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에 담긴 시대정신, 윤여정이 해석해낸 ‘미나리’

 

리 아이작 정 감독의 <미나리>에 출연한 윤여정이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국내 최초이자, 자국어로 연기한 아시아권 배우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윤여정은 어떻게 <미나리>를 통해 이런 성과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영화 '미나리'

아카데미에서도 빛났던 윤여정

결국 윤여정이라는 이름이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서 불렸다. 공교롭게도 시상자는 <미나리>의 제작자이기도 한 브래드 피트였다. 전 연도에 그 상을 수상한 다른 성의 배우가 시상하는 아카데미의 전통에 따라, 작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로 남우조연상을 받았던 브래드 피트가 시상자로 나왔기 때문이었다. 윤여정은 시상 소감을 하기에 앞서 “드디어 우리가 만났다”며 “그런데 우리 영화 찍을 땐 어디 있었냐?”는 브래드 피트에게 던지는 유쾌한 농담으로 좌중을 빵 터트렸다. 그리고 윤여정은 자신의 이름을 갖고 또 한 번 재치 있는 농담을 던졌다. “저는 윤여정인데 유럽 분들이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정’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모두 용서하겠다.” 지난 번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히 고상한 척하는(Snobbish) 영국인들이 나를 알아봐주고 인정해줘서 감사하다”는 솔직함과 위트가 섞인 농담으로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윤여정다운 모습이었다. 

 

그는 자신이 상을 받은 것이 운이 좋아서였다며 다른 후보자들에 대한 예우도 빼놓지 않았다. “나는 사실 경쟁을 믿지 않는다. 글렌 클로즈 같은 대배우와 어떻게 경쟁을 하겠나.” 대신 다섯 후보들이 다 각자의 영화에서 최고였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또 자신의 두 아들이 “일하러 나가라”고 해서 그 덕에 열심히 일했더니 이 상을 받게 됐다는 사적이면서도 공감 가는 이야기와, 자신의 첫 감독이었던 고 김기영 감독에 대한 존경의 마음도 전했다.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은 외신을 타고 전 세계로 타전됐다. 로이터 통신은 윤여정이 한국배우 최초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수상까지 이뤄냈다며 그가 수십 년 간 한국 영화계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주로 재치 있으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큰 캐릭터를 연기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작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배우 수상에는 불발됐지만 올해에는 윤여정이 상을 받았다고 전했고, AFP통신은 윤여정이 수상소감에서 글렌 클로즈에 경의를 표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윤여정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화제가 된 건, 특유의 유머감각과 더불어 할 말은 하는 ‘직설적인 화법’에 상대방에 대한 예우까지 갖추는 모습 때문이었다. 윤여정은 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혐오범죄가 늘고 있어 미국에 오는 걸 아들이 걱정한다는 이야기로 이 심각성을 전하기도 했고, 시상식 후 치러진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도 ‘무지개’를 언급하며 소신을 밝혔다. “심지어 무지개도 7가지 색깔이 있다. (무지개처럼) 여러 색깔이 있는 것이 중요하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하고 백인과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게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따뜻하고 같은 마음을 가진 평등한 사람이다.”

 

윤여정을 통해 다시 보이는 <미나리>의 가치

<미나리>는 리 아이작 정 감독의 작품이다. 정이삭이라고도 불리지만 한인 2세인 그는 미국인이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제작자가 브래드 피트다. 미국영화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미국영화가 힘을 발휘한 부분은 ‘미국적인 문화’가 담겨서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적인 문화’가 전해져서다. 그건 다름 아닌 순자(윤여정)라는 한국에서 딸 가족을 위해 고춧가루며 멸치 등을 바리바리 싸들고 이역만리를 찾아온 할머니를 통해서다. 

 

<미나리>는 제이콥(스티븐 연)이 아칸소로 이주해 농장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있지는 않다. 다만 황무지나 다름없는 그 곳을 일궈 농장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이 가족이 맞닥뜨리는 위기의 순간을 잔잔한 카메라로 포착한 영화다. 농장에 들어가는 돈을 벌기 위해 제이콥과 모니카(한예리)는 병아리감별사로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고, 아이들을 돌봐주기 위해 한국에서 온 순자는 몸이 좋지 않은 데이빗(앨런 킴)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런데 어린 데이빗이 보기에 이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 같지 않다. 쿠키를 굽기보다는 화투를 치고, 욕도 잘 하고, 남자팬티를 입고 잔다. 그런데 진짜 다른 점은 힘겨운 상황들 속에서도 낙천적인 모습이다. 가난해 트레일러에서 살고 있는 꼴을 보여주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딸에게 “바퀴달린 집에서 사니 재밌다”고 말해주는 그런 사람. 

 

어떻게든 땅을 일구고 물을 대 농장을 만들어내 큰돈을 벌려는 제이콥과도 순자는 사뭇 다르다. 그는 데이빗을 데리고 산책을 하다 어느 물가에 한국에서 가져온 미나리씨를 뿌린다. 그러면서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다 같이 먹을 수 있으며 건강하게 해준다고 말한다. 물을 대서라도 농장을 일궈 큰돈을 벌려는 제이콥의 다분히 미국식 자본주의적 사고방식과, 그저 물가에 씨를 뿌려두고 누구나 뜯어 먹을 수 있게 미나리가 자라게 해주는 순자의 자연주의적이고 생태주의적인 사고방식은 그렇게 극명하게 대비된다. 

 

즉 <미나리>는 순자가 조연이지만, 사실상 순자의 메시지가 가장 중요한 영화다. 제이콥으로 대변되는 한국식의 가부장적인 모습과 미국식의 자본주의적인 모습이 결합된 삶의 방식에, 순자라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한 인물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자를 자기만의 색깔로 해석하고 표현해낸 윤여정이야말로 지금의 <미나리>의 성과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전형성을 거부한 배우, 윤여정의 미나리 같은 삶

윤여정은 어떻게 순자를 그토록 생명력 강하고, 유머러스하며, 한국적인 정이 가득하면서도, 트렌디하고 쿨한 할머니(K할머니라고도 불리는)로 그려낼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은 그가 작품들을 통해 그려온 배우로서의 여정에 담겨 있다. 그는 이번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소감에도 거론했듯, 김기영 감독의 <화녀>를 통해 데뷔했다. 흔히들 여배우라고 하면 반짝반짝 빛나는 청춘스타로서 시작하는 모습을 떠올리지만, 그는 ‘악녀’로 데뷔한 셈이다. 결혼 후 미국 생활을 하다 돌아와 처음으로 한 작품도 박철수 감독의 <어미>로, 이 작품에서 윤여정은 딸을 자살하게 만든 인신매매범들을 처단하는 엄마 역할을 연기했다.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에서는 욕망에 충실한 어르신 역할을 연기했고, 이재용 감독의 <죽여주는 여자>에서는 성매매를 하는 이른바 ‘박카스 할머니’라는 파격적인 연기에 도전한 바 있다. 물론 윤여정은 더 넓은 스펙트럼의 다양한 연기를 해왔던 게 사실이지만, 늘 틀에 박힌 전형성을 거부하는 역할을 연기했던 배우였다. ‘K할머니’라 불리는 <미나리>의 순자가 전형성을 벗어난 우리 시대의 어르신상을 그려낼 수 있었던 것 역시 윤여정의 이런 특별한 연기여정의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 윤여정은 ‘배우 같지 않은 배우’로 통한다. 최고 선배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성실하게 임하며, 특유의 유머로 그 힘겨운 작업을 즐겁게 만들고, 틀에 박힌 전형성에는 질문을 던지기도 하는 배우. 그의 배우로서의 삶은 그래서 미나리를 닮았다. 자신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지만 주변도 함께 살리는 그런 존재. 그 삶에 대한 자세들이 <미나리>라는 작품 속 순자를 통해 그려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건 우리 시대가 처한 많은 위기들을 넘어서기 위한 슬기로운 지혜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글:매일신문, 사진:영화'미나리')

드라마, 교양 속으로 들어온 범죄

 

최근 범죄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 교양 프로그램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실제 사건들을 가져와 허구로 그려낸 드라마는 물론이고, 범죄를 소재로 하는 새로운 스토리텔링 방식의 교양 프로그램이 그렇다. 무엇이 이런 대중문화의 트렌드를 만들고 있을까.

 

지금 드라마는 범죄 스릴러의 시대

바야흐로 범죄 스릴러의 시대라고 할만하다. 최근 드라마 중 범죄스릴러 장르는 하나의 트렌드처럼 자리하게 됐다. tvN <마우스>, JTBC <괴물>, SBS <모범택시> 같은 작품들은 모두 19금 수위의 범죄스릴러지만,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을 모두 거머쥐었다. <마우스>가 최고 시청률 6.6%(닐슨 코리아)를 기록했고, <괴물> 역시 5.9%의 높은 시청률로 종영했다. <모범택시>는 무려 16%의 최고시청률을 냈다. 

 

SBS 드라마 '모범택시'

과거 범죄 스릴러가 다소 마니아적인 장르라 여겨졌던 시절을 떠올려보면, 최근 드라마의 이런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2007년 사극을 쓰던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내놨던 MBC <히트>는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가져왔지만 생각만큼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시청률이 월등히 높은 18.5%로 종영했지만 당시에는 히트작가들이 쓴 작품 치고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 작품으로서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초반 범죄 스릴러를 본격적으로 그려나가다 반응이 좋지 않자 중반 이후부터 인물들 간의 멜로가 부각된 건 이 드라마가 가진 한계였다. 2011년 김은희 작가가 쓴 SBS <싸인>이 살벌한 연쇄살인범들을 등장시켜 지상파에서도 범죄스릴러가 가능하다는 걸 확인시켰고, 이후 이 작품으로 주목받는 김은희 작가는 <유령>, <쓰리데이즈> 같은 작품을 거쳐 tvN <시그널> 같은 범죄 스릴러의 명작을 내놨다. tvN과 OCN 같은 케이블 채널은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를 본격화시켜준 토양을 제공했다. 지상파에서는 다루기 힘들었던 잔혹한 수위의 범죄들이 다뤄졌고 점점 시청자들에게 익숙하게 되면서 이 흐름은 지상파로까지 이어졌다. <시그널>에 이어 <갑동이>, <보이스>, <터널>, <나쁜녀석들> 같은 케이블 채널의 범죄스릴러가 수위를 높이면서, MBC <검법남녀>, <나쁜 형사>, SBS <리턴> 같은 지상파 범죄스릴러도 등장하게 된 것. 

 

이러한 흐름 위에서 최근 넷플릭스, 왓챠 같은 플랫폼을 통해 더 강력한 해외의 범죄스릴러들이 소개되면서 이제는 19금을 표방하는 우리네 작품들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보다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작품들은 단지 자극만이 아니라 깊이나 메시지까지 담게 됐다. <마우스>는 뇌 이식이라는 장치를 활용해 죄의식이 없는 사이코패스 가해자들을 어떻게 처벌하고 단죄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았고, <괴물>은 한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실종 살인 사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진짜 괴물이 어떤 욕망에서 탄생하는가를 들여다봤다. <모범택시>는 다분히 오락적인 작품이지만, 실제 있었던 사건들을 끌고 와 ‘사적 복수 판타지’를 더해 넣는 방식으로 법이 정의를 제대로 구현해내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처럼 최근 범죄스릴러의 폭증은 우리네 장르물의 진화와 더불어, 최근 우리 사회가 마주한 정의에 대한 갈증이 만나면서 생겨난 결과다. 

 

교양 속으로 들어온 범죄

범죄는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tvN <알쓸범잡(알아두면 쓸데없는 범죄 잡학사전)>은 대표적이다. tvN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스핀오프로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잡학 중에서도 ‘범죄’를 주 소재로 가져왔다. 이 아이디어는 다분히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이 그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알고 싶다> 특집으로 구성해 박지선 교수부터 이수정 교수, 권일용 프로파일러 등이 출연해 다양한 실제 범죄 이야기로 큰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기 때문이다. <알쓸범잡>은 여기 출연했던 박지선 교수는 물론이고 정재민 법무심의관과 물리학 박사 김상욱 교수 그리고 윤종신과 장항준 감독으로 출연진이 꾸려졌다. 이 프로그램이 말해주는 건 범죄가 남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한국판 홀로코스트로 불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이나 유영철처럼 세상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희대의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가습기 살균제나 대구 지하철 참사 같은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만세운동이나 제주 4.3사건 같은 역사적 사건들 역시 법정기록이나 판결문으로 다시 보는 흥미로운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 

 

<알쓸범잡>이 이처럼 범죄라는 특정 소재를 가져와 여행과 토크쇼가 더해진 형식으로 풀어내는 프로그램이라면, SBS <당신이 혹하는 사이>는 벌어진 사건에 대한 ‘음모론’을 소재로 가져와 다양한 추론들을 더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다루고 있다. 정규 편성되어 첫 방송된 10년 전 벌어진 강남경찰서 강력반 막내 형사의 사망사건의 경우, 단순 음모론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당시 제대로 수사되지 않고 종결처리된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와 재수사 촉구까지 나간 내용을 담았다. 너무 많은 의혹에도 서둘러 자살 처리한 데 앞장섰던 인물이 2018년 버닝썬 사건에 다시 등장하는 놀라운 사실을 전하면서,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또 다른 유사사건을 막기 위해서도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 바로 이러한 정당한 의혹을 제기한다는 지점은 <당신이 혹하는 사이>가 단지 음모론을 재생산하는 프로그램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준다. 

 

드라마는 물론이고 교양프로그램에서도 범죄가 주요 소재로 자리하게 된 건, 최근 갈수록 잔혹해지는 범죄들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그만큼 높아져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정인이 사건’은 물론이고 ‘N번방 사건’, ‘노원구 일가족 살인사건’ 등등 충격적인 범죄들이 매일 같이 사회면을 채우고 있는 현실이 그것이다. 드라마가 이들 사건들로 인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하는 피해자들에 반해, 후회나 죄책감조차 없이 상응하는 처벌을 받지 않는 가해자들을 허구를 통해서나마 단죄하는 카타르시스를 전한다면, 교양 프로그램들은 그 충격적인 사건의 진실에 접근함으로써 이를 예방하거나 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가를 들여다보려 한다. 안타깝고 씁쓸한 일이지만 그게 어느 쪽이든 우리가 처한 불안한 사회를 TV는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글:시사저널, 사진:SBS)

  • ‘마인’, 재벌가 이야기로 욕망을 성찰하는 드라마

 

냉정한 이야기지만 아마도 자본주의에서 누군가를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가 그 사람이 가진 거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일 게다. tvN 토일드라마 <마인>은 바로 ‘나의 것’이라는 의미의 ‘mine’을 제목으로 삼고, 효원그룹이라는 재벌가의 으리으리한 대저택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 엄청나게 넓은 대지 위에 커다란 건물이 카덴자 그리고 작은 건물이 루바토라 불리는 이 대저택은,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예술작품에 가까운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게다가 완벽한 카스트를 이루는 이 집의 위계는 이 곳에서 살아가는 주인들과 그들을 완벽하게 케어해주는 메이드들로 나뉘어있다. 조선시대나 어울릴 것 같은 ‘도련님’이라는 지칭에 헛웃음을 흘리는 신참 메이드는 헤드 메이드에게 소리를 빽 지르며 “여기는 어나더 월드”라고 알려준다. 그 다른 세상을 구조화하는 건 다름 아닌 돈이다. 그래서 메이드들도 여기에 적응하고 갑질하는 저들 세계에 남고 싶어 한다. 지나칠 정도로 충분한 돈을 주니까. 

 

tvN 드라마 '마인'

그런데 재벌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는 엉뚱하게도 엠마 수녀(예수정)의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주기도문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재벌가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설명하는 목소리 역시 엠마 수녀다. 이 지점은 <마인>이 이 작품을 쓴 백미경 작가의 성공작이었던 JTBC <품위 있는 그녀>와는 사뭇 다른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품위 있는 그녀>가 부유층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는데 집중했다면, <마인>은 모든 걸 다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 속에서 진짜 가져야할 것을 못 가진 이들의 삶을 성찰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물론 이 극단화된 부유층의 이야기는 ‘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어떤 성찰의 기회를 줄 것으로 보인다. 

 

이 드라마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 중심축은 역시 첫째 며느리 정서현(김서형)과 둘째 며느리 서희수(이보영)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그 속에서 자라온 정서현은 가족조차 비즈니스를 하듯 대하며 살아가는데 익숙하다. 이들에게 관계는 ‘가진 것’에 따라 달라지는 서열과 무관하지 않다. 정서현은 맏며느리로서 집안 대소사를 결정하고 예술 사업을 통해 대외적인 일까지 관장하지만, 가족 관계는 차갑기 그지없다. 알코올과 도박에 빠져 사는 남편은 남이나 다름없고, 그의 이혼한 아내가 낳은 아들 수혁(차학연)은 모자간의 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는 모든 걸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젊어서 사랑했던 동성 애인을 잊지 못하고 또 드러내지도 못한 채 가슴 속 깊이 봉인해놓고 살아간다. 가진 것이 의미 없어지는 삶이다. 

 

반면 여배우였다 결혼해 효원가에 들어온 서희수는 정서현과 달리 비서와도 자매처럼 지내고 교통사고로 사망한 남편 전 부인의 아들과도 친아들 같은 정을 준다. 하지만 모든 걸 다 가졌다 생각하는 그에게도 위기가 시작된다. 시크릿 튜터로 들인 강자경(옥자연)이 조금씩 자신이 가졌던 것들을 건드리면서다. 서희수의 남편 한지용(이현욱)과 이미 과거에 비밀스런 관계였을 것으로 보이는 강자경은 그래서 서희수의 모든 걸 빼앗으려 할 것이고, 이 둘의 사투는 드라마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희수가 저 정서현과는 ‘가지려는 것’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다. 정서현은 자신의 사랑 같은 삶의 진정한 것 대신 재벌가 맏며느리의 삶을 가지려 했지만, 서희수는 이 낯선 재벌가에 들어와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희수가 가지려는 건 그래서 ‘재벌가 며느리’가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다. 이 대비는 향후 이 드라마가 갖진 대결의식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온갖 욕망으로 가득 채워진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가지려 노력하지만, 진짜 가져야 할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 물론 <마인>의 겉면은 재벌가를 둘러싼 치정과 불륜, 후계구도를 두고 벌어지는 상속 싸움, 가진 것으로 나뉜 신 카스트 속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갑질 등등 자극적인 광경들이지만, 그 속은 마치 이들을 부감으로 내려다보는 성찰적 시선이다. 여러모로 <품위 있는 그녀>에서 한 걸음 더 깊어진 작가의 고민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PD저널), (사진출처:tvN)

'언더커버', 프락치 지진희의 비애, 그리고 국가의 야만적 폭력

 

1990년대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가짜 신분으로 접근했다 사랑에 빠진 안기부 요원. JTBC 금토드라마 <언더커버>는 한정현(지진희)은 이석규라는 자신의 이름을 지운 채 사랑하게 된 최연수(김현주)와 가정을 꾸려 단란하게 살아간다. 하지만 이 한정현이 가진 '거짓 신분'은 언제고 터질 수밖에 없는 시한폭탄이었다.

 

인권변호사가 된 최연수가 공수처장으로 지목되자, 국정원 도영걸(정만식) 팀장은 한정현을 협박한다. 최연수가 공수처장이 되는 걸 막지 않으면, 그의 가족을 파탄 내겠다는 것. 한정현은 아내의 앞길을 막을 수도, 그렇다고 가족이 파탄 나는 걸 볼 수도 없는 곤경에 빠진다. 다행스럽게도 최연수가 스스로 공수처장을 수락하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이런 선택은 그가 30년 넘게 재심 변론을 해왔던 황정호(최광일)의 간절한 부탁으로 흔들린다.

 

<언더커버>는 BBC 동명의 원작 리메이크 드라마지만, 우리 식의 해석이 담겨 있다. 90년대 학생운동과 당시 안기부의 공작들이 그 밑그림으로 들어가 있어서다. 이석규는 바로 당시의 안기부 요원 중 능력을 인정받아, 한정현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채 최연수에게 접근하는 인물이다. 프락치 활동을 하는 것이지만, 한정현은 점점 최연수에게 빠져들고 그래서 조직의 명령을 따르지 않겠다며 사직서를 쓴다. 하지만 이런 한정현을 그냥 놔둘 리가 없는 안기부다.

 

안기부는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꿨지만 한정현이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아직 드라마가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그 삶이 얼마나 비극적이었을 지는 그가 아버지를 우연히 거리에서 마주하는 장면에 들어 있다. 임무 때문에 자식이 해외에 나갔다 믿었던 아버지는 최연수와 가정을 꾸린 채 나타난 한정현이 아들이 아님을 부인하자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한참 후에 한정현이 요양원에서 마주한 아버지는 치매에 걸려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한정현은 아버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바로 달려갈 수 없는 처지다.

 

한정현은 국가 기관이 만든 시대의 비극을 담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그 비극 속에서 쓸쓸하게 죽어간 아버지를 경험하면서도, 애써 지키려 한 건 바로 자신의 가족이다. 과거를 애써 잊으며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려던 그지만, 그 과거가 갑자기 그의 앞으로 다시 툭 튀어나온다. 한정현은 이제 현재를 위해 과거와 싸워야하고, 가족을 위해 저 거대한 조직과 싸워야 한다.

 

궁금해지는 건 최연수가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그는 정의를 위해 거의 한 평생을 살아왔던 인권변호사다. 그런데 공수처장 수락을 앞두고 가족이 파탄 위기를 마주하게 된다. 그는 과연 남편의 거짓 신분을 알고도 그를 받아들일까. 가족이 위기에 처하는 상황 속에서도 정의를 위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갈까. 그런 최연수를 바라보는 한정현은 또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언더커버>는 정체를 숨기고 살아온 남편의 실체가 드러나는 스릴러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법 정의나 진실과 거짓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국가 기관이 만든 개인의 비극과 그래서 개인이 저 거대한 국가 기관과 마주해 싸우는 이야기. 특히 <언더커버>가 리메이크 되면서 강화한 부분은 가족이다. 결국 한정현도 최연수도 이 위기 속에서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가 중요한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분은 리메이크작이지만 이 드라마가 꽤 우리네 드라마 같은 정서적 공감대를 갖게 해주는 이유이기도 하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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