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기, 삶을 성찰하는 다섯 편의 영화들

불황기여서일까. 유난히 삶을 돌아보는 영화들이 눈에 띈다. 이미 독립다큐영화로서는 상상못할 대성공을 거둔 '워낭소리'는 물론이고, 또다른 독립영화의 맛을 보여주는 '낮술', 미키 루크라는 배우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더 레슬러',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한 인물을 통해 시간과 삶을 성찰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리고 심지어 슈퍼히어로 영화지만 정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왓치맨'까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그 현실을 관조하게 해주는 이 영화들이 가진 삶에 대한 각기다른 시선들은 무엇이었을까.

'워낭소리',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
'워낭소리'의 그 잔잔한 울림은 소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나가는 그 노동으로부터 울려퍼진다. 때론 바보처럼 우직하게 숨쉬듯 해온 노동이 달라진 세상 속에서 무화되는 어느 순간은 늘 아련한 노동의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마련. '워낭소리'는 우리네 아버지들이 해왔던 노동이자, 이제는 사라져버린 진짜 노동을 소 걸음으로 찬찬히 되새겨보게 해주는 영화다. 영화가 전하는 말,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는 그 말은 불황을 살아가는 작금의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만 하다.

'낮술', 기대와 배반의 삶 그래도 웃는다
'낮술'은 우리네 삶에 존재하는 욕망의 아이러니를 낮에 마시는 술의 그 분위기에서 포착해내는 영화다. 삶의 욕망이 가지게 마련인 기대감은 곧 배반감으로 돌아오게 마련. 낮술에 취해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던지고 난 후에 남는 것은 이 끝없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관조다. 기대와 배반의 반복은 그러나 그 과정을 이어나가는 유머감각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 '낮술'은 낮술 한 잔이 주는 쓰디쓴 현실을 웃음으로 전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일상이 그 한바탕 낮술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해준다.

'더 레슬러',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연민은 사절이다
'더 레슬러'는 한때 잘 나가던 프로레슬러였으나 이제는 남루해진 육신이 버거운 랜디(미키 루크)의 이야기면서, 한때 섹스심볼의 아이콘이었던 배우였으나 이제는 망가진 육체를 던져 연기하는 미키 루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프로레슬링은 그들이 말하는 '작전'에 의해 짜여진 쇼이지만 살과 살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튀기는 링 위에서의 쇼는 리얼이다. 이것은 연기자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더 확장해서 보통 사람들이 해나가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그 노동 속에서 나이들어가는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은 그 슬픈 육체에 보내는 연민마저 헤드락 한 판으로 날려버리는 그 쿨함에 있다.

'벤자민 버튼...',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인간의 욕망. 전쟁에서 죽어 돌아온 자식을 앞에 둔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고, 시간에 종속되어 늙어가다 이제는 죽음만을 눈앞에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이 영화는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욕망이 실현됐을 때 과연 우리는 시간을 넘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원작소설이 가진 유쾌함은 데이빗 핀처 특유의 진지함으로 바뀌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종속되어버리는 벤자민 버튼의 상황을 보여준다.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의 무차별성은, 아마도 이 영화의 초반부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 땅의 아들들을 다시 고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거꾸로 돌아가는 영상을 끼워넣은 데이빗 핀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화 또한 아무리 거꾸로 돌려도 시간에 종속되기 마련이니까.

'왓치맨', 세상은 구원할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래픽 노블의 정수라고 불려온 '왓치맨'은 세계를 위협하는 적과 그 세계를 구원하는 신적 존재가 등장하는 수퍼히어로 등식 속에 끼워넣어지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적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인류이고, 수퍼히어로는 구원자라기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에 가깝다. 유일한 초월적 존재(신은 아니고 초인에 가깝다) 닥터 맨해튼은 왜 자신들이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에 빠진다. 세상을 구원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슈퍼히어로의 비관적 고민은 그간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판단해왔던 정의의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왓치맨'은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진지한 질문을 던졌던 '다크나이트'의 계보를 잇는 영화다.

불황이 가져온 불안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욕망하게 만든다. 가벼운 주머니로 짧게 나마 현실을 빠져나와 그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들 영화들이 가치를 갖는 이유다.

‘카인과 아벨’, 의드의 경계를 넓히다

의학드라마가 힘을 발하는 이유는 도시 속에서 그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야생의 도전을 인공의 안락함으로 변모시킨 도시적 삶 속에서, 생과 사의 문제가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바로 병원이다. 과거 야생에서 삶을 도전 받았던 삶과 달리, 도시인들의 삶은 병원에서 시작해 병원에서 끝난다 해도 이제는 그다지 틀린 얘기가 아닌 시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병원이라는 공간에 포획되는 것이 당연할까.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은 그러나 ‘카인과 아벨’을 만나면 한갓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인과 아벨’은 병원 밖에서도 의드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다.

이초인(소지섭)의 전공이 응급의학과라는 사실은 이 의드가 그리는 공간이 단지 병원 내 응급실이라는 공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암시한다. 병원 밖에서도 얼마든지 응급 상황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의드가 주목하는 생과 사의 긴박한 순간들을 응급실 바깥에서도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 점은 그다지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상은 여러 장르들이 뒤섞이게 되는 ‘카인과 아벨’에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이초인이 중국에서 기억상실의 시간 속에 액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을 때, 그가 가진 응급의학이라는 경력이 없다면, 한편으로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국내에서의 병원이야기(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와의 봉합은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초인은 중국의 야생 상황에서도 병원에 갈 수 없는 탈북자인 오영지(한지민)를 수술해주고, 기억상실이 된 채 탈북자 신세가 되어 쫓기는 상황에서도 동료를 야생에서 수술해준다. 그는 병원 바깥에서도 여전히 의사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수술대 앞이 아니라도 메스를 든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거꾸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으로 변모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중국 공안에 잡혀 수용소에서 거구와 벌이게 되는 죽음의 대결에서 오강철(박성웅)은 이초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같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때려서는 안 되는 곳이 있지. 거길 때려라.” 이것은 의드의 새로운 변용이다.

물론 ‘카인과 아벨’은 후에 다시 병원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의드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초인의 응급의학이라는 전공은 형인 이선우(신현준)의 뇌의학과 병원 내 권력 구도를 두고(물론 그 밑에는 복수극의 전제가 깔릴 것이 분명하다) 각을 세울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응급의학이라는 이 의드의 새로운 선택은 탁월했다 생각된다.

지금까지 의드의 선택은 거의 대부분이 그 중심에 외과(그 중에서도 흉부외과)를 두고 있었다. ‘하얀거탑’이 ‘외과의사 봉달희’가 그리고 ‘뉴하트’가 그랬다. 이렇게 된 데는 외과가 가장 생명과 직결되고 힘겨운 과이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면받는 과로서 의학의 본령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의드의 계보를 세울 수 있을 정도가 된 상황에서 의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것은 새로운 장르와의 결합이 될 수도 있고, 의학의 새로운 분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카인과 아벨’은 이 두 가지를 응급의학의 선택을 통해 넘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촬영지 관광, 노동마저 상품화되는 세상

인디언들은 사진에 찍히면 영혼을 잃는다고 생각했다. 비합리적이라 생각될 수 있는 이 말은 그러나 지금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경상북도가 관광상품화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밝힌 ‘워낭소리’의 촬영지는 그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여주었던 노동을 증발시키고, 전시되는 상품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노동마저 상품화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워낭소리’가 대중들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은 그 영화가 주목했던 이제는 실종되어버린 진정한 노동의 발견 때문이었다. 소를 부려 짓는 농사를 고집하는 할아버지와, 그 할아버지와 함께 묵묵히 일생을 살아온 소는 그 노동을 증명해온 끊이지 않는 워낭소리만을 여운처럼 남긴 채 사라져 갔다. 그 워낭소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실종된 노동 속에서 소처럼 일하다 사라져버린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며 대중들의 가슴 속에도 울려 퍼졌다.

하지만 ‘워낭소리’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며 신드롬이 되는 순간(어쩌면 카메라에 담겨 그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으로 노출되는 순간부터였는지도 모른다), 그 카메라가 포착한 공간의 아우라는 휘발되어 버렸다. 그 곳은 영화가 보여주었던 노동의 현장이기를 거부하고, 도시인들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대의 카메라는 저 인디언들이 터부시하며 말했던 것처럼, 확실히 그 대상의 영혼을 빨아들이는 마법(?)을 발휘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이런 ‘워낭소리’의 사례는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한 산골소녀가 미디어에 노출되는 순간, 그 상업적 물결에 휩싸여 고통받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맨발의 기봉이’의 실제 인물인 기봉씨는 영화화된 후, 유명세로 고통받다가 결국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를 떠났고 그렇게 한참을 돌아서 이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다. 카메라가 포착한 시골의 그 순수함들은, 바로 그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부터 사라지게 될 운명에 처했던 것이다.

이것은 현재 TV 속에서도 진행되는 현상이다. 시골이 가진 그 순박한 모습은 이제 도시인들의 향수의 공간이 되었고, TV는 이제 그 공간들을 안방으로 날라다 주고 있다. 흔히 여행 버라이어티 속에 잡혀진 시골들에서 그 본질적인 모습들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속에서 시골 노동의 현장은 그저 병풍처럼 배경이 되거나, 도시인들의 놀이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다. 카메라가 도시에서 떠난 자들의 하룻밤을 포착하는 그 버라이어티쇼의 공간들은 그 순간부터 도시의 논리에 복속되기 시작한다.

촬영지의 상품화는 이제 문명화의 끝단에 서서 그 골동품적 취향으로 변질되어 도시화 되어가는 현 시골의 상황을 보여준다. 도시화되어야 살아갈 수 있는 현재의 불균형한 경제조건 속에서 ‘워낭소리’ 촬영지의 관광상품화에 대해 동의해준 최 할아버지 가족들의 처지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 마지막처럼 보이는 공간을 포착해 대중들의 마음을 울려준 그 영화가 거꾸로 그 공간을 잡아먹는 상황이 달갑게 보이지는 않는다.

‘1박2일’, ‘리얼’을 ‘실패’가 입증하다

누구나 소풍 전 날, “내일은 꼭 비가 오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빌었던 기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여행은 날씨에 민감하다. 또 변수도 많다. 갑작스런 폭설로 발이 묶이기도 하고, 우연한 사고(?)에 일정이 모두 바뀌기도 한다. 길에서 만난 사람과 생각지도 않은 경험을 하기도 하고, 그 경험을 통해 뜻밖의 재미를 얻기도 한다. 그것이 진짜 여행의 참 맛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여행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특별한 설정 없이도 그 낯선 장소로 떠나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든 벌이지게 마련이다. 그걸 촘촘히 발견해내고 때론 캐릭터가 그 발견된 상황을 강화하면서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자연스럽게 그 리얼이 주는 재미를 선사할 수 있다.

야생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1박2일’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야생과 캐릭터들이 자연스럽게 엮일 때다. 박찬호와 강호동이 대결하듯 한겨울 계곡 물에 들어가는 장면은 인물들 간에 형성된 미묘한 신경전과 함께, 마침 그 장소, 그 시간에 존재하는 얼음장같은 계곡물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물론 여기에도 인위적인 부분이 존재한다. 본질적으로 ‘1박2일’은 버라이어티쇼라는 의식은 어떤 식으로든 웃음의 포인트를 현장에서 찾아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강호동은 출연진들을 때론 윽박지르고 때론 다독이면서 지나치는 연못에 뛰어들게 만들어, 그 연못을 승기 연못으로 만들어버린다.

제주도로 가기로 되어있던 상황에서 비행기 결항으로 계획이 무산되어 대신 가게된 을왕리 해수욕장에서 그들은 웃음을 주기 위해 바닷물에 뒹구는 몸 개그를 위한(?) 게임을 해야한다. 하지만 이 정도의 인위적인 부분은 그것이 여행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수긍하게 된다. 여행이라는 일탈 속에서는 평소에 하지 않던 행동도 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제 거의 모든 프로그램들이 리얼을 표방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이러한 리얼의 요소들은 묻혀져 버렸다. ‘무한도전’의 끝없는 도전은 이제 굳이 리얼이라고 붙이거나 붙이지 않거나 상관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무한도전’이기 때문에 주목되는 것이지, 이제 더 이상 리얼 버라이어티이기 때문에 주목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 ‘무한도전’에서 시도했던 좀비 특집, ‘28년 후’는 그 실패를 통해 오히려 ‘무한도전’의 리얼 상황을 드러내주었다. 김태호 PD는 실패에 대해 연거푸 사과하며 시말서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했지만, 바로 그 상황이 ‘무한도전’이 가진 실험정신과 리얼리티를 상기시켜 주었던 것.

이것은 ‘1박2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제주도에 촬영팀들을 전부 보내고, 자신들은 영종도에 발이 묶여 을왕리로 발길을 돌릴 때, 이 애초의 목적 실패는 이 프로그램이 진짜 리얼이라는 것을 거꾸로 드러내주었다. 이제 모두가 리얼이라 주장하는 시대에, 오히려 리얼이 드러나는 대목은 버라이어티쇼가 어떤 목적의 실패를 했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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