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의 MBC, 그 잃어버린 3년의 의미

 

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공고하게 세워둔 MBC라는 방송사의 위상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것은. 그 중심에는 이명박 정권과 함께 낙하산 인사로 내려온 김재철 사장이 있다. 이전에는 MBC 사장이 도대체 누구인지조차 잘 모르면서 방송을 즐겼던 대중들도 이제 김재철 사장이 누구인지 알 정도로 그는 MBC 프로그램의 추락을 초래했다. 그 전까지는 잘 몰랐던 사장 한 명의 위력을 실감하던 시간이었다.

 

'뉴스데스크'(사진출처:MBC)

가장 큰 문제는 공정방송 회복을 위해 무려 170일 동안의 파업을 벌였지만, 이로 인해 2백여 명의 MBC직원이 해직되거나 징계되었다는 것이다. <PD수첩>의 최승호 PD, 박성제, 박성호 기자, 정영하 노조위원장, 이상호 기자 등 8명이 해고되었고, 파업 관련자들을 본래 직종과 무관한 부서로 전보 처리하는 등 보복성 인사와 징계가 이어졌다. 대중들에게 친숙했던 MBC의 얼굴들이 일거에 사라져버린 것. 서울남부지법은 이러한 전보 처리 등이 무효라는 결정을 내렸지만 아직까지 이들은 제 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MBC의 얼굴들이 해고되거나 주변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방송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는 당연할 수밖에 없다. 가장 눈에 띄게 망가진 것은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이다. MBC 하면 먼저 떠오르던 <뉴스데스크>나 <PD수첩>의 날선 비판의식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뉴스의 정부 편향성은 대중을 위한 뉴스가 아니라 정부를 위한 홍보에 머물렀고 당연히 시청자들은 채널을 돌렸다. <PD수첩>은 PD의 해고에 이어 작가 8명 전원이 해고당하고 대신 시용PD들이 배치되면서 대중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100분 토론> 또한 손석희가 빠지면서 급격히 신뢰도가 떨어졌고 결국 대중들의 기억에서조차 멀어진 프로그램이 되어버렸다.

 

전문 인력들이 빠져나가자 뉴스 프로그램의 방송 사고도 줄을 이었고 몇몇 아나운서들의 적절치 못한 발언과 실수로 연일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뉴스에 대한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그저 시청률에 목매달면서 <뉴스데스크>를 8시 대로 옮긴 것은 MBC 전체 프로그램의 틀을 뒤흔들었다. 시간대를 옮겼지만 여전히 시청률은 지상파 방송3사 꼴찌의 수모를 피하지 못했고, 9시 대에 <구암 허준>이라는 일일사극 파격 편성 또한 그다지 시청률을 가져가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뉴스데스크>의 시간대 변경은 8시부터 10시까지 두 시간의 공백을 가져온 셈이다.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MBC 주말드라마의 막장으로 이어졌다. <메이퀸>은 아동학대에 가까운 자극적인 전개로 시작해 개연성 없는 인물들의 변화와 극악스러운 캐릭터들을 세움으로써 시청률을 가져갔지만 대중들의 냉랭한 비판을 받았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백년의 유산> 또한 비상식적인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등장해 막장 논란을 이어가고 있다. 오로지 시청률 지상주의가 가져온 MBC 드라마의 비극이다.

 

시청률 지상주의의 그림자는 예능 프로그램에도 그대로 드리워졌다. 시청률이 떨어졌다는 이유로 8년 장수한 예능 프로그램인 <놀러와>가 떠난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종영되었고, 그 자리를 채웠던 <배우들>이라는 토크쇼 역시 시청률 난항으로 갑작스런 폐지를 맞았다. 아예 이제 MBC는 월요일 저녁 예능 프로그램을 빼고 <MBC스페셜>을 편성함으로써 사실상 예능 포기선언을 한 셈이다.

 

이 월요일 저녁 시간대를 때우고 있는 <MBC스페셜>도 그 위상이 과거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 것은 마찬가지다. 과거 참신한 기획으로 다큐프로그램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금요일 밤의 최강자로까지 자리했던 <MBC스페셜>은 끝없는 편성 변경으로 인해 한없이 망가져버렸다. 눈물 시리즈와 <휴먼다큐 사랑> 같은 좋은 아이템들이 즐비했던 <MBC스페셜>의 추락은 MBC의 교양 프로그램으로서는 뼈아픈 상처가 아닐 수 없다.

 

사장 한 사람의 전횡으로 인해 방송사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그것이 전체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을 떨어뜨리는 그 일련의 과정이 지난 3년 동안 MBC에서 벌어진 일이다. 방송의 성패가 프로그램의 질만큼 대중들이 그 방송사를 바라보는 정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이 3년이 준 뼈아픈 교훈이다. 해고 노동자 복직, 변방으로 밀려난 직원들의 원대복귀 등등 해야 할 일들은 산적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김재철 사장이 물러난 자리를 누가 채우느냐는 문제다. 이 하나의 선택은 앞으로 MBC가 잃어버린 3년을 되돌려 다시 대중들을 끌어 모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대중들의 외면을 받게 될 것인가를 가름하는 일이 될 것이다.

<메이퀸>, 출생의 비밀 하나로는 부족했나

 

출생의 비밀 하나로는 부족했나. <메이퀸>이 마지막 반전 카드로서 또 다른 출생의 비밀을 꺼내들었다. 해주(한지혜)가 윤학수(선우재덕)의 딸이 아니라 사실은 장도현(이덕화)의 딸이었다는 것. 해주가 사실은 친모인 이금희(양미경)를 장도현이 강제로 품어 낳게 된 딸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해주의 아버지는 셋이 되었다. 그녀를 키워준 천홍철(안내상)과 딸로 받아들여준 윤학수, 그리고 피를 이어받은 장도현이다.

 

'메이퀸'(사진출처:MBC)

드라마가 극적 장치로서 출생의 비밀을 활용하는 것은 그 카드 하나로 모든 상황을 뒤집는 반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특유의 핏줄의식을 끄집어냄으로써 사실을 알고 있는 시청자들을 더욱 몰입하게 만들 수도 있다. ‘알고 보니 누구의 자식’이라는 그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식은 그래서 이제 가족을 다루는 거의 모든 드라마에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다. 너무 반전의 반전을 활용하기 위해 억지스런 출생의 비밀 코드를 활용하면 시청자들은 우롱당한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결국 작가의 장난에 휘둘린 꼴이 되니까.

 

이것은 극중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해주가 자신의 피붙이인 줄 알고 그토록 애타게 찾던 윤정우(이훈)가 대표적이다. 그는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이금희를 만나 이렇게 분노를 터트린다. “그럼 난 뭐야? 이 세상에 유일한 피붙이는 유진인 줄 알고 그리워하고 평생 한으로 남겨온 난 뭐냐구? 유진이를 보며 형을 떠올린 난 뭐냐고?” 이 토로는 아마도 시청자들의 마음 그대로일 게다. 윤정우와 해주를 어렵게 다시 만난 가족이라 생각하며 흐뭇해했던 시청자들은 뭐냔 말인가.

 

결국 이런 무리한 설정을 하게 된 것은 뻔한 가족의 테두리로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죽을 죄를 지어도 가족이기 때문에 결국은 용서해야 한다는 그 뻔한 메시지. 하지만 과연 가족이면 모두 용서가 되는 것일까. 장도현은 윤학수를 죽인 살인자이고 평생 박기출(김규철)을 머슴 부리듯 부려온 그런 인물이다. 게다가 강산(김재원)의 할아버지인 강대평(고인범)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인물을 굳이 해주의 친 아버지로 변신시켜 놓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 무리한 출생의 비밀 때문에 이상한 캐릭터가 되어버린 윤정우는 그래서 이 사실을 알고는 해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내가 잘못했다. 우리 형이 너를 딸로 생각한 건 핏줄이 아니라 사랑이야. 넌 사랑으로 태어난 아이였어. 그러니까 넌 우리 형이 낳은 딸이 맞아. 널 키운 천홍철씨도 너를 더 큰 사랑으로 안았으니까 그 분도 너의 아버지야.” 이것은 하나의 설명이자 의미부여다. 과도한 출생의 비밀이 낳은 너무 많은 아버지들을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다.

 

그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조달순(금보라)이 윤정우에게 해주는 이야기 속에 들어있다. “죽은 상태 아버지가 해주한테 그랬대요. 가족은 피를 나눠서 가족이 아니라 배고픔도 슬픔도 고통도 나누는 게 가족이라구. 그게 뭔 말인지 이제 알겠더라구요.” 핏줄을 넘어선 가족애. 어찌 보면 이 대사는 잘만 활용되었다면 시청자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러 번 출생의 비밀 카드를 끄집어내 시청자를 이리 저리 휘두른 다음 나오는 이런 대사는 이제 변명처럼 다가온다.

 

“밥 먹기 전에 꽈배기를 먹었나. 왜 이렇게 꼬였어?” 상태(문지윤)가 밥상머리에서 해주에게 핀잔을 주며 던지는 이 대사는 마치 이 드라마를 두고 하는 얘기 같다. 배배 꼬아서 뒤집을 건 죄다 뒤집어 자극적인 상황에만 몰두하던 드라마가 이제 결말을 위해 제 멋대로 가족 관계를 엮어놓는 것은 그래서 시청자들을 희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아버지가 셋이나 되어버린 캐릭터는 또 무슨 죄인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

개연성 잃어가는 <메이퀸>, 문제는?

 

만일 막장드라마를 의도된 막장드라마와 의도치 않은 막장드라마로 나눌 수 있다면 <메이퀸>은 후자에 해당할 것이다. <메이퀸>은 물론 초반부에 어린 해주(김유정)를 아동학대에 가깝게 핍박하는 계모 달순(금보라)의 에피소드가 과한 면이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그 과한 설정에 나름대로의 개연성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중반을 넘겨온 <메이퀸>은 본래 하려던 이야기를 잃어버린 채 이리저리 자극적인 상황만 쫓는 꼴이 되어버렸다.

 

'메이퀸'(사진출처:MBC)

해주(한지혜)와 창희, 그리고 강산(김재원)과 인화(손은서)의 멜로 라인의 변화를 보면 이는 단박에 드러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해주(한지혜)를 키워준 천홍철(안내상)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창희(재희)가 해주와 헤어지고 갑자기 인화와 가까워지는 얘기는 그럴듯한 이유와 근거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심지어 인화는 어렸을 때부터 강산을 쫓아다니던 인물이 아닌가. 그런 인화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오는 창희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데는 어떤 계기가 필요할 텐데 그런 면도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창희 앞에서 인화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고는 “내가 왜 이러지?”하는 장면으로 그 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는 것은 작가로서는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사실 이런 합당한 이유 없이 돌변하는 심경의 변화는 캐릭터를 아주 우습게 만들어버린다. 창희야 복수를 위해 인화에게 의도적으로 다가갔다는 심증을 가질 수 있지만 당사자인 인화는 다르다. 인화라는 캐릭터는 여기서 어떤 성격을 품고 스스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조종되는 인형으로 전락한다.

 

<메이퀸>에서 이렇게 조종되는 캐릭터들은 의외로 많다. 또 하나의 불운의 캐릭터가 장일문(윤종화)이다. 일문은 전형적인 민폐 캐릭터로서 그가 나오는 장면은 하나의 클리쉐로 처리된다. 즉 그는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는(늘 그렇다) 아버지인 장도현(이덕화)에게 두드려 맞거나, 해주를 “너 까짓 게” 식의 안하무인격으로 대하거나 어머니인 이금희(양미경)에게 분노를 드러내고 때론 읍소를 가장하는 식의 역할로 고정되어 있다. 그는 성장이 멈춰진 인형처럼 보인다.

 

이것은 장도현이나 늘 해주에게 민폐를 끼치는 천상태(문지윤), 또 아들만을 생각한다는 명분으로 갖은 악행을 제 손으로 저지르는 어리석은 박기출(김규철)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너무나 전형화되어 있어 그들이 등장하면 앞으로 전개될 일들이 거의 예측 가능한 그런 인물들이다. 물론 이런 캐릭터들도 드라마에 필요하다. 하지만 작품이 중반을 넘어가면서 그렇지 않아야할 중심인물들도 자꾸만 작가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이 등장한다. 이금희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처음에는 인화와 창희의 결혼에 대해서 그다지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었다가 어느 날 일문이 찾아와 창희가 검찰에 있을 때 아버지를 잡으려 했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그녀는 돌변한다. 그리고 창희를 찾아와 결혼을 반대한다고 말하지만, 이러한 입장은 또 단 한 회만에 바뀐다. 인화가 결혼을 반대하면 죽어버리겠다고 엄포를 놓자, 결혼을 허락하겠다고 바뀌게 된 것. 사실 이런 캐릭터의 입장 변화는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 캐릭터의 심경변화에는 그만한 심리적인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결국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캐릭터를 이리저리 작가 자의적으로 바꾼다는 건, 개연성을 포기한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또한 <메이퀸>은 너무 인물의 죽음이 너무 흔하다. 특히 장도현이라는 인물은 이 드라마에서 마치 킬러처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죽일 수 있는 인물이 되어 있다. 그는 해주의 친 아버지인 윤학수(선우재덕)와 강산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강대평(고인범)까지 죽게 만든 인물이다. 역시 인물의 죽음은 언제든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때 그것을 무마하는 방식으로 살인이 자행되는 것은 너무 쉬운 방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작가의 의도적인 막장 전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메이퀸>은 작가의 역량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결국 개연성과 본래 의도를 잃어버리게 된 막장드라마의 경우라고 생각된다. 가족드라마로서의 가족에 대한 의미도 제대로 담지 못했고, 시대극으로서의 시대적인 상황을 잘 조명해내지도 못했으며, 조선업이라는 특정 전문 분야에 대한 본격적인 전개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건 뭘까. 뻔한 복수극과 출생의 비밀을 놓고 벌어지는 신파밖에 없다.

 

이 드라마가 본래 갖고 있던 기획의도를 다시 살펴보자. ‘이 드라마는 광활한 바다에서 꿈을 꾸는 젊은이들의 이야기이다. 이 나라 조선업이 발전하던 시기에 태어난 그들이 부모 세대의 원한과 어둠을 청산하고 새로운 시대의 해양으로 진출하려는 이야기이다. 그리하여 오늘 고단하게 살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자 한다.’ 이 드라마 어디에 젊은이들이 용기와 희망을 갖게 되는 이야기가 있는가. 도대체 어디에 우리나라 조선업의 성장과정이 담겨있는가. 부모 세대의 원한과 어둠을 청산하기는커녕 그 원한과 어둠을 동력으로 삼아 굴러가고 있는 게 바로 <메이퀸>이 아닌가. 다른 게 막장드라마가 아니다.

김순옥표 드라마의 한계, 비약과 과장

 

<아내의 유혹>과 <천사의 유혹>의 김순옥 작가에게 늘 막장 논란이 끊이질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다섯손가락>의 초반부는 분명 어딘지 기존 막장드라마들과는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피아노라는 감성적인 소재가 주는 느낌이 일조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섯손가락>의 피아노라는 소재는 김순옥 작가가 그리던 거친 세상과는 대조적인 감성을 보여주었다. 그래서였을까. <다섯손가락>은 11.2%(8월18일 agb닐슨)로 시작해 일찌감치 14.1%(8월25일)로 정점을 찍었다.

 

'다섯손가락'(사진출처:SBS)

여기에 아역들이 가진 힘이 있었다. 아이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극적인 상황들에 노출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이기 때문에 막장이라기보다는 동정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는 김순옥 작가의 진화라는 평가까지 만들었다. 하지만 초반 선전을 이끌었던 아역들이 빠지면서 11.8%(9월2일)로 뚝 떨어지더니, 10.8%(9월8일), 10.5%(9월9일)로 끊임없는 하락세를 걷게 되었다. 경쟁작인 <메이퀸>이 아역 분량을 지금껏 이어오면서 꾸준히 시청률을 끌어올린 것과는 대조적이다(<메이퀸> 역시 아역이 빠지면 어떤 결과가 올지 알 수 없지만.).

 

하지만 성인역으로 교체되면서 김순옥표 드라마의 고질적인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과 우연의 연속, 캐릭터가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작가에 의해 인형처럼 조종되고 있다는 인위적인 느낌, 게다가 어디서 많이 봤던 상황들의 연속까지... 문제들이 쏟아져 나왔다. 피아노라는 감성적인 소재와 아이라는 동정적 시선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본색이 드러난 셈이다.

 

지금껏 누누이 지적되어 왔던 김순옥표 드라마의 가장 큰 맹점은 개연성 부족과 속도 조절 실패에서 비롯된다. 그것이 작가의 성정 때문인지 모르지만,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는 너무 서두른다는 인상이 강하다. 물론 속도감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논리와 개연성이 충분히 녹아나지 않게 되면 시청자들은 저 뒤에 있는데 작가 혼자 저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성인이 된 유지호(주지훈)와 홍다미(진세연)가 자전거를 타다 부딪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 장면은 김순옥표 드라마의 논리와 개연성 결여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제 아무리 비슷하다고 해도(그렇게 비슷한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것도 지나친 우연이다) 자전거가 바뀌는 일이 얼마나 가능할까. 하지만 이 자전거가 바뀌는 사건은 유지호가 스승인 하윤모(전국환)에게 의심을 받게 되는 큰 사건으로 이어진다. 스승의 악보를 유지호가 소홀히 관리했다는 것. 게다가 하윤모가 그 악보가 유출됐다는 것을 알게 되는 장면도 홍다미가 우연히 아르바이트로 피아노 연주를 하게 된 카페에 그가 우연하게도 거기 있으면서 생긴 일이다.

 

사건이 개연성이 전혀 없고 우연을 반복되는 것이 김순옥표 드라마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다섯손가락>도 거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윤모는 결국 이것이 자신의 오해라는 것을 알고 다시 유지호를 제자로 받아들이지만, 그는 또 유지호가 자신의 악보를 훔쳤다는 오해를 갖게 되고(이것은 모두 채영랑(채시라)의 음모지만) 다시 그를 내친다. 이 과정에서 하윤모라는 캐릭터는 마치 감정조절이 안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 그토록 신뢰가 돈독하던 사제지간에 사건이 벌어지자마자 제자를 두둔하기보다는 그를 의심하는 섣부른 감정은 캐릭터를 매력 없게 만들어버린다. 이것은 작가의 스토리 전개를 위한 억지스럽고 인위적인 캐릭터 조종 때문에 생겨나는 일이다.

 

김순옥 작가의 드라마가 가진 지나친 비약과 과장은, 그녀의 작품이 속도에 집착하는 것조차 시청자들에게 속도의 쾌감을 주려하는 것이 아니라 이 빈약한 논리를 가리려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빨리 움직임으로써 우연의 반복과 개연성의 부족을 감추려는 안간힘. 과거의 시청자라면 ‘드라마는 원래 그래’하며 넘어갔을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시청자의 드라마를 보는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벼려져 있다. 작은 개연성 부족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게 작금의 대중들이 아닌가.

 

<다섯손가락>이 개연성과 논리를 버리고 속도에 집착하면서 생겨나는 한 가지 맹점이 있다. 그것은 애초에 이 거친 드라마조차 감성적으로 만들어주던 피아노라는 소재가 점점 하나의 소품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다섯손가락>은 피아노라는 음악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피아노 회사의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한 암투와 욕망의 이야기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 정도면 소재가 아깝고 호연을 펼치고 있는 연기자들이 아까운 상황이다. 시청률의 추락은 당연하면서도 고무적인 일이다. 언제까지 시청률이 나온다는 이유로 완성도가 떨어지는 드라마를 계속 방치할 것인가. 시청자들의 눈은 정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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