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만 남은 '하이킥', 웃음은 어디갔나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에서 서지석이 용종수술을 받는 과정에서 벌어진 박하선과의 멜로는, 꿈 속에 꿈을 넣음으로써 반전에 반전을 만들었다. 즉 수술을 받다가 잘못 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병원으로 달려온 박하선에게 서지석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 나왔지만, 병상에서 깨어난 서지석에게 이것은 모두 꿈으로 밝혀진 것.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박하선이 서둘러 미국행을 결심하고 공항으로 떠나자 그녀를 잡기 위해 달려간 서지석이 차에 치이는 장면이 나오고는 다시 이 모든 게 꿈으로 되돌려진 것이다. 즉 꿈 속에 꿈을 넣어 반전시킴으로서 결국 박하선과 서지석이 연인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물론 박하선과 서지석 사이의 이루어질 듯 이루어지지 않는 그 멜로를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극화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토리에서 꿈을 장치로 활용할 때는 조심해야 될 부분이 있다. 그 작품 전체가 꿈에 대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 장치는 반전을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전혀 그런 암시가 없는 상황에서 꿈을 사용한다면 작품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게 될 수 있다. '하이킥3'가 사용한 꿈이 그렇다. 박하선과 서지석의 멜로는 그만큼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소재였다. 그런데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던 상황을 꿈으로 쉽게 뒤집고, 또 그것을 다시 꿈으로 뒤집어놓는 건 너무 과도한 작가와 PD의 작위적인 손길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나올 스토리들에 어떻게 몰입할 수 있을 것인가. '알고 보니 꿈이더라'는 장치는 쉬우면서도 효과적인 반전 장치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위험한 장치이기도 하다.

'하이킥3'는 최근 들어 멜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물론 시트콤에서 멜로는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재미가 되었다. 누가 누구와 연결되고 이뤄지는가 하는 점은 매일 아이디어를 뽑아내야 하는 시트콤에 있어서 어느 정도 숨 쉴 틈을 만들어주면서도, 그 자체로 흥미를 끄는 소재이기도 하다. 신세경을 다시 부활시켜 '지붕 뚫고 하이킥'의 새드 엔딩을 뒤집으려 한 스토리 또한 '하이킥3'가 멜로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그런데 박하선과 서지석 사이의 멜로가 신세경의 스토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게 여겨지는 건 왜일까.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던 신세경을 '하이킥3'를 통해 부활시킨 것처럼, 박하선과 서지석 사이의 멜로는 꿈이라는 장치로 손쉽게 상황을 뒤집어 놓는다. 그 과정이 너무 손쉽기 때문에, 또 그래서 반전도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는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다. 조금 과장을 보태 생각하면 이것은 시청자의 마음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이리저리 휘둘리게 만드는 장치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아무리 시트콤이 다루는 멜로라고 해도 어느 정도의 심리적인 개연성이 있어야 하고, 반전에 대한 복선이 깔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안종석과 김지원, 백진희와 윤계상 그리고 서지석과 박하선. 이렇듯 '하이킥3'의 멜로에 대한 집착은 이 작품이 시트콤이라는 사실을 가끔씩 지워버린다. 즉 시트콤이 가져야할 시추에이션과 코미디가 실종된 상황에서 그저 분량을 뽑아내기 위한 3각 관계 짝짓기 놀이로 비춰지는 것이다. 물론 전작 시리즈들이었던 '거침없이 하이킥'이나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도 멜로는 빠지지 않았다. 하지만 멜로의 분량만큼, 현실이 공감되는 '웃기는 상황들'이 그 시트콤들에는 있었기 때문에 어떤 균형감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하이킥3'는 시트콤으로서의 상황 공감이나 그로 인해 유발되는 웃음의 분량이 너무 적다.

'하이킥3'는 시트콤이다. 그러니 그 중심은 시추에이션 코미디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하이킥3'는 멜로라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그 손쉬우면서도 달콤한 꿈에 젖는다면 시트콤으로서의 날선 현실에 대한 시각을 자칫 놓칠까 저어된다. '짧은 다리의 역습'은 도대체 언제 보여줄 것인가. '하이킥3'가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 이 답답한 현실에 속 시원한 하이킥 한 방을 날려주길 기대한다. 전작들이 그래왔듯이.


'해품달', 하이틴 로맨스 사극의 탄생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잊어 달라 하였느냐? 잊어주길 바랐느냐? 미안하구나. 잊으려 하였으나 너를 잊지 못하였다." 왕세자 훤(여진구)이 연우(김유정)에게 애틋한 마음을 고백한다. 10대의 어린 나이지만 어딘지 이 고백에는 절절한 훤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 고백을 듣는 연우의 마음 또한 그 진심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 어둠 속에서 그들을 아프게 바라보는 이가 있다. 바로 훤의 이복형이자 존재자체가 위협이 되는 라이벌 양명(이민호)이다. 그는 일찍이 "모두가 세자의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했다. 연우만 그의 사람이 된다면 말이다. 한편 연회에서 홀로 멈춰선 윤보경(김소현) 역시 끈 떨어진 연처럼 어딘가 사라져버린 훤을 찾는다.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 이것은 이 사극의 제목이기도 한 '해를 품은 달'이 가진 스토리의 기본전제이다. 두 명의 남자와 두 명의 여인이 갖게 되는 운명적인 사랑. 현대극의 멜로였다면 그저 그런 사각관계에 지나지 않았을 지 모르지만, 사극 속으로 들어오자 이 네 명의 운명은 진중한 무게를 갖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것은 왕과 왕후가 될 사람들의 멜로가 아닌가. 하늘에 두 개의 해와 두 개의 달이 공존할 수 없기에 멜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는 두 사람뿐이다. 멜로의 끝이 생사를 가름하는 이 구조는 드라마에 극성을 높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것이 엇갈린 운명이라면? 대왕대비 윤씨(김영애)에 의해 왕후의 상을 점쳐달라는 명을 받은 성수청 국무 장씨(전미선)는 연우와 윤보경을 보고는 이렇게 생각한다. '왕후의 상을 지녔으나 교태전의 자리를 가질 수 없고, 왕후의 상은 아니나 교태전의 자리를 가질 운명.' 이 말은 이 멜로가 엇갈린 운명의 비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연우가 아닌 윤보경이 왕후가 되는 이 예정된 운명이 만들어낼 파국은 어떤 결말을 만들어낼 것인가. '달을 품은 해'가 아니라 '해를 품은 달'이란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루어지지 못한 연우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는 훤의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성균관 스캔들'이 역사 바깥으로 과감히 뛰쳐나와 멜로 사극의 가능성을 열어 보여준 것처럼 '해를 품은 달'은 그 연장선에 서 있다. 비극적인 운명을 가진 여자 주인공 연우와 그 주변을 감싸는 훤, 양명, 허염(송재희), 운(송재림)은 저 F4의 사극 버전으로 읽혔던 '성균관 스캔들'의 잘금 4인방을 떠올리게 한다. 꽃선비 허염이 지나갈 때마다 과장되게 쓰러지는 궁녀들이나 그에게 빠져 위신이고 뭐고 상관없이 달겨드는 민화공주(진지희), 또 연우의 뇌구조를 그려놓고 7할이 오빠 허염이고 2할이 양명이며 1할이 운이지만 훤은 점에 지나지 않다고 설명하는 내관 같은 현대적인 설정은 사극이지만 하이틴 로맨스가 갖는 발랄함을 잊지 않는다.

어른들의 정치 세계가 갖는 어둡고도 무거운 기운이 이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지만 이들은 아이들 특유의 천진함과 순수함으로 이 어두운 세계와 대적하려 한다. 정치적인 가식과 계급적 주종관계를 떠난 순수한 진심의 대결. 이것은 감히 궁 안에서 벌이는 로맨스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비록 적이라도 입속의 혀처럼 지내거라. 그것이 정치다."라고 말하는 이판 윤대형(김응수)의 조언에 어린 나이에도 가식어린 정치의 행보를 보이는 윤보경과,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려는 연우의 대립구도는 그래서 멜로의 차원을 넘어서게 된다.

사극이라는 틀에 박힌 구조를 떠올린다면 '해를 품은 달'의 파격에 놀랄 수밖에 없다. 일단 역사라는 틀거리 자체를 과감하게 무시해버리고 그저 과거라는 그 완벽한 빈 도화지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것도 10대에서 시작해 20대를 넘기지 않는 청춘들의 로맨스가 아닌가. 이것이 가능한 것은 가슴 설레는 로맨스가 저항하는 것이 저 틀에 박힌 정치판의 이전투구이기 때문이다. 수평적 동무관계인 아이들은 어떻게 계급적 서열과 정치적으로 다른 노선에 서 있는 어른들에 의해 그 운명이 유린될 것인가. 그 아픔을 바라보는 만큼 그만큼 순수하게 여겨지는 이들의 사랑은 우리네 가슴을 울리게 할 수밖에 없다.


'오싹한 연애', 오싹 상큼 로맨틱 코미디

'오싹한 연애'(사진출처:상상필름)

공포영화 여주인공은 왜 사랑을 안 할까. 주인공이 사랑을 하면 무섭지 않기 때문이란다. 곁에 누가 있는데 무서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말하면 로맨틱 코미디에 공포물에나 나올 법한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이유와 같다. 자칫 잘못하면 로맨틱 코미디의 그 달달한 분위기를 살벌한 귀신이 깨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와 공포는 이렇게 이질적인 장르다. 그렇다면 이 두 장르의 결합은 불가능한 것일까.

'오싹한 연애'는 이 질문에 답을 주는 영화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멜로와 공포는 결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합은 어쩌면 틀에 박힌 식상한 장르적 문법들을 뒤집는 새로움을 전해줄 수 있다. 오싹하지만 상큼하고, 살벌하지만 웃음이 쿡쿡 나오는 이 기발한 영화는 그래서 관객들에게 새로운 멜로의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공포가 주는 긴장감이 로맨틱 코미디가 풀어내는 이완으로 이어질 때, 그 양극단의 경험은 더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여리(손예진)가 바로 그 공포영화 속의 여주인공이다. 절대로 웃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는 귀신과 함께 살아간다. 너무나 공포스러워 가족이 떠날 정도니, 애인은 언감생심이다. 귀신을 보는 체험을 견뎌낼 수 있는 남자가 어디 그리 많겠는가. 이것은 영화 속에 등장하듯이 '귀신 잡는 해병대' 출신이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게다. 그런 공포영화 같은 삶 속에 살아가는 여리의 공간으로 뛰어든 조구(이민기)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남주인공 같은 캐릭터다.

어딘지 소심하지만 세심한 면이 있고, 사랑을 위해서는 기꺼이 어떤 위험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는 그런 남주인공. 흥미로운 건 이 남주인공 조구의 직업이 마술사라는 것이다. 그것도 여리를 통해 영감을 얻어 만든 호러판타지 마술로 인기를 얻은 마술사. 마술이라는 것이 공포가 주는 긴장감과 그것이 마술로 풀어졌을 때의 이완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은 이 영화의 호러 판타지적 정조를 그대로 대변한다.

마술이 아무리 공포를 소재로 갖고 오더라도 바로 '마술'이라는 안전한 바탕 위에 섬으로써 적절한 이완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오싹한 연애'도 공포보다는 로맨틱 코미디를 바탕으로 한다. 즉 '오싹한' 보다는 '연애'에 더 방점이 찍히는 영화라는 얘기다. 남주인공인 마술사 조구는 그래서 공포 위에서도 그것을 이완시켜주는 마술을 손에 쥐고 있는 캐릭터다. 공포가 멜로로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이 캐릭터 속에 들어있다.

조구는 여리의 공포스런 환경 속으로 들어와서도 여전히 멜로를 한다. 그녀의 귀신 나오는 집에서 조구가 여리와 춤을 추고, 키스를 하는 장면, 그리고 점점 여리가 마음을 열고 조구와의 사랑을 이어가는 장면은 그래서 하나의 마술처럼 여겨진다. 공포를 멜로로 바꾸는 마술.

어쩌면 이것은 우리네 사랑에 대한 하나의 우화인지도 모른다. 이율배반적이지만 우리는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낯선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모두 갖고 있다. 바로 이 두 두려움을 넘어서게 되는 것은 두려움을 사랑으로 채워나가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외롭고 두려우며, 그 감정을 통해 타인도 똑같이 외롭고 두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공감'의 힘이 두려움을 사랑으로 바꾼다. 공포를 멜로로 바꾸는 것이 가능한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오싹한 연애'는 바로 그 흥미로운 지점을 마술처럼 보여주는 로맨틱 코미디다.


'천일', 멜로를 넘어 인간을 담다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급하게 결혼을 서두르는 모습에 아이를 갖게 된 줄 아는 엄마 강수정(김해숙). 그래서 찾아온 그녀에게 임신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임을 밝히고,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할 수 없다 말하는 서연(수애). 강수정은 서연의 상황을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아들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하라고 한다. 그러자 서연은 말한다. 자기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다고.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장면이 깊은 감흥을 주는 건 왜일까. 상황은 뻔해도 그 속에 있는 두 인물, 남자의 엄마와 남자의 여자가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때문일 게다. 강수정이 "어쩌면 그렇게 침착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서연은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1년만 아드님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말할 뻔 했던 속내를 내레이션을 통해 털어놓는다. 이것은 강수정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안쓰러운 서연의 모습이 못내 눈에 밟힌다.

이 짧은 장면 속에는 '천일의 약속'이 하려는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내는 이 드라마만의 방식이 잘 드러난다. 무모한 결혼을 하려는 아들을 반대하는 엄마가 그 아들의 여자를 찾아오는 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애'다. 아들의 여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꼭 껴안아주었을 강수정과, 남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한 여자로서 이해를 구하고 그 넉넉한 품에 안겼을 서연. 그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거리를 두고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숨기지는 못한다. "손 한 번 잡아 봐도 돼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으며 서연의 손을 잡아주는 강수정의 모습은 그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흔히 가족이기주의에 의해 '빗나간 모성'이 드라마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와 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게 된 한 여자(아니 한 인간)를 세워두고 이 가족들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제 모든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인간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녀를 위해 정해진 결혼마저 깨버린 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지극히 현실적인 잣대로 바라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식상할 정도로 뻔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혹은 자기 자식이 겪을 고통을 더 생각하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인지상정이 아닌가. 따라서 '천일의 약속'의 강수정 같은 엄마는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최소한 모성과 인간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니까. 보통의 엄마들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위한 선택에는 면죄부가 성립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 이 이상적인 강수정이라는 엄마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한 참회가 섞여있을 법도 하다.

우리는 강수정 같은 엄마를 김수현 작가의 전작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그 작품에서 김해숙이 엄마 역할을 했던 김민재나, 그 아빠였던 양병태(김영철) 같은 인물들이다. 동성애자인 아들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성과 부성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일의 약속'은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모성애와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애를 잡아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자식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드라마라는 판타지를 통해 우리는 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세가 갖는 위대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서연이 말할 때 느껴지는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이해는, '결혼'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틀 따위는 벗어던진 인간 대 인간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온기를 담고 있다.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지금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를 통해 멜로를 넘어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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