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동성애도 있는 것

최근 보수적인 성향의 한국교회언론회는 "동성애 미화,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논평을 통해 '동성애를 미화하는 TV프로그램의 방영은 동성애에 대한 동정심을 넘어 심각하게 비호하는 측면이 있다."는 논평을 냈다. 또 기도운동단체인 에스더 기도운동도 최근 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이대로 TV드라마를 방치한다면 이 땅의 많은 청소년에게 동성애는 아름다운 것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며 시청거부운동을 촉구했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프로그램을 지목하진 않았지만 최근 종영한 드라마 '개인의 취향', 그리고 현재 방영되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에 등장하는 동성애자를 지목한 것일 게다. 특히 그중에서도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동성애자 태섭(송창의)에 대한 시선은 극에서 극으로 옮겨졌다.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동성애자 태섭이란 존재에 대한 반감은 어느새 동감으로 바뀌어버렸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던 걸까.

그것은 커밍아웃을 통해서 비로소 태섭이 가족의 일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태섭이 차마 가족들에게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철저히 타자였다. 드라마 속에서 가족과 섞이지 않는 태섭의 모습은 바로 우리가 이 땅의 동성애자를 바라보는 그 시선 그대로였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외계인 같은 존재. 하지만 그가 커밍아웃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양엄마인 민재(김해숙)에게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는 태섭을, 민재는 "오히려 자신이 더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사실을 민재에게 전해들은 병태(김영철) 역시 태섭을 탓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식의 앞날을 걱정해준다.

외계인처럼 겉돌던 태섭은 그 부모인 민재와 병태가 끌어안음으로써 비로소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바로 이 시점의 변화가 동성애자에 대한 시선을 극에서 극으로 바꿔놓은 김수현 작가의 마법. 그 마법은 다름 아닌 가족애다. 타인으로만 바라보던 시청자들의 시점을 가족의 시점으로 바꿔놓자, 거기에 외계인이 아닌 우리네 가족 중 하나로서의 태섭이 서 있었다. 그 어떤 가족이 자신의 가족이 동성애자라고 해서 그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을까.

민재가 태섭에게 '우리가 너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김수현 식으로 동성애에 대한 접근을 하고 있다. 그것은 철저히 가족드라마의 시선으로 동성애를 바라보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분명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인 잣대나 사회적인 맥락 같은 것들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것은 가족 바깥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가족의 눈높이에서 동성애는 윤리적인 문제도 사회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저 부모 자식사이에, 형제 남매 사이에 놓여진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인생은 아름다워'는 동성애 드라마라기보다는 김수현 특유의 가족드라마가 맞다. 다만 그 가족의 일원 중에 동성애자가 들어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양병태네 집안사람들이 저마다 문제들을 갖고 옥신각신하면서도 결국에는 가족애로 그것을 넘어서며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드라마다. 거기에는 일부에서 제기하는 '동성애에 대한 미화'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동성애 자체가 아니라, 동성애자라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그 가족애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해묵은 동성애에 대한 윤리적이고 사회적인 접근보다, 훨씬 실질적이고 인간적인 접근방식인지도 모른다.

가족으로 모든 걸 투영해 내는 김수현 드라마

"당신 오늘부터 앉아서 싸." 김민재(김해숙)의 딸 양지혜(우희진)가 남편인 수일(이민우)에게 하는 이 말은 작금의 달라진 남녀 관계를 압축해서 설명한다. 수일은 과거라면 데릴사위로 있는 처지에, 차에서 내리는 딸의 문까지 열어줘야 할 정도로 아내인 지혜를 여왕 대접해준다. 물론 투덜대지만 늘 자신의 처지보다는 아내와 아내의 가족을 먼저 돌보는 그 마음에는 어느 정도의 진심도 엿보인다. 덜컥 갖게 된 둘째 아이에 기뻐하는 그지만, 그 아이를 지우려는 아내와, 그걸 반대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그는 아내 편임을 공공연히 드러낼 정도로 애처가다. 그에게서 과거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남편의 모습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 사위에 그 장인이라고, 수일의 장인 양병태(김영철)는 딸이 사위에게 앉아서 일을 보라고 했다는 말에 허허 웃는다. 오히려 장모인 김민재는 그런 사위를 안쓰러워 하지만, 양병태는 반 농담을 섞어서 "잔뜩 긴장하며 보기 때문에 (자신은) 한 방울도 떨어뜨리지 않는다"고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준다. 한편 그런 수일을 "네가 남자냐?"고 비아냥대는 병태의 동생 양병걸(윤다훈)은 언뜻 남자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 같지만, 그가 사실은 가족드라마에 늘 있게 마련인 감초 같은 수다쟁이 역할을(주로 여성이 맡게 마련인) 맡고 있다는 점은 역시 이 달라진 남녀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무엇보다 이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인 할아버지(최정훈)가 돌아온 탕자(?)가 되어 아내(김용임)의 눈치를 보고, 집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 있다가 오줌까지 지리는 장면은 가부장주의 시대의 종언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장인 양병태가 패밀리 비즈니스로서 펜션을 운영하고, 그 아들인 호섭(이상윤)이 그 일을 돕는 모습은 취업이 어려워진 두 세대(고령세대와 젊은 세대)의 새로운 대안처럼 그려진다. 집 밖으로 치열해진 취업 전쟁에서 이제 남자들은 집 안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할 일을 찾아낸 것 같은 뉘앙스가 거기서 느껴진다. 이 집에서 가장 잘 나가는 병태의 동생 양병준(김상중)은 리조트 상무로 지내지만 아직까지 결혼을 하지 못한 상태고, 병태의 아들 양태섭(송창의)은 내과의사지만 여자에게는 관심이 없는 동성애자다. 물론 동성애는 파격적으로 보이지만 이 남성성이 사라져가고 있는 가족을 염두에 두면, 이 동성애 또한 그다지 부자연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 '인생은 아름다워'를 통해 김수현 작가가 그려내는 남자들은 작금의 변화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의 남자들의 모습을 저마다 대변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성 소수자까지도.

한편 이런 분위기 속에서 여성들의 모습 또한 달라졌다. 젊은 시절 온갖 마음고생을 다해온 할머니는 이제 이 집안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로 우뚝 서 있고, 며느리 김민재는 여전히 부엌을 꿰차고 있지만, 그 부엌은 가사 일만의 공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그녀가 요리방송을 하는 모습은 부엌이라는 공간을 사회적으로 확장시킨 결과로 보인다. 그녀는 가족에게서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지위를 가진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그려낸다. 그녀의 딸인 양지혜는 자신의 삶을 위해, 생긴 아이를 지울 것이라고까지 말할 정도로 자기주장이 강하며, 막내딸인 양초롱(남규리)은 "어장에 물 반 고기 반"이라고 말하며 남자들을 저울질 할 줄 아는 대학생이다.

이처럼 김수현 가족드라마의 가족들은 저마다 변해가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안식년을 주장하는 엄마가 등장하고, 로맨스 그레이를 즐기는 할아버지가 등장하는 것처럼, '인생은 아름다워'에 동성애자가 등장하고, 그를 사랑하는 재일교포 채영(유민)이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다양해진 사회 구성원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것은 김수현 가족드라마가 현실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오래도록 고정적인 팬층을 이어가게 해주는 가장 큰 힘이다. 즉 현재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그 가족 구성원들 속으로 담아냄으로써, 그 파격을 보편적인 가족애로 전해주기 때문이다.

도무지 해결될 수 없을 것만 같은 파격적인 갈등도 그 가족애 속에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보인다. 평생을 다른 여자와 살아온 남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또 금지옥엽 키워낸 아들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것은 사회적인 잣대로 보면 해결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가족이라는 틀로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가족애로 대변되는 인간애. 그 굳건한 믿음 앞에 김수현 드라마의 가족은 사회 문제를 풀어내는 마력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것은 김수현 가족드라마가 왜 그토록 인기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일단의 답을 제공한다. 우리는 '김수현의 가족'에서 우리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 가족의 갈등과 해결을 통해 큰 위안을 얻게 된다. 우리는 매번 김수현의 드라마가 구성하는 가족을 통해 공감의 틀로 묶여지는 일체감을 경험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넓은 범주의 가족의 경험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지금 가족드라마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금 우리네 가족드라마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가족드라마는 우리 드라마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오랜 세월 대중과 함께 해온 드라마 장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가족드라마는 본래 이 장르가 추구하는 가족애의 범주를 넘어서고 있다. '소문난 칠공주'와 '조강지처 클럽'을 통해 파괴되어 가는 가족의 틀을 극단으로까지 끌고 가 보여주면서 자극적인 가족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준 문영남 작가는 '수상한 삼형제'로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다. 지금 이 드라마는 35.4%(AGB닐슨 자료)의 시청률로 전체 주간시청률 1위에 올라있다.

한편 일일 가족드라마로 시청률 장기집권(?)을 해온 KBS 일일드라마 역시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너는 내 운명'이 막장드라마라는 오명을 얻은데 이어, 종영한 '다함께 차차차' 역시 배배 꼬인 관계와 지나치게 질질 끄는 드라마 진행으로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대열에 들어갔다. 이 드라마의 이런 자극에만 치중하는 경향 때문일까. 그럼에도 종영하는 시점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33.5%로 전체 주간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천만번 사랑해'는 대리모라는 설정에, 자신이 준 자식이 배우자의 형의 자식이라는 거의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우연적 상황을 통해 신파적으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 드라마는 자식을 얻기 위해 첫째 며느리에게는 대리모를 강요하고, 둘째 며느리가 그 대리모를 한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된 시어머니가 그녀를 내쫓는 패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며느리 수난사라는 설정은 작금에는 현실성이 거의 없는 이야기로, 가족드라마의 퇴행 현상을 잘 보여준다. 그럼에도 이 가족드라마의 시청률은 전체 4위인 25.9%에 올라 있다.

어째서 가족드라마들이 과거의 훈훈한 가족 이야기의 범주를 지키지 못하고 파국적인 이야기로 달려가고 있는 것일까. 결국은 시청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비교적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훈훈한 가족애를 다루면서도 시청률 최고를 차지하던 시대가 있었으니까. 중요한 것은 드라마를 보는 시청층의 눈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한류의 위상을 통해 미드와 일드 같은 선진적인 드라마와 접촉하면서, 우리 드라마들은 그간 실험을 통해 어떤 식으로든 진화의 길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유독 가족드라마는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왜? 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정적인 시청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족드라마가 변화하지 않고 머문다는 것은 그 자체로 퇴행적인 양상을 예고하는 길이다. 흐르지 않는 물이 썩듯이 확장의 길이 아닌 과거의 틀에 만족하던 가족드라마는 결국 가족애라는 끈끈한 힘을 자극을 위해 이용하기 시작했다. 막장의 탄생이다. 가족 복수극의 유행이다. 이처럼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 가족드라마가 막장이 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이 장르가 가진 독특한 특성에서 비롯한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갈등을 근간으로 하는데, 가족드라마의 갈등은 가족 간에 벌어지기 때문에 분명, 윤리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싸우다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달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막장드라마는 이 윤리의 선을 넘어섬으로서 자극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가족드라마가 갈 길은 결국 이것밖에 없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몇몇 드라마들이 가족드라마의 또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작년에 등장해 호평은 물론 시청률까지 최고를 기록한 '찬란한 유산'이 대표적이다. 이 가족드라마는 전형적인 가족의 틀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애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자신의 유산을 자식이 아닌 타인에게 준다는 설정은 혈연과 가족의 고리를 넘어선다. 이것은 최근 '그대 웃어요'나 '별을 따다줘(물론 멜로드라마 성격이 강하지만 그 안에 가족의 형태에 있어서)' 같은 작품으로 그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타인이지만 가족처럼 살아가는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가족드라마의 확장으로 보인다. 가족에서 유사가족으로의 확장.

가족드라마는 지금, 막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유사가족이라는 인간애로 확장될 것인지의 갈림길에 서 있다. 물론 이도 저도 아닌 전통적인 가족드라마의 형태도 지속적으로 등장할 것이지만, 그것이 현재적인 관점에서 과거만큼의 공감을 얻을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분명한 것은 진화를 꿈꾸지 않는 한, 가족드라마가 갈 길은 상투적인 보수적 코드의 반복이거나, 파국적인 가족드라마의 윤리적 탈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확장으로의 길을 모색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대 웃어요'나 '별을 따다줘' 같은 드라마가 주목되는 이유는 그 가족의 범주를 넘어서려는 노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사극의 가능성

'선덕여왕'이 만일 현대극이었다면 어땠을까. 사극이라는 껍질을 벗겨내면 '선덕여왕'에서 우리는 익숙한 코드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출생의 비밀'이다. 이 드라마업계에서는 이미 안정적인 성공 코드로 취급되는 '출생의 비밀'은 이 사극의 전반부를 거의 차지하고 있다. 살기 위해 중국으로 도피했던 덕만(이요원)의 귀환은 그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먼저 언니인 천명(박예진)을 우연히 만나고, 또 친부모인 마야부인(윤유선)과 진평왕(조민기)을 차례차례 만난다.

게다가 그녀는 중국에서 그녀를 키워주었던 소화(서영희)를 또 한 명의 부모로 두고 있기 때문에, 소화의 등장과 덕만과의 재회는 또 하나의 '출생의 비밀' 코드를 만들어낸다. 그런데 이 사극이 가진 '출생의 비밀' 코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덕만과 함께 버려진 비담(김남길)은 미실(고현정)과의 '출생의 비밀' 코드를 만든다. 미실에게 버려졌으나 돌아온 비담은 또 한 번 버림을 당하는 고통을 맛본다. 이것은 '출생의 비밀'이 부모의 참회로 이어지는 것과는 또 다른 양상으로 이 코드의 변주라고 볼 수 있다.

'출생의 비밀'의 힘은 바로 만남의 시퀀스에서 나온다. 이것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와 가족드라마의 코드다. '선덕여왕'은 인물들 사이사이에 이 만남의 시퀀스를 계속 만들어낸다. 미실과 덕만의 만남, 미실과 소화의 만남, 소화와 칠숙(안길강)의 만남, 덕만과 칠숙의 만남, 소화와 마야부인의 만남, 문노(정호빈)와 미실의 만남, 비담과 소화의 만남, 춘추(유승호)와 덕만의 만남 등등. '선덕여왕'은 이 만남의 시퀀스에서 감정을 강화시키거나 반전을 꾀함으로써 드라마의 힘을 끌어낸다.

멜로드라마의 코드 또한 이제 점점 부상하는 중이다. 덕만과 유신(엄태웅)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이 표면화되고 있고, 그것을 질시하는 비담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다. 사랑하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운명적 관계는 현대극이라면 어색할 수 있었겠지만 사극 속으로 들어오면서 오히려 흥미진진한 멜로를 만들어낸다. 왜 이럴까. 현대극이라면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일련의 코드들은 사극 속으로 들어가면서 어떤 마법을 부린 것일까.

이것은 사극이 가진 가능성에서 비롯된다. 멜로드라마가 현대에 이르러 식상하게 된 것은 그 설정이 갖는 비현실성 때문이다. 멜로드라마는 논리적인 사건이 아니라, 감정적인 흐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드라마다. 그러니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현재의 드라마에서 운명을 운운하는 멜로드라만 특유의 과장은 비현실적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바로 이런 한계는 멜로드라마가 왜 사극이라는 장르와 혼융하여 효과를 발휘하는지를 설명해준다.

사극 속에서 멜로는 현대극이라면 가질 수 없는 '태생적인 계급'이라는 장애요소를 자연스럽게 선취하게 된다. 즉 서열과 신분이 달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가능해진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출생의 비밀'을 통해 만들어지는 만남의 시퀀스들에서도 마찬가지다. 사극이라는 공간은 현대극이 갖지 못하는 특유의 이야기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극이 먼저 그 리얼리티를 바라보게 한다면 사극은 그 이야기에 집중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바로 이 이야기성은 사극이 왜 타 장르들과 손쉽게 융합이 가능한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선덕여왕'은 가족드라마,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플래시백을 활용한 추리 형식의 영상연출, 전형적인 무협 액션 같은 요소들 또한 갖고 있다. 또한 '선덕여왕'의 융합 가능성은  매체 간에도 일어난다. 이 사극은 비담 같은 캐릭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무협지나 만화적인 스토리와 캐릭터도 자연스럽게 엮어내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장르적 매체적 요소들을 끌어안는 '선덕여왕'은 사극만이 갖는 가능성을 증폭해서 보여준다. 그것은 낯설음과 친숙함이 동시에 얽혀있는 공간의 구축이다. 거기에서 누군가는 우리에게는 낯설게 느껴지는 미드 식의 긴박감 넘치는 시추에이션극을 발견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는 정반대로 아주 익숙한 가족드라마와 멜로드라마의 문법을 발견하기도 한다. 전형적인 사극이 갖는 이야기성의 친숙함이 있는 반면, 만화 같은 낯설음과 신선함이 있다. 이렇게 된 것은 사극이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렸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은 그 사극의 가능성을 100%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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