭게 드러난다. 자극의 끝단을 담는 드라마들 속에서 <전원일기>가 오히려 도드라져 보이는 이유다. 

 

농촌마저 도시화를 꿈꾸는 요즘, 우리에게 원형적인 따뜻함으로 기억되어 있던 ‘고향’의 풍경들은 갈수록 소외되고 사라져간다. 그래서 그 사라져가는 정경에 대한 갈증이 커지듯이 <전원일기>는 2021년에 새로운 가치로 우리에게 재조명되고 있다. 세상은 변화하고 그 삶의 방식 또한 변해가지만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 건(않아야 한다 여기는 건) 바로 우리네 인간이다. 그래서 <전원일기>를 통해 우리가 애써 찾고 있는 건 ‘인간의 온기’가 아닐까 싶다. (글:시사저널, 사진:MBC)

‘슬의생2’, 이들의 행복은 돈, 명예가 아닌 커피 한 잔, 케이크

 

슬기로운 의사생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적어도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2>의 이른바 99즈(99학번 의대동기 5인방)에게 ‘소확행’은 그런 뜻이 아니다. ‘소박해서 오히려 확실한 행복’이다. 율제병원을 사실상 이끄는 에이스들이고, 그래서 환자들과 병원 사람들의 존경은 물론이고 마음만 먹으면 돈도 명예도 모두 거머쥘 수 있지만, 이들은 그런 데는 관심이 없다. 

 

대신 이들이 관심을 갖고 행복을 느끼는 건, 힘든 수술 후 맛보는 달콤한 케이크 한 조각이나, 퇴근길에 마시는 커피 한 잔, 다 함께 모여 간식으로 즐기는 라면 같은 것들이다. 그건 이들이 하는 일에 비해 너무 소박한 보상(?)처럼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율제병원에서 이들은 누군가의 생사가 달린 수술을 해야 하고, 때론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 앞에 절망하기도 한다. 이 정도로 힘겨운 일이라면 그 이상의 보상을 원할 만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돈이나 명예, 권력 같은 보상이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주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VIP 환자를 받는 일에 채송화(전미도)가 열심인 이유는 거기서 나오는 수익이 이른바 키다리 아저씨를 통해 환우 돕기 기부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명인이거나 병원의 VIP 환자를 수술하는 일은 그만큼 부담될 수밖에 없고, 때론 다소 무례한 일들도 겪기 마련이다. 하지만 채송화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어려운 뇌수술을 성공시킨 한국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라는 타이틀로 독일방송국에서 요청한 취재를 거부한다. 이유는 함께 수술했던 후배 의사들이 시간이 나지 않아서다. 그는 그 수술을 자기 혼자 한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 하는 인터뷰를 거절한 것. 

 

유명해질 수 있고 또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일 수 있지만 채송화는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대신 그 어려운 수술을 끝내고 나서 그가 받은 보상은 함께 수술에 들어갔던 허선빈(하윤경) 레지던트가 갖다 준 케이크 한 조각의 달콤함이다. 그 달콤함 행복이 어찌 케이크의 맛뿐이겠나. 무엇보다 자신을 진심으로 챙겨주는 후배들의 소박하지만 따뜻한 마음이 주는 행복감일 테다. 

 

어렵게 아이를 갖게 됐지만 정상적인 분만이 어려운 산모를 끝까지 도우려 했던 양석형(김대명)은 끝내 아이를 잃게 된 산모에게 위로의 문자를 보냈다. ‘산과교과서의 첫 장에 이런 글이 있네요. 때때로 불행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생길 수 있다.’라는 문자 메시지에 산모는 꽃다발과 함께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에는 양석형에 대해 산모가 전하는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교수님 미안해하지 마세요. 교수님 덕분에 아기 심장소리도 듣고 태동도 처음 느껴봤습니다.” 의사로서 쉽지 않은 선택을 해야 하고, 그것이 때론 원치 않는 결과로 돌아와 힘겹게 만들지만, 그걸 풀어주는 건 대단한 보상이 아니라 환자와의 편지 한 통이라는 걸 이 에피소드는 보여준다. 

 

수술 후 남은 실밥을 빼는 걸 두려워해 계속 울고 보채는 아이를 끝까지 웃으며 기다려주는 ‘생불’ 안정원(유연석)이나, 간 이식 수술을 두 딸의 간 기증으로 했지만 여전히 술을 마시는 환자에게 “자식이 간 기증 해주는 것 당연한 일 아니다”라며 그건 “목숨을 거는 일‘이라 강변하는 이익준(조정석) 그리고 어려운 수술을 혹여나 실패할까 노심초사하며 결국은 성공해내는 김준완(정경호)도 그 힘겨운 상황들을 보상해주는 건 대단한 게 아니다. 오랜 친구들과의 장난이나 농담, 사랑하는 사람과의 한 끼 식사나 전화 한 통, 그리고 다 함께 모여 노래를 부르는 그런 소박한 일들이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보상이다. 

 

많은 의학드라마들이 생명을 위해 싸우는 의사의 영웅담을 담거나, 혹은 엇나간 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벌어지는 조직 내 암투를 담기도 하지만, 결국 의사라는 직업의 본질은 환자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다. 그래서 많은 의사들은 그 생명을 들여다보며 그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을까. 그러니 <슬기로운 의사생활2>에서 99즈가 행복을 느끼는 소박한 보상들은 돈이나 권력과는 다른 따뜻한 인간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우리에게 잔잔한 위로를 주는 ‘슬기로운 삶’이다. 의사들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사진:tvN)

주인공을 ‘멸망’이란 추상으로 바꿔 놓으니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는 벌써 제목부터 특이하다. 드라마 내용과 상관없이 제목만 보면, ‘멸망’이라는 의인화된 표현은 이 집 주인이 맞이한 비극을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이 ‘멸망’이 들어온 집 주인 탁동경(박보영)은 시쳇말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다. 사귀던 남자친구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고, 머릿속에는 100일 후 터져버릴 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선고를 받는다. 이 정도면 술에 취해 누구나 한 번쯤 이렇게 외쳐볼만 하다. “세상 다 망해라! 멸망해버려!” 그런데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지점부터 멜로를 시작한다. 그것도 탁동경이 외쳤던 그 ‘멸망(서인국)’이 잘생긴 남자 캐릭터로 새벽에 그 집 문 앞에 나타나는 것으로. 

어느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설정은 흥미롭다. ‘멸망’이라는 추상명사를 초현실적 존재로 캐릭터화 했고, 마치 신처럼 그 존재의 역할까지 부여했으니 말이다. 이 멸망은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유’라는 존재의 역할이 부여됐다. 그래서 그가 지나는 곳에서는 씽크홀이 생기고, 달리던 버스의 타이어가 펑크 난다. 물론 사람도 죽는다. 그러니 이 멸망이라는 초현실적 존재의 삶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뭐든 가까이 하면 사라지거나 불행해지는데 어찌 행복을 생각할 수 있을까. 그런 존재가 되면 차라리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고 나아가 인간들과 거리를 두는 게 인지상정일 게다. 

 

그런데 이 멸망이라는 초현실적 존재는 탁동경과 계약을 맺는다. 죽기 직전에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고 하는 조건으로 계약한 100일 간은 아프지 않게 해주고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다만 계약을 어기면 그 순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조건이 붙는다. 

물론 ‘멸망’이라는 초현실적 존재가 등장하지만 <멸망>이 겉으로 드러내고 있는 장르적 틀은 멜로다. 그래서 멸망과 탁동경은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공식을 거의 따라간다. 어쩌다 ‘동거’를 하게 되고, 물론 ‘동거 계약서’도 쓴다. 함께 살아가며 만들어지는 밀고 당기는 관계 역시 빠지지 않는다. 멸망은 탁동경을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트라우마 때문에 횡단보도를 건너지 못하는 탁동경의 손을 잡고 함께 건너 주기도 하고, 초현실적 존재로서 탁동경이 그토록 원하는 판타지(이를 테면 과거로 잠깐 시간을 되돌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그 시절을 경험하게 해주거나, 온 가족이 함께 놀이공원에 갔던 그 시간 속으로 옮겨놓는 식의)를 이뤄주기도 한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는 비정함과 그와는 정반대로 탁동경을 달달하게 만드는 판타지가 오가며 멜로의 밀당이 생겨난다. 그리고 이미 모든 시청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만 같던 멸망이 탁동경에게 연민을 느끼다 사랑하게 된다. 

 

너무나 전형적인 멜로의 틀은 시청자들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멸망’이라는 초현실적 존재라는 사실은 이 익숙한 틀을 낯설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래서 멸망과 사랑에 빠지는 이 탁동경의 판타지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인가가 궁금해진다. 판타지는 현실의 결핍이나 부재를 채워주는 방식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희망도 아니고 절망도 아닌 멸망과 사랑에 빠지는 판타지는 현실의 어떤 결핍을 채워주기 위함일까 궁금해질밖에.

 

바로 이 부분은 그래서 이 전형적인 멜로가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어느 날 도무지 이길 수 없는 멸망이 당신을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망하게 생겼으니 세상도 망해야 한다고 저주를 퍼부을 것인가, 아니면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멸망을 힘겹지만 끌어안을 것인가. 탁동경은 세상의 멸망을 요구하는 저주 대신 멸망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후자를 선택한다. 그러자 이제 멸망이 고민에 빠진다. 그 역시 탁동경을 사랑하게 되지만 저 계약 조건에 따라 자신은 죽게 됐으니 말이다. 이 상황은 ‘운명은 거스르려 하면 결코 바뀌지 않지만, 받아들이려 할 때 그제서야 변화하게 된다’는 다소 철학적인 해석이 가능해진다. 물론 이런 해석은 해석일 뿐이다. 그저 밀고 당기는 전형적인 멜로로 보일 수 있고 그것 역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히 미덕이 있다, 그건 적어도 멸망이라는 초현실적 존재가 그 흔한 멜로의 현대판 왕자들보다는 낫다는 점이다.(글:PD저널,사진:tvN)

‘슬기로운 의사생활2’, 한국형 시즌제 드라마의 이정표 세울까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시즌2로 돌아왔다. 사실 시즌1과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여전히 병원을 둘러싼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하지만 이 변함없음이 이 시즌제 드라마의 최대 강점으로 부각됐다. 무엇이 이런 결과로 이어진 걸까.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그대로... 그래서 더 빠져드는

작년 3월 시작했던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그 첫 회를 6.3%(닐슨 코리아)의 시청률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후로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가 12회 14.1%의 최고시청률로 시즌1을 마무리 지었다. 엄청난 상승곡선을 그린 건 아니지만, 아주 천천히 하지만 조금씩 시청자들을 끌어들이며 마음을 사로잡았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요즘 보기 드물 정도로 훈훈하고 잔잔한 감동과 설렘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던 드라마였다. 특히 피가 흐르고 사람의 생사가 오가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자극적 상황들을 그리곤 하던 의학드라마의 흐름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그렸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의학드라마라기보다는(그렇다고 전문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휴먼드라마이자 멜로드라마처럼 시청자들에게 다가온 면이 있었다. 

 

매주 2회가 아닌 1회 방송을 한 점과, 보통의 미니시리즈가 16부작으로 구성되는 데 반해 12회로 마무리 지은 점도 남달랐다. 매주 2회의 16부작 미니시리즈는 그 편성의 특성만으로도 벌써 공격적이다. 전쟁을 치르듯 시간에 쫓기는 촬영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2회 연속이 갖는 스피드와 자극으로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신원호 PD와 이우정 작가는 이런 기존의 관행을 거부했다. 대신 한 회 한 회 따뜻한 에피소드들을 정성껏 채워 넣었고, 사랑스런 캐릭터들의 매력을 자극 대신 시청자들에게 어필했다. 결과는 고무적일 정도로 대성공이다. 아예 처음부터 시즌제를 겨냥하고 만들었고, 그래서 시즌1에 모든 걸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가도 황소걸음으로 가는 방식을 택했다. 시청자들은 시즌1이 끝나자 바로 시즌2를 기다렸다. 

 

본래는 연말에 시즌2가 계획되었지만 코로나19의 확산세가 거세지면서 촬영과 방영이 연기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6월 시즌2 첫 회를 내놨다. 기다림이 만든 효과일까. 첫 회 시청률이 10%로 시즌1의 첫 회부터 훌쩍 뛰었고, 시청자들의 여지없는 호평이 이어졌다. 그런데 그 호평의 이유가 흥미롭다. 보통 시즌제 드라마라고 하면 시즌이 거듭되면서 색다른 반전이 이어지거나 혹은 자극이 더해지는 방식을 취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시즌1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따뜻한 의사들과 환자들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고, 코믹한 상황들이 주는 웃음과 더불어 한 회마다 병원 동기 5인방이 모여 노래를 연주하고 부르는 틀도 달라진 게 없었다. 게다가 시즌1에서 만들어진 멜로 라인은 더욱 깊어져 시청자들을 애틋하게 만들었다. 달라진 게 없어서 더 빠져든다는 이례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자극 콘텐츠 시대, <슬기로운 의사생활2>는 뭐가 달랐나

최근 들어 시즌제 드라마는 이제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는 않게 됐다. 최근에 시즌제로 돌아온 드라마들만 봐도 이런 변화는 쉽게 읽혀진다. 시즌3로 돌아온 SBS <펜트하우스>는 물론이고 시즌2로 돌아온 TV조선 <결혼작사 이혼작곡> 그리고 무려 시즌4로 돌아온 tvN <보이스>가 그 사례들이다. 그런데 이들 시즌제 드라마들을 보면 시즌을 거듭하면서 얼마나 자극의 강도가 높아져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펜트하우스3>는 시즌2에 감옥에 갔던 헤라팰리스 사람들이 감옥에서 겪는 갖가지 폭력과 기행들로 시작하고, 심지어 감옥에 수감 중이던 주단태(엄기준)가 감옥 밖으로 나와 로건 리(박은석)를 폭탄으로 살해한다. 그런데 갑자기 로건 리의 형이라고 하는 알렉스(박은석)가 또 등장한다. 이미 시즌2에서도 시즌1에 죽었다고 끝을 맺었던 심수련(이지아)이 사실은 쌍둥이 나애교였다는 식으로 처리된 바 있어, 로건 리 역시 알렉스라는 인물로 다시 부활하는 이 대목에서 시청자들은 반전의 쾌감이 아닌 실소를 터트렸다. 그런데 이런 무리수가 나오게 된 건 다름 아닌 시즌제에서 더 강한 이야기를 그려나가야 한다는 자극의 강박 때문이다. 

 

<결혼작사 이혼작곡2>는 시즌1이 그렸던 ‘내로남불’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 역시 어딘가 좀 더 센 이야기에 대한 강박이 엿보인다. 그 단적인 사례가 시즌1에서 사망한 신기림(노주현) 원장이 귀신이 되어 자신의 집에 출몰하는 장면이다. 물론 임성한 작가가 워낙 좋아하는 무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껏 로맨스와 불륜 사이를 오가던 이야기에 갑작스런 귀신의 등장은 어딘가 ‘자극을 위한 자극’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보이스>는 본래 OCN 시리즈로 나왔을 때부터 거의 ‘공포’ 수준에 가까운 스릴러를 무기로 내세운 장르물이었다. 사이코패스가 무고한 이들을 뒤쫓아 살해하는 장면들은 그래서 마치 공포영화 속 괴물에게 쫓기는 상황들을 연상케 하곤 했다. 시즌4는 서커스맨이라 불리는 일당이 등장해 일가족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드라마들은 이제 19금이 익숙해졌다. 피가 튀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심지어 다시 부활해 복수를 하는 자극이 드라마 속에서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게 잘못된 건 아니지만, 이런 드라마들의 범람은 당연히 반대급부를 불러온다. <슬기로운 의사생활2>나 SBS <라켓소년단> 같은 드라마들이 최근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은 건 그래서다. 자극과는 정반대로 따뜻한 힐링과 인간애가 느껴지는 드라마에 마음이 가게 된 것이다. 

 

애초 기획대로 시즌제 드라마의 이정표 세울까

본래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해외의 <프렌즈> 같은 시즌제 드라마를 목표로 기획된 작품이다. 신원호 PD는 지난해 시즌1의 제작발표회에서 <슬기로운 의사생활>이 “한국판 <프렌즈>가 되길 원한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그는 “애초에 캐스팅을 하면서 배우들에게 시즌3까지는 가지 않을까 하고 얘기했었다”고 했다. 그리고 시즌2의 시작을 보니 이 말이 그냥 내놓은 허언이 아니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미 시즌1에 매력을 전했던 인물들은 더 선명해졌고, 관계들은 깊어지면서 변주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게다가 의학드라마로서 빼놓을 수 없는 환자들과 의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도 여전했다.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화수분처럼 피어나 서로 관계를 맺어가고, 매 회 병원에서 벌어지는 소박해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은 에피소드들이 촘촘히 구성되는 방식은 시즌3가 아니라 더 오래 지속돼도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구조다.

 

게다가 매주 1회 방영되는 12부작 시즌제라는 새로운 드라마 편성의 틀은 어쩌면 향후 우리네 시즌제 드라마의 좋은 이정표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보다 완성도를 높이는 방식인데다 모든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보다 행복한 노동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를 갖게 되는 건 신원호 PD가 <응답하라> 시리즈로 우리네 드라마 제작방식에 일대 전환을 불러 일으켰던 전적이 있어서다. 우리네 드라마 제작이라고 하면 대부분 작가를 맨 꼭대기로 세우고 그 밑으로 PD와 배우, 스텝들이 서는 수직적 위계구조로 이뤄져 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예능 방식으로 집단 창작을 시도하면서 신원호 PD는 훨씬 수평적 협업을 통한 드라마 제작이라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내놨다. 지금은 이러한 협업 방식이 드라마 제작의 새로운 시스템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제 신원호 PD는 <슬기로운 의사생활>로 드라마 편성 방식의 새로운 길을 열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적인 제작방식의 고민은 고스란히 따뜻한 인간 냄새가 나는 드라마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글:매일신문,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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