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교양국 해체에 왜 이승환은 분노했을까

 

좋은 다큐멘터리 한 편이 가진 힘은 얼마나 될까. 아마도 가수 이승환에게는 각별했던 모양이다. 2006MBC <휴먼다큐 사랑>에서 방영된 너는 내 운명편 이야기다. 간암 말기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서영란씨와 이를 알고도 결혼한 정창원씨의 이야기를 본 이승환은 깊은 감동을 받고 다큐멘터리를 보자마자 곡을 써내려갔다. 그 노래가 바로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히든싱어3(사진출처:JTBC)'

아마도 이 감흥은 이승환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닐 게다. 당시 너는 내 운명을 본 시청자들이라면 당시 죽음을 앞둔 서영란씨와 정창원씨가 보여줬던 병원에서의 결혼식이 다시금 눈앞을 가릴 것이고, 앞에서 차마 눈물을 흘리지 못하고 인터뷰 도중 PD를 껴안고 울어버린 정창원씩의 모습이 여전히 아른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영란씨는 서둘러 떠나버렸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에 여전히 살아있다.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라는 이승환의 곡은 그래서 이제 그에게만 특별한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당시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토록 간절하게 기적이 일어나길 기원했던 모든 이들을 위한 곡으로 남았다. 이것은 좋은 다큐멘터리 한 편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일이다. 떠나버린 그녀는 다큐멘터리를 남겼고, 그 다큐멘터리는 노래로 탄생됐으니 말이다.

 

이승환이 MBC 교양국 해체에 대해 분노하는 건 그래서다. 그 기적 같은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그 PD들이 제작과는 무관한 부서로 보내진다는 사실이 어찌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일까. 교양국이 해체되어 PD들은 예능국으로 보내지거나 아니면 그간 해왔던 일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부서로 보내지게 되었다. 당시 <휴먼다큐 사랑>은 물론이고 <아마존의 눈물> 같은 대작을 기획했던 윤미현 PD는 지금 어느 부서로 가있는지 조차 모르는 인물이 되어버렸다.

 

시청자들에게 좋은 감동을 선사하고 시청자들을 위해 올바른 시각을 전달하기 위해 외압과 싸워온 분들이 좌천되고 사라져가고 있는 건 슬픈 일이다. 그런 점에서 MBC 교양국의 해체는 말 그대로 교양 없는’ MBC를 상징하는 사건처럼 보인다. 이승환의 곡을 빌려 이런 질문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어떻게 그래요?’

 

열심히 일한 사람이, 또 누구보다 자기 일에 소신을 갖고 일해 온 사람들이 눈앞에서 밀려나는 세상에 희망을 갖기는 어렵다. 지난 정권부터 계속되어온 MBC의 추락은 그래서 단순한 시청률 몇 프로의 수치만으로는 더 이상 회복될래야 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천안함 프로젝트>, 그 완성은 관객이 만들었다

 

도대체 이게 뭐라고 이렇게 나라 전체를 들썩거리게 만들었을까. <천안함 프로젝트>는 한 마디로 말하면 천안함 사건에 대해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을 던지는 그저 평범한 다큐멘터리였다. 이미 그간 보도된 것들도 많기 때문에 어쩌면 어떤 획기적이고 새로운 내용을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심지어 실망감을 줄 수도 있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사진출처:영화 '천안함 프로젝트')

다만 당시 너무 많은 보도와 말들이 쏟아져 나와 도무지 뭐가 뭔지 종을 잡을 수 없었던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다큐멘터리의 미덕은 그것을 아주 차분하게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일정의 거리를 두면서 하나하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전문가들의 상세한 의견을 통해 국방부가 발표했던 일련의 자료들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 것들이었나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정도.

 

천안함 사건이라는 민감한 소재였기 때문이었을 게다. 이 다큐멘터리는 과감한 연출방식을 의도적으로 자제했다. 다큐멘터리의 구조는 마치 백서를 보듯이 챕터1, 2 이런 식으로 지극히 담담하게 구성되었고 그 안에 담겨진 전문가나 관계자의 증언 역시 극도로 감정을 배제시키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그러니 심지어 밋밋하게까지 여겨지는 이 다큐멘터리가 메가박스에 상영되는 것을 저지하려 했다고 지목된 보수단체들조차 억울해했을 법하다.

 

보수단체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천안함 프로젝트>는 메가박스의 상영중지 결정이 오히려 흥행의 도화선이 되어준 격이 되었다. 왜 원천적으로 볼 권리를 빼앗는 것인가 하는 대중의 분노는 영화의 내용이나 성취와 상관없이 영화관으로 대중들을 이끌었다. 영화 자체가 가진 콘텐츠적인 의미보다는 그 영화를 보는 행위 자체가 가진 의미가 더 컸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천안함 프로젝트>의 영화적 가치가 낮다는 얘기는 아니다. 이것은 영화의 콘텐츠적인 성취보다는 ‘천안함 사건’처럼 민감한 소재도 영화화할 수 있다는 그 과정과 행동 자체가 커다란 성과다. 그리고 결국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가 진짜 하고픈 이야기도 천안함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는 것. ‘의문이 소통의 시작’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메시지다.

 

즉 소통을 이야기하려던 <천안함 프로젝트>가 원천적으로 소통을 봉쇄하려는 움직임을 만난 것은 영화가 말하려는 것처럼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소통되지 않고 있는가를 오히려 보여주었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 보면 <천안함 프로젝트>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영화가 영화관에 걸리는 우여곡절과 힘들어도 애써 그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의 행동까지가 이 영화의 완성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즉 <천안함 프로젝트>처럼 지극히 상식적인 영화가 이토록 큰 파장을 일으킨 것은 거꾸로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비상식적인가를 말해준다. 소통에 대한 작은 손짓마저 생각이 다르다며 묵살하려는 태도, 국민적인 관심과 의혹이 생긴 사안에 대해 끝까지 설명해주기는커녕 그 의혹을 제기하는 것 자체에 꼬리표를 다는 행위들, 그리하여 국민적인 불신감만 더 증폭시키는 이 현실이 <천안함 프로젝트> 속에는 들어있다. <천안함 프로젝트>라는 영화적 실험은 그래서 이런 현실 속에서도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에 의해 비로소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관객들은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처럼 막힐수록 더 갈증을 느끼게 되는 소통에 대한 갈망을 보여준 것이다.

'아프리카의 눈물', 그 아름다움과 슬픔 사이

이건 겨우 프롤로그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음은 혼란스럽다. 막연히 '아프리카' 하면 누구나 자연을 떠올린다. 날 것 그대로의 야생이기에 살풍경한 것조차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곳. 그래서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피조차 신성하게 여겨지는 곳. '아프리카의 눈물'은 지금까지의 '눈물' 연작 다큐멘터리가 그래왔듯이 그 공간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 야생과 그 위를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아름다움을 담는다.

다른 사람들이 볼까봐 수줍어하며 데이트를 하는 우바가 이제 곧 소 뛰어넘기 성인식을 마치고 다르게와 혼인할 날을 기다리며, 유목민인 풀라니족들은 가장 아름다운 남성이 되기 위해 몸을 가꾸는 것처럼.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아름다움으로만 연상되는 '아프리카'만을 담으려는 것이 아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창과 화살이 들려진 손이 떠올리는 신성한 피는, 이제 그 손 위에 대신 총을 얹어놓음으로써 더럽혀진다. 왜 평화롭게 공존하던 그들은 서로 총을 겨눌 정도로 생존 전쟁을 치르게 되었을까.

'아프리카의 눈물'은 그 눈물의 진원지를 찾아간다. 아프리카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덜 문명화되고 환경과 자연이 보존되어 있던 아프리카가 무슨 죄가 있어 피와 눈물을 흘리고 있을까. 그것은 결국 지구의 다른 한 편에서 살아가는 우리 같은 도시인들의 죄다. 물이 점점 말라버리고 바닷물의 수위가 올라가 살 터전이 물에 잠기고, 땅이 타버리는 것이 농담이 아닌 진짜 현실인, 그들 표현대로 '죽어가는 땅'이 되어버린 아프리카는.

코끼리들이 물을 찾아서 반제나 호수로 몰려들고, 가는 도중에 낙오된 어린 코끼리들이 말라 죽어가며, 말라버린 땅에 목말라 하며 쓰러져 죽어가는 가축이 마지막 물기를 눈물로 떨굴 때, 그 가축의 주인은 속수무책으로 방치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이제 갓 아이를 낳은 엄마는 물을 찾아 나서고 도무지 마실 수 없을 것 같은 물을 마시며, 그 아이의 아버지는 일을 찾기 위해 대도시로 떠나가 그 곳에서 막노동을 하고, 그러다가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분노하는 도시의 일꾼들에게 폭력을 당하고, 급기야 어떤 이는 차가운 한 줌의 재로 돌아오고, 그 아버지의 묘 앞에서 소년은 분노 반 슬픔 반으로 눈물을 흘리는 이 모든 재앙들... 이건 그들의 죄가 아니다.

'아프리카의 눈물'은 잔인하게도 이 아름다운 아프리카와 눈물 흘리고 있는 아프리카를 병치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 혼돈스런 상황들이 서로 연결고리를 맺고 있고, 그 고리가 바로 TV 앞에 앉아 '아프리카' 하면 연상되는 평화로운 자연을 떠올리고 있던 시청자들과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총을 쥐게 된 것도, 어린 코끼리가 죽어간 것도 모두 그 현실을 없는 것처럼 여기며, 마치 영화 속에서 그려내는 아름다움으로만 아프리카를 기억했던 우리들의 문제라는 것을 이 다큐는 보여준다.

'눈물' 연작 다큐멘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공간을 상정하고 그 위에 살아가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본 후, 그것이 파괴되어 가는 현실에 눈물 흘린다. 따라서 감성적으로 그 곳의 삶들에 공감하면서 따라가다 보면 그 밑바닥에 깔려진 이성적인 각성에 도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 아름다움과 슬픔의 파괴력이 강력하다. 무엇보다 이 아름다움과 슬픔을 포착하기 위해 총알이 날아다니는 위험 속으로 뛰어 들어간 제작진의 용기가 영상 곳곳에 진심으로 묻어난다는 것. 현빈의 내레이션은 '아마존의 눈물'을 빛나게 했던 김남길의 목소리만큼 차분하고 호소력이 느껴진다. 혼란스럽지만 이것이 다시 눈물로 돌아온 '아프리카의 눈물'을 기꺼이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그리고 이건 겨우 프롤로그에 불과하지 않은가.

'1박2일', 새로운 여행의 패러다임을 만들어라

'1박2일'이 깔끔해졌다. MC몽이 빠진 공백은 크게 느껴지지만 대신 다섯 명으로 줄어든 멤버들에 대한 집중력은 더 높아졌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복불복에 대한 강박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게임을 하는 모습보다는 여행지에 대한 소개가 더 많아졌다. 전체적인 짜임새도 더 탄탄해졌다.

당일치기 콘셉트로 떠난 서울 나들이는 치밀한 사전 계획이 돋보였다. 종로의 북촌 한옥마을, 북악산 성곽길, 백사실 계곡, 이화마을, 광장시장을 배경으로 주어진 미션은 이미 그 속에 의미를 다 담고 있었다. 게다가 이 미션은 그 장소에서 서울의 특징을 대변하는 특정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었다. 즉 이것은 서울로 떠나는 출사여행을 미션 형식으로 보여준 것이다.

모든 미션이 끝난 후 강호동이 굳이 설명한대로, 북촌 한옥마을은 서울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고, 북악산 성곽길에서 이수근이 담아온 총알 맞은 소나무는 근대사의 아픔이, 백사실 계곡에서 은지원이 찍어온 개구리 사진은 서울의 자연을, 이화마을은 예술과 어우러진 서울의 모습을, 그리고 광장시장은 서울의 친절한 사람들을 담아낸 것이었다.

미션 막판에 시간에 맞춰 도착하려는 멤버들이 보여주는 초를 다루는 긴박한 상황은 자칫 루즈해질 수 있는 분위기를 팽팽하게 만들기도 했다. 또 이렇게 미션으로 각각의 서울의 아름다움을 포착할 수 있는 사진들이 모아진 후, 그 정지 화면을 함께 보면서 마치 그 날 하루 있었던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을 집어넣은 것도 꽤 깔끔한 안배라고 할 수 있다.

즉 '1박2일' 서울 나들이 편은 상당히 잘 짜여져 있고 웃음과 함께 정보를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묻어났다. 복불복이 빠지자 자극적인 재미는 줄어들었지만, 의미는 그만큼 커졌다. 마지막 강호동이 굳이 그 의미를 하나씩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과잉의 흔적까지도 느껴진다. 공익적인 분위기까지 연출된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기획이 잘 되어 있고 잘 짜여진 데다 군더더기 없어 보이는 '1박2일'에서 어떤 아쉬움이 남는 것은 말이다. 왜 그럴까. 여행에 대해 집중해달라는 요구와 복불복에만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시청자들의 주문에도 불구하고, 왜 복불복이 그립게 느껴지는 걸까.

그 이유는 너무 잘 짜여져 있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 '1박2일'이 가진 매력은 잘 정돈된 영상이 아니라,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그 의외성에 있다. 말 그대로 '야생'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래서 때로는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그 날 것이 주는 재미는 잘 짜여진 틀에서는 나오기가 어렵다.

'1박2일'이 다큐를 닮아있다는 표현에는 약간의 오해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다큐는 말 그대로 의외의 사건들이 날 것 그대로 마구 드러난다는 의미에서지, 실제 여행 다큐멘터리가 갖는 그 기획적인 깔끔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영석 PD는 '1박2일'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100% 이상을 기획하지만, 50% 정도만 기획을 충족시킬 때 '1박2일'만의 재미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그것은 100% 기획이 100%대로 이루어지면 밋밋해진다는 얘기고, 그렇다고 완전히 틀어지면 본래 기획 자체가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1박2일'은 다큐 같은 날것을 지향하는 예능이지만, 다큐 자체가 될 수도, 되어서도 안된다.

특히 여행이라는 소재는 지나치게 기획된 대로 움직이면 재미가 반감되기 마련이다. 여행의 묘미는 길 위를 걷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우연한 계기에 의해 길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있는 것이다. 복불복이 문제로 지목되는 것은 그것이 게임에만 몰두할 때다. 필자가 만난 나영석 PD는 이미 복불복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복불복은 게임이 재미를 주지만, 그 게임이 만들어내는 어떤 의외성이 여행 전체에 색다른 스토리를 부여할 때 진짜 재미를 준다"고 그는 말했다.

꽤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1박2일'은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지나치게 앞으로만 달려 나왔던 '1박2일'은 그 초심인 여행으로 돌아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하다. 하지만 여행의 묘미가 무엇인지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여행이라면 몇몇 관광명소에서 사진을 찍는 것이 다였지만, 지금은 아예 없는 길을 걸어 나가는 것이 여행이 되고 있다. 모쪼록 '1박2일'이 과거부터 지금껏 해오던 대로, 여행이라는 밥상 위에 숟가락 하나를 얹어놓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여행의 맛이 느껴지는 밥상을 차려내기를 바란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