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룡'의 질문, 백성이냐 가족이냐

 

백성인가 아니면 가족인가. SBS <육룡이 나르샤>가 이성계(천호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회군을 결정하자 최영(전국환) 장군은 이성계의 식솔들을 인질로 잡고 만일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올 시 만월대 위에 그들의 목을 내걸 것이라고 위협한다. 5만의 군사들을 구하자니 가족의 생명이 위태롭고, 그렇다고 가족을 구하자니 5만의 군사들이 눈에 밟힌다. 이성계의 선택은 결국 군사들, 아니 영문도 모르고 죽을 전쟁에 차출된 백성들이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백성이냐 가족이냐는 질문은 고스란히 지금 현재로 되돌려진다.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들은 과연 국민들을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가족적인 당파와 세력을 위한 선택만을 하고 있을까. 물론 정당정치가 그러한 당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는 만들어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정치인들은 당 이전에 국민이 우선이 아닌가. 국민의 어려움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한다면 과연 지금처럼 그들끼리의 정쟁에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일까.

 

<육룡이 나르샤>는 지난 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요동정벌이라는 무모한 결정에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며,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위정자에게 과연 그 자격이 있는가를 질문한다.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과연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홍인방(전노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처했을 때 그는 정도전(김명민)에게 인간의 욕망은 결국 권력욕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을 피력한다. 그는 누구나 가슴 속에 벌레 한 마리씩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인물. 즉 개혁을 부르짖던 인물도 권좌에 오르게 되면 권력욕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질문이다. 개혁에 있어서 사람은 바뀌어도 권력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정도전은 홍인방에게 자신이 하려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나라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즉 고려를 되살리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야기는 시스템 자체를 바꾸겠다는 뜻이다. 그는 왕이 바뀌어도 신하들이 서로 견제하여 권력이 쏠리는 것을 막는 시스템을 고안해낸다.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 보면 마치 <100분토론>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사극이 선과 악의 대결로서 단순히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입장과 생각의 차이에 의해 대결하는 인물들을 그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적이라고 해도 길태미(박혁권)나 홍인방 그리고 이인겸(최종원)이 저마다의 논리를 갖고 있는 건 그래서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대결할 때 그 모습은 마치 토론을 벌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가능한 건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독특한 대본 작업 방식 때문이다. 이들은 대본 작업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가진 입장을 정해놓고 실제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한석규)과 정기준(윤제문)이 한글 유포를 갖고 나누는 대결이 토론 방식으로 전개됐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육룡이 나르샤>는 그래서 매회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말 선초에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이지만 그 안에 현재적 질문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물론 그 질문에 답은 어느 정도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실행하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백성인가 가족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역사든 사극이든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렇게 실행하기 어려운 갈등 상황에서 어떤 결정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의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들이 의미 있는 건 그것이 현재에도 같은 울림의 질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12>의 구탱이를 자처하던 김주혁의 존재감

 

토사구탱!” <12>에서 토사구팽을 잘못 알고 그렇게 외치는 순간 김주혁은 구탱이형이 되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김주혁의 <12> 적응은 쉽지 않아 보였다. 어느 시골마을에서 즉석에 벌어진 인기투표에서 꼴찌를 당한 그 굴욕 앞에 김주혁은 진심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때는 연기자로서의 자존심이 예능이라는 판에서 망가지는 자신을 아직까지는 용납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1박2일(사진출처:KBS)'

하지만 어느 음식점에서 얼굴에 영구 분장을 하고 영구 흉내를 자처하는 김주혁은 노력하고 있었다. 물론 그 영구 흉내도 그다지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동생들은 그런 김주혁의 노력에 활짝 웃으며 리액션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런 과한 설정을 통한 웃음도 김주혁의 자리는 아니었다. 그는 차츰 <12>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맏형이라는 그 위치가 바로 자신이 서야할 곳이었다.

 

<12>은 출연자들의 마치 형제 같은 모습이 시청자들로 하여금 웃음은 물론이고 때로는 짠한 감동을 주는 프로그램이다. 여행이 소재일 수밖에 없고 그 여행 위에서 복불복 게임을 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자극제지만 그 바탕에 깔린 가족적인 형제애가 없다면 이 모든 것들의 색깔은 완전히 다른 느낌을 줄 것이다. 시청자들도 저들과 같이 여행하고 싶다는 그런 마음이 들게 해주는 그들만의 끈끈함이 있어야 여행이든 게임이든 <12> 특유의 훈훈함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김주혁이 맡은 맏형이라는 역할은 그래서 튀지는 않지만 중요하다. 항상 맏형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동생들은 찧고 까불고 하는 것이 편안해진다. 본인이 드러내진 않아도 동생들이 놀 자리를 든든하게 마련해주는 일 그게 맏형이 가진 존재감이다. 그래서 적절히 위치를 지키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 적당히 자신을 망가뜨려 동생들이 놀기 편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김주혁은 복불복 게임에서 여지없이 무너져 아마도 설정이 아닌 진짜였을 몸 개그를 보여주기도 했고, ‘토사구탱처럼 퀴즈 대결에서도 한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줬다. 또한 슬기작가와 러브라인을 형성함으로써 시커먼 남자들의 예능 <12>에서는 좀체 없었던 달달함을 선사하기도 했다.

 

<응답하라1988>에서 김주혁은 훗날의 덕선 남편으로 깜짝 등장해 연기를 선보였다. 연기가 본업인 그에게 연기에 대한 갈증은 그 누구보다 깊었으리라. 이제 <12>을 하차하지만 대중들은 이로써 더 많은 드라마, 영화에서 그를 보기를 원할 것이다. <12>을 통해 대중들이 그에게 갖게 된 친근한 이미지는 연기에 있어서도 자양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편안한 이미지는 물론이고 그 정반대의 변신도 그만한 반전효과를 줄 테니.

 

김주혁은 <12>을 떠나지만 구탱이형의 그 존재감은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그 빈 자리에 남아있을 것 같다. 늘 그가 선 자리는 구탱이였지만 <12>의 훈훈한 공기를 만들어주던 장본인이 바로 그였으니.



엄마로 울리고 웃기고, <응팔>의 남다른 저력

 

애초에 남편 찾기콘셉트가 <응답하라1988>에서도 계속된다고 기자간담회를 통해 신원호 PD가 밝혔을 때 대중들의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던 건 또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가 시대만 바꿔 반복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연 <응답하라1988>은 이전 시리즈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물론 여전히 여주인공 덕선(혜리)의 남편이 누구인가에 대한 궁금증은 이 드라마의 주요한 동력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건 하나의 요소일 뿐 <응답하라1988>의 전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그렇다면 <응답하라1988>이 이전 시리즈와 확연히 다른 점은 뭘까. 물론 여전히 염소 BGM이 흘러나오며 웃기는 장면들이 연출되지만, 유독 눈물의 밀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눈물은 다름 아닌 가족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다. 성동일이 모친상을 당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다가 뒤늦게 외국에 살던 형이 찾아오자 우리 엄니 불쌍해 어쪄하고 오열하는 장면은 대표적이다. <응답하라1988>의 핵심적인 정서는 신원호 PD가 공표한대로 가족이야기에서 나오고 그 가족이야기는 엄마의 이야기로도 귀결된다.

 

5회는 그런 점에서 오롯이 엄마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묻는 이야기들로 구성됐다. 남편 잡아먹었다는 시어머니 앞에서 그 모진 소리를 다 듣고는 다신 찾아오지 말아달라고 말하는 김선영이 자신의 친정어머니가 온다는 소리에 짐짓 잘 사는 것처럼 보이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에서는 엄마로서 서로 이해되는 이심전심의 마음이 시청자들을 울렸다. 결국 그렇게 숨기려 했지만 그래도 눈에 띈 구멍 난 양말과 헤진 옷이 밟혀 화장실에 돈과 편지를 놔두고 간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걸다가 목이 메어버리는 김선영의 모습에서 우리는 아마도 저마다의 엄마를 떠올렸을 게다.

 

딸이 데모를 하고 다닌다는 사실 때문에 걱정이 태산인 이일화의 이야기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부모들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절대 데모 하지 말라고 꾸지람을 하지만 딸을 잡아가려는 경찰 앞에서 쉬지 않고 우리 딸이 어떤 딸인 줄 아냐며 애원하는 엄마. 경찰서에서 훈방조치 받고 나온다는 딸에게 따끔하게 혼을 내야한다는 이웃집의 이야기에 그래도 우리 딸이 무슨 잘못을 했냐고 두둔하는 아빠. 결국 부모가 데모를 반대한 것은 그 데모가 잘못된 일이라서가 아니라 단지 딸을 걱정하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당대의 부모들의 마음 그대로였을 게다.

 

반면 라미란의 이야기는 눈물보다는 웃음의 포인트가 드러난 엄마의 이야기였다. 뭐든 자기 손길이 닿아야 집안 일이 돌아가는 라미란이 집을 비운 사이 엉망진창이 되어가는 집안이라던가, 그녀가 온다는 소식에 말끔하게 집을 치워놓는 남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렇게 아무 변화가 없는 것에 오히려 실망하는 라미란의 모습은 우리네 억척스럽던 엄마들의 유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엄마들이 있어 어렵던 시기도 뚫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응답하라1988>이 한 회로 묶어서 보여준 다양한 엄마들의 이야기가 그토록 감동적으로 다가오게 된 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변치 않는 것이 바로 그 모성이기 때문일 게다. 다만 80년대라는 상황이 그 모성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 엄마로 대변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응답하라1988>이 남편 찾기 같은 기존 시리즈의 요소들을 답습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는 이유다.

 

특히 데모하는 딸을 둔 이일화의 이야기는 엄마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이고 또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읽어내게 한다. 일부이겠지만 무슨 무슨 엄마회라는 이름의 단체로 엄마를 호명해 정치적인 행보를 보이기도 하는 것이 안타깝게도 2015년 서울의 한 풍경이다. 거기서 우리는 어떤 모성을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아니 감히 거기에 엄마라는 호칭을 붙인다는 게 가당한 일이기나 할까. 자식이 몹시 걱정되지만 그래도 자식이 잘못한 건 없다고 말하는 엄마. 그것이 시대가 달라져도 여전해야할 엄마라는 존재여야 하지 않을까.



<응팔>, 무엇이 80년대까지 우리를 되돌렸나

 

도대체 <응답하라1988>의 무엇이 우리를 그 시대로 눈 돌리게 했을까. 97년과 94년이라는 시점과 88년이란 시점은 사뭇 다르다. 많은 이들이 1988년이라는 시점에 의구심을 갖게 된 건 그럴만한 일이다. 97년과 94년은 그나마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할 수 있는 시대다. 97년을 기점으로 디지털문화, 팬 문화가 시작됐고, 무엇보다 IMF 이후의 장기불황이 이어져왔기 때문에 당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도 그 기점이 흥미로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하지만 1988년은 다르다. 80년대 문화를 이해하는 이른바 386세대들에게는 아련한 향수지만 젊은 세대들과 그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애매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우려가 기우였다는 것이 <응답하라1988> 2회만에 증명되었다. 첫 회에 평균시청률 6%를 간단히 넘긴 이 작품은 2회에는 7.4%(닐슨 코리아) 시청률을 기록했다. 고무적인 건 10대부터 50대까지 전 연령층에 고루 소구하는 시청률 분포를 보였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런 힘을 발휘하게 했을까.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주효했던 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것인가에 대한 이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응답하라1988>은 신원호 PD의 말대로 가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그 가족의 모습이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엄마가 없는 바둑천재 택(박보검)이 바둑대회 우승을 하자 이웃인 라미란의 가족이 그걸 축하해주기 위해 비빔국수 같은 스파게티를 나눠먹는 풍경이 그 시대의 가족이다. 갑자기 귀가한 남편의 밥 한 공기를 빌릴라 치면 각자의 집에서 저녁에 만든 반찬이 이웃으로 배달(?)되어 결국은 비슷비슷한 저녁을 먹는 이웃이라니.

 

이웃집 딸이 88올림픽 피켓걸로 나온다고 하면 마치 자기 딸인 양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를 해주는 그런 풍경을 지금 우리는 어디서 찾아볼 수 있을까. 학교 점심시간이면 서로가 싸온 반찬을 꺼내놓고 친구들끼리 함께 둘러앉아 먹던 그런 풍경. 맛없는 도시락이라도 애써 싸준 엄마가 미안해 귀갓길에 남은 반찬을 다 먹는 그 따뜻한 마음. 골목길 한 켠에 놓여진 평상에서 수위 높은 부부생활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마치 자매들처럼 환한 웃음을 채워놓는 이웃들.

 

876.10 이후 6.29 선언이 이어지고 그해 말에 치러진 대선이 직선제로 대통령을 선출했던 그 시점부터 198888올림픽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대책 없는 낙관론 속에 있었다. 하지만 <응답하라 1997>이 보여줬던 것처럼 88년부터 97년 사이에 있었던 낙관론이 실로 대책 없는 거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도시는 재개발되었고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은 아파트로 재정비되었다. 정치적 이슈들을 저 경제논리 속에 묻혀져 갔고 세계화를 부르짖던 기업들은 대마불사를 꿈꿨지만 결국은 무너져버렸다.

 

88년부터 97년 사이의 10년은 그래서 세계로 뻗어나간 경제 성장이 아니라 안으로부터 허물어진 10년이 되었다. 우리는 번지르르한 아파트들이 세워진 그 10년 사이 많은 걸 잃어버렸고 결국은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IMF를 통해 확인했으며 그 여파를 지금껏 겪고 있는 중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신원호 PD가 왜 굳이 1988년까지 시간을 되돌린 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대책 없는 낙관론으로 모든 것이 뻥튀기되기 직전 실로 진솔했던 우리네 삶에 대한 그리움. 부유하진 않았어도 많은 걸 갖고 있었던 그 시절이 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비로소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응답하라1988>은 지금의 자극적인 삶을 담아내는 살풍경한 드라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어찌 보면 너무 밋밋하고 소소한 느낌마저 갖게 된다. 거품 없는 세상의 진짜 사람 간의 정과 삶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다. 88년을 경험한 세대든, 아니면 그걸 경험한 적 없는 그 이후의 젊은 세대든 이 드라마에 막연히 끌리는 이유는. 경제적 수치는 올라갔다고 하지만 너무나 많은 걸 잃어버린 채 각박해진 우리네 현재의 삶. 그것이 88년의 한 골목이웃들에게서 벌어지는 소소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하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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