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에 대한 상업적 조명이 가진 위험성

‘워낭소리’가 1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간다는 기사가 하루가 멀다 않고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양상은 마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관객몰이 하듯 쏟아내던 수치와 유사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 결과는 그러나 수많은 것들을 바꾸어놓았다. ‘워낭소리’에 등장한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사생활 침해와 성공에 따른 수입에 관련된 소문들은 독립영화로서 갖고 있던 진정성의 아우라마저 휘발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오마이뉴스 주최로 열린 특별 상영회에 참석한 이충렬 감독은 이런 상황에 대해 “관객이 늘어날수록 무섭다”며 “차라리 잠적하고 싶다”는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워낭소리’가 독특한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여전히 소를 이용한 농사를 고집하고 있는 할아버지와 소를 조명했다는 데 있다. ‘워낭소리’는 사실 다큐멘터리 영화로서는 연출의 의도가 꽤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이다. 물론 연출해서 찍었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의도가 드러나는 장면을 포착했다는 이야기다. 소가 눈물을 흘리고, 소와 함께 할아버지가 보조를 맞춰 걸어가고, 소와 할아버지가 힘겹게 농사를 짓는데 뒤편에서 기계로 농사를 짓는 장면이 겹치는 장면 같은 것들은 카메라의 앵글 자체가 의도로서 끼여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작위적인 느낌의 영상연출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의 기획의도인 할아버지와 소를 조명한 그 마음, 진정성을 통해 모두 덮어지고도 남음이 있다.

따라서 이 진정성이 유지되려면 현실과 영화 사이에 변함 없는 관계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 이것은 원본(현실)과 복제(영화)가 어느 정도의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복제 속에서도 여전히 아우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 진정성이 유지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복제가 원본을 위협하는 시뮬라크르의 세계 속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이충렬 감독과 나아가 독립영화라는 현실은 거꾸로 대박이 나면서 상업적 성격으로 둘러싸인 ‘워낭소리’의 공격을 받는 입장이 되고 있다.

독립영화에 있어서 진정성의 힘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가난하다는 것은 거꾸로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되어버린 작금의 세상에서, 독립영화의 가난함은 자본논리를 넘어선 어떤 진정성을 담보하게 된다. 물론 그 가난함이 지금처럼 처절한 생존의 문제로까지 와 있는 독립영화의 상황이 긍정적이라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 생존을 넘어서 대박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과도해지는 상업적 논리의 개입이다.

지금껏 별 관심을 주지 않았던 독립영화에 갑자기 쏟아지는 정치적, 경제적 관심은 자칫 독립영화라는 본래의 순수한 형태를 왜곡할 수 있다. 대통령이 영화를 찾아서 보고, 문화부장관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한 개인의 취향으로서는 이해되는 일이나, 그 위치가 가지는 무게감을 생각해보면 그 순수함을 왜곡시키는 엉뚱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독립영화도 대박을 터트릴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은 실로 위험하다 할 수 있다. 상업적 성공이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벌어질 수 있는 상업적 계산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흔히들 인류학의 문제를 지적할 때, 원주민의 삶을 파헤쳐 보겠다는 그 시도 자체가 원주민의 삶을 바꿔버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말하곤 한다. ‘워낭소리’가 지금 처해 있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할아버지와 소가 보여주는 실종된 노동의 숭고함과 그것을 잡아내면서 그 숭고함에 동화되어버린 독립영화로서의 ‘워낭소리’는 이제 거꾸로 영화의 엄청난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워낭소리’의 상업적 성공에 대한 주목이 아니라, 독립영화의 하나로서 갖게 되는 그 진정성에 대한 가치 조명이 아닐까. ‘워낭소리’의 제작자인 고영재 PD는 심지어 자신의 부모님조차 얼마를 벌었느냐고만 묻는 작금의 상황에 대해 “지금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 자신이 일하고 있는 가치”라고 말했다.

독설의 홍수, 내우외환 겪고 있는 ‘상상플러스’

처음 ‘상상플러스’가 시작되었을 때 그 제목에는 당대 인터넷의 언어문화를 TV 프로그램으로 껴안겠다는 기획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즉 상상을 덧붙인다는 그 의미 속에는 이른바 댓글 문화에 대한 이 프로그램의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하나의 코너로 만든 것이 댓글방의 활용이었다. 스타들에 대한 재치 넘치는 댓글들을 포스트잇으로 방 한 가득 붙여놓고 거기서 몇 개를 골라 그걸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은, 자연스레 네티즌들의 참여를 이끌었고, 이로써 ‘저들끼리의 이야기’로만 치닫던 당대의 토크쇼에 참신한 변화를 제공했다.

뉴미디어의 등장과 그로 인해 변해 가는 언어에 대한 ‘상상플러스’의 관심은 곧바로 ‘세대공감 올드 앤 뉴’로 이어졌다. 당시 건전한 KBS의 방송이미지에 걸맞는 이 프로그램은 기성세대의 언어와 신세대의 언어 사이에 교량역할을 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인포테인먼트에도 잘 편승하는 형식이었다. 세대 간의 공감대를 넓힌다는 좋은 취지 하에 출연진들은 맘껏 놀 수 있는 멍석이 마련되었다. 노현정 아나운서를 중심에 세워 유지한 말에 대한 엄정함은 몸 개그와 부적절한 언어가 난무하는 출연진들의 경박함에 어떤 긴장관계를 만들며 균형을 잡히게 했다.

하지만 ‘상상플러스’의 추락은 바로 그 엄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투여된 노현정 아나운서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연예인화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포테인먼트로서의 정보와 재미 중에 점점 재미에 경도되게 되면서 ‘상상플러스’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그것은 또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흔들어 만들어낸 인기일 뿐이었다. 긴장감은 흐트러졌고 노현정 아나운서가 빠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인기가 급하락하면서 ‘상상플러스’는 말에 대한 관심을 버렸고, 그러자 과거 그 프로그램이 벗어나고자 했던 말장난으로 회귀했다.

‘놀이의 탄생’같은 몸 개그로의 변신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 ‘상상플러스’는 먼 길을 돌아 다시 말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지금의 이지애 아나운서가 자리한 ‘상상우리말더하기’라는 코너다. 하지만 이 돌아온 탕아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그 동안 ‘상상플러스’가 내적으로 겪은 그 일련의 과정들, 즉 아나운서가 연예인화되고, 인포테인먼트가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하는 그 과정이 프로그램 외부에서도 진행되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세대공감 올드 앤 뉴’가 나왔던 그 시절만 해도 아나운서의 권위는 여전했고 따라서 그들이 구사하며 굳건히 지키고 있던 방송언어의 권위도 여전했다. 물론 방송사에서 독립해 연예활동을 하던 아나운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발적인 아나운서들의 변신이 일반화된 시점은 정확히 노현정 아나운서가 인기의 극점에 있었던 그 시기와 일치한다. 이 변화의 시기부터 아나운서들은 더 이상 우리 말의 최후의 보루를 잡고 있는 권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예인 혹은 방송인의 하나로 그 존재를 낮춰오기 시작했다.

이 아나운서들의 변신이 말해주는 것은 그것을 용인해주는(혹은 권장하기까지 하는) 방송사의 달라진 말에 대한 태도를 말해주기도 한다. 아나테이너들은 보도와 뉴스 속에서 엄정함을 유지하기보다는 쇼 프로그램 속에서 춤을 추고 끼를 발휘하는 방송인으로 활약했고, 이렇게 달라진 방송사의 태도와 리얼리티가 강조되는 방송 환경이 만나자 권위를 포기한 방송언어는 막말과 독설로 변질되어 갔다. 아나운서의 변신은 그 자체가 방송언어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예고했던 징후들이다.

‘상상플러스’가 내우외환을 겪게 되는 것은, 이 외부적인 변화(독설의 트렌드화 같은) 속에서 어떤 적응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결국 내부적인 문제까지 도출하게 되는 그 악순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를 다룬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 각종 막말 논란에 휩싸이게 되는 이 아이러니는, 이제는 권위를 잃어버린 아나운서와의 사라진 긴장감이 그 문제의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형식이 무의미해지면, 그 속의 인물들은 과도해지거나 무성의해지기 마련이다.

‘상상플러스’의 끝없는 추락은 한 토크쇼의 부적응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아나운서에 대한 인식의 변화, 나아가 방송사가 언어를 생각하는 인식의 변화 같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남긴다. 이제 막말까지 치닫는 방송언어 환경 속에서, 그저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상상플러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 지도 모른다.

‘워낭소리’와 막장드라마, 그 불황기 영화와 드라마의 상반된 선택

이미 60만 관객을 넘어서 독립영화로서는 꿈의 1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 ‘워낭소리’.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사람을 닮아버린 소가 함께 걸어가는 그 느린 걸음걸이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한편 수줍게 “좀 하는” 영화라며 지난 겨울 살며시 다가 온 ‘과속스캔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현재 8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블록버스터의 화려한 외관들 속에서 수수한 얼굴로 다가온 ‘과속스캔들’은 따뜻한 가족애를 그리며 불황기 찬바람에 서늘해진 관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진정성을 선택한 영화, 막장을 선택한 드라마
어찌 보면 이 두 영화의 성공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작은 영화들의 반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타고 전해진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불황기 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까지 보여진다. 극장 밖에서 세파에 흔들리며 버티던 관객들은 극장 속 몇 천 원의 도피처 속에서 위안과 성찰을 요구했다. ‘과속스캔들’은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하는 소시민들에게 “아직 당신은 꽤 하는 사람”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워낭소리’는 먹고살기 급급한 현재, 오히려 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노동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해주는 감동의 시간을 선사했다. 실로 진정성의 성공이었다.

반면 같은 불황기 속, 안방극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2월9일자 일일 시청률표를 보면 그 1위가 SBS의 ‘아내의 유혹(34.3% AGB닐슨 자료)’, 2위가 KBS의 ‘꽃보다 남자(26.2%)’, 3위가 MBC의 ‘에덴의 동쪽(23.3%)’이다. 이것은 지난 한 주의 주간 시청률과 거의 같은 결과(주간시청률에는 SBS의 주말극장 ‘유리의 성’이 하나 떠 끼어있을 뿐이다). 이 시청률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방송3사의 대표주자가 바로 드라마라는 점이며, 그 드라마들은 막장이라 불려지거나, 각종 논란 속에 허우적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느리게 걷는 ‘워낭소리’와 속도에만 편승한 ‘아내의 유혹’
영화가 선택한 진정성, 드라마가 선택한 막장. 불황에 대한 이 상반된 선택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이것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서로 다른 매체성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이것은 두 매체의 과금 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는 순수하게 관객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매체인 반면, 드라마는 시청률이라는 간접적인 잣대를 통해 광고로 수익을 얻는 매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요구는 당연히 영화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그것이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면 드라마는 작품성보다는 화제성에 더 치중하게 된다. 즉 완성도가 떨어져 욕을 먹으면 영화로서는 사형선고가 될 수 있지만, 드라마로서는 오히려 논란을 통한 시청률 상승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완성도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워낭소리’와 ‘아내의 유혹’의 상반된 속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워낭소리’의 속도는 말 그대로 소걸음에 가깝다. 그 느린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담히 쌓아놓은 것이 ‘워낭소리’의 미덕이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작품의 개연성이나 인물의 일관성 같은 것마저 휘발시킬 정도의 속력으로 자극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속도감은 지속적인 자극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성도의 구멍을 메워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영화처럼 불황기 속에서 어떤 진정성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4부작이었지만 호평을 받았던 ‘경숙이, 경숙아버지’에 쏟아진 찬사는 여전히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서도 어쩐 진실된 감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상관없는 시청률의 양적 판단에만 의존하는 작금의 드라마 시스템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언제까지 욕하면서 보는 이 병적인 시청으로 휘둘려야 할까. ‘워낭소리’처럼 그 따뜻한 울림이 대중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드라마에서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막장’과 ‘국민’이라는 용어, 남용되고 있다

막장. ‘갱도의 막다른 끝’. 흔히 ‘갈 데까지 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최근 드라마들이 불륜과 자극적인 설정과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는 스토리를 반복하면서, 이 말은 그런 드라마들을 지칭하는 접두어가 되어버렸다. 이 ‘갈 데까지 간’ 드라마에 대한 반발심이 ‘막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 ‘막장’이라는 용어는 실로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오히려 ‘막장’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일찌감치 막장의 전염병을 터뜨리고 화려한 시청률로 사라진 ‘너는 내 운명’을 비롯해, 현재 그 스피디한 전개로 실험성까지 바라보게 되는 ‘아내의 유혹’이 그 대표주자. 이제 이 전염병은 일일드라마나 가족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에덴의 동쪽’이나 ‘꽃보다 남자’같은 미니시리즈 같은 프라임 타임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문제는 마구 사용되는 ‘막장’이란 용어의 남용이다. 자극적인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지적하는 ‘막장’이라는 극단적 표현은 지나치게 남용되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시청자들을 ‘막장’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일부 세대가 극단적으로 욕하지만 여전히 그 수요층(그것도 강력한 충성도를 가진)이 존재하는 이들 드라마들의 상업성은, 익숙해진 막장을 더욱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막장드라마는 그 본질인 조악함을 그 상업적으로 변모한 용어 아래 숨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장’이라는 용어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남용되던 ‘국민’이라는 용어와 만나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낸다.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로도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시청률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은 질적인 판단이 아니라 양적인 판단(시청률)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고, 막장드라마가 그 시청률에 도달하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 동거하게 되었다. ‘아내의 유혹’에 혹자는 이렇게 이름 붙였다. ‘국민막장드라마.’

‘국민’이라는 질적인 판단으로 불려져야할 용어가 어느 순간부터 양적인 판단으로 그 의미를 남용하게 되면서 그것이 양적인 팽창(시청률 확보)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막장’이라는 단어와 만나고, 그렇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라는 본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야할 용어가 아주 가깝게 다가와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막장’이라는 용어는 이제 그 부정적인 질을 질타하는 용어에서 양적인 성공을 상찬하는 용어로 변질되고 있다.

‘국민’이나 ‘막장’과 같은 드라마에 붙는 말들은 둘 다 모두 질적 판단으로 등장한 용어이다. 전자가 그 질의 긍정적 측면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그 부정적 측면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지금 모두 양적인 의미로 변질되고 있다. ‘막장’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 않고(오히려 상업적으로 성공한 드라마로 보이게 된다), ‘국민’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 질적인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시청률이란 잣대가 가진 진짜 무서운 얼굴이 아닐까. 이제 이들 막다른 길을 달리는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은 용어의 차원을 넘어 좀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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