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윅스>가 보여준 이준기의 특별한 연기영역

 

이준기는 온 몸으로 연기하는 연기자다. 물론 모든 연기자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이준기의 연기 속에서는 그의 몸이 부서질 듯 애처로워지는 지점이 있다. <왕의 남자>에서 여성성을 가진 공길이라는 인물이 그토록 처절하게 여겨졌던 이유는 줄 위에 자신을 세우는 몸의 연기가 보여주는 진정성이 거기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눈에 핏발이 서가며 이중적으로 갈라져버린 자신의 존재를 온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이준기의 모습은 또 어떻고. 이준기는 실로 그 몸의 진정성이 가진 힘을 아는 연기자다.

 

'투윅스(사진출처:MBC)'

그래서 <투윅스>에서 그가 연기하는 장태산이라는 인물은 이준기가 가진 몸의 진정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첫 회부터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 도망자가 된 장태산은 온 몸이 깨지고 넘어지고 심지어 총에 맞고 물로 떨어지며 도망치기 위해 빨대 하나를 입에 물고 흙 속에 묻히는 그런 캐릭터다. 산 속을 뛰는 장면이나 거친 물살의 계곡물에 휩쓸려 내려가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진짜 사나이들의 야전훈련을 보는 느낌이다.

 

신출귀몰할 정도로 포위망을 빠져나가면서도 장태산이라는 인물이 그저 신창원 같은 희대의 탈주범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이 몸의 절실함에 덧대진 이준기의 섬세한 내면 연기가 있기 때문이다.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과 비교되는 <투윅스>의 장태산이라는 인물의 변별성은 전자가 말 그대로 추적자인 반면(물론 그래도 쫓기는 인물이 되지만), 후자는 도망자라는 데서 나온다. 추적자가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쪽에 더 집중한다면, <투윅스>는 그가 왜 도망치게 되었고 왜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가에 더 집중한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한 이준기의 눈에서 남모르게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을 내포한다. 그는 왜 필사적으로 도망쳐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표피적으로는 보스 문일석(조민기)이 그를 살인자로 누명을 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죽이려 하기 때문이지만, 그 이면에는 문일석과 조서희(김혜옥) 변호사 간의 추악한 거래가 담긴 증거를 그가 갖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이 부분에서 서민과 권력자 간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진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살인자로 몰려 단 2주도 살기 힘든 세상이다.

 

그런데 <투윅스>는 <추적자>가 가진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대결보다는 한 개인의 가족애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장태산이 끝없는 도주 속에서 그 힘겨움을 버텨낼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지켜야할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장태산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백혈병에 걸린 딸에게 골수이식을 해줘야 할 몸이다. 그러니 살뜰하게 상처난 곳을 덧나지 않게 살피는 것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딸을 위해서이고, 그가 단 2주만이라도 버텨내야 하는 것도 모두 딸을 살리기 위함이다. 거기에 자신의 자리 따위는 없다.

 

이준기의 땀과 눈물이 범벅이 된 몸은 그래서 그 어떤 통렬한 비판보다도 더 절절하게 사회의 부조리를 에둘러 말해주기도 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가장들의 모습이 아닌가. 온 몸이 부서져라 하루를 보내고 남 모르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버텨내고 또 버텨내는 건 자신을 기다리는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시스템 속에서 심지어 소모되는 삶을 살아간다고 해도 가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감당하는 장태산 같은 가장이 그 땀과 눈물로 뭉클해지는 건 그 때문이다.

 

<투윅스>라는 제목은 그래서 이 우리네 시스템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가장의 의미를 떠올리면 지금의 현실이 얼마나 힘겨워졌는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단 2주다. 단 2주를 버텨내기 힘든 현실. 이준기라는 연기자는 그래서 이 2주 간의 버텨냄을 자신의 온 몸으로 보여주는 중이다. 드라마를 보며 가끔씩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그것은 이준기의 몸이 말해주는 그 진정성을 느꼈기 때문일 게다. 그런 점에서 <투윅스>는 이준기라는 연기자의 특별한 영역을 제대로 드러내주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준기, 서민으로 돌아와 영웅이 된다

이준기는 한때 꽃미남 이미지로 소비됐다. ‘왕의 남자’에서 공길이라는 역할을 하면서 갖게 된 중성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것 때문에 이준기의 중성적 매력은 광고를 통해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준기가 바랐던 것도 아니고 본래 갖고 있던 색깔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상품 광고가 공길이라는 인물을 그저 여장을 한 남자로만 바라보면서 생긴 이미지의 오해였다. 공길은 여장 남자라는 표피를 떼어내고 보면 거기 서 있는 것은 정확히 우리네 민초의 자화상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그러니까 이준기에게 덧씌워진 불편하기 짝이 없는 중성적인 꽃미남의 이미지를 떼어내는 시간이었다. 눈에 핏발이 잡힐 정도로 내면 속에 숨겨진 야수성을 끄집어내는 과정은, 이준기가 스타라는 겉 이미지를 찢어내고 연기자라는 본래의 스펙트럼 속으로 들어오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그가 다시 돌아간 곳은 바로 그 민초들의 세계였다.

‘일지매’에서 본래 양반의 서자에서 서민의 아들로 내쳐진 뒤, 거기서 다시 일지매라는 서민들의 영웅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재미있게도 바로 이준기의 변화과정을 미리 예고한 듯 보인다. 화려하지만 허황된 스타의 세계에서 소박하지만 진실된 연기자의 세계로 넘어온 그는 잰 체 하지 않으면서 늘 서민들의 옆자리에서 너스레를 떠는 서민 영웅의 자화상을 그려낸다. 그리고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제목 자체가 ‘히어로’다.

현대판 일지매를 떠올리게 하는 제목 때문일까. ‘히어로’는 시작 전부터 ‘서민적인 영웅’의 모습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과연 칼 대신 펜을 들고, 대도의 근성 대신 올곧은 기자정신을 갖고 있는 도혁(이준기)은 진짜 일지매와 판박이일까.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일지매는 평범을 가장하지만 그 면모는 실제 영웅인 반면, 도혁은 우리와 다를 바 없는 그저 평범한 인물일 뿐이라는 점이다.

그는 실제로 삼류 잡지사의 기자이고, 그가 쓰는 기사는 실제로도 자극적인 그저 그런 기사들이다. 결국 그 잡지사는 문을 닫게 되고 그래서 다시 세우게 된다는 신문사 역시 뭔가 대단한 사회 정의의 뜻을 갖고 세우는 그런 회사가 아니다.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왜 ‘히어로’일까. 도대체 어떤 면이 도혁을 영웅이라 칭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극한 평범함조차 비범하게 만들어버리는 썩어버린 사회다. 도혁은 그저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려 하지만, 세상이 그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대세일보라는 거대 언론사의 기자라는 강해성(엄기준)은 대세그룹이라는 기업의 뒤를 봐주는 역할을 할 뿐, 그로인해 피해를 보게 되는 서민들에게는 관심조차 없다. 진실? 돈과 권력 앞에 거짓과 자리바꿈하기 일쑤다. 그러니 그 속에서 피해를 겪게 되는 도혁은 그저 정상적으로 진실을 진실이라고 말하는 일을 할뿐이다.

이 평범한, 아니 심지어는 지질해보이기까지 하는 한 인물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거꾸로 평범함이 통하지 않는 세상을 통렬하게 그려낸다. 따라서 '히어로'는 이제 '일지매'를 통해 서민들의 영웅으로 자리한 이준기가 온전히 특별한(?) 서민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서민적인 영웅을 통해 이준기에게서 기대하게 되는 것은 따뜻한 면모다. 어딘지 가볍게도 느껴지고, 때로는 초라하게도 보이지만 그래도 모든 낮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따뜻한 관심. 이것이 영웅을 잃어버린 시대, '히어로'가 말하는 영웅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서민적 이미지로 돌아와 오히려 영웅 그 이상의 매력을 보이게 된 이준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의학, 멜로, 액션, 정치, 휴머니티까지 봉합하려는 ‘카인과 아벨’

장르 속에서도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일까.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장르의 시도가 갖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백화점식 나열일까. 장르 드라마들은 한 가지 이상의 장르를 봉합하며 진화해 왔다. ‘하얀거탑’은 의학드라마에 법정드라마와 정치드라마를 칵테일했고,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학드라마에 멜로드라마를 성공적으로 봉합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액션드라마에 가족드라마의 관계망을 접목해 한국형 느와르를 선보였다. 그렇다면 ‘카인과 아벨’은 어떨까. 놀랍게도 이 드라마는 이 모든 장르 드라마들의 디테일들을 하나로 끌어 모으고 있다.

‘카인과 아벨’에는 ‘하얀거탑’이 가진 권력대결구도가 있다. 그것은 이초인(소지섭)으로 대변되는 응급의학 센터와 이선우(신현준)로 대변되는 뇌의학 센터 건립을 두고 벌어지는 권력의 충돌이다. ‘하얀거탑’에서 긴장감 넘치게 그려졌던 투표 장면은 이 드라마에서도 여전히 효력을 발휘한다. 한편 ‘카인과 아벨’은 의드로서 ‘외과의사 봉달희’가 가진 멜로드라마와 휴먼드라마의 요소도 숨겨져 있다. 형제의 한 여자를 두고 벌어지는 삼각관계와 새롭게 멜로의 축으로 들어올 오영지(한지민)가 멜로드라마의 구도를 이루고 있고, 한편으로는 인술을 향해 달려가는 이초인의 휴머니티가 기술에 편향된 이선우와 대결구도를 이룬다.

‘카인과 아벨’에는 또한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이 드라마는 의드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 권력 대결구도의 극한으로 끌어올려지면서 액션드라마와 복수극의 양상을 띄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기억의 문제를 끼워 넣었다는 것이다. 이초인의 탄생이 교통사고로 뇌사상태에 빠진 어머니로부터 꺼내지는 것이나, 자신을 아버지처럼 키워준 이종민 원장(장용)이 뇌사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그리고 자신도 음모에 빠져 기억상실에 빠지는 것이 그렇다. 무엇보다 이 의학드라마에서 그 분야로 잡고 있는 것이 뇌 의학이라는 점은 이 드라마가 그만큼 기억에 천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개와 늑대의 시간’이 그려낸 기억의 문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겠지만, 일정부분 모티브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카인과 아벨’은 이처럼 꽤 많은 장르 드라마들의 속성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며, 그 봉합은 현재까지는 꽤 성공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판단된다. 화두로서 제시했듯, 이렇게 많은 장르적 요소들을 한 틀 안으로 끌어 모은 데는 이제는 장르적 재미에만 머무는 것만으로는 어딘지 부족하게 되어버린 현 드라마 소비층들의 높아진 안목에서 기인된 것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장르 드라마라는 아직까지도 여전히 낯선 그 틀에 전통적인 드라마의 형식을 접목하면서 생겨난 것일 수도 있다. 모쪼록 그 장르 실험이 백화점식 나열에 그치거나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 시도가 작금의 정체된 장르 드라마들에 꽤 괜찮은 의미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들의 두 가지 얼굴

‘일지매’로 새로 돌아온 이준기가 선택한 것은 이번에도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을 잃고 과거와 현재, 그 두 존재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는 역할은 ‘개와 늑대의 시간’에 이어 ‘일지매’로 이어진다. 이준기가 ‘개와 늑대의 시간’에서 이수현과 케이 사이에 서 있었다면, ‘일지매’에서는 겸이와 용이 사이에 서 있다. 이런 야누스의 얼굴은 베테랑 연기자들마저 해내기 어려운 것이지만 이제 그것은 이준기에게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이준기의 두 가지 얼굴
한 드라마 속에서의 배역뿐만이 아니라 이준기 개인이 연기자로서 걸어온 길 또한 변신의 연속이었다. ‘마이걸’에서 곱상한 외모와 털털한 이미지를 동시에 선보이던 이준기는 ‘왕의 남자’를 통해 여성적인 이미지로 변신한다. 그 이미지로 이준기는 각종 CF를 통해서 그루밍족의 표상처럼 구획된다. 문제는 ‘왕의 남자’를 통해 일약 1천만 관객의 스타가 된 이준기가 그 굳어진 이미지를 어떻게 벗어버리느냐는 데 있었다. 하지만 ‘개와 늑대의 시간’을 통해 이준기는 연기자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냈다. 그것은 예쁜 남자와 거친 남자의 두 얼굴을 동시에 보이는 것이었다.

‘일지매’의 일지매 캐릭터가 갖는 야누스적인 성격, 정체성의 문제 같은 것은 역시 ‘개와 늑대의 시간’을 빼 닮았다. 하지만 ‘일지매’의 두 얼굴이 갖는 의미는 ‘개와 늑대의 시간’의 그것과는 다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 정체성의 혼동을 통한 관계의 역전을 이수현이란 캐릭터의 끝없는 변화과정을 통해 포착하고 있다면, ‘일지매’의 두 얼굴은 혼동의 시간 속에서 자기 존재를 찾고 가치를 알아가는 과정을 잡아내기 위함이다.

일지매의 두 가지 얼굴
첫 회에서 멋진 갑의를 걸치고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일지매는 저 스스로 말하듯 ‘못할 게 없는 존재’다. 하지만 이 못할 게 없는 일지매가 어떤 기억의 자각 이전으로 돌아가면 거기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청년, 용이(이준기)가 서 있다. 충격적인 아버지의 살해장면을 목격한 겸이가 기억을 지우고 용이가 되었을 때 그 앞에 던져진 삶은 쇠돌(이문식)의 자식으로서의 천한 삶이다. 천하다는 이유로 양반자제들에게 갖은 모욕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로서의 용이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다. 그저 “살려주십쇼”하고 애걸할 뿐이다.

하지만 용이가 기억을 되살려내고 천한 존재로 치부되었던 자신이 귀한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일지매가 탄생한다. 하지만 이 일지매라는 존재는 단순히 겸이로의 회귀를 뜻하지 않는다. 일지매는 자신이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 듯이 저 저잣거리에서 자신 때문에 기꺼이 이빨 하나 정도는 빼주고 바보처럼 웃어주는 쇠돌 같은 민초들이 더 이상 천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일지매 속에는 겸이와 용이 이 두 인물이 교차한다.

천함과 귀함 사이에서 이 두 인물이 한 몸 속에서 갈등하는 이 부조리한 상황이 저 세상의 잘못된 선 가르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일지매가 하는 것은 그 선을 넘는 일이다. 그가 서는 자리는 양반과 서민들 사이에서, 도적과 의적 사이에 서서 자신처럼 갈라진 정체성을 가진 부조리한 세상을 바꿔보고자 함이다.

이 시대 청춘들의 두 가지 얼굴
이 일지매의 이중적인 의식(귀한 존재지만 천덕꾸리기 취급을 받는)은 이 사극이 왜 지금 존재해야 하는가를 말해주기도 한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서자 의식을 일깨운다. 386이 80년대 민주화를 통해 역사의 주역이 되었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 깊은 경제 불황의 나락 속에서 ‘88만원 세대’로 전락했다. 역사에서도 빗겨나 있고 현실에서도 주역이 되지 못하는 이들이 처한 상황은 일지매의 ‘기억을 잃고 부유하는 용이의 상황’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꿈꾸는 세상은 용이도 아니고 겸이도 아닌 일지매이다. 즉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닌 미래라는 뜻이다. 이 지점이 바로 이준기라는 연기자가 일지매를 통해 만나는 자신의 얼굴이다. 여성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속에 강렬한 피를 끓게 하는 남성적 이미지를 공유한 이준기는, 이제 이미지를 넘어서 이 시대의 청춘들이 공유한 두 가지 의식, 즉 청춘으로서의 쾌활함과 그 쾌활함 이면에 현실로서의 어두움을 공유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 이것은 실제로 연기자로서의 활동과 함께 현실참여에 적극적인 이준기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일지매의 이중적인 캐릭터와, 이준기의 이중적인 이미지, 그리고 이 시대 청춘들이 갖는 이중적인 얼굴은 모두 닮았다. 그래서 일지매가 웃고 있거나, 배우이자 한 청년으로서의 이준기가 웃고 있거나, 혹은 이 시대 청춘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것은 바로 그 아래 숨겨진 슬픔이나 분노 같은 것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 자체를 전복하고 새로운 저들만의 역사를 허구 속에서라도 그려내고픈 ‘일지매’라는 파격적인 사극이 존재하는 이유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추천하기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