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멸망’과 ‘간동거’의 평행이론

 

로맨틱 코미디의 남녀 주인공은 당대의 대중들이 가진 욕망을 대변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최근 방영되고 있는 tvN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와 <간 떨어지는 동거>는 유사한 지점이 있다. 초현실적 존재와의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고 있어서다.

어느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이젠 ‘멸망’과 밀당하는 판타지 멜로의 시대

사귀던 남자가 알고 보니 유부남이었고, 뇌종양까지 발견되어 100일 시한부 판정을 받은 탁동경(박보영)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외친다. “세상 다 망해라! 다 멸망해버려!” 그런데 그 날 새벽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보니 웬 잘 생긴 남자가 서있다. 그는 불러서 왔다며 자신을 ‘멸망’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tvN 월화드라마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이하 멸망)>는 멸망(서인국)과 탁동경의 밀당 판타지 멜로가 시작된다. 

 

사실 초현실적인 존재와의 사랑이야기는 완전히 색다른 건 아니다. 이미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를 통해 우리는 도깨비 김신(공유)은 물론이고 저승사자(이동욱)의 매력에 푹 빠져본 경험이 있다. <멸망>은 이 작품을 쓴 김은숙 작가의 보조작가였던 임메아리 작가가 쓴 작품이라는 점에서 어딘가 <도깨비>를 닮았다. 잘 생긴 초현실적인 존재의 갑작스런 등장과 그와 얽히는 판타지 멜로 그리고 과거사의 비극까지, <멸망>의 세계관은 유사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건 ‘도깨비’가 초현실적인 존재이긴 해도 최소한 설화 속에 등장하는 어떤 형상이 있는 반면, ‘멸망’은 말 그대로 추상이기 때문이다. 그 추상적 관념을 그려낸 실재 인물과 만나고 사랑하고 아파하며 아마도 헤어질 그 과정들은, 그래서 탁동경이라는 절망에 빠진 인물이 그 절망(아마도 멸망 같은)을 어떻게 수용하고 받아들이며 극복하는가의 과정처럼 그려지는 면이 있다. 예컨대 이 드라마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멸망이 당신의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탁동경은 그 멸망이라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걸 선택한다.

 

바로 이런 ‘추상’과의 판타지 멜로가 만들어내는 철학적인 세계관은 그래서 이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를 차별적으로 보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사실 이러한 세계관을 빼놓고 보면 <멸망>은 지극히 평범한 판타지 로맨틱 코미디다. 함께 동거를 하고 계약서를 쓰고 밀고 당기는 관계를 보이다가 사랑하게 되는 드라마. 하지만 탁동경이 사랑하게 되는 존재가 다름 아닌 ‘모든 사라지는 것들의 이유’인 멸망이라는 사실은 이 평이한 로맨틱 코미디에 무게감을 만들고 나아가 운명적인 비극의 향기까지 드리운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호불호가 갈릴 수밖에 없다. 즉 그 추상적 존재와의 관계를 다양한 의미로 해석하려는 시청자들에게 이 이야기를 흥미를 주지만, 그것이 너무 복잡하거나 낯설게 느껴지는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뻔하고 틀에 박힌 멜로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한 가지 지평만은 넓힌 공적이 있다. 그건 이제 멜로가 ‘멸망’ 같은 추상적 존재와의 밀당 정도는 다뤄야 새롭게 느껴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점에서다. 

간 떨어지는 동거

‘멸망’과 다른 듯 닮은 ‘간동거’의 판타지 멜로

tvN 수목드라마 <간 떨어지는 동거>는 그 이야기의 소재를 구미호 설화에서 가져왔다.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최근 <구미호뎐>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재해석과 진화를 거듭해온 설화의 주인공이다. <간 떨어지는 동거>가 특이한 건 신우여(장기용)라는 구미호가 무려 999살을 산 존재라는 점이다. 고려 현종 때 태어난 이 인물은 그래서 조선시대를 거쳐 구한말을 지나 현재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어딘가 <별에서 온 그대>의 외계인 도민준(김수현)을 닮았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골동품들이 가득 채워진 집의 풍경이 그렇고, 남다른 능력(도술)을 가진 존재라는 점이 그렇다. <간 떨어지는 동거>의 구미호 신우여는 그 긴 세월을 살며 인간에게는 정을 주지 못하는 ‘어르신’이지만, 어쩌다 우연히 그의 구슬을 삼키게 된 이담(혜리)을 그는 조금씩 마음에 담기 시작한다. 구슬을 빼내는 건 간단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담의 기억이 모두 지워지고 그렇다고 그대로 놔두면 구슬에 정기를 빼앗겨 이담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신우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멸망>과 <간 떨어지는 동거>는 언뜻 보기에는 확연히 다른 작품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비슷한 요소들이 적지 않다. 즉 멸망이나 구미호 같은 초현실적 존재가 등장하고, 그와의 밀당 로맨틱 코미디를 그리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며, 이들은 결국 동거를 하게 되고 함께 사는 동안의 계약서를 쓴다는 점도 유사하다. 또한 이 멜로가 순간순간을 웃음으로 채워 넣는 코미디라는 장르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점과, 쉽게 이뤄질 수 없는 비극을 담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인간과 초현실적인 존재 간의 사랑이니 어찌 쉽게 이뤄질 것인가. 

 

그런데 이렇게 유사한 지점들이 많은 건, 이 두 드라마가 전형적인 ‘청춘 로맨틱 코미디’의 법칙들을 따라가고 있어서다. 즉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그대로 두 작품이 모두 쓰고 있지만, 거기에 ‘멸망’이나 ‘구미호’ 같은 초현실적 존재를 더함으로서 색다른 관전 포인트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멜로라는 장르의 안간힘이 느껴지는 이유

우리네 드라마에서 한때 멜로는 중심적인 장르였다. 그것은 최근 등장한 장르 드라마들보다 훨씬 더 ‘맨 파워’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장르가 바로 멜로이기 때문이다. 액션이나 화려한 CG 혹은 판타지적 세계를 세트나 의상 등을 통해 구현해내곤 해야 하는 장르드라마들은 더 큰 제작규모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상대적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드라마들은 잘 만든 대본과 연기자들의 감정 연기 등으로 가성비 높은 몰입감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남녀 간의 사랑을 담는 멜로만큼 본능적인 소재도 없다. 그래서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기까지 트렌디 멜로 드라마들은 우리네 드라마를 대표하는 장르였다. 2002년 만들어졌던 <겨울연가>가 일본에서 첫 한류의 불씨를 지폈던 것도 그 동력은 바로 멜로였다. 

 

하지만 이런 흐름은 그 후 20년 간 급격히 변화했다. 너무 많이 나온 멜로드라마들은 이제 시청자들이 그 공식을 꿰고 있을 만큼 익숙한 문법이 되어버렸고, 2010년대까지도 그토록 쏟아져 나온 신데렐라 판타지의 멜로드라마들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 대중들의 ‘성인지 감수성’ 때문에 변화를 요구했다. 김은숙 작가가 2000년대 초반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연인> 3부작으로 멜로 장인에 등극하게 된 건 다름 아닌 신데렐라 스토리 덕분이었지만, 이 작가는 2016년부터 <태양의 후예>,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의 대작 3부작을 통해 변신했다. 장르와 더해진 멜로의 퓨전을 성공적으로 실험한 것. 

 

<멸망>이나 <간 떨어지는 동거> 같은 초현실적 존재를 등장시켜 만들어가는 판타지 멜로는 그래서 이 흐름 안에서 보면 너무 익숙해져 위기에 빠진 멜로의 안간힘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 문법은 익숙하지만 무언가 다른 관점을 통해 새로움을 시도하려는 안간힘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그 안간힘을 성공했을까. 두 작품은 모두 절반의 성공, 절반의 실패가 아닐까 싶다. 새로운 소재와 장르를 더해 새롭게 만들려 한 시도는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하지만, 그 껍질을 벗기고 나면 여전히 같은 이야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어쨌든 멜로는 남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 드라마에서는 필수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다. 다만 시대적 변주와 창조적 변화가 요구될 뿐.(글:매일신문, 사진: tvN)

‘라켓소년단’, 변방으로 가 중심 강박을 털어버리다

라켓소년단

“저는 내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배드민턴 국제대회에 나간 한세윤(이재인)은 코치에게 다음 날 경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를 묻는다. 다른 선수들에게는 일일이 조언을 해주는 코치가 단식대회에 나가는 한세윤에게는 아무런 얘기도 해주지 않아서다. 그러자 코치는 말한다. “하던 대로. 그냥 너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물론 이런 말은 코치가 한세윤을 무시하거나 무관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늘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무조건 이기는 선수. 그래서 이기는 게 ‘당연한’ 선수이기 때문에 뭐라 코치를 해줄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코치의 말에 한세윤은 어딘지 시무룩한 얼굴이다. 그 ‘당연한 우승’에 대한 기대가 만만찮은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기 전 잠도 못자고 두통으로 시달리던 선수였다. 

 

친구부터 코치, 동네 어르신들까지 모두가 영상으로 응원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그것이 기쁘면서도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그런데 그에게 의외의 영상 메시지 하나가 온다. 윤해강(탕준상)이 보낸 메시지다. “내 생각에 너는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했어. 지금도 충분히 충분하고 대단히 대단하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너한테 해주고 싶은 말은... 져도 돼. 한세윤. 꼭 이번이 아니더라도. 앞으로도. 그동안 고생했다.”

 

SBS 월화드라마 <라켓소년단>은 배드민턴이라는 스포츠의 세계를 다룬다. 뭐든 1등을 해야 알아주고 승자가 되어야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우리네 경쟁사회에서 스포츠의 세계만큼 ‘승자독식’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도 없다. 인기 종목이야 그나마 더 여지가 열려 있지만, 비인기 종목으로 국제대회에서 잠시 화제가 되었다가 끝나고 나면 잊히기 마련인 비인기종목은 더더욱 그렇다. 국내 1위가 아니라 세계 1위가 되어도 주목받지 못하는 종목도 있으니.

 

<라켓소년단>은 스포츠의 세계를 가져와 승자 독식 강박에 빠져있는 우리네 현실을 에둘러 끄집어낸다. 선수들은 저마다 배드민턴이 즐거워서 하다가도 우승하지 못하면 계속 그 운동을 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늘 이겨서 우승이 당연하다 생각되는 선수는 한 번 지면 그 충격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러니 우승은커녕 소년 체전을 앞두고 같은 팀에서 나갈 3명을 뽑기 위해 한 명의 탈락자를 뽑는 평가전마저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다. 운동은 즐거워서 하는 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절박한 선택이다. 

 

나우찬(최현욱)은 늘 배드민턴을 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아버지 때문에 힘겨웠지만, 갑자기 “잘 해보라”는 말에 불안감을 느낀다. 스스로도 팀 내에서 자신이 가장 뒤쳐진다 여기고 있는데다, 그 잘 해보라는 아버지의 달라진 태도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의 불안감은 그리고 사실 그대로다. 아버지는 이제 곧 고1이 될 아들이 더 이상 배드민턴에 길이 보이지 않으면 포기시키려고 하는 마음을 드러낸다. 이기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우리네 승자 독식 사회의 풍경이다. 

 

<라켓소년단>이 굳이 도시가 아닌 땅끝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도시로부터 소외된 ‘변방’을 은유하기 때문이다. 도시를 중심으로 세워두고, 마치 그 곳으로 입성해야 ‘승자’가 되는 사회, 그 곳에서 어느 곳에 몇 평짜리 아파트를 가져야 성공으로 여기는 사회, 그런 지표들이 그는 물론이고 그 자녀들의 삶에까지 고스란히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회에서 변방의 소외는 폭력적이다. 하나의 중심을 세우면 그 주변이 모두 소외된다는 점에서, 승자로 돈으로 지위로 중심이 세워지는 사회는 그 자체로 폭력적이다.

 

<라켓소년단>을 그래서 그 땅끝마을로 간 소년이(그것도 하고 싶은 야구를 잠시 접어두고) 그 곳에서 팀원이 없어 팀 자체가 와해될 위기에 놓여 있는 배드민턴부에 들어가 함께 소년 체전을 향해 가는 이야기 속에, ‘승자 독식 강박’과는 정반대의 ‘망할 권리’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놓는다. 윤해강은 만만찮은 승부욕의 소유자지만, 그렇다고 승부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한세윤에게 “져도 돼”라고 말하면서 열심히 했고 최선을 다한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대단하다 말한다. 

 

그 누구도 우리 사회에서는 “져도 돼”라는 말을 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가족마저도 꼭 이기고 합격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이 승자 독식의 강박 속에서 우리는 좀체 즐겁게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 이겨야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사회니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 이긴다면 누군가는 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꼭짓점 위에 서 있는 한 명의 승자는 더 많은 패자들을 낳는다. 이런 사회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을까. 

 

윤해강이 툭 던지는 “져도 돼”라는 말을 듣고는 어딘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그래서 저 경기를 앞두고 잔뜩 신경이 곤두서 있는 한세윤만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매일 한세윤이 마주한 그런 경기를 앞두고 살아가는 처지가 아닌가. 져도 망해도 그 과정의 최선을 누군가 알아봐주고 기꺼이 박수 쳐주는 그런 사회에 대한 열망이 이 땅끝마을로 간 소년소녀들의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사진:SBS)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 청춘 멜로로 그려낸 5.18 광주

 

청춘 멜로와 5.18 광주.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풋풋한 청춘들이 어떻게 그 시대의 아픔 앞에 고통 받았는가를 멜로의 틀로 그려낸다. 그간 5.18을 담았던 콘텐츠들과 이 드라마는 어떤 차별점을 갖고 있을까.

오월의 청춘

<오월의 청춘>, 80년 광주라는 시공간이 만든 무게감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부모가 강제로 시키려는 정략결혼 앞에 헤어질 수밖에 없는 청춘 남녀... KBS 월화드라마 <오월의 청춘>은 그 액면만 보면 전형적인 청춘 멜로, 아니 다소 상투적으로까지 보이는 옛날 멜로처럼 보인다.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부터가 그렇다. 누구나 선망할만한 서울대 의대 졸업반이지만 대학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휴학을 하고 있는 황희태(이도현)는 어딘지 반항기가 있어 보이는 현대판 왕자님 같은 캐릭터다. 신군부와 줄을 대고 승승장구하고 있는 보안부대 대공수사과 과장 황기남(오만석)의 혼외자식인 그는,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갖고 있는 집안의 아들이지만 어딘지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겨 엇나가는 남자 주인공이다. 반면 고등학교 때 절친 이수련(금새록)과 학교 재단의 비리에 맞섰다가 아버지의 알 수 없는 강권으로 자퇴서를 낸 후 홀로 노력해 간호사가 된 김명희(고민시)는 현대판 신데렐라 같다. 그는 그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간호사가 됐고, 이제 유학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앞두고 있다. 게다가 알고 보면 황기남과 김명희의 아버지 김현철(김원해)은 과거 악연을 가진 인물들이다. 김현철의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이유로 황기남이 그를 연좌제로 몰아 지금껏 핍박해온 것. 그러니 원수지간인 아버지들 사이에 선 황희태와 김명희의 사랑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만만찮은 장벽을 세우고 있다. 

 

이처럼 다소 익숙하고 심지어 옛날 멜로처럼 보이는 남녀 관계의 설정을 갖고 있지만 <오월의 청춘>은 그 시공간을 80년 광주로 삼고 있다는 점 때문에 그 모든 설정들이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 해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아픈 시대적 비극들이 이 뻔해 보이는 청춘 멜로에 어떤 ‘절박한 정서’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들은 너무나 풋풋하게 만나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지만, 그럴수록 이들 앞에 닥칠 거대한 비극이 눈에 밟힌다. 황기남은 마치 당시 광주를 군홧발로 짓밟은 신군부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가 황희태를 김명희로부터 갈라놓고 대신 이수련과 정략결혼을 시키려 하는 모습이나, 이를 통해 사실상 이수련 아버지가 운영해온 사업체를 강탈하려는 이야기는 신군부가 당시 저질렀던 폭력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그래서 이 뻔해 보이는 청춘 멜로는 80년 5월 광주라는 시공간을 가져옴으로써 시대적 비극이라는 무게감을 얻게 된다. 굳이 전면적으로 당시 신군부에 의해 저질러진 폭력들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 청춘들이 겪는 아픔 속에 시대성이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5.18 민주화운동을 멜로로도 다룰 수 있게 된 건

<오월의 청춘>에 대해서 송민엽 PD는 “1980년 광주를 배경으로 당시 젊은이들이 사랑하고 슬퍼하고 미워하는, 보편적인 감정을 그린 드라마”라며 “특정한 사건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집중해서 봐 달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5.18 민주화운동을 전면적으로 다룬 시대극이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청춘남녀의 멜로에 더 집중했다는 뜻이다. 물론 그렇다고 5.18 민주화운동의 이야기를 피하고 있는 드라마도 아니다. 황희태가 의대생이고 김명희가 간호사라는 설정이나, 황희태의 대학친구로 계엄군이 되어 광주로 투입될 김경수(권영찬) 같은 인물 그리고 김명희의 절친인 이수련 역시 독재 타도를 외치는 대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 이야기가 80년 광주의 아픔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준다. 다만 당시 시대상을 청춘남녀의 아픈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풀어낸다는 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 지점은 이제 우리가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과거에 비해 훨씬 유연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사실 5.18 민주화운동이 지상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건 1995년부터다. 당시 SBS에서 방영되어 ‘귀가시계’로 불리기도 했던 <모래시계>가 바로 그 장본인이었다. 이 드라마는 놀랍게도 당시까지만 해도 금기시 됐던 광주 민주화운동의 실제 영상들을 드라마 속에 그대로 담아 전해주었다. 최고시청률 65.7%를 기록했던 이 드라마는 SBS의 창사특집으로 방영되며 이 방송사의 위상을 단번에 높였고, 그 해의 백상예술대상은 TV부문 대상을 비롯해 작품상, 연출상, 남자 최우수연기상, 극본상, 남자 신인연기상을 모두 <모래시계>에 안겼다. 1995년 <모래시계>가 이런 파격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1993년 들어선 문민정부 김영삼 정권이 추구했던 역사 바로 세우기로 전두환과 노태우 전직 두 대통령이 법정에 서게 된 일과 무관하지 않았다. <모래시계> 이후, 광주 민주화운동을 담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꽃잎(1996)>, <박하사탕(1999)>, <화려한 휴가(2007)>, <26년(2012)>, <택시운전사(2017)> 같은 작품들이 그 사례다. <오월의 청춘> 같은 드라마가 이제 청춘 멜로라는 장르로 80년 광주를 다룰 정도로 유연해질 수 있게 된 건, 이처럼 시대 변화에 따라 5.18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이를 투영한 많은 콘텐츠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 운동, 이제는 다양한 장르와 결합하기 시작하다

사실 90년대는 물론이고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치열함은 그 시대적 비극을 엄밀한 시대극의 틀 이외의 다양한 장르가 품을 수 있는 여지를 주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오월의 청춘>을 비롯해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들이 민주화 운동의 풍경들을 담아내고 있다. 지난해 방영됐던 tvN <화양연화>는 단적인 사례다. 최루탄에 의해 뿌연 연기가 퍼지고 깨진 돌들이 흩뿌려진 80년대 대학가의 익숙한 풍경으로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딩대 민주화 투쟁을 했던 청춘들이 이제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고 그 때의 순수했던 열정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멜로로 그려냈다. 놀라운 건 당대에는 죽고 사는 절박한 문제였던 민주화 운동의 살풍경이, 2020년에 되돌아보는 시점에 의해 아련한 ‘추억’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들로 보여 진다는 점이다. 물론 상처의 깊이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시대적 아픔조차 한참을 지나 돌아보면 아련한 그리움으로 채색되기 마련인 기억의 마법이 작용한 탓이다. 복고는 이렇게 민주화 운동까지 하나의 향수 가득한 광경으로 품어낸다. <오월의 청춘>이 80년대라는 아날로그적인 시공간을 복고로 담아내듯이. 

 

현재 방영되고 있는 JTBC 금토드라마 <언더커버> 역시 민주화운동을 청춘 멜로와 스릴러 장르로 담아낸다. 이 드라마는 민주화운동을 하는 대학생을 검거하기 위해 프락치로 접근했다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안기부요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 여인과 가족을 꾸려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아내가 공수처장이 되면서 그를 막으려는 국정원의 공작에 의해 정체가 드러나게 되면서 위기에 처한 한 남자의 고군분투가 그 내용이다. 흥미로운 건 <언더커버>가 BBC 원작 드라마라는 점이다. 즉 리메이크 과정에서 우리 식의 이야기로 풀어내기 위해 80년대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선택은 이 작품이 리메이크작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로컬 정서를 담아내는데 효과적이었다.

 

<오월의 청춘>은 이처럼 민주화운동이 보다 유연하게 다양한 장르들과 결합하기 시작한 지금의 달라진 시대 정서를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청춘 멜로로 풀어내고 있지만, 이들의 순수한 사랑이 깊어질수록 앞으로 닥쳐올 5.18의 비극성이 더해진다. 물론 너무 익숙한 청춘멜로의 틀이 갖는 한계는 분명하지만, 시대성이 이 흔한 멜로를 특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글:매일신문, 사진:KBS)

낚시, 예능의 피해야할 아이템에서 핫 아이템으로 

 

한때 낚시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피해야할 아이템’으로 꼽힌 바 있다. 들어가는 시간에 비해 건질 영상은 적다는 게 그 이유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낚시는 예능 프로그램의 핫 아이템으로 변신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든 걸까. 

도시어부3

<도시어부3>, 물고기는 못 낚지만 시청자는 낚는다

지난 5월6일 채널A <도시어부3>가 새 시즌을 시작했다. 첫 회 시청률은 2.5%(닐슨 코리아)로 3회에는 2.9%를 기록했다. 종편 채널로서는 그리 낮은 수치는 아니다. 이미 시즌1,2를 거듭하면서 최고시청률 5.3%(시즌1)를 달성했던 기록도 갖고 있어 어느 정도 고정 시청층이 있다는 방증이다. 

 

그런데 시즌3의 3회까지 방송분을 보면 조금 특이한 사항이 눈에 띈다. 첫 회 미션이었던 ‘40시간 동안 4짜 붕어 잡기’에 이어, 2회에 바다에 나가 펼쳐진 감성돔 낚시를 모두 실패했다. 3회에 게스트들을 초대해 함께 붕어 낚시에 도전하는 ‘붕친대회’에서도 2시간의 방영분량 내내 미션이었던 토종붕어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결과를 내다 마지막 순간에 이경규가 겨우 한 마리를 잡아 실패를 면했다. 이 정도면 낚시를 소재로 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어째서 PD들의 기피대상이 됐는가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심지어 40시간 가까이 잠도 못자고 눈에 불을 키며 낚시찌를 바라봐야 하지만, 정작 잡히는 순간은 아주 짧은 방송 분량으로 끝나 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어부3>의 첫 회는 40시간 내내 버티느라 힘겨워하는 제작진들의 다크서클 가득한 모습들이 방송에 채워지기도 했다. 그런데 신기한 건 한 마리 잡기도 힘겨운 낚시 소재의 이 프로그램이 결코 짧지 않은 2시간 가까운 방송 분량을 채워내는 ‘기적(?)’이다. 게다가 그 2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시간 순삭’을 체험하게 해줄 정도니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그것은 물고기는 못 낚아도 시청자는 낚는, 이 프로그램만의 몇 가지 요인들이 있어서다. 그 첫 번째는 출연자의 진정성이다. 사실 40시간을 꼴딱 세우며 낚시를 한다는 건, 제 아무리 현장에서 벌어지는 예능의 노동 강도가 높아졌다고 해도 출연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도시어부>에서는 늘 벌어진다. ‘40시간 동안 4짜 붕어 잡기’ 미션에서 칠순의 나이에도 쉬지 않는 집념을 보여주는 이덕화나, 미션이 끝나고도 아쉬움이 남아 6시간을 더 낚시를 하는 최진철 프로 같은 인물들의 면면은 낚시에 대한 이들의 집념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모습들이다. 얼마나 낚시가 진심이면 3회 미션으로 치러진 ‘붕친대회’에서 김준현의 친구로 참여한 이홍기가 “이렇게 조용한 예능은 처음”이라며 낚시에만 집중하는 모습에 놀라는 장면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웃기기보다는 물고기 한 마리를 더 낚고, 또 낚기 위해 집념을 보이는 것이 더 열광하는 이 프로그램만의 묘미가 바로 그 진정성에서 나온다. 

 

빈 여백을 채우는 방송의 묘미

<도시어부>가 시청자를 낚는 두 번째 힘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만이 아니라 기다리는 과정에서도 지루할 틈이 느껴지지 않게 해주는 기획적 요소들이다. 2회에 등장한 유튜브 채널 <도시어부 Grrr>는 방송 중간의 여백을 채워주는 역할을 했다. 바다 감성돔 낚시를 나갔지만 잘 잡히지 않자 방송에 노련한 이경규가 “유튜브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며 갖가지 기행(?)을 선보이는 장면은 그 자체로 예능적인 방송 분량을 만들어줬다. 3회 ‘붕친대회’에서 게임전문MC로 유명한 전용준이 참여해 ‘세계 최초 낚시 중계방송’을 연출한 장면도 대표적이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중계방송 동안 단 한 마리도 붕어를 낚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중계방송은 엄청난 텐션으로 중계를 한 MC 전용준과 KCM의 맹활약으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중계방송의 실시간 댓글들은 ‘중계 해설 자체가 너무 웃기다’는 반응들을 쏟아냈다. 

 

물론 낚시를 소재로 하고 있는 방송으로서 그 특유의 정서를 <도시어부>는 놓치지 않는다. 출조 전에 한 자리에 모여 지난 낚시의 결과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고, 그 날 미션에 대한 기대감을 채우는 시간에는 낚시꾼들 특유의 설렘과 허세가 묻어난다. 바로 낚시를 하는 게 아니라 사전 토크를 하는 건 이런 정서들을 담아내기 위해서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을 때의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나, 찌가 오르락내리락할 때의 긴장감 그리고 드디어 물고기를 낚아 채 올릴 때 팽팽하게 구부러지는 낚싯대가 주는 기대감 같은 것들을 <도시어부>는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낚시를 하는 당사자들이 겪는 기대와 아쉬움을 방송은 연출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한다. 그래서 마치 기다렸던 물고기가 문 것처럼 카운트다운을 하지만 결국 예상을 빗나가는 장면을 연출해 보여주는 건, 단지 시청자들을 낚기(?) 위한 트릭만이 아니다. 그건 낚시꾼들이 실제 낚시를 하며 때론 환영이 보일 정도로 빠져드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양한 예능이 소환해낸 낚시의 새로운 묘미

낚시라는 소재는 이제 <도시어부>만이 아닌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그 묘미를 소환해내고 있다. 물론 과거 KBS <1박2일>이나 <남자의 자격> 같은 프로그램이 이미 금기였던 낚시를 하나의 소재로 끌어낸 바 있지만, 그 저변이 만들어진 건 tvN <삼시세끼> 어촌편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였다. <삼시세끼> 어촌편은 마치 어촌에서 밥해먹는 프로그램으로 기억되지만, 그 안을 잘 들여다보면 낚시가 중요한 소재로 사용됐다는 걸 알 수 있다. 애초 나영석 PD가 섬에 들어가는 차승원, 유해진에게 그 시즌의 미션으로 제시한 게 바로 ‘낚시’였기 때문이다. ‘참바다’로 불리는 유해진은 그래서 이 낚시라는 소재의 독특한 매력을 잘 끄집어내준 인물이었다. 빈 어망을 들고 돌아오는 ‘가장의 무게’를 잘 담아내는 그의 모습에서, 못 잡았을 때의 헛헛함과 비례해 잡았을 때의 환희 또한 엄청나게 컸다는 걸 방송은 보여준 바 있다. 지난해 죽굴도로 들어가 유해진이 드디어 낚은 ‘참돔’은 그래서 <삼시세끼> 어촌편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만찬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SBS <정글의 법칙>은 정글 생존이라는 그 특성상 낚시는 중요한 소재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낚싯대를 갖고 하는 낚시보다는 직접 물속으로 들어가 작살로 잡는 방식이 주로 선보였는데, 김병만 족장의 놀라운 실력은 보는 이들의 시선을 잡아 끌기에 충분했다. MBC <안싸우면 다행이야> 역시 무인도에서 사는 자연인을 찾아가 함께 지내는 과정에서 빠지지 않는 게 낚시였다. 정규 편성되어 첫 회에 나간 황도편에서는 세상과 격리된 섬이지만, 낚싯대를 던지기만 하면 물고기가 잡혀 올라오는 광경으로 그 섬 생활의 풍요로움(?)을 전해주기도 했다. 

 

본격적으로 낚시를 소재로 하는 <도시어부3>나, 기획적 특성상 낚시가 빠질 수 없었던 <삼시세끼> 어촌편, <정글의 법칙>, <안싸우면 다행이야> 같은 프로그램들은 낚시가 예능의 금기라는 한때의 불문율을 옛 이야기로 만들고 있다. 특히 요즘처럼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빠르고 복잡한 세상사에서 사람들이 낚시를 하러 가는 이유는 물고기를 잡겠다는 일념 때문만은 아니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 해도 마치, ‘불멍’, ‘물멍’을 하듯 아무 생각 없이 찌만 바라볼 때 느껴지는 마음의 평온함이야말로 낚시의 진짜 매력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소재를 담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그 낚싯대를 드리운 장면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마음을 잡아 끌기도 한다. 지금의 시청자들이 낚시를 담는 예능 프로그램에 낚이는 이유다. (글:매일신문, 사진:채널A)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