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참 다양하게도 비유된다.

삶을 인생의 여정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글을 쓰는 일도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가는 여행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영화 한 편을 보는 것 역시 잠시 이 쪽의 불을 끄고 새로운 세상으로 떠나는 여행으로 말하기도 한다. 

여행과 나날

여행에는 낯설음과 익숙함 혹은 새로움과 진부함 나아가 차이와 반복의 이중주가 담겨 있다.

새로운 곳으로의 여행은 낯설고 새롭고 어딘가 지금과는 차이가 있는 경험을 하게 해준다.

하지만 제아무리 낯설고 새롭고 차이가 나는 경험으로서의 여행이라도

같은 곳에 오래 머무르거나, 혹은 반복적으로 하게 되면 

그 경험은 익숙해지고 진부해지기 마련이다.

삶은 그래서 이 낯설음과 익숙함 사이, 새로움과 진부함 사이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행위다.

 

글을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은 그것 역시 삶과 여행을 빼닮았다는 걸 알고 있다.

처음에는 새로운 단어들이나 말들이 갈수록 익숙해지면 하나의 클리셰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그 단어나 말들이 지긋지긋해지고 더이상 쓰고 싶어지지 않게 된다. 

여행과 나날

“나는 말(言)이라는 틀에 갇혀 있다. 여행이란, 말에서 도망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미야케 쇼 감독의 영화 '여행과 나날'에서 각본가인 '이(심은경)'는 그렇게 말한다. 

이는 한국인이지만 일본에서 각본가로 일하고 있다. 

한국어와 일본어를 동시에 쓰는데, 아마도 그녀에게 처음부터 일본어가 쉬웠을 리는 없다. 

이건 심은경이라는 배우가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느꼈던 소회하고도 일치한다.

그 일본어를 쓰며 하는 연기는 그래서 그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다. 

한국어로 하던 연기의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새로운 연기를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본어가 점점 익숙해지면서 이는 그마저 '말의 틀'에 갇히고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

슬럼프에 빠지기 전 그녀가 쓴 작품으로 된 영화는 여름 날 어느 낯선 바닷가에서 만난 소년 소녀의 이야기다.

대단한 사건도 대단한 대사도 없지만 묘하게도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그 영화는

그 무료한 바닷가에서 함께 바다 속으로 뛰어들고 수영하는 광경을 관능적으로 담아낸다. 

작가의 이의 무료함은 그렇게 영화라는 세계 속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여행의 낯설음을 꿈꾸게 한다. 

여행과 나날

그 작가의 권태로움이 극에 달해 말의 틀에 갇혀버린 이는

이제 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말로부터 도망치기 시작한다. 여행을 떠난다. 

영화 속 세계가 어느 여름날의 바닷가 소년 소녀의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이었다면

현실 속 이가 떠난 세계는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 속 지도에도 없는 허름한 여관에서 만난 

괴팍해 보이는 아저씨 주인과 만난 지극히 현실적인 경험이다.

여행과 나날

하지만 이는 온천도 스키장도 아닌 이 지도 바깥에 있는 이 낯선 여관에서

주인 아저씨 벤조와 일상을 보내며, 그가 하는 엉뚱한 짓에 가담해 의외의 작은 모험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벤조가 왜 혼자 그런 외진 곳에서 여관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사연도 알게 된다.

그 엉뚱한 모험을 한 후 이가 한껏 웃는 얼굴로 벤조에게 

“이렇게 즐거웠던 건 오랜만이에요.”라고 말할 때

벤조가 툴툴 대며 옆자리로 눕는 장면은 이 영화의 깨알같이 빛나는 대목이다. 

여행과 나날

벤조의 사연은 자못 비극적이고 아련한 면이 있고,

그건 그의 하루하루를 온통 채우는 일상 그 자체다. 새로울 리도 없고 그러니 즐거울 리도 없다.

하지만 벤조의 그 일상 속으로 여행해 들어온 이는 다르다.

그녀는 자신의 일상 바깥으로 나와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낀다. 

 

영화는 잔잔하기 이를 데 없고 대사도 많지 않다. 

특히 전반부에 등장하는 이가 쓴 작품 속 바닷가 소년 소녀의 이야기는

익숙한 영화 문법과는 사뭇 동떨어진 광경들이 등장하며

낯선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여행과 나날

하지만 그것이 영화였고, 그 영화의 각본을 쓴 이가 아이러니하게도

그 익숙함에 갇혀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새로움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또 하나의 영화다. 

극중극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이것은 영화라는 예술이

익숙함의 틀에 갇혀 즐거움을 잃은 사람들을

어떻게 다시 즐거운 여행으로 인도하는가를 담아낸다. 

 

이 영화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우리의 삶은 둘 중 하나가 된다.

여행을 하고 있거나 혹은 나날(일상)을 살아가고 있거나.

그 반복 속에서 끊임없이 즐거움을 추구하며.

여행과 나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 ‘사말’이 주는 감동의 실체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주도에서 처음 만났을 때 비가 내렸거든. 갑자기 천둥소리가 나서 그 사람을 쳐다 봤는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딴 생각에 잠겨 있는 거야. 그런 모습이 좀 쓸쓸해 보이더라. 근데 오늘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 나는 천둥소리를 듣고 놀랐지만 그 사람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몰랐던 것처럼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나만 듣고 나만 알게 되는 일들이 생겨. 그걸 그럴 때마다 수어로 문자로 설명하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막막해져. 들리지 않아서 쓸쓸한 순간만 생각했는데 들려서 쓸쓸해지는 순간도 뭐 있을 수 있는 거구나. 그런 생각 들더라고.”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친구 오지유(박진주)에게 미술관에서 송서경(이은재)과 권도훈(박기덕)이 다투는 소리를 들었지만, 듣지 못하는 차진우(정우성)에게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심정을 그렇게 에둘러 털어놓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생겨나는 비밀이 만들어내는 쓸쓸함. 그건 듣지 못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사이에만 생기는 쓸쓸함은 아니다. 그게 말이든 글이든 수어든, 근본적으로 완전한 진심이 소통되기 어려운데서 만들어지는, 결국은 혼자라는 쓸쓸함이다. 

 

정모은도, 차진우도, 송서경도 또 정모은의 절친인 윤조한도 비밀이 있다. 정모은은 자신의 엄마가 친엄마가 아니다. 낳아주신 엄마는 따로 있다. 어려서 아빠와 엄마가 다투는 소리를 우연히 듣고는 그 사실을 알았다. 절친인 윤조한(이재균)은 정모은과 함께 시골집에 가서 우연히 보게 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됐다. 정모은은 그 사실을 안 이후로 엄마가 “날 진짜 사랑하는 걸까. 사랑하는 척 하는 건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어려서 불안하기만 해서 가졌던 그 어리석었던 생각들을 털어놓으며 그런 비밀은 몰랐으면 더 나았을 뻔 했다고 정모은은 털어 놓는다. 

 

차진우는 송서경과의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 학교에 불이 났었고 그로 인해 차진우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무슨 이유에선지 송서경은 아픈 말들을 잔뜩 쏟아붓고는 차진우를 떠났다. 차진우는 큰 상처를 받았지만, 세월이 한참 지나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 송서경에게 그 때 왜 떠났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송서경에게는 비밀이 있지만 그건 지나간 과거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정모은은 차진우와 송서경 사이에 있었던 일이 궁금하고 그래서 차진우의 절친인 홍기현(박재준)을 찾아가 묻지만 그건 그 비밀이 궁금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 입을 통해 듣는 이야기들이 신경쓰여서다. 고맙게도 홍기현은 있는 그대로를 알려주면서 차진우의 마음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거라고 정모은에게 말해준다. 

 

윤조한은 정모은을 좋아하지만 절친이고 정모은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 비밀을 털어 놓지 않는다. 대신 정모은이 출연하게된 드라마의 OST를 맡아서 만든 곡에 자신의 마음을 담는다. 정모은은 모르겠지만 윤조한은 그렇게 멀리서나마 스스로의 마음을 전한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지만, 불타오르는 사랑의 화려함보다는 그 여백으로 남아 있는 쓸쓸함이 더 짙은 여운을 주는 드라마다.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자기 감정을 자꾸만 차진우에게 드러내고 말하려는 송서경과 달리, 차진우도 정모은도 또 윤조한도 쉽게 말로서 자신의 속내를 꺼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말로 전해질 수 없는 진심이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쓸쓸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이 드라마는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쓸쓸한 존재로서의 우리들을 인정하기 때문에, 말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진심이 전해지고 그 진심이 닿게 되는 그 순간의 감동은 더 짙다. 침묵한 채 따뜻한 시선으로 정모은을 바라만 보는 차진우의 마음은 그래서 그 침묵 속에서 더 잘 전해지고 그의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 역시 그가 그리는 그림 속에서 더 잘 살아난다. 정모은의 진심은 차진우에게 쉽게 말하지 못하고 세심하게 고민하며 말을 아끼는 그 모습에서 드러난다. 

 

윤조한의 진심은 끝내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대신 음악을 들려주는 데서 드러나고, 낳아준 엄마는 아니지만 딸을 생각하는 정모은의 엄마 나애숙(김미경)의 마음은, 우연히 딸의 남자친구를 만났는데 청각장애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게 걱정되어 “귀가 성치 않든 고아든 간에 지가 좋아서 만난다는데 ‘그래 니가 좋으면 나도 좋다’ 시원하게 그 한 마디를 못해준 것”을 후회하며 눈물 흘릴 때 절절히 드러난다. 

 

때론 말하지 않을 때, 차라리 비밀로 남겨둘 때 그 침묵을 또 비밀을 알아봐주는 이에 의해 오히려 더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다. 차진우의 전시회에 온 어느 마지막 손님이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그것이다. 왜 눈물을 흘렸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정모은에게 그녀는 말한다. “글쎄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혼자 이 고즈넉한 연못을 바라보면서 화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살았고 어떤 이유에서 이런 그림을 그리게됐을까 떠올려 보는데 갑자기 눈물이... 주제 넘죠? 그림 한 장으로 그 사람의 삶을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건 결코 주제 넘은 일이 아니다. 수천, 수만의 단어를 동원해도 알 수 없던 누군가의 삶의 진실을 우리는 순간을 포착해낸 그림 한 장으로 때론 아름다운 가사를 담은 노래 한 곡으로 알아보게 되는 그런 경험을 하지 않던가. 그 그림 앞에서 눈물 흘렸던 사람처럼, 우리는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해줘>가 주는 감동과 여운을 마주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진심을 느끼며. (사진:지니TV)

‘사랑한다고 말해줘’의 질문, 우린 과연 진짜 말하고 듣고 있는 걸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 얘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에서 정모은(신현빈)은 차진우(정우성)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고 한다. 그저 평범하게 누구나 할 법한 그 말이 새삼스럽게 들린다. 차진우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농인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듣는다’는 건 그래서 다른 의미로 들린다. 그저 소리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마음’일 수 있다는.

 

그 날은 정모은에게는 너무나 힘들 날이었다. 배역 캐스팅이 되어 기뻐하며 촬영장에 갔지만 알고 보니 뺨 맞고 물세례를 받는 역할이라 빠른 촬영을 위한 더블 캐스팅이었다. 그래서 수없이 번갈아가며 뺨을 맞고 물세례를 받으며 촬영을 끝냈지만 자신이 나올지 더블 캐스팅된 다른 엑스트라가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없이 초라해진 마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모은은 차진우를 떠올린다. 힘들 때 부르면 오겠다고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문자를 남겨도 보지 않는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하던 차에,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던 정모은은 집 앞에 그가 서 있는 걸 보고는 꾹꾹 눌렀던 감정이 터져나온다. 돌아선 그의 등을 살짝 잡은 채 눈물을 쏟아낸다. 정모은은 돌아볼까봐 등뒤로 숨으려 하고, 차진우 역시 그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는 걸 직감하며 그 눈물을 보이기 싫어하는 정모은을 위해 돌아서지 않는다. 

 

감정을 추스른 정모은은 자신도 모르게 차진우에게 그 날의 일들을 늘어놓는다. “저 오늘 처음으로 대사있는 역할 촬영한다고 엄청 신났었거든요. 근데 막상 가보니까 긴장도 많이 되고 정신도 하나도 없고 잘 하고 왔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좀 서러웠나 봐요. 그래도 씩씩하게 잘 참고...”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정모은은 깨닫는다. 말을 듣지 못하는 차진우에게 자신의 말이 너무 많았다는 걸. 그래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차진우는 아니라며 미소를 지어주고는 핸드폰에 이렇게 찍어준다. ‘수고했어요. 잘 쉬길 바라요.’ 그 말은 힘겨운 날을 보낸 정모은에게 작지 않은 위로가 됐을 게다. 

 

그래서 훗날 만나 그 날 일을 이야기하며 고맙다는 정모은에게 차진우는 의외의 답변을 핸드폰을 찍어 보여준다. ‘사실... 거의 듣지 못했어요. 조금이라도 더 들으려고 노력은 했는데...’ 실상은 너무 어둡고 말이 빨라서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없었다는 거였다. 하지만 정모은은 그 답변에서 ‘노력’이라는 단어에 더 마음이 끌렸다. 그래서 차진우에게 이렇게 익숙지 않은 수어로 말한다. “더 고마워요. 내 얘기를 들으려고 노력해줘서.”

 

자신이 듣지 못해 대화를 하는 것이 답답하지 않냐는 차진우의 물음에 정모은 역시 의외의 말을 꺼낸다. “솔직히 저는 핸드폰 없이 얘기하는 것도 좋아요. 왜 그런지 한 마디로 설명할 순 없지만 정말이에요. 음.. 나도 모르게 한 혼잣말도 다 알아주는 것 같고. 그래서 가끔 잊어버려요. 당신이 듣지 못한다는 거.” 그러면서 오히려 차진우에게 수어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수어를 잘 못해서 힘드시겠지만.”

 

타인과 소통하고 마음을 나누는 건 무슨 의미일까. 정모은이 말하는 ‘듣는다’는 건 단지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그런 의미는 아닐게다. 우리는 매일 같이 많은 말들을 듣지만 과연 그건 진짜 듣는 걸까. 그저 지나가는 소리들일 뿐인 건 아닐까. 들을 수 있어도 듣지 못하는 건 정모은이 콕 짚어낸 것처럼 ‘노력’이 없어서다. 마음을 쓰지 않으면 들을 수 있는 것도 듣지 못한다. 

 

그래서 정모은의 자기 이야기를 들으려 노력해줘서 더 고맙다는 그 말을 곱씹으며, 차진우는 생각한다. ‘딴 생각에 빠지는 순간 눈앞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없는 무례한 사람이 되고 만다. 같은 말을 두 번 세 번 되묻기가 미안해 가끔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까지 다시 말해달라 부탁하지 않는 게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듣기 위해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문득 궁금해진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마음에 선을 긋고 누구로부터 거리를 두려 애썼던 걸까. 나는 듣지 못하는 게 아니라 듣고 싶은 이야기에만 귀 기울이며 살아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차진우의 이 생각은 <사랑한다고 말해줘>라는 멜로드라마가 손으로 말하는 농인 화가 차진우와 마음으로 듣는 배우 정모은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진짜 건네려는 질문을 끄집어낸다. 그건 사람과 사람이 진정으로 듣고 말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더 설레면서도 뭉클하다. 그저 쉽게 ‘사랑한다’는 말로는 다 담겨질 수 없는 진심을, 그래서 말이 아니라도 더 노력하고 마음을 다 하는 것으로 전해질 수 있는 진심을 꺼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모은이 뭐라 설명할 순 없지만 완벽히 알아듣지 못해도 차진우와 핸드폰 없이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느끼는 그 순간들처럼.(사진:ENA)

‘사랑한다고 말해줘’, 정우성이 11년만에 선택한 멜로 뭐가 다를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산 속 외딴 곳에 있는 집. 정적 속에 산새 몇 마리의 지저귐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그 곳에 고독의 표상처럼 서 있는 그 집을 차진우(정우성)는 사진에 담는다. 마치 그렇게 침묵과 고요 속에 외롭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듯이.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남자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제주공항에 도착해 바닷가 촬영장을 찾은 정모은(신현빈)은 ‘여자4번’으로 불리는 무명배우다. 스튜어디스였지만 배우의 꿈을 시작한 그 선택은 쉽지 않다. 연기가 어색하다며 제주까지 온 그녀를 감독은 다른 배우로 바꾸겠단다. 그러면서 그녀가 배역을 위해 고심해서 산 스카프는 마음에 든다며 팔라고 한다. 정모은이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무례한 말들로 가득하다. 

 

그 바닷가를 찾았다가 우연히 정모은을 멀리서 보게된 차진우는 그녀를 사진에 담는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차진우의 시선에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무슨 사연인지 제주를 찾아 하염없이 바다만 보고 앉아 있다 결국 죽어버린 한 남자를 벽화로 남긴다. 그 남자는 그렇게 외로운 모습 그대로 벽화 속에 남았다. 그 벽화를 보게 된 정모은은 거기에 포스트잇으로 메모를 남긴다. 

 

말이 있는 세계와 말이 없는 세계. 말로 하는 소통이 더 잘 될 것 같고, 침묵은 불통일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정모은이 마주한 세계가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무심코 던지는 무례한 말들 속에서 상처받는다. 반면, 차진우가 그린 말없는 고요의 벽화를 보며 알 수 없는 위로 같은 걸 받는다. 갑자기 벌어진 화재 사고 속에서 저마다 빠져나가라며 아우성을 치지만, 정모은은 그런 ‘말’ 대신 듣지 못하는 차진우를 구해 함께 나가야 한다는 ‘마음’에 발길을 돌린다.  

 

정모은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차진우가 전하는 감사의 표시는 말이 아니라 스케치북에 한 자씩 눌러쓴 글귀라 더 마음을 움직인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그리고 무사해주셔서.’ 듣지 못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 있다는 건 먼저 마음이 움직이면 그리 불편한 일만은 아니다. 꼬르륵 소리에 배를 만지자, 이를 오해해 ‘아파요’라고 적은 차진우의 글에 정모은이 ‘고파요’라고 정정해줌으로써 피어나는 웃음처럼 말이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이들은 상대가 살고 있는 다른 세계를 알고 싶어진다.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아 차진우는 자신의 캠핑카로 정모은을 초대한다. 함께 라면을 끓여먹는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자 비를 피해 앉은 정모은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는데, 그 와중에도 차분한 차진우를 보고는 자신도 귀를 막아 본다. 그가 사는 세계가 궁금한 것. 그녀는 나직이 말한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도 나쁘지 않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청각 장애를 가진 차진우와 배우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정모은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 과연 서로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있는가를 멜로라는 장르적 틀을 통해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수한 가시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래서 무시로 상처받고 상처주는 세상이 밑그림으로 깔려 있다. 정모은이 차진우가 마주하고 있는 ‘침묵과 고요의 세계’를 궁금해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그건 차진우에겐 고독이겠지만. 

 

서울로 돌아온 차진우는 한 아트센터에서 청각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수어로 하지만 이들의 손으로 하는 대화는 화기애애하다. 반면 배역 캐스팅을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인 정모은은 가시 같은 말들에 상처받는다. “열심히 한 티가 나요. 근데 우리가 연기 보자고 했지 암기 실력 보자고 했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뭐랄까 난 재미가 없어.” 그러자 정모은은 “제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열심히 한 게 잘못 된 건가요?”하고 되묻는다. 하지만 결과로만 판단하는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성희롱에 가까운 말까지 듣게 된다. “아니 승무원 출신이면 좀 타이트한 유니폼이라도 좀 입고 와 가지고 어필이라도 좀 하지 이게 뭐예요.” 

 

‘거리의 이방인 옆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부디 지금은 외롭지 않길.’ 제주 어느 바닷가에서 외롭게 죽어간 사내를 그린 벽화에 정모은은 그런 포스트잇을 남겼다. 그 포스트잇에 화답하듯 차진우는 그녀의 그림을 그려 ‘배우님께’라는 글귀를 남긴 스케치북을 건넸다. 정모은은 그 글귀를 떠올리며 혼자 생각한다. ‘나, 배우라는 말 처음 들어봐요. 보조출연, 단역, 엑스트라 뭐 그렇게들 말하니까.’ 말보다 소리없이 마음을 담은 글 하나가 더 마음을 움직인다. 

 

정우성이 11년만에 하는 멜로는 이처럼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랑 혹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말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이제 그 서로 다른 세계를 향해 마음이 움직인다. 우연히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난 자리에서 여자는 ‘열심히’ 연습한 수어로 남자의 세계를 향해 들어온다. 남자는 침묵 속에서 말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노력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를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준비한 말을 천천히 한 뒤엔 웃었다. 가벼운 인사 몇 마디에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냐는 듯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건  소리없는 사랑의 시작이었다.(사진: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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