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당 이야기들에는 오컬트부터 가족 서사까지 담겼다(‘샤먼: 귀신전’)

샤먼:귀신전

“뭣이 중헌디?”라는 유행어까지 남긴 영화 ‘곡성’에서부터 최근 ‘파묘’ 신드롬까지 이어진 오컬트 영화들과, ‘손 the guest’에서부터 ‘방법’, ‘지옥’에 이르는 오컬트 드라마들이 독특한 우리식의 오컬트 장르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면, 이제 그 K오컬트라 불리는 영역 안에 다큐멘터리도 한 자리를 차지할 듯 싶다. 바로 티빙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샤먼: 귀신전’이 그것이다. 

 

사실 실제 무당들이 등장해 귀신에 괴롭힘을 당하거나 혹은 귀신에 빙의되어 고통을 겪는 이들이 겪는 문제들을 해결해주는 ‘샤먼: 귀신전’은 어딘가 오싹한 면이 있다. 첫 번째 사례자의 경우만 봐도 눈앞에 점점 가까이 나타나는 귀신의 형상이 낮이고 밤이고 계속되는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지가 실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컬트적 이야기를 그리 즐기지 않는 분들에게는 진입장벽이 있을 수 있지만, 막상 보다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서사가 펼쳐진다.

 

오컬트 장르물들이 가진 서사가 그러하듯이, 고통받는 사례자와 그 사연을 접하고 그 사례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들어보는 과정의 섬뜩함이 전면에 이어진다면, 이를 해결해주는 인물로서 무당이 등장해 불가해했던 사건들을 무속의 언어들로 풀어주고 굿을 통해 귀신을 떼어내고 귀문을 닫아주는 그 일련의 과정들이 펼쳐진다. 그 과정 속에서 과거 사례자에게 있었던 사건들이 등장하고 귀신 들리게 된 이유가 무당의 입을 통해 제시될 때는 그것이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실제 다큐멘터리라는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드디어 문제를 해결한 사례자가 평화로운 삶으로 돌아간다. 

 

‘샤먼: 귀신전’은 고통받는 사례자와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 그걸 풀어주는 과정을 담는 오컬트 장르물들이 가진 기본적인 서사를 따라가면서, 무속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갖는가를 되짚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치유’의 의미와 가치다. 지금이야 현대의학이 대부분의 질환들을 치료하지만, 100년 전만 해도 아픈 병자들을 고치는 1차 방어선이 한의학이었고 2차 방어선이 바로 무속이었다는 것. 약초에도 해박한 무당들은 그래서 한의사들과 함께 아픈 이들을 치유해주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거였다. 

 

‘샤먼: 귀신전’이 가진 무속에 대한 ‘치유’의 관점은, 과거 한국의 무속을 연구했던 인류학 박사 로렐 켄달이 “귀신의 존재를 믿느냐”는 질문에 한 답변에도 담겨 있다. “‘믿느냐’는 잘못된 질문 방식이다.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질문의 방향은 ‘믿느냐’가 아닌 ‘효과가 있느냐’인 것 같다.” 그 말은 무당들의 역할이 믿는가 아닌가의 차원이 아니라 실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을 치유하는 효과가 분명 있었다는 것이고, 그러니 무속이 그만한 의미를 갖는다는 이야기다. 

 

계속 신의 부름을 거부하다 아이까지 알 수 없는 병으로 고통받게 되자 끝내 신내림을 받기로 결심하고 그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자의 경우는 무당이 되는 일이 얼마나 자기 희생을 필요로 하는가를 절감하게 해주는 사례이다. 끝까지 안하고 싶어 왜 하필 나냐고 눈물을 쏟아내는 사연자에게 엄마 역시 무당이라 그 신내림을 끝까지 도와주는 엄마가 그런 딸을 보며 흘리는 눈물은 오컬트 장르적 서사로만 채워질 줄 알았던 ‘샤먼: 귀신전’에 의외로 진한 감동을 선사한 가족서사였다. 

 

그 누가 자신의 딸을 그 어려운 무당의 길로 들어서게 해주고 싶었을까. 하지만 그것을 회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엄마는 딸이 신내림 받는 걸 도와주며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고, 신들에게 딸을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다. 그 절절한 과정은 무당이라는 업이 가진 무게감을 드러낸다. 그저 갑자기 신병이 들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 되는 게 무당이 아니라, 어려운 이들을 돕는 역할을 부여받아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받아들이게 된 이들이 무당이라는 것이다. 

 

‘샤먼: 귀신전’은 이처럼 우리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보던 다소 피상적인 무속에 대해 한 발 더 다가가 그 실체에 접근하는 다큐멘터리다. 한 편의 오컬트 장르를 보는 듯한 드라마틱한 스토리텔링이 들어있지만, 다큐멘터리 특유의 진실에 접근해가는 진지함이 돋보이고 나아가 무당의 업을 물려받는 자들의 가족 서사 같은 진한 감동도 담겨있다. 다큐멘터리로서 K오컬트의 탄생을 이야기해도 될 법한 재미와 완성도가 충분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사진:티빙)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이 디스토피아에 담아낸 것

지옥

인간은 왜 지옥이라는 종교적 개념을 만들어냈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논쟁적이다. 지옥의 실재를 믿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의심이 그 질문 안에 담겨 있어서다. 그래서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은 논쟁적이다. 미리 말해두면 이 드라마에 흔히 불길이 치솟는 아비규환으로 그려지곤 하는 그런 진짜 지옥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지옥의 사자’라 불리는 괴 존재들이 등장한다. 갑자기 유령처럼 어떤 차원을 뛰어넘어 나타난 이들은 사전에 ‘지옥행’을 ‘고지’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 다짜고짜 폭력을 가해 피와 살점이 튀는 처참한 광경을 마치 보여주려 작정한 것처럼 ‘시연’한 후, 손을 모아 만들어내는 빛 속에서 순식간에 뼈의 형상 정도만 남겨놓는 재로 만들어버린다. 그건 물론 괴 존재에 의해 만들어진 끔찍한 광경이지만, 그저 하나의 사건으로 본다면 일종의 ‘재난’에 가까운 일이다. 즉 어느 날 길을 가다 갑자기 날아온 벼락에 맞아 온몸이 타버리며 죽는 그런 일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재난이 지옥이 되는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하나는 그런 일이 벌어질 걸 사전에 고지 받는다는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한 시간 후에 어떤 이들은 일주일 후 혹은 10년 후에 지옥행을 고지 받는다. 자신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그것도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미리 알게 된다는 건 그의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죽음도 그렇지만, 자신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은 그의 삶조차 치욕스럽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재난이 더더욱 견디지 못할 지옥이 되는 건,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는 걸 알았을 때다. 재난 자체가 무슨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을까. 갑자기 난데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건 그래서 삶의 의미를 지워버린다. 그래서 아무 의미 없고 맥락도 없는 죽음 앞에서 인간은 지옥을 창조한다. 그가 죽은 건 그냥 벌어진 일이 아니고 죄를 지었기 때문이며, 그래서 생전 나쁜 짓을 저지르면 지옥에 가게 된다는 논리가 만들어진다. 정반대로 착한 일을 하면 천국에 간다는 서사도 만들어진다. 결국 지옥이란 불가항력의 운명이나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수 있는 인간이 살아내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일 수 있다. 

 

<지옥>에서 새진리회라는 신흥 종교를 만들어낸 정진수(유아인)는 그 자신도 10년 전 지옥행 고지를 받은 자로서 이런 일들이 ‘죄’와는 무관하게 벌어지는 재난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지옥행을 ‘신의 의지’라 설파하면서 사람들을 새진리회로 끌어들인다. “신이 왜 그런 기괴한 일을 벌이는 걸까요? 저는 10년이 넘는 시간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근데 그걸 알 수가 없었어요. 이런 기괴한 일이 벌어지는데 아무런 이유가 없으면 사람들이 버틸 수 있을까요? 아마 엄청난 폭동과 정신적인 공황이 찾아올 거예요. 이유가 있어야 돼요. 이런 기괴한 일들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벌어지고 있다...” 정진수는 그렇게 신과 종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종교는 과연 인간을 구원했을까. 지옥행이 벌어지는 그 끔찍한 장면들은 ‘시연’이라는 이름으로 생중계되고, 이런 공포를 이용해 새진리회는 세력을 키워간다. 지옥행을 당한 이들은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고 그 가족들의 신상마저 공개되어 새진리회 광신도 단체인 화살촉 단원들의 테러를 당한다. 하지만 거짓의 증거들이 곳곳에서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하자(죄가 없는데도 지옥행 고지를 받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 진실을 가리기 위해 새진리회는 유지사제(류경수) 같은 행동대장을 동원해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현재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종교전쟁이나, 종교를 내세운 폭력의 공포로 세력을 키워가는 급진 무장단체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결국 진짜 지옥은 저 갑자기 나타나 무작위로 사람들을 죽이는(이건 아마도 우리 모두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은유하는 것일 게다) 그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인정할 수 없어 만들어낸 거짓으로부터 탄생한다는 걸 <지옥>은 보여준다. 물론 종교는 삶의 또 다른 선택으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하지만 죽음의 공포를 내세워 인간을 미혹하는 사이비들이 판치는 세상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종교만이 아닌 정치나 경제에서도 똑같이 해당하는 이야기일 게다.(글:PD저널, 사진:넷플릭스)

'좀비탐정', 코미디지만 웃을 때마다 느껴지는 짠내의 정체

 

이렇게 웃기는 좀비가 다 있나. 아마도 KBS 새 월화드라마 <좀비탐정>을 본 시청자라면 그간 좀비 장르들과는 너무나 다른 좀비에 적이 당황스러웠을 지도 모르겠다. 이른바 K-좀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네 좀비 장르물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현재, <좀비탐정>의 좀비(최진혁)는 무섭다기보다는 우습다.

 

어떻게 누군가에 의해 죽게 됐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깨어난 좀비는 <부산행>이나 <#살아있다> 그리고 <킹덤> 등에 등장하는 좀비들처럼 활기차지가(?) 않다. 빨리 가려고 해도 느릿느릿 몸이 굼뜨고, 돌을 던지려 해도 힘이 없다. 배가 너무나 고파 결국 혼절하는 상황에 이르러야 눈이 빨개지고 깨어나 보면 자신도 모르게 죽어있는 동물들을 발견한다.

 

이러니 요즘 좀비라면 달리는 건 기본이요, 떼로 몰려다녀 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을 돋게 만드는 그런 좀비와는 태생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좀비는 자신의 존재와는 어울리지 않게 인간에 대한 식욕(?)을 절제하려 한다. 물론 인간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다시지만 그것은 해서는 안 될 짓이라 여긴다. 능력도 인간 이하인데다 어울리지 않는 윤리관(?)까지 갖고 있으니 좀비는 이 살풍경한 인간세상에서 약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좀비가 인간처럼 행동하기 위해 일 년 간 발음교정과 젓가락질 그리고 걷는 연습을 피나게 하는 모습은 '예능 드라마'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빵 터지는 웃음을 준다. 특히 발음교정 훈련을 통해 말하는 게 익숙해진 좀비가 랩을 하는 장면은 최진혁의 망가지기로 작정한 듯한 연기가 더해져 큰 웃음을 준다.

 

우연히 한 탐정의 살해 장면을 목격하고, 마을로 내려가 그의 탐정 사무실에서 생활하게 된 좀비가 만나게 되는 우리네 세상의 풍경들. 버텨내기 위해서 아이들의 코 묻은 돈까지 벌려 애쓰는 좀비의 모습은 우습지만 짠한 블랙코미디를 보여준다. 인간을 위협하던 좀비가 이제는 인간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해 애쓰는 존재가 된 것. 흔한 좀비 장르 속 좀비와 인간의 관계를 역전시켜 좀비보다 더 무서운 살풍경한 인간 세상을 그려보겠다는 게 이 블랙코미디가 취한 흥미로운 자세다.

 

최근 들어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새로운 플랫폼들이 등장하면서 기존 레거시 미디어들이 갖는 위기감은 만만찮다. KBS 드라마가 주말드라마를 빼고는 점점 존재감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 역시 이런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이런 플랫폼들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 만들어진 토종 OTT 웨이브나, 이제 OTT의 등장으로 트렌드가 지나가고 있는 IPTV도 마찬가지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에 KBS와 더불어 웨이브 그리고 SK브로드밴드가 공동으로 제작에 투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면이 있다.

 

과연 <좀비탐정>은 침체되어 있는 KBS 드라마를 살려낼 수 있을까. 이 드라마 속 좀비의 고군분투가 마치 있기는 하지만 존재감이 점점 사라지는 KBS 드라마를 닮았다. 물론 예능 드라마라는 틀 위에 좀비 장르와 블랙코미디, 수사물, 어쩌면 멜로까지 퓨전으로 엮어 놓은데다 B급 코드를 담은 작품이라 KBS라는 다소 보수적인 채널에 어울릴까 싶은 면은 있다. 실제로 이 작품의 시청률은 3%(닐슨 코리아)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물론 적어도 <좀비탐정>의 색다른 시도의 가치만큼은 평가받아 마땅하겠지만.(사진:KBS)

‘타인은 지옥이다’, 너무 잔인하고 불편해서 못 보겠다?

 

웹툰과 드라마의 차이 때문일까. 웹툰으로서는 괜찮게 보였던 것이 드라마로 보니 너무나 불편하게 느껴진다. OCN 드라마틱 시네마 <타인은 지옥이다>의 시청자들은 허름한 고시원에 드글드글한 싸이코패스들을 보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다고 토로한다. 너무 잔인하고 분위기가 으스스한데다 징그러움까지 더해져 그 곳이 진정 지옥처럼 여겨져서다.

 

물론 이건 <타인은 지옥이다>가 이 이상한 고시원을 통해 그리려는 세상의 모습일 게다. 타인은 멀리 떨어져 있을 때는 별다른 불편함을 주지 않지만, 숨소리 하나까지 공유되는 고시원 같은 공간에서 함께 있게 되면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고시원 사람들은 하나 같이 이상하다 못해 살인마들이다.

 

드라마는 그 고시원에 들어가게 된 윤종우(임시완)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러니 시청자들은 온전히 윤종우의 입장이 되어 그 고시원이 주는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느끼게 된다. 첫 날부터 섬뜩함을 줬던 조폭아저씨 안희중(현봉식)는 그나마 정상이었다는 게 금세 밝혀진다. 그는 302호 유기혁(이현욱)과 306호 쌍둥이 변득종, 변득수(박종환), 313호 변태 홍남복(이종옥)에게 일찌감치 잡혀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이 무리의 우두머리처럼 보였던 유기혁은 진짜 우두머리인 치과의사 서문조(이동욱)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함부로 고시원을 찾아온 형사를 죽여서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이 고시원의 주인아주머니인 엄복순(이정은) 역시 이 살인마들과 한 패다. 이상한 계란과 고기를 자꾸 먹이려 해 그것이 인육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 아주머니는 변득종, 변득수 쌍둥이를 보육원 시절부터 키워온 인물로 서문조와도 ‘살인 파티’를 함께 하는 인물이다.

 

이러니 그 곳에 윤종우가 들어가는 것 자체가 지옥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이제 그가 이들의 먹잇감으로 지목된 상태다. 옆방에서 구멍을 뚫어 윤종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서문조와 때가 됐다며 뭔가 이상한 걸 먹이는 아주머니 그리고 문 앞에서 윤종우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쌍둥이와 변태. 이 상황을 부감으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공포감이 느껴진다.

 

물론 여기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는 놀랍다. 군 제대 후 복귀한 임시완은 을에 위치에 있으면서도 때때로 분노의 감정을 드러내는 윤종우의 복잡한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연기해 보여준다. 싸이코패스로 분한 이동욱에게서는 과거 tvN <쓸쓸하게 찬란하신 도깨비>의 저승사자가 보여주던 그 다정함이 어디로 갔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섬뜩함을 준다. <기생충>으로 이제 제 물을 만난 이정은의 리얼하면서도 살벌한 연기는 또 어떻고. 여기 고시원에 사는 이상한 인물들을 연기하는 박종환이나 이현욱, 이중옥 같은 배우들 또한 빈틈없는 연기를 보여준다.

 

하지만 너무 리얼해서 그런지 <타인은 지옥이다>는 아예 보기 불편할 정도다. 웹툰과 달리 직관하게 되는 드라마 장르의 세세함이 그 불편함의 첫 번째 원인이고, 주제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윤종우가 다니는 회사 역시 고시원 사람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타인의 지옥’을 보여준다는 걸 드라마가 상대적으로 잘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게 두 번째 원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살인마들이 득시글대는 고시원을 그리며, 그 바깥세상의 풍경 또한 다르지 않음을 병치함으로써 사회적 의미를 끄집어내는 공포스릴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고시원 안의 잔인함과 불편함의 비중이 너무 커 전체 사회적 메시지를 잡아먹는 느낌이다. 직접 살해 장면을 과도하게 보여주기보다는 분위기 정도로 연출해 그 메시지와의 균형을 잡으려 했다면 좀 낫지 않았을까.(사진:O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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