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간 ‘무한도전’, 남극 도전하는 ‘1박2일’

‘무한도전’이 알래스카로 날아갔다. ‘1박2일’의 남극행을 염두에 두었던 행보 아니냐는 추측이 나왔지만, 미션 자체는 지극히 ‘무한도전’다웠다. ‘알래스카에서 김상덕씨 찾기’라는 지극히 사소한 선택. 반면 ‘1박2일’이 남극에 가는 데는 그 프로그램 성격상 명분이라는 게 필요했다. ‘1박2일’의 취지 자체가 국내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명소들을 구석구석 찾아가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박2일’이 남극에 가는 것은 물론 여행에 있어서 극점이라는 의미로서 어떤 로망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남극에 우리의 세종기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확장해서 바라보면 남극의 세종기지는 국내의 오지 섬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반면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은 ‘무한도전’답게 의미가 아닌 재미를 위한 것이었다. 일단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김상덕씨를 찾아 알래스카까지 간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설정이었다. 거기서 김상덕씨를 찾느냐 못 찾느냐는 애초부터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말이 씨가 되는 상황’. 그것을 찬찬히 목도하면서 그 속에서 생고생을 하는 그들의 모습 자체가 ‘무한도전’이 알래스카편에서 겨냥한 웃음과 재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건 로망이 있기 때문에 남극을 선택한 ‘1박2일’과는 다른 이야기다. 그들은 벌칙 수행을 하기 위해 알래스카에 갔다.

목적 없이 떠난 벌칙 여행에서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이 겪을 일은 대체로 예상 가능하다. 어찌할 바를 몰라 좌충우돌하는 상황. 의미가 아닌 재미를 위한 선택이었기에 가중되는 웃음에 대한 강박.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상황. 유재석은 가평 번지점프대 위에서 역시 벌칙을 수행하며 하룻밤을 지내는 박명수, 정준하, 길에게 전화를 해서 “거기는 어떠냐?”고 묻는다. 그러자 길이 “완전 망했어요”라고 말하는 그 상황. 웃음을 주려고 극한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었지만 웃음을 못주는 상황이 오히려 이번 미션의 재미 포인트가 된다.

따라서 알래스카까지 가서 얼음낚시를 하겠다고 몇 시간 동안 빙판에 구멍을 뚫기 위해 낑낑대는 모습이나, 난데없는 동계올림픽을 흉내 내다가 피까지 보는 상황은 분명 이 의도된 재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개그맨으로서의 이들에게 새롭게 부여된 도전 상황으로서 ‘무한도전’의 취지와도 잘 어울린다. 웃음을 주기 어려운 상황에서 웃음을 주는 것. 늘 그렇듯이 ‘무한도전’은 미션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서 재미를 주지는 않는다. 그저 그렇게 무모한 듯 도전 상황에 내던져졌다는 것 자체로 재미를 준다. 즉 아이러니한 얘기지만 이번 상황은 웃음을 주었던 주지 못했던 그 도전 자체가 재미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흔히 ‘1박2일’에서 발견한다. 즉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전제 하에 어떤 미션 속에서 웃음을 주지 못하고 지나치게 진지하게 되었을 때, ‘1박2일’에서는 누군가 이런 얘길 한다. “이게 다큐지, 예능 맞아?” 예능이 다큐를 할 때 오히려 웃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1박2일’은 일찌감치 알아차렸다. 그것은 지나친 진지함, 어찌 보면 사소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웃음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즉 ‘1박2일’은 늘 스스로가 다큐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것은 쉽게 웃음으로 전화된다. 반면 ‘무한도전’은 재미를 모토로 하기 때문에 새롭게 시도된 다큐적 재미는 낯설게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거 다큐 아냐?”하고 늘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1박2일’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어떤 한계가 지워진다. 그것은 ‘의미에 대한 강박’이다. 무엇을 하건 의미가 무엇인가에 합당하지 않으면 비판받기가 쉬워진다. 재미를 위해 알래스카로 훌쩍 떠나는 것이 가능한 ‘무한도전’과는 달리 ‘1박2일’은 그 남극행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꽤 많은 의미부여가 필요해진다. ‘무한도전’이 주창하는 ‘재미를 위한 재미’는 ‘1박2일’에서는 부러운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무한도전’이 거의 매번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스스로 과도한 의미부여를 피하고 재미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의미부여는 따라서 스스로가 아니라, 시청자들에 의해 부여되곤 한다. 하지만 ‘1박2일’은 의미를 떼어낼 수가 없다. 만약 ‘1박2일’에서 ‘무한도전’이 벌칙으로 수행한 알래스카 같은 오지로의 목적 없는 여행을 했다면, 거기서도 ‘1박2일’은 어떤 의미를 끄집어내려 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목적 없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의미 같은 것 말이다.

‘1박2일’은 그 프로그램 형식상 그 의미를 벗어날 수 없다. 여행이라는 사뭇 다큐적인 상황을 예능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1박2일’은 어쩌면 지금껏 이 의미로만 점철된 여행의 공간을 재미로 바꿔나가는 도전을 해온 셈이다. 교과서에서나 봐왔던 오지 속으로 들어가 게임을 하고 미션을 수행하면서 의미는 재미로 자연스럽게 전화된다. 그렇다고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의미만 있던 공간에 재미가 부가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행이 과거 가이드가 붙는 관광여행에서 이제는 스스로 떠나는 체험여행으로 바뀌는 시대적 추세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1박2일’이 남극 도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마치 의미로만 점철된 그래서 딱딱하게 다큐적 의미만으로 고형화된 공간의 표상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남극하면 떠오르는 것은 다름 아닌 ‘다큐멘터리’다. 그 다큐멘터리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의미와 함께 그것을 뛰어 넘는 재미를 찾아내려는 무한도전, 그것이 ‘1박2일’의 남극 도전 속에 숨겨진 것들이다.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과 ‘1박2일’의 남극도전이 모두 똑같이 말해주는 메시지가 있다. 그것은 아직까지는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될 ‘즐거운 삶에 대한 자유’에 대한 것이다. 알래스카와 남극은 더 이상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공간, 즉 특정인들만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여행을 꿈꾸는 그런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한도전’의 알래스카행을 보면서 어떤 로망을 느꼈다면 그것은 생각만 하면 알래스카라도 쉬 달려갈 수 있다는 그 상상의 자유로움 때문일 것이다. 목적도 없이 생각하는 대로. 이것은 ‘1박2일’이 꿈꾸는 남극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능이 다큐의 영역을 넘어가는 시대, 즉 어떤 기능적인 목적이 아니라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이 두 프로그램은 지금도 매주 우리 눈앞에 펼쳐놓고 있다.

논리가 아닌 감동으로 전하는 '현장르포 동행'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강하게 살아야죠." '현장르포 동행-엄마 보고 싶어'편의 열 아홉 살 봉관이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아빠 대신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가던 봉관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엄마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으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엄마는 자식들에게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엄마 마음이 다를까. 입으로는 독하게도 "돌아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는 말을 하면서도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엄마를 다독이는 건 오히려 봉관이었다.

엄마를 찾아왔는데 "왜 왔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을 봉관이. 하지만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래도 낳아주신 엄마잖아. 한번은 봐야지."하고 말했다. 그렇게 밀쳐내던 엄마는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이 독한 짓에 욕이라도 듣고 싶었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안아줘." 이 말은 어찌 보면 상처를 주었을 엄마를 그래도 한없이 보듬는 아이 같지 않은 봉관이의 마음이 담겨진 것이면서 동시에, 이 엄마 앞에서 꿋꿋이 서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봉관이가 역시 열아홉 살의 아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었다.

거듭 한번만 안아 달라고 하는 봉관이에게 결국 엄마는 "그럴 자격 없다. 난 엄마도 아니야"하고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봉관이가 불쑥 다가가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 원망 안 해. 힘들게 사는 거 아니까. 그냥 엄마 보러 왔어. 엄마가 아무리 독하게 말해도 잘 해주신 거 아니까 괜찮아."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끝내 참고 참았던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정말 잘 컸다.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90도로 고개 숙여 다시는 못 볼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봉관이를 보며 엄마는 혼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 엄마의 귓전으로 마치 천상의 목소리라도 되는 듯, 봉관이의 외침이 들여왔다. "엄마! 고마워!"

이 엄마와 아들 봉관이의 짧은 만남이 주는 감동을 어떤 드라마가 대신해줄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휴먼 다큐멘터리 '현장르포 동행'이 세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온통 화려하고 편리한 것들만 넘쳐나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현장르포 동행'은 그 사각지대에 가려진 무채색의 진실을 담아낸다. 그 속에는 가난에 휘둘려 힘겨운 세상에 내쳐진, 그러나 그 세파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이들이 있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희망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가 비춰주지 않았다면 있는 것조차 몰랐을 그네들의 삶. 그러니 이 동행을 자처한 것은 먼저 저 따뜻해질 수 있는 카메라다.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 어려움을 함께 바라보고, 그 힘겨움에 함께 울어주는 카메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동행이다. TV가 화려한 세상의 모습들만을 비춰주고, 마치 세상은 그렇게 빛으로만 가득하다고 외칠 때, 이 프로그램은 마치 섬처럼 그 자리에 서서 그 그늘을 바라본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삶을 카메라가 바라보고, 그 카메라를 통해 우리들이 그 삶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동행하면서 세상은 조금 따뜻해진다. 힘겨웠던 그들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은 이 카메라가 바라본 그 따뜻한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그늘이 왜 만들어졌고, 또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현장르포 동행'이 바라보는 시선은 그런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눈이 아니다. 대신 '현장르포 동행'은 세상의 그늘에 있는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동행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동으로서 우리에게 전해줌으로써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힘겨운 삶 속에 던져졌음에도 끝내 "엄마! 고마워!"하고 외친 봉관이의 말이 그 어떤 앙상한 논리보다 더 아프고 깊게 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통의 세상을 향한 길 위의 희망가, '오 마이 텐트'

토크멘터리. 토크와 다큐멘터리가 엮어진 '오 마이 텐트' 스스로가 표방한 지칭이다. 다큐멘터리와 타 장르와의 퓨전이 새로운 경향으로 나오고 있는 요즘, '오 마이 텐트'의 토크멘터리 표방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큐멘터리와 예능이 만나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형식을 창출해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능이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끌어들이는 것과 다큐멘터리가 예능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역시 다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 특성으로서의 진지함이나 진정성이 예능적인 요소와 부딪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재미있어야겠지만 재미 그 자체보다는 어떤 의미가 목적이 되어야 그 형식이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즉 쉽지만은 않은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을 김제동이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런 걱정은 상당부분 상쇄되었다. 김제동은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토크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해질 줄 아는 개그맨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을 터트리게 되고, 그 웃음의 끝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된다. 웃음이 의미를 만나 훈훈해지는 것이다.

'오 마이 텐트'는 바로 그 김제동을 그대로 빼닮은 프로그램이다. 손님을 초대해 이틀간 여행을 하면서 나누고 겪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흔히 여행을 떠나면 그 함께 떠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성격이 달라지듯이, 함께 떠나는 김제동을 닮아있다. 때 아닌 야구배트를 꺼내 야구선수들을 흉내내는 것으로 웃음을 주고, 허술하게 차리진 밥상머리에 식구들(매니저와 코디)과 함께 맛없는 밥을 먹으면서 연실 웃는 장면에서는 이야기 없이도 훈훈해지는 느낌을 전해준다.

김제동이 캠핑장에서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듣는 캠핑족들의 표정 속에는 삶에 대한 어떤 공감이 묻어난다. 김제동 자신이 손님으로 초대된 첫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들이 던져졌고 거기에 대한 김제동의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사실 이야기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상을 벗어난 이들이 공통으로 갖는 어떤 편안함과 관조적인 태도가 주는 일체감일 것이다.

'오 마이 텐트'가 굳이 토크를 하기 위해 길 위로 나선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미 길을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통하고 있다는 것. 일상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 그 올바른 자신의 얼굴로 돌아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 그러니 그 위에 걸쳐지는 토크의 내용이 뭐가 중요할까. 일상 바깥에서 관계와 위치 같은 사회적 껍질을 벗고 나면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 토크 없이도 되는 토크. 김제동의 '오 마이 텐트'가 보여주는 것은 그 소통의 세상을 향해 내딛는 길 위의 희망가다.

일상적 다큐의 시대, 다큐를 외면하는 TV

KBS는 가을개편을 맞아 그간 주중 저녁에 매일 방영되며 일일 다큐 시대를 열어놓았던 '30분 다큐'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30분 다큐'는 이번 주까지만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폐지 이유는 시청률이나 제작비 부담 등을 들고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편당 1천만 원 정도가 들어가는 이 프로그램에 제작비 부담을 얘기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게다가 시청률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럴만한 후속 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텐데, '30분 다큐'의 공백은 종전처럼 스포츠 뉴스가 채운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청률이 높은 KBS1TV의 일일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 시간대의 KBS2는 공백지대로 놔두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30분 다큐'는 그렇게 간단히 폐지돼도 될 만큼 존재감이 없는 프로그램일까. 시청률이 낮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같은 시간대가 일일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라, 이 시간대의 편성은 애초부터 다큐멘터리로서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독특한 다큐멘터리 형식은 단지 시청률만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존재가치가 있다. 그것은 국내 TV 다큐멘터리가 가진 거대담론의 이야기들을 벗어나 소품이지만 일상적인 다큐멘터리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30분이라는 시간으로 압축된 다큐멘터리는 그 안에 지금껏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거창한 기획의 다큐멘터리의 세계에서는 좀체 발견하기 힘든 지점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장점이 있다. 즉 일상이라는 소재 자체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에 포착되기 시작된 것. 이것은 영상이 일상화되어버린 현재, 거대담론의 다큐멘터리들이 놓치고 있던 것들이기도 하다. '30분 다큐'는 그 짧은 시간이 주는 경쾌함으로, 일상성의 소재를 가벼이 다루지 않는 겸손함으로, 우리에게 다큐멘터리란 본래 이처럼 친근한 것임을 드러내주었던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 TV 다큐멘터리가 어떤 변화의 길을 가는 도정에 놓여진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TV 다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 변화의 속도가 느리게 진행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다양한 실험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고민하고, 틀에 박힌 엄숙주의의 무거움을 깨뜨리면서 대중들과 호흡하려 할 때, TV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그 보수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TV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MBC스페셜'은 그 편안해진 다큐멘터리의 성공사례로 지목된다. 'SBS스페셜'는 여전히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작금의 변화된 다큐멘터리의 일상화를 저버리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KBS는 '30분 다큐'와 함께 '다큐멘터리 3일'이 그 첨병에 나서고 있다. 3일이라는 시간의 축으로 자른 특정 공간을 포착해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그려내는 이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는 기획 다큐멘터리가 갖는 기획적인 의도성의 틀을 깨는 힘을 보여주었다. 즉 의도하지 않은 낯선 곳에서의 만남과 발견의 영상들은 그 순간의 포착이 잡아내는 리얼리티의 진정성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다큐멘터리 3일'이 이렇게 포착하는 곳의 시간을 3일로 압축시켜 거기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삶 속에 숨겨진 비의를 포착해냈다면, '30분 다큐'는 방송분량을 압축함으로써 그간 일상이라는 이유로 소외된 소재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공적이 있다.

항간에는 '30분 다큐'가 폐지되고, '다큐멘터리 3일' 역시 지금 시간대인 토요일 저녁 9시40분에서 더 늦은 밤으로 미뤄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롱런하며 세간의 관심을 한몫에 받아왔던 '인간극장'이 아침 7시50분대로 이동된 것까지 생각해보면, 이제 KBS 다큐멘터리는 'KBS 스페셜'을 빼고는 모두 한데로 내몰리는 느낌이다. 현재의 방송 프로그램들이 예능, 드라마 할 것 없이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식들이 탄생하는 요즘, 그만큼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이 시점에 다큐멘터리가 폐지되거나 한데로 옮겨가는 상황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론 시청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어떤 재미적인 기능을 통해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형식이라면, 다큐멘터리는 TV라는 매체가 갖는 정보적 기능에 충실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보성을 버리고 재미에만 치중할 경우, 결국 TV는 오락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현실이다. '30분 다큐'의 폐지. 시간대의 이동도 아닌 이 일상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폐지가 유감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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