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K2'의 내적 외적 성공요인

사실 오디션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MBC '목표달성토요일'에서 진행됐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악동클럽'은 소소하게 지나가 버렸고, 2006년 박진영이 진행한 스타 메이킹 프로그램 '슈퍼스타 서바이벌'은 전국과 해외에 걸친 사전 오디션과 서바이벌 형식, 시청자들의 직접 투표방식 등 작금의 '슈퍼스타K'와 상당히 유사한 형식을 갖추었지만 그다지 화제를 몰고 오지는 못했다. 2007년도 MBC에서 방영됐던 신인 발굴 오디션 프로그램, '쇼바이벌'은 쇼의 형식으로 신인들의 무대대결을 보여주었지만 역시 반향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슈퍼스타K'는 다르다. 케이블 채널 엠넷에서 방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케이블로서는 불가능하다는 두 자리 수를 훌쩍 넘어섰다. 도대체 이 오디션 프로그램은 뭐가 다른 것일까.

많은 이들이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을 지적한다. 즉 현실이 해주지 못하는 부분을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상에서나마 실현시켜준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슈퍼스타K2'에 몰린 1백만 명이 훌쩍 넘는 지원자들이 그려내는 풍경은 경쟁으로 점철된 우리 사회를 살 떨리게 재현한다. 그런데 그 엄청난 지원자들이 선정되는 기준은 현실과는 완전히 다르다. 아무리 연예인의 자식이라도, 또 학벌이 출중하다고 해도 실력이 없다면 심사위원들은 가차 없이 '불합격'을 준다. 초기에 심사위원으로 앉은 이하늘은 '철이와 미애'의 신철의 조카를 떨어뜨리면서 "너는 철이형을 통해서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하늘은 "이 오디션이 실력은 있지만 등용문이 없는 이들을 위한 것"이란 점을 반복해서 말한다. 살벌한 경쟁 현실의 리얼함 위에, 불공정한 세상을 뒤집는 판타지가 겹쳐지는 지점에 대중들의 몰입은 생겨난다.

하지만 단지 프로그램 외적인 상황에 의해 '슈퍼스타K2'가 거둔 경이적인 대중적 성공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런 외적인 환경은 기획적인 것이지만, 이 기획을 실현시키는 것은 내적인 완성도다. 그런 점에서 '슈퍼스타K2'가 거둔 성과의 반은 바로 이 끊임없이 몰입하게 만드는 프로그램 내적인 성취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음악의 본질인 노래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슈퍼스타K2'는 물론 간간히 댄스를 가미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래 실력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슈퍼위크를 거쳐 마지막 11인에 뽑힌 경쟁자들 중에서 댄스와 함께 노래를 한 후보자는 이보람과 김소정 정도다. 나머지는 모두 각자의 개성적인 보컬로 경쟁에 임했다. 기존의 노래들을 이들이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해내는가는 이 프로그램이 가진 특별한 재미다.

쟁쟁한 기성가수들의 노래가 이제 첫발을 디디는 이들에 의해 거침없이 재해석되는 것을 목도하면서 대중들을 열광한다. 그것은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이기 때문이다. 이문세가 '조조할인'을 부른 허각에게 "저보다 더 잘 불렀네요"라고 심사평을 말할 때, 윤종신이 장재인의 노래를 듣고는 "좋은 가수가 될 거예요"라고 말할 때 그 쾌감은 극대화된다. 심사위원들의 노래에 대한 혹독한 평가가 서서히 찬사로 바뀌는 과정 역시 마찬가지다. 중요한 건 이들이 불러야 하는 노래가 좀 더 폭넓은 세대를 끌어안으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뽑힌 11명이 첫 생방송 무대에서 부여받은 미션은 명곡들의 재해석이었고, 8명으로 좁혀진 경쟁자들이 치르게 된 미션은 이문세의 노래를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쇼바이벌'이 그랬던 것처럼 노래들이 지나치게 젊은 층에 치중되었다면 '슈퍼스타K2'는 이처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좀 더 넓은 세대를 포괄할 수 있는 노래들을 미션을 부여함으로써 이 프로그램은 젊은 세대들은 물론이고 중장년층까지 빠져들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

노래 자체의 매력과 그것을 절절히 표현해내는 경쟁자들의 만만찮은 노래 실력이 프로그램의 기본적인 힘을 만들어냈다면, 이 힘에 더 강한 추진력을 부여하는 건 게임이나 스포츠를 보는 것 같은 이 프로그램만의 형식이다. '슈퍼스타K2'는 노래를 빼놓고 보면 한 판의 스포츠 경기를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관중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사회자로서의 김성주 아나운서(그가 예전 스포츠 캐스터였다는 점이 이채롭다)가 심판처럼 서 있고 경쟁자들이 나와 실력을 보이면 그것에 대해 심사위원들이 점수를 준다. 단순해 보이지만 이 형식은 100만 명이 넘는 지원자에서 단 한 명으로 서서히 좁혀져가는 과정을 통해 시쳇말로 '쪼이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게다가 이렇게 좁혀지는 과정에서 가수들(캐릭터)은 성장한다. 스타일리스트가 붙으면서 스타일이 업그레이드되고, 보컬트레이너가 붙으면서 노래가 세련되어지는 과정은 게임에서 캐릭터가 성장할 때 바뀌어지는 갑옷처럼 대중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지지 않았다면 매번 진행될 때마다 이처럼 프로그램이 상승곡선을 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즉 이 모든 요소들이 하나의 스토리텔링으로 엮어지는 구조가 '슈퍼스타K2'에 마치 연속극을 보는 것 같은 힘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저마다의 지원자들은 자신들의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들고 무대 위에 오른다. 허각이나 김지수가 갖고 있는 힘겨웠던 가족관계의 이야기는 노래로 승화된다. 때론 애인을 생각하며 때론 어머니를 생각하며 노래에 감정이입하는 이들의 모습은 노래 이면의 스토리를 구축한다. 게다가 함께 합숙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은 그들만의 스토리 또한 만들어간다. 함께 연습해서 무대에서 부른 후, 둘 중 한 사람을 떨어뜨리는 경쟁 형식은 이런 스토리에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더해준다.

'슈퍼스타K2'의 경이적인 성공을 단 한 가지 요소로서 해석하기는 어렵다. 거기에는 음악이 갖고 있는 본연의 힘과 그 음악을 세대적으로 배려하는 섬세한 연출, 마치 게임이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구성해놓은 무대 그리고 차츰 성장해가는 인물들의 스토리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물론 한 몫을 하는 것은 케이블이라는 채널이라는 특성을 빼놓을 수 없다. 아무리 심사라고 하지만 이승철이 지원자들 앞에 거침없이 날리는 독설은 지상파에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직설어법이 이 프로그램에 대중들이 빠져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항간에는 "왜 우리는 저런 프로그램을 못하냐"는 질책으로 '슈퍼스타K2'를 벤치마킹한 프로그램이 기획되어 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요인들을 분석하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예감할 수 있다. 다 년 간의 무대 노하우가 거기에는 있고, 케이블만이 자유롭게 해온 실험정신이 있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지극히 상업적이면서도 그것이 용인되는 케이블에 대한 대중들의 감성이 들어가 있다. '슈퍼스타'는 그냥 탄생하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해피투게더'와 '런닝맨' 논란이 말해주는 것

결국은 게임이 문제다. '해피투게더'는 지금껏 게스트 배려가 가장 돋보이는 프로그램이었지만, 이른바 '커플 게임' 하나로 시청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게임은 전형적인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가져온 것들로 처음에는 이구동성 퀴즈 같은 소소한 것으로 시작하더니, 차츰 막대과자를 남녀가 양쪽에서 먹어 가장 적게 남기는 게임, 신문지를 점점 접어가면서 두 사람이 그 위에 서는 게임으로 강도를 높이더니 마지막에는 눈을 가린 사람이 자장면을 먹여주는 조금은 과도한 게임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 게임의 주인공은 게스트가 아니라 게임에 참여한 박명수-박미선이었다. 지금껏 이런 균형을 잃은 과도함이 없었던 '해피투게더'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편집이었다.

게스트를 위해 기꺼이 병풍이 되어줌으로써 게스트들의 자연스러운 토크를 유도하던 '해피투게더' 본연의 화기애애하고 편안한 분위기는 왜 이런 과도함으로 점철되어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을까. 이것은 때론 프로그램에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게임이 가진 또다른 얼굴이다. 게임은 잘 활용되면 캐릭터도 만들어주고, 프로그램을 팽팽하게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너무 과도해지면 거기에 참가하는 이는 물론이고 보는 이까지 불편하게 만든다. 웃음은 게임의 강도가 적절했을 때 유발되지만, 어떤 선을 넘기면 고통으로 변질된다. 만일 넘어진 개그맨이 진짜 다리가 부러진다면 웃을 수 있을까. 웃자고 한 일이 과도해 '왜 이걸 하고 있지'하고 반문하게 된다면 과연 웃을 수 있을까.

게임이 문제인 것은 '런닝맨'에서도 불거져 나온 바 있다. 도시의 랜드마크를 찾아가 아무도 없는 밤에 지형지물을 이용한 각종 게임을 수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그러나 지나치게 가학적인 게임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다. 얼굴에 빨래집게를 집고 양측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게임은 보기만 해도 그 고통이 생생히 느껴졌고,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 넣고 부러뜨리기 게임 역시 "고통을 참아내야 한다"는 구호로 얼룩졌다. 주사위 수만큼 계란을 잔뜩 넣은 뜨거운 쌍화차를 누가 빨리 마시는가 하는 게임에서 유재석은 "용암을 마시는 것 같다"고 심정을 말하기도 했다. 아무리 게임 버라이어티를 추구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지나치다는 의견이 쏟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게임이 갖는 비중은 상당하다. '무한도전'이 어떤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물론 차츰 진화해온 도전과제와 그 과정 중에 보여준 다양한 스토리들 때문이지만, 그 속에 양념처럼 들어가 있던 게임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1박2일'에서도 마찬가지다. '1박2일'은 여행이라는 아이템을 주제로 하지만, 재미 요소를 확실하게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복불복이었기 때문이다. 야외 취침이나 저녁 식사를 놓고 벌이는 복불복은 차츰 진화해서 팀원들과 제작진이 게임을 벌이는 복불복의 스펙터클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예능 프로그램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임은 또한 천덕꾸러기이기도 하다. '1박2일'이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던 가장 큰 이유는 본래 취지인 여행이 점점 드러나지 않고 지나치게 복불복에만 치중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1박2일'은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복불복 게임을 잠시 접어두고 다섯 구간으로 나누어 지리산 둘레길을 각자 걷는 모습을 통해 본연의 모습을 찾아갔다. 과거 '패밀리가 떴다'가 비판 받았던 점도 바로 게임이었다. 어떤 변화없이 밥 해먹고 게임하고 밥 해먹고 게임하는 그 매너리즘이 문제로 지적되었던 것.

작금의 예능 프로그램은 맥락 없는 게임의 연속만으로는 대중들의 달라진 기호를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게임은 일종의 자극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극만으로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점점 버라이어티쇼화 되어가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들은 이제 말 그대로 버라이어티한 재미를 추구해야 이제 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각 프로그램들이 내세운 취지에 맞는 스토리를 지속적으로 축적해나가야 한다는 점이다. '무한도전'이 계속 도전을 하고, '1박2일'이 계속 여행의 설렘을 찾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해피투게더'가 비판받았던 것은 게임에 몰두하면서 그 본래 취지인 '함께 행복(해피투게더)'한 모습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런닝맨'이 비판받는 것은 아무리 게임 버라이어티라고 해도 그 안에 어떤 맥락 있는 이야기 구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저 마구잡이식의 게임에 치중하기보다는 '다이하드'식의 액션 스토리를 부가하고 유르스 윌리스 같은 캐릭터를 끄집어내면서 차츰 스토리를 축적시키는 것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예능 프로그램이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기 시작하는 순간, 본래 프로그램의 스토리는 그만큼 휘발되기 쉽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위기는 바로 이런 부분에서 시작된다.

'패떴2'가 가진 공감 없는 스토리의 문제

새로운 구성원으로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이하 패떴)'. 그 추락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주말 예능의 지존의 자리까지 있었던 '패떴'은 차츰 하향세의 길을 걸어오다 결국 구성원 전원을 교체하고 '패떴2'로 변화를 꾀했다. '패떴2'의 첫 방은 16% 남짓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기대감을 높였으나 현재는 반 토막에도 못 미치는 7.5%에 머물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걸까.

먼저 지목되는 것은 유재석, 이효리 같은 '패떴' 1기 멤버들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패떴2'에는 전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할 수 있는 이들 같은 존재가 없다. 김원희가 나서서 상황을 이끌려는 노력이 보이나, 그것은 유재석이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아 마치 리얼 예능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는 듯한 어색함이 있다. 지상렬은 거의 목숨을 걸고(?)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열성을 보이지만 그걸 효과적으로 받아주는 멤버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한다는 느낌만을 전할 뿐이다.

애초에 기대했던 조권, 윤아, 택연은 이미 프로그램밖에 있던 캐릭터를 프로그램 속으로 가져와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이미지 소모가 너무 빨라지고 있다. 조권은 여기서도 여전히 깝춤을 추고, 윤아는 '분장실의 강선생님' 흉내를 내며, 택연은 초콜릿 복근을 과시한다. 매화아가씨-매실총각을 뽑는 장면에서 이들이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조권의 여장은 결국 깝춤으로 이어졌고, 윤아의 남장은 의외의 보이쉬함을 통한 털털함을 재확인해줬으며, 택연은 결국 근육 과시로 마무리되었다.

거의 전 멤버가 프로그램 속에서 캐릭터를 세우지 못하고, 대신 이미 갖고 있던 캐릭터를 반복하는 것은 '패떴2'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패떴'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예인들이 유사가족으로 뭉쳐졌을 때,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미를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외부의 캐릭터를 그저 내부로 가져올 때, 그것은 '패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해주는 게 아니고, 그 캐릭터를 반복하는 출연자의 정체성만 소비하게 된다. 즉 '패떴2'에서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지게 되는 셈이다. 유일하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인물은 윤상현이지만 예능 초보로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연출의 문제다. 지금 '패떴2'에는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부재하다. 어느 마을에 가는 것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 곳에서 게임을 반복하는 것에도 어떤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의미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그 게임에 빠져들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맥락 없는 게임은 시청자들의 맥빠지게 만든다. 아침에 기상시켜 갑자기 차에 타라고 한 후, 강변에서 씨름을 시키는 것은, 출연진을 고생시키는 것 이외의 공감을 찾기 어렵게 한다. 씨름부 아이들과의 아침 대결이 준비되었다면(어차피 이건 인위적인 것이다), 사전에 왜 그들이 대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 정도는 암시되었어야 한다.

이것은 매화아가씨-매실총각 콘테스트나 벗굴 채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곳의 명물인 매화와 매실 그리고 벗굴을 홍보하기 위한 것은 알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이 왜 게임을 통해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금 '패떴2'는 이처럼 공감이 형성되기 이전에 인물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님으로써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효과는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패떴1'에서는 저녁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주었는데, 지금은 눈밭과 진창에 뒹굴고, 벗굴 채취를 위해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도 그다지 재미를 주지 못한다.

이것은 '패떴1'이 가졌었던 공감대를 '패떴2'가 가져오지 못한 결과다. '패떴1'은 그 따뜻한 가족적인 분위기가 가장 큰 공감대였다. 그 분위기 위에서 서로 툭탁대지만 그것이 장난 같은 즐거운 놀이처럼 아기자기한 맛을 주었던 것. 하지만 '패떴2'는 너무 비장하다. 윤아나 조권, 택연, 윤상현 같은 좋은 멤버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마음에 저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떠올려야할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야심만만'이다. '야심만만'은 설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초대 손님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재미를 선사했다. 어찌 보면 폭로의 우회형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설문을 통해 바탕에 깔린 공감대가 있었다. '아 나도 저랬었지'하는 공감을 통해 출연자의 이야기에 시청자가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야심만만2'로 오면서 그 공감이 사라지고, 대신 자극적인 설정만 남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패떴2'는 왜 안타깝게도 '야심만만2'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일까.

수상한 게임을 시작하는 ‘수상한 삼형제’

‘수상한 삼형제’가 수상하다. 시작 전부터 문영남 작가라는 아우라 때문에 또 다른 막장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과는 달리 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특히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차인 주어영(오지은)이 김이상(이준혁)을 통해 다시 생기를 찾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밝은 행보를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역시 본색은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수상한 삼형제’는 서서히 그 수상한 행보를 보이면서 시청자들 사이에 논쟁마저 일으킬 정도로 강한 설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어영과 삼 년을 연애하다 차버리고는, 그녀가 김이상과 가까워지게 되자 질투를 느끼고 그 사이에 다시 끼어들게 되는 왕재수(고세원)는 이름처럼 왕재수다. 드라마 속의 삼각관계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라고 여겨질 지도 모르지만 이 삼각관계는 지나치게 극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왕재수가 검사로서 김이상의 상사로 부임해 오고, 그 권력을 남용해 주어영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이야기는 치졸함과 치사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삼각관계의 설정이야 드라마를 위해 어떻게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김이상이 보는 앞에서 왕재수가 그를 비웃듯 노려보며 억지로 주어영과 키스하는 장면은 범죄적인 뉘앙스마저 풍긴다.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주어영과 김이상 사이에 어떤 애틋한 감정을 만들어놓은 것이 결국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끄집어내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또다시 문영남 작가의 자극적인 갈등 구조로의 회귀다. 문영남 작가는 먼저 지극히 착하고 순한 인물을 먼저 세워두고는 거의 악마에 가까운 대립자를 통해 그 주인공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갈등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결론은 사필귀정이지만 드라마는 결론만큼 과정이 중요한 콘텐츠이다. 문영남 작가의 작품들이 짧은 사필귀정의 이야기보다 긴 핍박이 가진 울화통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수상한 삼형제’에는 주어영과 김이상 사이에 끼어드는 왕재수 이외에도, 전형적인 민폐남인 장남 김건강(안내상)이 등장하고, 그 지질함을 끝까지 감싸고도는 엄마 전과자(이효춘)가 등장해, 보는 이의 혀를 차게 만든다. 마치 종 부리듯 며느리인 도우미(김희정)를 마구 대하는 전과자가 민폐만 끼치는 김건강을 상전 대하듯 하는 장면은 또 하나의 부정적 관계로서 시청자들의 눈을 밟는다. 전과자 연기를 하고 있는 이효춘의 연기력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대사 자체가 연극적인 데서 오는 이유도 있지만, 그녀의 캐릭터가 가진 과장된 설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문영남 작가는 드라마라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저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설정된 캐릭터를 부여한 인형들의 놀이를 즐기는 작가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이름이 그 캐릭터로 부여되는 것은 어쩌면 그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주어영은 이름처럼 두 남자 사이에서 어영부영대고 있고, 김이상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왕재수는 말 그대로 왕재수다. 전과자는 무슨 잘못인지 모르지만 아버지인 김순경(박인환)에게 체포되어 있는 말 그대로의 전과자이며, 심지어 며느리인 도우미는 진짜 며느리라기보다는 집안일 돕기 위해 고용된 도우미처럼 보인다.

‘수상한 삼형제’의 행보가 수상해 보이는 것은 이미 변화의 여지없이 설정된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가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인위적인 손길은 그것이 인위적이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때로는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하고 심지어 화나게도 만든다. 이것은 작가가 시청자들과 벌이는 하나의 게임이다. 거기에 말려들면 화를 내면서도 더욱 더 쳐다봐야만 하는 이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게임. ‘수상한 삼형제’의 수상한 게임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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