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여왕’, 김지원은 ‘행복한 왕자’ 같은 변화를 보여줄까

눈물의 여왕

“내가 어렸을 때 <행복한 왕자> 보고 느낀 건 딱 하나였어. ‘하여튼, 집 나가면 개고생이다’. 아니, 왕자 입장에서도 이런 데 살 때가 좋았겠지. 괜히 밖에 나갔다가 볼 꼴, 못 볼 꼴 다 보고, 어? 보석이며 눈알이며 다 남 퍼주고 에휴, 쯧쯧쯧.”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에서 해인(김지원)은 오스카 와일드가 쓴 동화 <행복한 왕자>에 대해 현우(김수현)에게 그렇게 말한다. 

 

3년 전 너무나 사이가 좋았던 두 사람이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을 찾았을 때의 모습이다. 그 궁전이 바로 그 행복한 왕자가 살던 곳이었다는 현우의 이야기에 해인이 보인 반응이었다. 알다시피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는 생전 부유하게 살 때는 몰랐지만 마을 광장 높은 탑 위에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채 서있는 동상이 되어서야 비로소 세상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이 많다는 걸 알고는 눈물을 흘리던 왕자의 이야기다. 그 가난한 이들을 위해 제비에게 사파이어로 된 제 눈까지 떼서 나누어주는 이야기. 

 

<눈물의 여왕>이 갑자기 에필로그를 빌어 꺼내놓은 동화 <행복한 왕자> 이야기는, 해인이 현재 마주한 상황과 그로 인해 그가 겪을 변화를 예감하게 만든다. 퀸즈백화점 사장으로 도도하게 세상 위에 군림하며 살아왔던 해인은 갑작스런 희귀병으로 3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후 변화를 겪는다. 먼저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 걸맞게 남편 현우에 대한 감정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부정맥도 아닌데 남편 보고 심장이 떨리고, 어떤 날엔 남편 눈망울을 보면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다가도 어떤 날엔 남편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진단다. 

 

물론 이 도도한 여왕이 그런 자신의 감정을 애써 부인하려하고 비서에게 마치 남이야기처럼 하는 장면은 어딘가 설레면서도 빵빵 터지는 코미디로 그려진다. 너무 섹시해보여서 세상에 내놔도 괜찮을까 싶어진다며 마치 남 이야기하듯 하는 해인의 이야기가 설레면서도, “진짜 꼭 병원 가 보라 그러세요. 아픈 거야 그건.”이라는 나비서(윤보미)의 자못 진지한 리액션은 여지없이 그 설렘을 깨고 들어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하지만 이 코미디는 어딘가 진짜 해인에게서 벌어지는 심경의 변화에 대한 예고다. 주치의를 찾은 해인은 자신이 이상하다며 그 증상을 이렇게 말한다. “불쌍한 걸 보면 동정심이 생겨요.” 스스로 “피가 차가운 여자”였다며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는 해인은 자꾸만 “공감이 된다”는 ‘증상(?)’을 이야기한다. 사무실에 든 잡상인 남자에 화를 내다가 그의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있다는 이야기에 짐짓 나비서에게 화를 내는 척 그 아기가 인큐베이터에 있을 때까지만 봐줄 거라며 그 남자를 도와준다. 

 

아픈 엄마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시집 갈 때 쓸 돈이라며 수술을 하지 않으려 한다며 우는 직원의 이야기를 화장실에서 몰래 듣고는 “아픈 거야 고치면 되지 왜 울고 난리”라고 툴툴 대면서도 그 이야기에 공감되어 눈물을 보인다. “제가 원래 안 그랬거든요. 누가 아프거나 말거나 울거나 말거나 아무 상관도 없었는데 왜 자꾸 공감이 돼죠? 남편 보고 설레질 않나? 아무래도 제 뇌가 정상 기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주치의에게 해인이 털어놓는 이 말은 그에게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를 잘 보여준다. 

 

게다가 해인은 이제 “안하던 짓”을 해보겠다고 공언한다. 건강하게 오래 살겠다고 남들 다 하는 거 안하고 살았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다며 억울하단다. 그래서 하고 싶은 거 이제 하면서 살겠단다. 그건 과연 ‘행복한 왕자’의 삶을 살겠다는 것일까. 경제성이니 효율이니 하면서 1조클럽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싶은 것들도 안하고 감정 또한 드러내지 않으며 ‘피가 차가운 여자’로 살아왔던 것 대신,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단다. 

 

<눈물의 여왕>은 이제 이 드라마의 제목이 어떤 의미인지 꺼내놓고 있다. 그 눈물은 아마도 저 ‘행복한 왕자’가 비로소 동상이 되어 마을을 들여다보고는 알게 됐던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을 향해 흘리는 것일 테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고, 눈물 따위는 결코 흘릴 것 같지 않았던 해인의 눈물은 그래서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해인의 이런 변화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윤은성(박성훈)이 돈이면 누군가의 은인이자 가족이나 다름 없는 반려견을 죽여도 상관없다 생각하는 감정 없고 공감도 못하는 사이코 패스라는 점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를 분명하게 해준다. 약자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고 가진 것들을 다 내어주면서 드디어 진짜 행복을 찾아가는 해인과, 더 많은 걸 갖기 위해 감정 없는 사이코 패스처럼 살아가는 윤은성으로 대변되는 자본화된 비정한 세상에 대한 대결구도가 그것이다. 

 

해인은 사랑에 대해 윤은성에게 이렇게 말한다. “행복한 걸 함께하면서 달콤한 말을 해주는 게 아니라 싫어서 죽을 것 같은 걸 함께 견뎌주는 거야. 어디에 도망가지 않고 옆에 있는 거.” 달콤함이 아니라 쓴 걸 함께 견뎌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그걸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일 수 있다고 해인은 말하고 있다. 그는 불치병에 걸렸고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았지만 그래서 어떤 의미로 보면 그건 병이 아니라 어쩌면 고쳐지는 중인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눈물의 여왕>은 그래서 이 해인이라는 인물의 감정 변화를 기분좋게 꺼내놓는 과정이 작품의 메시지나 다름 없는 관건인 드라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이 역할을 맡은 김지원이라는 배우의 연기는 대체불가라는 생각이 든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만 같은 도도한 모습에서 마치 그 얼음이 녹아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그 변화를 이토록 설득력 있게 연기해내고 있으니. 그가 앞으로 할 ‘안하던 짓’을 계속 기대하게 만들 정도로. (사진:tvN)

‘눈물의 여왕’, 김수현의 시월드와 신데렐라 뒤집기는 왜 빵빵 터질까

눈물의 여왕

“나 그 때 왜 그랬지? 왜 귀여웠지? 왜 막 귀엽고 필살기 쓰고 홍애인 설레게 만들고 그래 가지고 내 팔자를 내가... 꼬았지? 안 귀여웠으면 이런 결혼도 안 했을텐데, 내가.” 술에 취한 백현우(김수현)는 울면서 절친 김양기(문태유)에게 신세한탄을 한다. 그런데 그건 자기 자랑인지 신세한탄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다. 이 웃픈 상황이 웃음을 만든다. 백현우 본인은 진심으로 펑펑 울며 속내를 토로하고 있지만 보는 이들에게 그 장면은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든다. 

 

tvN 토일드라마 <눈물의 여왕>은 박지은 작가 특유의 코미디로 문을 열었다. 그 코미디는 고정관념을 뒤집는 아이러니로 펼쳐진다. 그많은 신데렐라 스토리들이 그려내곤 했듯이, 흔히들 재벌가와 결혼했다고 하면 인생 역전의 판타지를 떠올릴 테지만, 퀸즈그룹 재벌가의 딸이자 퀸즈백화점 사장인 홍해인(김지원)과 결혼한 백현우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 때 왜 자신이 귀여워 홍애인을 설레게 만들어 스스로 팔자를 꼬았는지 한탄을 하고 있으니.

 

<눈물의 여왕>은 재벌가 신데렐라 스토리를 남녀를 뒤집어 놓은 이른바 ‘남데렐라’ 버전으로 꺼내놓은 후, 그렇게 막상 신데렐라가 되어 재벌가의 사위가 됐지만, 판타지와는 전혀 다른 마치 현실 버전의 처월드(시월드의 처가버전)가 열리게 됐다는 기막힌 블랙코미디로 또 한 번 뒤집는다. 이 재벌가 처월드에 빠져버린 남데렐라가 눈물을 흘리며 결혼을 후회하고 이혼까지 결심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그래서 그간 우리가 봐왔던 시월드와 신데렐라 이야기를 모두 뒤틀어놓은 지점에서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든다. 

 

“나만 보면 돼.” 재벌가 입성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 여긴 백현우에게 홍해인이 하는 이 말은 그 숱한 왕자님들이 신데렐라들을 재벌가에 들일 때 했던 현실성 없는 이야기들이고, 저녁 9시마다 모여 ‘종례’하듯 대화를 나누고 크리스마스니 생일이니 제사니 하는 걸 함께 가족이 하다보니 ‘내 시간’이 사라진 백현우의 처지 역시 숱은 시월드에 입성했던 며느리들이 겪던 일들이다. 

 

백현우가 일년에 15번이나 차린다는 제사는 어떤가. 옛날 진짜 양반가에서는 남자들이 다 제사준비를 했다며 저마다 빵빵한 전문 이력을 가진 사위들이 제사상을 모두 준비하는 풍경이라니! 그러면서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홍애인의 동생 홍수철(곽동연) 같은 인물은 시월드에 시어머니도 보다 더 얄미운 ‘시누이’의 처가 버전처럼 그려진다. 이건 마치 시집살이에 손과 눈에 물 마를 날 없는 며느리의 재벌가 처가 버전 미러링 같다. 그래서 백현우의 신세한탄과 눈물이 주는 빵빵 터지는 웃음 속에서는 블랙코미디적인 통쾌함이 묻어난다. 

 

이 블랙코미디에는 박지은 작가 특유의 디테일들이 채워져 있다. 제사상 차림에 하버드에서 케미컬 전공한 사위가 그 전공으로 전이 제대로 익혀졌나를 파악한 후 “뒤집어!”를 외치는 장면이나, 파슨스 디자인 스쿨을 나온 또 다른 사위가 플레이팅을 하는 제삿날 장관(?)을 보며 “재능 낭비”라는 백현우의 툴툴대는 모습이 그렇고, 우울증으로 정신과를 찾은 백현우의 처가살이 신세한탄을 다 듣고 난 후 의사가 도리어 상담이라도 받은 듯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해”라고 고백하는 장명도 그렇다. 평범한 삶이 오히려 재벌가 사위의 삶보다 낫다는 반전과 더불어, 환자가 오히려 의사의 마음을 다독이게 만드는 아이러니까지 그 코미디에는 담겨 있다.

 

재벌가 딸과 결혼한 평범한 남자의 이야기. 그 자체로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구도지만 성역할을 뒤집고 신데렐라 판타지를 혹독한 처월드 현실로 뒤집어 놓는 것으로 <눈물의 여왕>은 새로운 웃음과 색다른 기대감을 만들었다. 과연 이 처월드로부터 탈피하려는 백현우는 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삶을 되찾고 사랑 또한 다시 확인할 수 있을까. 펑펑 울면서 빵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한 김수현의 열연과 더불어, 이 인물이 그려나갈 색다른 관계의 판타지와 웃음에 시청자들의 마음도 빠져들기 시작했다.(사진:tvN)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어떻게 연기자들 재발견의 장이 되었나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종영했다. 대본에서부터 연출, 연기까지 나무랄 데 없는 오랜만에 보는 '삼박자 드라마'였던 <사이코지만 괜찮아>였다. 디즈니와 팀 버튼을 섞어 놓은 듯한 박신우 감독의 공이 느껴지는 감각적인 연출에, 잔혹동화의 형식으로 사회적 편견을 깨나가는 휴먼드라마이면서 동시에 달콤살벌한 멜로와 스릴러를 오가는 완성도 높은 대본, 그리고 캐릭터 하나하나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감을 만들어낸 연기까지 더해진 작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칭찬하고 싶은 건 이 작품이 꺼내놓은 많은 연기자들의 재발견이다. 김수현은 검증된 배우로서 드라마 전체의 중심을 굳건하게 잡아 주었고, 그 위에서 서예지가 이렇게 연기를 잘 했었나 싶을 정도로 펄펄 날았다. 그리고 그 위에 드라마의 따뜻한 정서를 만들어낸 오정세의 미친 존재감이 자리했다.

 

서예지가 이런 연기의 재발견이 가능해진 건 고문영이라는 독특한 캐릭터 덕분이었다. 고문영은 지금껏 우리가 보지 못했던 여성 캐릭터였고, 어떤 면에서는 멜로드라마의 공식 속 상투적 설정들을 대부분 깨준 캐릭터이기도 했다.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공주임을 거부하고 위기에 처한 남자를 구해내는 매력적인 마녀(?)의 강렬한 인상을 만들었고, 일은 물론이고 사랑에 있어서도 온전히 주도권을 이끌어가는 여성 캐릭터였다는 점에서 고문영은 서예지의 연기에도 날개를 달아주었다. 마치 그 안에 있었지만 꺼내놓지 못했던 거침없는 면모들을 서예지는 고문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발산하는 모습이었다.

 

오정세는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거의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상찬도 부족할 지경이다. 자폐를 갖고 있지만 드라마 속 그 어떤 인물들보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심지어 많은 복잡해 보이는 어른들의 문제를 아주 단순한 어린이의 순수한 시선으로 명쾌한 답을 던져주는 인물이기도 했다. 보호를 받던 인물이(어찌 보면 보호가 필요하다 막연히 치부되던) 이제 동생들을 보호하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던 인물이 누군가에게 필요한 인물이 되어 결국 동생을 떠나 독립하는 그 과정은 이 드라마의 중요한 메시지였다. 오정세는 이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담은 상태라는 인물을 과하지 않게 연기해냄으로써 시청자들의 몰입을 이끌었다.

 

후반부에 이르러 시청자들로부터 "살살 연기해 달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소름 돋는 반전을 이끌어준 문영의 엄마 박행자 역할의 장영남은 그 웃는 연기만으로도 드라마를 순식간에 살벌한 스릴러로 만들었고, 강태(김수현)의 친구 재수 역할의 강기둥이나, 이렇게 귀여워도 될까 싶을 정도로 앙징맞은 연기를 보여준 승재 역할의 박진주는 다소 무거울 수 있는 극의 분위기를 웃음으로 가볍게 바꿔주는 연기자들이었다.

 

밥 한 끼 차려주며 미소를 지어주는 것만으로도 엄마의 푸근함을 전해주었던 배우 김미경과 그 딸 역할로 아련한 짝사랑에서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가는 설렘을 안겨준 배우 박규영, 세속적인 출판사 대표지만 미워할 수 없는 상인 역할의 김주헌, 괜찮은 정신병원의 다소 이상하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은 원장 역할의 김창완, 거의 환자 역할로 누워 있는 연기만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극의 무게를 확실히 잡아준 이얼, 그리고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운 환자 역할을 했던 모든 배우들이 이 작품 속에서는 반짝반짝 빛났던 연기자들이었다.

 

좋은 배우들이 있어 좋은 작품이 가능했던 것이지만, 그것은 거꾸로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좋은 배우들의 진가가 발휘된 면도 있다.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그래서 괜찮은 연기자들을 줄줄이 내어놓았다. 아마도 다음 작품에서 이들이 출연한다면 또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하게 만들어줄 정도로.(사진:tvN)

'사이코지만 괜찮아', 우리가 자폐 오정세를 통해 위로받은 까닭

 

"배 째-" 자신의 엄마가 강태(김수현)와 상태(오정세) 형제의 엄마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영(서예지)이 자꾸만 자기 집에서 떠나라고 하자 상태는 그렇게 말한다. 그건 상태가 생각하는 가족 간의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이다. 자신들을 떠나라고 하는 문영 때문에 고민하던 강태가 상태에게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상태는 떠날 수 없는 이유로 "우리는 가족"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하는 거고, 떠나도 같이 떠나야 한다고 한다. 자신들만 떠나면 문영이 혼자 남게 된다고 하며 그러면 안 된다며 그래도 떠나라고 하면 "배 째!"라고 하면 된다고 한다.

 

tvN 토일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상태는 애초 보호를 받아야 할 자폐를 가진 형처럼 처음엔 등장했지만 어쩐지 갈수록 그가 동생들을 보호해왔다는 걸 알게 해준다. 문영의 엄마가 박행자(장영남)였다는 게 밝혀지고, 그가 문영의 집을 찾아와 강태와 문영을 궁지로 몰아넣을 때 그 위기에서 동생들을 구한 건 다름 아닌 상태였다. 그는 책으로 박행자의 머리를 내려쳐 쓰러뜨리고는 외친다. "내 동생들 괴롭히지 마!"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건 그가 박행자의 머리를 내려친 책이 '세계명작동화집'이라는 사실이다. 갖가지 동화들을 뒤집어 새롭게 해석하고 잔혹동화를 통해 동화들이 부지불식간에 심어주는 왜곡된 시선들을 비틀어 보여줘 온 것이 이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였다. 그래서 매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잠자는 숲속의 공주'나 '미녀와 야수', '양치기 소년', '의좋은 형제' 같은 동화들이 부제로 달려 있지만 그 회차가 보여주는 이야기는 그 동화의 메시지를 뒤집는 것이었다.

 

읽음으로써 효용가치를 지니는 '세계명작동화집'이 박행자를 내리치는 흉기로서 효용을 갖게 된다는 그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자폐를 가진 채 보호 받아야할 존재로 여겨졌던 상태의 손에 의해 동생들이 보호됐다는 상황이라니. 동화 속 이야기대로라면 문영이 위기에 처해있을 때 강태가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나 문제를 해결하고 구해내는 게 흔한 구도였을 게다. 하지만 <사이코지만 괜찮아>는 이 동화의 틀에 박힌 구도들을 깨버린다.

 

상태와 강태가 위급한 상황에 몰렸을 때 문영이 나타나 엄마와 대결하고 문영 역시 위기에 처했을 때 상태가 그들을 구한다. 강태가 아닌 문영이나 상태가 구원자이자 보호자로 등장하는 이 구도는 동화 속에서 늘 약자로 그려지던 여성이나 장애를 가진 존재가 사실은 너무나 편견어린 시선으로 상투화되어 그려지곤 했다는 걸 드러내는 대목이다. 상황이 모두 정리되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강태가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미러링하고 문영이 키스를 해줘야 깨어난다고 상태가 말하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이제 한 회를 남긴 시점에서 되돌아보면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상태는 사실상 이 드라마의 메시지에 해당하는 캐릭터였다. 그는 자폐를 가진 형 캐릭터였지만 잘 들여다보면 '어른이지만 여전히 아이의 마음을 갖고 있는' 그런 존재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아주 단순하게 정리함으로써 오히려 문제의 해결에 쉽게 도달한다.

 

사실 어른이 되는 일은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니다. 다만 해야 할 말과 행동을 피하지 않고 하는 존재가 어른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보면 상태는 어른이지만 아이의 그 순수함을 잃어버려 어쩌면 어른이라 말할 수 없는 이들에게 '진정한 어른'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해주는 캐릭터처럼 보인다.

 

이런 점은 문영의 엄마가 강태의 엄마를 살해함으로써 갈등하게 되는 강태와 문영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 해답을 상태가 전해주는 대목에서도 발견된다. 박행자가 '서쪽마녀' 같은 나쁜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 상태가 그가 준 둘리엄마 인형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버리겠다는 강태에게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그 이유로 상태는 "둘리엄마는 잘못한 게 없어. 그거 준 사람이 나쁘지 둘리엄마는 안 나빠. 얘는 잘못한 거 없어. 버리지 마."라고 말한다. 그 이야기는 문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영의 엄마가 나쁘지 문영은 잘못이 없다는 것을 상태는 둘리엄마 인형을 통해 마치 어린이의 목소리로 전한다. 근데 그 말의 의미는 웬만한 어른들보다 낫다.

 

<사이코지만 괜찮아>에서 '사이코'로 지칭되는 인물들은 이 작품 속에는 꽤 많다. 문영이 그렇고 괜찮은 정신병원의 그 많은 환자들이 그렇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 사이코는 그 지칭이 너무나 과할 정도로 왜곡된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걸 갖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알려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상태가 있다. 그는 어린이의 목소리로 어른인 척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이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어른의 말과 행동을 보인다. 우리가 그를 통해 감동하고 어떤 위안을 느끼게 되는 건 그래서다.(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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