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의 팀플레이 정신과 공감의 힘

도대체 이게 뭘까. 달랑 공 하나가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것일 뿐인데 전 세계가 들썩거린다. 공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이 그림은 실로 놀랍다. 공 한 개가 있고, 그 공을 차는 선수가 있으며, 그 선수를 둘러싼 팀과 팀이 있다. 그리고 경기장에서 그 공을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선수들을 예의주시하는 수천 명의 관중이 있고, 카메라라는 시각의 확장을 매개해주는 매체가 전 세계인의 눈을 그 공 하나에 집중시킨다. 도대체 공 하나에 모두가 집중하게 되는 그 집단적인 힘은 어디서 발생하는 것일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한국과 그리스전에서 박지성이 두 명의 그리스 선수를 제치고 골을 집어넣는 장면은 질리지가 않는다. 그 순간에 제 아무리 다른 환경에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있었다고 해도 그 마음은 똑같았을 것이다. 골을 몰고 들어갈 때의 그 기원 가득한 긴장감과 골을 찼을 때의 터질 듯한 심장박동, 그리고 골이 들어갔을 때 느꼈던 그 희열. 짧은 순간이지만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한 덩어리가 되는 집단적인 황홀감에 빠져들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 중의 하나가 타자와의 '완전한 공감'이라고 할 때 이 순간은 그 욕구가 충족되는 흔치않은 시간이었음에 분명하다.

흔히들 '공감'이라고 하면 우리는 문화적인 차원을 떠올린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고 웃거나 울거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 그것이 공감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공감은 그 한자(共感)가 그대로 말해주듯이 좀 더 감각적인 것이다. 누군가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을 볼 때, 내 입에 침이 고이는 것이나, 진동하고 있는 핸드폰을 누군가 들었을 때, 그 비슷한 감각을 느끼는 것 같은 감각적인 차원이 공감이다. 자신이 직접 행동하지 않고 상대방의 행동을 보기만 하더라도 뇌신경이 반응하며 그 감각을 느끼는(공명현상이라고 한다) 이른바 신경학에서 발견한 '거울 뉴런'의 존재는 '공감'의 매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준다. 따라서 거기 굴러다니는 것은 축구공 하나지만 그 공 하나로 인해 공감하는 이들은 전 세계인들이 된다. 그들은 저마다 제각각의 존재이지만 공 하나로 똑같이 감각하게 된다. 집단적인 황홀감은 스포츠의 묘미이고, 거기에는 바로 이 공감의 매커니즘이 숨겨져 있다.

떨어져 있으면서도 실제로 기능하는 이 마법 같은 공감의 힘은 응원이 어째서 경기 결과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가를 설명해주기도 한다. 이길 수 있다는 불굴의 의지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질 때, 그것은 경기장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에게까지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이것은 경기장에서 팀을 이뤄 뛰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어떤 확신을 준다면 그 팀은 그 공감의 힘으로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두려움에 가득하다면 그것은 고스란히 팀에 나쁜 영향으로 돌아간다.

박지성 선수의 자서전을 보면 히딩크 감독이 한국팀을 4강까지 가져갈 수 있게 한 원동력으로 '팀플레이 정신'을 자주 찾아낼 수 있다. 박지성은 "우리가 싸우는 것은 어느 한 개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경기를 이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개개인이 아니라 팀이 하나가 되어 움직일 때 경기를 이길 수 있다고 자주 말해왔다. 히딩크 감독은 자주 경기를 뛰면서 전체 팀원들의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생각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이것은 어떤 차원으로 보면 일종의 '공감 훈련'인 셈이다. 11명의 선수가 제 각각이 아니라 모두 똑같은 감각으로 하나의 유기체처럼 움직인다면, 그 팀은 개개인의 역량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쉽게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히딩크가 강조했고 박지성이 자주 언급했던 한국팀의 힘은 바로 이 팀플레이라고 흔히 부르는 공감능력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축구는 공감의 스포츠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서로 공감하며 제각각이 아니라 하나의 팀으로 달려야 승리할 수 있고, 그걸 바라보는 관중들은 자신들의 염원을 응원에 담아 선수들에게 보냄으로써 승리를 공감하려 애쓴다. 그러니 벌써 8년이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골이 터지는 그 장면을 보면서 아직도 가슴이 두근두근한 그 이유를 알 것이다. 그 장면들은 다름 아닌 우리가 그토록 욕망하는 완전한 공감을 했던 인생에 흔치않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아르헨티나를 강팀이라고 한다. 그 팀에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이는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개인적 역량이 뛰어난 스타 선수들이 많다고 해서 그들을 강팀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됐다. 진정한 강팀은 각각의 선수들의 역량이 아니라, 하나의 팀이 마치 한 몸처럼 공감하며 움직일 때 탄생하는 것이다. 그런 면으로 보면 우리 팀은 분명 강팀이라고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면모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승패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강팀으로서의 면모를 발휘해주기를 바란다. 그것은 선수들과 똑같이 공감하는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일 테니까.

기부 프로그램의 새로운 실험, '올리브'

"비둘기는 저녁 때가 되어 되돌아왔는데 부리에 금방 딴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있었다. 그제야 노아는 물이 줄었다는 것을 알았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의 한 구절이다. 아마도 홍수로 배 위에서 절망적인 나날을 버텨내던 그들은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잎사귀에서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올리브는 평화와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 선을 보인 기부 프로그램 '올리브'에는 그 비둘기와 그 올리브가 모두 존재한다. 비둘기가 기부자라면 올리브는 그가 프로그램을 통해 전하는 희망이다.

그 희망이 닿는 곳은 지금 이 땅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그들은 저마다 사연 하나씩을 들고 스튜디오로 들어온다. 출연자들이 직접 필요한 금액을 적어보이는 모습은 조금은 직설적으로 보이지만 오히려 그 투박함이 어떤 진실에 가까워보인다. 이것은 힘겨운 현실에 처한 이들을 그저 말로 위로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누군가는 고상하게 '돈'이라는 말을 피하겠지만, 사실 이들에게 가장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돈이다.

하지만 돈을 적어내고 그 돈을 기부하는 것으로 '올리브'라는 프로그램을 단순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드러내고 그 사연을 들어주는 이가 있으며, 거기에 선선히 돈을 쾌척하는 기부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그 기부의 선순환을 희망하게 만드는 힘이 생겨난다. 그래서 '올리브'가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들은 돈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된다.

출연진들이 전해주는 사연들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낮은 곳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거기에는 날치기범을 잡은 자율방범대원이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오른쪽 어깨 인대 파열을 입고 손을 사용할 수 없어 횟집을 2년 여간 방치해오다 왼손으로 다시 칼을 잡게 된 이도 있고, 두석장을 만드는 중요무형문화재지만 생활고에 시달려 나무조차 살 수 없게 된 이도 있으며, 고2 때 아들을 낳아 이제 갓 스물에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이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사연을 통해 힘겨운 삶의 이야기들을 시청자들에게 물어다 준다.

한편 기부자를 통해 도움을 받은 그들은 자신들 또한 자신처럼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겠다고 다짐한다. 다친 오른손 때문에 서툴게 왼손으로 회를 썰며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토로했던 남자는 다음날 새벽 3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시장에 나가면서 이렇게 말한다. "매일 왔던 곳인데 어제와 오늘이 달라 보입니다."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연봉 1천5백만 원도 안 되는 자신의 일을 선뜻 아들에게 권하지 못한 중요무형문화재 두석장 보유자는 다음 날 신바람 나게 목재상을 찾아간다. 그것은 희망을 찾아가는 발걸음이다.

프로그램 시작에 MC 이경규는 이렇게 말했다. "돈을 버는 건 기술이지만 돈을 쓰는 건 예술"이라고. 흔히 쓰는 표현이지만, 그것을 직접 목도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건 '올리브'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힘이다. 의외로 공감의 힘은 강하다. 어떤 사연을 가진 이에게, 또 그에게 도움을 주는 이에게 공감할 때, 이미 사회는 그 변화가 시작됐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주 위에서 비둘기가 물어다 준 올리브를 보며 느꼈던 그 희망이 다시 삶을 살아가게 해주었을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 희망은 다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군가의 올리브였던 적이 있느냐고.

'패떴2'가 가진 공감 없는 스토리의 문제

새로운 구성원으로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이하 패떴)'. 그 추락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주말 예능의 지존의 자리까지 있었던 '패떴'은 차츰 하향세의 길을 걸어오다 결국 구성원 전원을 교체하고 '패떴2'로 변화를 꾀했다. '패떴2'의 첫 방은 16% 남짓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기대감을 높였으나 현재는 반 토막에도 못 미치는 7.5%에 머물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걸까.

먼저 지목되는 것은 유재석, 이효리 같은 '패떴' 1기 멤버들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패떴2'에는 전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할 수 있는 이들 같은 존재가 없다. 김원희가 나서서 상황을 이끌려는 노력이 보이나, 그것은 유재석이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아 마치 리얼 예능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는 듯한 어색함이 있다. 지상렬은 거의 목숨을 걸고(?)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열성을 보이지만 그걸 효과적으로 받아주는 멤버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한다는 느낌만을 전할 뿐이다.

애초에 기대했던 조권, 윤아, 택연은 이미 프로그램밖에 있던 캐릭터를 프로그램 속으로 가져와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이미지 소모가 너무 빨라지고 있다. 조권은 여기서도 여전히 깝춤을 추고, 윤아는 '분장실의 강선생님' 흉내를 내며, 택연은 초콜릿 복근을 과시한다. 매화아가씨-매실총각을 뽑는 장면에서 이들이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조권의 여장은 결국 깝춤으로 이어졌고, 윤아의 남장은 의외의 보이쉬함을 통한 털털함을 재확인해줬으며, 택연은 결국 근육 과시로 마무리되었다.

거의 전 멤버가 프로그램 속에서 캐릭터를 세우지 못하고, 대신 이미 갖고 있던 캐릭터를 반복하는 것은 '패떴2'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패떴'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예인들이 유사가족으로 뭉쳐졌을 때,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미를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외부의 캐릭터를 그저 내부로 가져올 때, 그것은 '패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해주는 게 아니고, 그 캐릭터를 반복하는 출연자의 정체성만 소비하게 된다. 즉 '패떴2'에서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지게 되는 셈이다. 유일하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인물은 윤상현이지만 예능 초보로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연출의 문제다. 지금 '패떴2'에는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부재하다. 어느 마을에 가는 것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 곳에서 게임을 반복하는 것에도 어떤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의미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그 게임에 빠져들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맥락 없는 게임은 시청자들의 맥빠지게 만든다. 아침에 기상시켜 갑자기 차에 타라고 한 후, 강변에서 씨름을 시키는 것은, 출연진을 고생시키는 것 이외의 공감을 찾기 어렵게 한다. 씨름부 아이들과의 아침 대결이 준비되었다면(어차피 이건 인위적인 것이다), 사전에 왜 그들이 대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 정도는 암시되었어야 한다.

이것은 매화아가씨-매실총각 콘테스트나 벗굴 채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곳의 명물인 매화와 매실 그리고 벗굴을 홍보하기 위한 것은 알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이 왜 게임을 통해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금 '패떴2'는 이처럼 공감이 형성되기 이전에 인물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님으로써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효과는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패떴1'에서는 저녁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주었는데, 지금은 눈밭과 진창에 뒹굴고, 벗굴 채취를 위해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도 그다지 재미를 주지 못한다.

이것은 '패떴1'이 가졌었던 공감대를 '패떴2'가 가져오지 못한 결과다. '패떴1'은 그 따뜻한 가족적인 분위기가 가장 큰 공감대였다. 그 분위기 위에서 서로 툭탁대지만 그것이 장난 같은 즐거운 놀이처럼 아기자기한 맛을 주었던 것. 하지만 '패떴2'는 너무 비장하다. 윤아나 조권, 택연, 윤상현 같은 좋은 멤버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마음에 저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떠올려야할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야심만만'이다. '야심만만'은 설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초대 손님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재미를 선사했다. 어찌 보면 폭로의 우회형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설문을 통해 바탕에 깔린 공감대가 있었다. '아 나도 저랬었지'하는 공감을 통해 출연자의 이야기에 시청자가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야심만만2'로 오면서 그 공감이 사라지고, 대신 자극적인 설정만 남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패떴2'는 왜 안타깝게도 '야심만만2'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일까.

'남녀탐구생활', 공감 버라이어티 시대 여나

내 속에 들어갔다 나왔나. 어쩜 저렇게 내 속 같은 얘기만 할까. 케이블채널 tvN의 '재밌는 TV 롤러코스터-남녀탐구생활'의 마음에 짝짝 달라붙는 맛깔스런 내레이션을 듣다 보면 드는 생각이다. 같은 상황에 대한 남녀의 서로 다른 내밀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예능 프로그램이 말 그대로 빵 터진 건 바로 이 공감에 있다.

'남녀탐구생활'이 이 공감을 가져오기 위해 취하고 있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실로 흥미로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이른바 대세가 되어버린 리얼 버라이어티 형식의 정반대 지점에 이 코너가 서 있다는 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리얼에 포인트를 맞춰 대본을 최소화하고 현장에서 포착한 장면과 대사들을 가져와 그것을 편집과 자막을 통해 웃음과 스토리를 강화한다. 하지만 '남녀탐구생활'은 먼저 내레이션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 영상을 연출하는 철저히 사전 기획된 내용을 담는다. 그래서 결과는? 공감 백배의 영상이다.

이것은 기획되지 않은 날 것의 영상들만이 진정성을 담아내고, 그것이 결국 공감까지 가져올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만드는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가 된 세상에 대한 역발상이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의도되지 않은 장면을 통해 리얼한 공감을 주고 자막 등 후반작업을 통해 그 공감이 증폭된다면, '남녀탐구생활'은 먼저 딱 맞는 내레이션이 철저히 기획되어 만들어지는 지점에서 먼저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거기에 맞춘 영상은 그 공감을 증폭시킨다. 방향은 반대지만 목적은 같다. 공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가 대세가 된 것은 그것이 리얼해서 재미있기 때문이 아니라 리얼해서 공감이 가기 때문이다. 그 웃음이 거짓이 아니고 진정성이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먹을 것을 놓고 복불복을 해도 그것이 진짜 배고플 때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을 때 하는 것에는 공감의 차이가 생긴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바로 이러한 리얼한 상황들을 엮어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는 바로 그 리얼함 때문에 공감을 얻는다. 그러니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리얼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목적은 공감이 된다.

예능 프로그램이 이처럼 공감을 목적으로 하게 된 것은 리얼 버라이어티가 가진 스토리텔링의 특징이기도 하다. 리얼 버라이어티는 일정한 캐릭터를 구성하고, 상황 속에서 리얼한 반응들을 엮어서 하나의 스토리를 구성한다. 이것은 매 회 다른 이야기를 가지면서 또 전체를 관통하는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드라마적인 스토리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그것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 정도일 것이다. 그러니 이러한 스토리를 가진 예능들이 드라마가 추구하는 것처럼 공감을 추구하게 된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남녀탐구생활'이 이 굳이 리얼을 내세우지 않고도 공감을 가져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이것은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에 이 코너의 선택이 리얼을 주장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남녀탐구생활'은 남녀의 숨겨진 내밀한 심리라는 누구나 보편타당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소재를 가져와 대중들과 공감했다는 점이 성공의 핵심 포인트다. 사실 이제는 '리얼 버라이어티'의 리얼이라는 말조차 식상해진 시점이다. 리얼에 대한 강박은 이제 그것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식으로 오히려 사회적 논란만 야기시키는 아킬레스건으로 전락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은 공감이다. '남녀탐구생활'은 그 가능성을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웃기기만 하면 된다고 치부되던 시대는 이제 갔어요. 예능도 이제는 공감이 필요해요." 이제 공감 버라이어티의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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