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의 디바>로 우영우를 잇는 응원을 선사한 박은빈

무인도의 디바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늦깎이 바이올리니스트 역할을 연기하게 되면서 유튜브에 올린 ‘바이올린 연습일지’에서 박은빈은 전공생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를 연기해내야 하는 고충을 이야기하며 그렇게 말한 바 있다. 몇 개월 동안의 짧은 기간 동안 쉬지 않고 바이올린 연습을 해 놀라울 정도의 연주를 보여준 그 영상에서 툭 튀어나온 이 말은 배우 박은빈의 명대사가 되었다. 그건 매번 도전적인 연기에 임하는 박은빈의 마음가짐을 그대로 대변하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에서도 박은빈은 극중 가수로 성장해나가는 서목하를 연기하며 등장하는 노래들을 직접 모두 불렀다. 그 노래들(모두 11곡)은 OST에 담겨져 음반으로 출시됐는데(1월5일 발매), 이를 위해 박은빈은 6개월 간 3시간씩 43번의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역할에 맞게 기타도 배우고, 노래 발성 연습도 했다. 또 녹음실에서 적게는 4시간에서 많게는 10시간까지 녹음을 하며 음반 작업을 했다고 한다. 배우지만 거의 가수 데뷔 같은 도전적인 노력을 했던 거였다. 아마도 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박은빈은 역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어쩌겠습니까? 해내야죠.

 

그런데 이 말에는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청춘들에 대한 공감과 응원이 담겨있다. 즉 너무나 버거운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청춘들에게 그 힘겨움에 대한 공감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포기하지 않으면 해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5살 때 아동복 모델로 시작해 연기를 하게 된 후 지금껏 쉬지 않고 그 길을 걸어온 박은빈이 그 실제 사례가 되는 셈이다. 그녀는 매번 도전 아닌 연기가 없었을 정도로 쉽지 않은 역할을 하나하나 해내면서 결국 백상예술대상 대상에 빛나는 최고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지 않았던가. 

 

<청춘시대>에서는 차분하고 단단한 자신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된 음주가무, 음담패설에 능수능란한 역할에 도전했고, <스토브리그>에서는 속이 뻥 뚫리는 걸크러시를 보여주는 주도적인 프로야구 프런트 오피스 유일의 여성 운영팀장 역할을 소화했다. 그러더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는 이 두 캐릭터와는 또 완전히 다른 청순하고 내셩적이며 수줍음 많은 늦깎이 대학생 역할로 변신했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고 이제 활짝 피어난 박은빈의 시작이었다. <연모>에서는 역사적 사실 때문에 남자배우가 연기할 수밖에 없는 사극의 왕 역할을 연기했는데, 그건 액션부터 정치, 로맨스까지 넘나들어야 하는 난관을 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박은빈은 이제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라는 또 다른 산을 넘는다.

 

그런데 이들 작품 속 캐릭터들을 관통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위로와 응원이다. <청춘시대>에서 어디로 튀어도 청춘은 아름답다고 캐릭터 자체로 말해준 송지원이 그렇고, <스토브리그>에서 위태로운 야구단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백승수(남궁민) 단장을 든든하게 받쳐주는 이세영이 그러했으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평범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청춘들을 지지한다고 온몸으로 말해주는 듯한 채송아가 그랬다. 또 박은빈은 <연모>에서 여성이라는 정체를 숨긴 채 피 튀기는 궁중 생존기를 겪는 이휘를 통해 차별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대여성들을 응원했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장애를 갖고 있지만 변호사로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우영우를 통해 편견 없는 세상을 지지했다.

 

그래서였을까. <무인도의 디바>의 서목하는 극중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위로와 응원의 아이콘’으로서 박은빈 자체로 보이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한 때는 디바로 불렸지만 지금은 한물 간 기성가수가 되어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가는 윤란주(김효진)에게 서목하가 던지는 무한 응원이 그렇다. “시상에 언니 팬이 딱 하나 남았다고 하믄, 언니, 응? 그것은 서목하고요. 언니 팬이 없다고 하믄 그것은 이 서목하가 세상에 없어져 붓다 치면 돼요, 언니. 언니, 지는요 언니. 언니를 위한 것은 뭣이든 해요, 언니. 어 풍선 그깠거 불라믄 천 개, 만 개도 불어요, 언니. 일도 아니어요, 언니. 그니까요 언니 응? 힘내 불어요잉.” 그 말은 마치 저마다 힘겨운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서민들에 대한 응원처럼 들렸다. 박은빈은 그렇게 서목하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를 위로하고 응원하고 있었다. 

 

실로 박은빈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로 2020 SBS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받았을 때 자신이 연기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극중 송아가 ‘음악을 하기로 선택했으니까 음악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라는 대사는 했는데요. 저도 배우가 되기를 선택했으니까 제가 선택한 작품이 그리고 제가 하고 있는 일이 누군가에 위안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연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로 백상 예술 대상 대상을 받았을 때도 그의 수상소감에는 세상의 많은 다양하고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응원의 목소리가 실렸다. “가장 좋아하는 대사는 제 삶은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있고 아름답습니다. 라는 대사였는데요. 영우를 통해 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어서 너무 기뻤습니다. 나는 알아도 남들은 모르는, 또 남들은 알지만 나는 알지 못하는 그런 이상하고 별난 구석들을 영우가 가치있고 아름답게 생각하라고 얘기해주는 것 같아서 많이 배웠습니다.”  

 

도전적이고 경쟁적인 세상이다. 최후의 1인이 모든 걸 독식하는 현실 속에서 무수히 많은 소외되는 이들이 생겨난다. 그래서 누군가의 응원이 절실해진다. 당신은 여전히 잘 살아가고 있고, 힘겹지만 결국은 해낼 거라는 응원. 박은빈은 자신 또한 결코 쉽지 않았지만 결국은 해냈던 여러 역할들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를 응원한다. 그만큼 진정성이 담겨 있기에 그 역할의 대사들은 더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그녀는 이것이 배우로서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대단하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건 마치 <무인도의 디바>에서 변함없는 응원을 받았던 윤란주가 서목하에게 갖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나 아닌 누군가를 온전히 응원하는 건 정말 어려워. 아무 대가 없이 질투 없이 남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건 더 어렵고. 그게 목하 니가 대단한 이유야.”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박은빈처럼. (글:국방일보, 사진:tvN)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 12번의 다른 삶이 꺼낸 재미와 의미

이재 곧 죽습니다

한 작품 안에 이토록 다양한 장르가 겹쳐진 드라마가 있었을까. 멜로와 스릴러가 결합하고 사극과 멜로가 더해지는 식의 멀티 장르는 있었지만, 장르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은 처음이 아닐까 싶다.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의 신박한 세계다. 

 

뻔한 취준생의 회귀물인 줄 알았다면 오산

그 어렵다는 태강그룹 최종면접까지 갔지만, 면접날 눈앞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한 남자를 마주한 후 그 충격에 망쳐버린 면접에서 떨어진 이재(서인국)는 그 후로 절망적인 취준생의 삶을 살아간다. 알바를 전전하며 여자친구 지수(고윤정)에게 변변한 밥 한 끼 사지 못하는 처지에, 알바로 번 돈 전부를 투자 사기를 친 친구 때문에 다 날려버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자친구가 웬 남자랑 차에서 내리는 걸 보고는 남자친구라 생각해 이별을 통보하고, 집세를 내지 못해 쫓겨날 처지가 된다. 그리고 기대했던 태강그룹 최종면접의 결과는 또 불합격. 절망의 끝에서 이재는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는 게 두렵지 죽음 따윈 전혀 두렵지 않다.”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는 이처럼 첫 회 시작한 지 15분 정도가 지난 후 주인공인 취준생이 절망의 끝에서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이 죽음이 끝일 리 없다. 죽었다 생각한 그는 곧 태강그룹의 둘째아들 재벌3세 박진태(최지원)로 깨어난다. 그것도 개인 전용 비행기 안에서. 그런데 그 옆에는 미스테리한 여인 죽음(박소담)이 그를 쳐다보고 있다. 죽음은 지옥으로 가는 이재를 붙잡아 그가 저지른 죄에 대한 벌을 주겠다고 한다. ‘죽음 따윈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한 이재에게 죽음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알려주겠다고 한다. 그건 12번의 죽음(혹은 삶)을 경험하게 해주겠다는 것. 그래서 첫 번째로 다시 깨어난 게 바로 박진태의 몸이다. 이재는 개인 전용 비행기까지 타고 있는 이 인물의 다른 삶으로 깨어난 데 대해 쾌재를 부르지만 그것도 잠시 비행기는 엔진에 불이 붙으면서 추락하기 시작한다. 살려고 발악하지만 그는 온 몸에 불이 붙은 채 사망한다. 그리고 깨어난 곳은 지옥으로 가는 길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이다. 죽음은 그에게 죽을 위기에 처한 또 다른 새로운 삶 속으로 그를 보낼 것이라 하고, 거기서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다짜고짜 이재의 머리에 권총을 쏜다. 

 

두 번째로 깨어난 몸은 익스트림 스포츠 선수 송재섭(성훈)이다. 그는 낙하산 없이 추락해 안전그물이 쳐진 곳으로 무사히 떨어지면 30억의 후원을 받게 되는 미친 미션을 위해 하늘에서 낙하하는 중이다. 잠시 희망을 가졌지만 허무하게 맨땅에 쳐박고 사망하게 된 이재는 그런 식으로 제3, 제4의 삶을 계속 맞이하게 된다. 죽는 순간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는 ‘회귀물’의 공식을 따르고 있지만, 자신이 아닌 다양한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점에서 그 서사는 인물들마다 색달라진다. 게다가 그가 들어간 타인은 곧 죽을 위기에 처한 이들이다. 그러니 그 서사의 긴박감도 높아진다. 뻔한 취준생의 아픔을 되돌리는 회귀물처럼 보였던 이 작품은 그 첫회만에 색다른 세계관을 꺼내놓으며 신박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재난, 액션, 학원물, 조폭누아르, 멜로까지... 장르 종합선물세트

흥미로운 건 이재가 회귀하게 된 인물에 따라 다른 서사와 더불어 장르도 변주된다는 점이다. 박진태가 짧은 재난물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면, 송재섭은 익스트림 스포츠가 등장하는 액션 코믹물의 볼거리를 제공한다. 세 번째 몸으로 회귀한 권혁수(김강훈)는 열일곱살 고등학생으로 일진들의 상습적인 학교폭력을 겪고 있는 피해자다. 그런데 그 몸에 들어간 이재는 취준생의 어른이었다는 점에서 이 폭력을 그냥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그는 머리를 써 학교폭력 가해자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는 사이다 전개를 보여주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학원액션물의 장르적 재미를 선사한다. 네 번째 몸으로 회귀한 이주훈(장승조)은 조폭 해결사로 위기에 처한 보스의 여자를 구해 달아나는 중이다. 당연하 조폭 느와르의 논스톱 추격 액션이 펼쳐진다. 그러더니 다섯 번째 몸으로는 격투기 선수 지망생으로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 뺑소니친 재벌3세를 대신해 감옥에 가게 된 조태상(이재욱)으로 깨어난다. 이제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장르물이 펼쳐진다. 

 

한 마디로 장르 종합선물세트라고 다양한 새로운 인물들의 삶을 살지만, 흥미롭게도 그 삶들의 겹쳐지는 부분들이 생긴다. 즉 세 번째 삶에서 권혁수를 그토록 괴롭히던 이진상(유인수)이 다섯 번째 삶에서 감옥에 가게 된 조태상의 같은 감방으로 들어오게 되는 식이다. 이러니 세 번째 삶과 다섯 번 째 삶에서 두 사람의 입장은 뒤집어진다. 권혁수로서는 피해자였지만 감방의 짱인 조태상으로서는 이진상에게 복수를 할 수 있는 가해자 입장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재가 죽기 전 헤어졌던 여자친구 지수의 진심을 알게 되는 멜로적 순간들도 등장한다. 모델 장건우(이도현)로 새 삶을 살게 되면서 카페를 찾아오는 지수를 만나게 되면서다. 이재지만 장건우라는 몸으로 깨어난 입장이라 눈앞에 너무나 사랑하는 지수를 두고도 다가갈 수 없는 그 절절한 멜로가 그려진다. 다시 새로운 삶으로 깨어나고 죽기를 반복한다는 세계관을 통해 다채로운 장르물의 묘미가 펼쳐지는 것. 요즘처럼 여러 장르들에 익숙한 시청자들로서는 그 다양한 맛을 이 작품 하나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한 자리에 모인 배우 유망주들

12번의 다른 삶을 산다는 세계관은 또한 12명의 배우 유망주들을 한 자리에 끌어 모았다. 서인국과 박소담을 중심으로, 최시원, 성훈, 김강훈, 장승조, 이재욱, 이도현, 김재욱, 오정세 같은 배우들이 이재가 깨어난 새로운 몸의 주인공들로 열연했고, 여기에 고윤정, 김지훈, 김성철, 유인수, 려운 같은 배우들도 가세했다. 이들은 물론 이미 대세배우로 자리매김한 인물들도 있지만 그보다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이 더욱 큰 배우들이라는 점에서 ‘유망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어쩌면 향후 몇 년이 지난 후, 각각 저마다의 작품을 통해 톱배우가 된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인 작품으로서 <이재, 곧 죽습니다>가 거론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만큼 이 드라마는 다양한 개성과 매력을 가진 배우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12번의 죽음 혹은 삶을 회귀하는 것으로 <이재, 곧 죽습니다>가 하려는 이야기는 뭘까. 그건 애초 이재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며 던졌던 “나는 사는 게 두렵지 죽음 따윈 전혀 두렵지 않다”는 그 말이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 뒤집혀가는가에 담겨 있다. 즉 이재는 계속되는 죽음을 맞이하며 어느 순간 점점 살고 싶은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죽음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나를 우습게 본 죄에 대한 벌을 내리겠다고 한 것처럼, 절망 속에서도 죽음이 결코 쉽게 할 선택은 아니라는 걸 이 작품은 매 번 새로운 삶 속에서 보여준다. “처음에는 엄청 억을했는데 스스로 인생 망쳐버리고 죽음이란 감옥에 갇히게 된 걸 후회해. 너무 늦게 알았는데.. 지옥을 보고 나니까 살아있는 거 자체가 기회였더라.“ 조태상의 몸으로 회귀한 이재가 툭 던지는 이 말 속에 그 의미가 담겨있다. 다채로운 장르물의 스펙터클과 치고받는 서사의 묘미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드는 몰입을 선사하면서도, 일관된 메시지의 의미를 놓치지 않는 작품이다. 많은 회귀물들이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이미 흔해진 상황이지만, 익숙한 틀도 계속 진화할 수 있다는 걸 이 작품은 색다른 세계관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진:티빙)

<소년시대>로 또다시 청춘의 날개 편 완생의 배우

소년시대

“14살 된 내 아이가 나이에 맞지 않은 성숙함을 보일 때 짠한 마음이 있는데 임시완에게서 그런 연민을 느낀다.” <미생>의 원작자 윤태호 작가가 한 매체와 인터뷰 중 했던 이 말은 임시완이라는 배우에게 왜 대중들이 마음을 빼앗기고야 마는가를 잘 설명해준다. 그에게서는 어딘가 이면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내력 같은 게 풍겨나온다. 세월을 거꾸로 먹는 듯한 초절정의 동안이지만, 끝없는 노력을 통해 그 안에 쌓인 만만찮은 내공이 만들어내는 아우라가 그것이다. 일찍이 세상의 어려움을 알아버린 조숙한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갖게 만든다고나 할까.

 

그가 이번에는 <소년시대>라는 작품에서 1989년 충청도 출신 고등학생 장병태라는 인물로 분했다. 폭력이 일상이던 시대, 장병태는 매일 안 맞고 지나는 날을 꼽을만큼 두들겨 맞던 온양 찌질이다. 하지만 부여농고로 전학오면서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아산 백호라는 전설의 싸움꾼으로 오인받는다. 16대1 전설의 싸움꾼이 왔다는 소식에 부산농고 일진들의 무조건적인 추앙을 받지만, 진짜 아산백호 정경태(이시우)가 같은 반으로 전학오면서 화려했던 봄날은 가고 처절한 응징을 당하는 겨울을 맞이한다. 결국 자신이 좋아했던 부여 소피마르소 강선화(강혜원)를 정경태에게 빼앗기고, 가족까지 해코지를 당하게 되자 각성한 장병태가 죽을 각오로 복수혈전을 치르는 이야기다. 

 

학원 액션물로서 시원시원한 액션은 기본이고, 부여 흑거미로 불리는 여고 짱이지만 장병태를 좋아하는 박지영(이선빈)과의 달달한 멜로도 들어있다. 또 부여 농고의 대표 찌질이인 조호석(이상진)과의 티격태격하는 우정스토리에, 춤바람난 아버지와 생활력 강한 엄마와의 훈훈한 가족서사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코미디다. 충청도 사투리 자체가 주는 정감 가득한 해학이 작품 전체에 깔려 있는데, 임시완은 찰떡같이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특유의 찌질이 캐릭터를 너무 무겁지도 또 너무 가볍지도 않게 표현해냈다. 

 

여기서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라는 표현이 중요한데, 그것이 이 작품을 연출한 이명우 감독이 원했던 <소년시대>의 톤 앤 매너이기 때문이다. <소년시대>는 학교 폭력을 다루고 있고 그래서 멍이 들고 피가 튀며 뼈가 부러지는 참혹한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키득키득 만화책을 보는 것 같은 웃음이 묻어난다. “하나도 안아프다니께. 어차피 지난주에도 맞고 저번 달에도 맞고 맨날 맞고 사는 인생인디 뭐가 별다를 게 있겄어?” 장병태의 이 대사처럼 맞는데 이력이 나 포기한 듯한 동네북 아이들이 늘 멍을 달고 다니는 모습은 그 자체로는 웃음이 피어난다. 하지만 그 말을 곱씹어 보면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이력이 다 나버린 이 청춘들의, 속으로 타버린 내면이 느껴져 짠해진다. 그래서 마치 무협지 활극을 우리네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학원물로 옮겨놓은 듯한 <소년시대>에서는 희비극이 겹쳐진 페이소스가 묻어난다. 

 

임시완이 풍기는 ‘연민’의 정서는 그래서 이 장병태라는 웃기면서도 짠하고 찌질하면서도 어딘가 신뢰가 생기는 캐릭터를 제대로 빚어낸다. 그러면서 <해를 품은 달(2012)>로 데뷔해 연기자로서 어언 10년의 내공을 다져온 임시완의 또 다른 스펙트럼으로 자리한다. 그 사이 30대 중반의 나이가 됐고, 그만한 삶의 경험치들로 더 단단해진 내면을 갖게 됐지만 여전히 고등학생 얼굴로 등장하니 저 윤태호 작가가 얘기한 연민의 강도 또한 짙어졌다. 

 

이처럼 변함없는 동안은 그를 청춘을 대표하는 배우로 만들었다. 아름다운 미소년의 얼굴에 가녀린 몸은 <변호인(2013)>에서는 용공조작사건으로 억울하게 고문을 당하는 대학생으로 분해 보는 이들마저 괴로울 정도로 아픈 80년대 청춘의 초상을 그려냈고, <미생>에서는 냉혹한 현실에 내던져진 사회초년생 장그래를 통해 2010년대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춘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에 대한 도전을 멈추지 않았는데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에서는 극중 대사처럼 ‘혁신적인 또라이’ 역할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2019년 군복무를 마치고 나와서는 이제 선과 악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을 선보였는데, 복귀작이었던 <타인은 지옥이다(2019)>에서는 고시원에서 사는 작가지망생 역할을, <런온(2020)>에서는 순수하고 따뜻하며 정의감 넘치는 단거리 육상선수 역할을, 또 영화 <비상선언(2022)>이나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2022)> 같은 작품에서는 ‘맑은 눈의 광인’이라는 호칭을 얻은 사이코패스와 스토커 역할을 넘나들었다. 그리고 손기정과 함께 마라톤 역사를 새로 쓴 서윤복의 이야기를 그린 <1947 보스톤(2023)>에서는 완벽히 빙의된 마라토너의 면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소년의 얼굴 이면에 단단해진 내면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임시완이 이같은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갖게 된 건 그 이면에 숨겨진 치열한 노력 때문이다. 그가 보여주는 치열함은 함께 작업을 한 감독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깜짝 놀랄 정도로 준비되어 나타난 임시완의 이야기를 꺼내놓곤 한다. 예를 들어 <1947 보스톤>을 연출한 강제규 감독은 처음 임시완을 마주하고는 저런 가녀린 몸으로 마라토너 서윤복을 연기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 몇 달도 되지 않아 나타난 임시완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완벽한 마라토너(그것도 그 가난했던 시절의)의 모습 그대로였다고 한다. 또 <소년시대>의 이명우 감독 역시 부산 출신인 임시완이 과연 이 작품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를 잘 구사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단 한 달 정도만에 나타난 임시완이 구사하는 부여 사투리는 말만이 아니라 감성, 뉘앙스까지 살려낼 정도로 실감이 나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만큼 연기자라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배우라는 것이다. 

 

실로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시대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네 청춘들은 사회에 나오기도 전부터 치열하게 준비하려고 노력한다. 아픔이 있지만 안으로 꾹꾹 씹어 내공을 만들고, 밖으로는 해맑은 척한다. 아 이토록 조숙한 청춘의 처연함이라니. 임시완의 얼굴에는 끝없이 이들을 ‘미생’으로 만드는 이 시대와 공유하는 청춘의 초상이 느껴진다. 부디 완생하기를.(사진:쿠팡플레이 글: 국방일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 ‘사말’이 주는 감동의 실체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비가 내렸거든.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서 그 사람을 쳐다 봤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딴 생각에 잠겨 있는 거야. 그런 모습이 좀 쓸쓸해 보이더라. 근데 오늘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 나는 천둥소리를 듣고 놀랐지만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나만 듣고 나만 알게 되는 일들이 생겨. 그걸 그럴 때마다 수어로 문자로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막막해져. 들리지 않아서 쓸쓸한 순간만 생각했는데 들려서 쓸쓸해지는 순간도 뭐 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 들더라고.”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친구 오지유(박진주)에게 미술관에서 송서경(이은재)과 권도훈(박기덕)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만, 듣지 못하는 차진우(정우성)에게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심정을 그렇게 에둘러 털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생겨나는 비밀이 만들어내는 쓸쓸함. 그건 듣지 못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만 생기는 쓸쓸함은 아니다. 그게 말이든 글이든 수어든, 근본적으로 완전한 진심이 소통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지는, 결국은 혼자라는 쓸쓸함이다. 

 

정모은도, 차진우도, 송서경도 또 정모은의 절친인 윤조한도 비밀이 있다. 정모은은 자신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다.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다. 어려서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고는 그 사실을 알았다. 절친인 윤조한(이재균)은 정모은과 함께 시골집에 가서 우연히 보게 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정모은은 그 사실을 안 이후로 엄마가 “날 진짜 사랑하는 걸까. 사랑하는 척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불안하기만 해서 가졌던 그 어리석었던 생각들을 털어놓으며 그런 비밀은 몰랐으면 더 나았을 뻔 했다고 정모은은 털어 놓는다. 

 

차진우는 송서경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 학교에 불이 났었고 그로 인해 차진우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무슨 이유에선지 송서경은 아픈 말들을 잔뜩 쏟아붓고는 차진우를 떠났다. 차진우는 큰 상처를 받았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송서경에게 그 때 왜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송서경에게는 비밀이 있지만 그건 지나간 과거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정모은은 차진우와 송서경 사이에 있었던 일이 궁금하고 그래서 차진우의 절친인 홍기현(박재준)을 찾아가 묻지만 그건 그 비밀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이 신경쓰여서다. 고맙게도 홍기현은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면서 차진우의 마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거라고 정모은에게 말해준다. 

 

윤조한은 정모은을 좋아하지만 절친이고 정모은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비밀을 털어 놓지 않는다. 대신 정모은이 출연하게된 드라마의 OST를 맡아서 만든 곡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 정모은은 모르겠지만 윤조한은 그렇게 멀리서나마 스스로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지만, 불타오르는 사랑의 화려함보다는 그 여백으로 남아 있는 쓸쓸함이 더 짙은 여운을 주는 드라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자기 감정을 자꾸만 차진우에게 드러내고 말하려는 송서경과 달리, 차진우도 정모은도 또 윤조한도 쉽게 말로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말로 전해질 수 없는 진심이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쓸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 드라마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쓸쓸한 존재로서의 우리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심이 전해지고 그 진심이 닿게 되는 그 순간의 감동은 더 짙다. 침묵한 채 따뜻한 시선으로 정모은을 바라만 보는 차진우의 마음은 그래서 그 침묵 속에서 더 잘 전해지고 그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 역시 그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더 잘 살아난다. 정모은의 진심은 차진우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고 세심하게 고민하며 말을 아끼는 그 모습에서 드러난다. 

 

윤조한의 진심은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대신 음악을 들려주는 데서 드러나고,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생각하는 정모은의 엄마 나애숙(김미경)의 마음은, 우연히 딸의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게 걱정되어 “귀가 성치 않든 고아든 간에 지가 좋아서 만난다는데 ‘그래 니가 좋으면 나도 좋다’ 시원하게 그 한 마디를 못해준 것”을 후회하며 눈물 흘릴 때 절절히 드러난다. 

 

때론 말하지 않을 때, 차라리 비밀로 남겨둘 때 그 침묵을 또 비밀을 알아봐주는 이에 의해 오히려 더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차진우의 전시회에 온 어느 마지막 손님이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왜 눈물을 흘렸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정모은에게 그녀는 말한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혼자 이 고즈넉한 연못을 바라보면서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이유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됐을까 떠올려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제 넘죠? 그림 한 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건 결코 주제 넘은 일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단어를 동원해도 알 수 없던 누군가의 삶의 진실을 우리는 순간을 포착해낸 그림 한 장으로 때론 아름다운 가사를 담은 노래 한 곡으로 알아보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던가. 그 그림 앞에서 눈물 흘렸던 사람처럼, 우리는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주는 감동과 여운을 마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을 느끼며. (사진:지니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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