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박2일', 새로운 여행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라

'1박2일'이 깔끔해졌다. MC몽이 빠진 공백은 크게 느껴지지만 대신 다섯 명으로 줄어든 멤버들에 대한 집중력은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불복에 대한 강박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게임을 하는 모습보다는 여행지에 대한 소개가 더 많아졌다. 전체적인 짜임새도 더 탄탄해졌다.

당일치기 콘셉트로 떠난 서울 나들이는 치밀한 사전 계획이 돋보였다. 종로의 북촌 한옥마을, 북악산 성곽길, 백사실 계곡, 이화마을, 광장시장을 배경으로 주어진 미션은 이미 그 속에 의미를 다 담고 있었다. 게다가 이 미션은 그 장소에서 서울의 특징을 대변하는 특정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서울로 떠나는 출사여행을 미션 형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모든 미션이 끝난 후 강호동이 굳이 설명한대로,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고, 북악산 성곽길에서 이수근이 담아온 총알 맞은 소나무는 근대사의 아픔이, 백사실 계곡에서 은지원이 찍어온 개구리 사진은 서울의 자연을, 이화마을은 예술과 어우러진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광장시장은 서울의 친절한 사람들을 담아낸 것이었다.

미션 막판에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는 멤버들이 보여주는 초를 다루는 긴박한 상황은 자칫 루즈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팽팽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이렇게 미션으로 각각의 서울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사진들이 모아진 후, 그 정지 화면을 함께 보면서 마치 그 날 하루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집어넣은 것도 꽤 깔끔한 안배라고 할 수 있다.

즉 '1박2일' 서울 나들이 편은 상당히 잘 짜여져 있고 웃음과 함께 정보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묻어났다. 복불복이 빠지자 자극적인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의미는 그만큼 커졌다. 마지막 강호동이 굳이 그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과잉의 흔적까지도 느껴진다. 공익적인 분위기까지 연출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기획이 잘 되어 있고 잘 짜여진 데다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1박2일'에서 어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말이다. 왜 그럴까. 여행에 대해 집중해달라는 요구와 복불복에만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시청자들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왜 복불복이 그립게 느껴지는 걸까.

그 이유는 너무 잘 짜여져 있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 '1박2일'이 가진 매력은 잘 정돈된 영상이 아니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 의외성에 있다. 말 그대로 '야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래서 때로는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날 것이 주는 재미는 잘 짜여진 틀에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1박2일'이 다큐를 닮아있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큐는 말 그대로 의외의 사건들이 날 것 그대로 마구 드러난다는 의미에서지, 실제 여행 다큐멘터리가 갖는 그 기획적인 깔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영석 PD는 '1박2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100% 이상을 기획하지만, 50% 정도만 기획을 충족시킬 때 '1박2일'만의 재미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100% 기획이 100%대로 이루어지면 밋밋해진다는 얘기고, 그렇다고 완전히 틀어지면 본래 기획 자체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박2일'은 다큐 같은 날것을 지향하는 예능이지만, 다큐 자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특히 여행이라는 소재는 지나치게 기획된 대로 움직이면 재미가 반감되기 마련이다. 여행의 묘미는 길 위를 걷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길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있는 것이다. 복불복이 문제로 지목되는 것은 그것이 게임에만 몰두할 때다. 필자가 만난 나영석 PD는 이미 복불복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복불복은 게임이 재미를 주지만, 그 게임이 만들어내는 어떤 의외성이 여행 전체에 색다른 스토리를 부여할 때 진짜 재미를 준다"고 그는 말했다.

꽤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1박2일'은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나치게 앞으로만 달려 나왔던 '1박2일'은 그 초심인 여행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여행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여행이라면 몇몇 관광명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다였지만, 지금은 아예 없는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 여행이 되고 있다. 모쪼록 '1박2일'이 과거부터 지금껏 해오던 대로, 여행이라는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얹어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맛이 느껴지는 밥상을 차려내기를 바란다.

알래스카 간 ‘무한도전’, 남극 도전하는 ‘1박2일’

‘무한도전’이 알래스카로 날아갔다. ‘1박2일’의 남극행을 염두에 두었던 행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미션 자체는 지극히 ‘무한도전’다웠다.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 찾기’라는 지극히 사소한 선택. 반면 ‘1박2일’이 남극에 가는 데는 그 프로그램 성격상 명분이라는 게 필요했다. ‘1박2일’의 취지 자체가 국내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을 구석구석 찾아가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박2일’이 남극에 가는 것은 물론 여행에 있어서 극점이라는 의미로서 어떤 로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남극에 우리의 세종기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확장해서 바라보면 남극의 세종기지는 국내의 오지 섬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반면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은 ‘무한도전’답게 의미가 아닌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일단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김상덕씨를 찾아 알래스카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설정이었다. 거기서 김상덕씨를 찾느냐 못 찾느냐는 애초부터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말이 씨가 되는 상황’. 그것을 찬찬히 목도하면서 그 속에서 생고생을 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무한도전’이 알래스카편에서 겨냥한 웃음과 재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로망이 있기 때문에 남극을 선택한 ‘1박2일’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들은 벌칙 수행을 하기 위해 알래스카에 갔다.

목적 없이 떠난 벌칙 여행에서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이 겪을 일은 대체로 예상 가능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좌충우돌하는 상황. 의미가 아닌 재미를 위한 선택이었기에 가중되는 웃음에 대한 강박.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상황. 유재석은 가평 번지점프대 위에서 역시 벌칙을 수행하며 하룻밤을 지내는 박명수, 정준하, 길에게 전화를 해서 “거기는 어떠냐?”고 묻는다. 그러자 길이 “완전 망했어요”라고 말하는 그 상황. 웃음을 주려고 극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었지만 웃음을 못주는 상황이 오히려 이번 미션의 재미 포인트가 된다.

따라서 알래스카까지 가서 얼음낚시를 하겠다고 몇 시간 동안 빙판에 구멍을 뚫기 위해 낑낑대는 모습이나, 난데없는 동계올림픽을 흉내 내다가 피까지 보는 상황은 분명 이 의도된 재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개그맨으로서의 이들에게 새롭게 부여된 도전 상황으로서 ‘무한도전’의 취지와도 잘 어울린다. 웃음을 주기 어려운 상황에서 웃음을 주는 것. 늘 그렇듯이 ‘무한도전’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무모한 듯 도전 상황에 내던져졌다는 것 자체로 재미를 준다. 즉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이번 상황은 웃음을 주었던 주지 못했던 그 도전 자체가 재미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흔히 ‘1박2일’에서 발견한다. 즉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전제 하에 어떤 미션 속에서 웃음을 주지 못하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되었을 때, ‘1박2일’에서는 누군가 이런 얘길 한다. “이게 다큐지, 예능 맞아?” 예능이 다큐를 할 때 오히려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1박2일’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것은 지나친 진지함, 어찌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웃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1박2일’은 늘 스스로가 다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웃음으로 전화된다. 반면 ‘무한도전’은 재미를 모토로 하기 때문에 새롭게 시도된 다큐적 재미는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거 다큐 아냐?”하고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1박2일’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어떤 한계가 지워진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강박’이다. 무엇을 하건 의미가 무엇인가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판받기가 쉬워진다. 재미를 위해 알래스카로 훌쩍 떠나는 것이 가능한 ‘무한도전’과는 달리 ‘1박2일’은 그 남극행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꽤 많은 의미부여가 필요해진다. ‘무한도전’이 주창하는 ‘재미를 위한 재미’는 ‘1박2일’에서는 부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무한도전’이 거의 매번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과도한 의미부여를 피하고 재미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의미부여는 따라서 스스로가 아니라, 시청자들에 의해 부여되곤 한다. 하지만 ‘1박2일’은 의미를 떼어낼 수가 없다. 만약 ‘1박2일’에서 ‘무한도전’이 벌칙으로 수행한 알래스카 같은 오지로의 목적 없는 여행을 했다면, 거기서도 ‘1박2일’은 어떤 의미를 끄집어내려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목적 없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의미 같은 것 말이다.

‘1박2일’은 그 프로그램 형식상 그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여행이라는 사뭇 다큐적인 상황을 예능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1박2일’은 어쩌면 지금껏 이 의미로만 점철된 여행의 공간을 재미로 바꿔나가는 도전을 해온 셈이다. 교과서에서나 봐왔던 오지 속으로 들어가 게임을 하고 미션을 수행하면서 의미는 재미로 자연스럽게 전화된다. 그렇다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의미만 있던 공간에 재미가 부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행이 과거 가이드가 붙는 관광여행에서 이제는 스스로 떠나는 체험여행으로 바뀌는 시대적 추세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1박2일’이 남극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마치 의미로만 점철된 그래서 딱딱하게 다큐적 의미만으로 고형화된 공간의 표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극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다. 그 다큐멘터리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의미와 함께 그것을 뛰어 넘는 재미를 찾아내려는 무한도전, 그것이 ‘1박2일’의 남극 도전 속에 숨겨진 것들이다.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과 ‘1박2일’의 남극도전이 모두 똑같이 말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는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될 ‘즐거운 삶에 대한 자유’에 대한 것이다. 알래스카와 남극은 더 이상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공간, 즉 특정인들만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여행을 꿈꾸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을 보면서 어떤 로망을 느꼈다면 그것은 생각만 하면 알래스카라도 쉬 달려갈 수 있다는 그 상상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목적도 없이 생각하는 대로. 이것은 ‘1박2일’이 꿈꾸는 남극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능이 다큐의 영역을 넘어가는 시대, 즉 어떤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이 두 프로그램은 지금도 매주 우리 눈앞에 펼쳐놓고 있다.

논리가 아닌 감동으로 전하는 '현장르포 동행'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강하게 살아야죠." '현장르포 동행-엄마 보고 싶어'편의 열 아홉 살 봉관이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아빠 대신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가던 봉관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엄마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으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엄마는 자식들에게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엄마 마음이 다를까. 입으로는 독하게도 "돌아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는 말을 하면서도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엄마를 다독이는 건 오히려 봉관이었다.

엄마를 찾아왔는데 "왜 왔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을 봉관이. 하지만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래도 낳아주신 엄마잖아. 한번은 봐야지."하고 말했다. 그렇게 밀쳐내던 엄마는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이 독한 짓에 욕이라도 듣고 싶었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안아줘." 이 말은 어찌 보면 상처를 주었을 엄마를 그래도 한없이 보듬는 아이 같지 않은 봉관이의 마음이 담겨진 것이면서 동시에, 이 엄마 앞에서 꿋꿋이 서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봉관이가 역시 열아홉 살의 아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었다.

거듭 한번만 안아 달라고 하는 봉관이에게 결국 엄마는 "그럴 자격 없다. 난 엄마도 아니야"하고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봉관이가 불쑥 다가가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 원망 안 해. 힘들게 사는 거 아니까. 그냥 엄마 보러 왔어. 엄마가 아무리 독하게 말해도 잘 해주신 거 아니까 괜찮아."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끝내 참고 참았던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정말 잘 컸다.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90도로 고개 숙여 다시는 못 볼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봉관이를 보며 엄마는 혼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 엄마의 귓전으로 마치 천상의 목소리라도 되는 듯, 봉관이의 외침이 들여왔다. "엄마! 고마워!"

이 엄마와 아들 봉관이의 짧은 만남이 주는 감동을 어떤 드라마가 대신해줄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휴먼 다큐멘터리 '현장르포 동행'이 세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온통 화려하고 편리한 것들만 넘쳐나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현장르포 동행'은 그 사각지대에 가려진 무채색의 진실을 담아낸다. 그 속에는 가난에 휘둘려 힘겨운 세상에 내쳐진, 그러나 그 세파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이들이 있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희망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가 비춰주지 않았다면 있는 것조차 몰랐을 그네들의 삶. 그러니 이 동행을 자처한 것은 먼저 저 따뜻해질 수 있는 카메라다.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 어려움을 함께 바라보고, 그 힘겨움에 함께 울어주는 카메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동행이다. TV가 화려한 세상의 모습들만을 비춰주고, 마치 세상은 그렇게 빛으로만 가득하다고 외칠 때, 이 프로그램은 마치 섬처럼 그 자리에 서서 그 그늘을 바라본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삶을 카메라가 바라보고, 그 카메라를 통해 우리들이 그 삶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동행하면서 세상은 조금 따뜻해진다. 힘겨웠던 그들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은 이 카메라가 바라본 그 따뜻한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그늘이 왜 만들어졌고, 또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현장르포 동행'이 바라보는 시선은 그런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눈이 아니다. 대신 '현장르포 동행'은 세상의 그늘에 있는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동행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동으로서 우리에게 전해줌으로써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힘겨운 삶 속에 던져졌음에도 끝내 "엄마! 고마워!"하고 외친 봉관이의 말이 그 어떤 앙상한 논리보다 더 아프고 깊게 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통의 세상을 향한 길 위의 희망가, '오 마이 텐트'

토크멘터리. 토크와 다큐멘터리가 엮어진 '오 마이 텐트' 스스로가 표방한 지칭이다. 다큐멘터리와 타 장르와의 퓨전이 새로운 경향으로 나오고 있는 요즘, '오 마이 텐트'의 토크멘터리 표방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큐멘터리와 예능이 만나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형식을 창출해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능이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끌어들이는 것과 다큐멘터리가 예능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역시 다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 특성으로서의 진지함이나 진정성이 예능적인 요소와 부딪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재미있어야겠지만 재미 그 자체보다는 어떤 의미가 목적이 되어야 그 형식이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즉 쉽지만은 않은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을 김제동이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런 걱정은 상당부분 상쇄되었다. 김제동은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토크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해질 줄 아는 개그맨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을 터트리게 되고, 그 웃음의 끝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된다. 웃음이 의미를 만나 훈훈해지는 것이다.

'오 마이 텐트'는 바로 그 김제동을 그대로 빼닮은 프로그램이다. 손님을 초대해 이틀간 여행을 하면서 나누고 겪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흔히 여행을 떠나면 그 함께 떠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성격이 달라지듯이, 함께 떠나는 김제동을 닮아있다. 때 아닌 야구배트를 꺼내 야구선수들을 흉내내는 것으로 웃음을 주고, 허술하게 차리진 밥상머리에 식구들(매니저와 코디)과 함께 맛없는 밥을 먹으면서 연실 웃는 장면에서는 이야기 없이도 훈훈해지는 느낌을 전해준다.

김제동이 캠핑장에서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듣는 캠핑족들의 표정 속에는 삶에 대한 어떤 공감이 묻어난다. 김제동 자신이 손님으로 초대된 첫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들이 던져졌고 거기에 대한 김제동의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사실 이야기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상을 벗어난 이들이 공통으로 갖는 어떤 편안함과 관조적인 태도가 주는 일체감일 것이다.

'오 마이 텐트'가 굳이 토크를 하기 위해 길 위로 나선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미 길을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통하고 있다는 것. 일상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 그 올바른 자신의 얼굴로 돌아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 그러니 그 위에 걸쳐지는 토크의 내용이 뭐가 중요할까. 일상 바깥에서 관계와 위치 같은 사회적 껍질을 벗고 나면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 토크 없이도 되는 토크. 김제동의 '오 마이 텐트'가 보여주는 것은 그 소통의 세상을 향해 내딛는 길 위의 희망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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