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아이, 아이가 된 어른

주말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보다보면 거기 등장하는 출연진들의 나이를 의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웃음을 주는 프로그램으로서 당연히 의도적으로 과장된 것이지만, 어른들(그것도 30대에 다다른)이 아이처럼 노는 모습이 이제 성인들이 보는 예능 프로그램의 한 경향이 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은 복잡한 현대의 성인들과는 정반대로 단순화되어 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한도전’이 가진 리얼리티의 진면목이다. 말 개그보다 몸 개그가 우선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아이가 된 어른들(Kidadult)이다.

왜 ‘무한도전’은 되는데 ‘라인업’은 안됐을까
이것은 ‘1박2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여행이라는 장치를 끌어옴으로써 ‘어른이 아이 행세하는 것’이 ‘1박2일’에서는 어느 정도 현실적으로 보인다는 것뿐이다. 여행은 본래 어른들도 아이처럼 만드는 구석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도 ‘1박2일’의 먹을 것을 두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은 이 프로그램의 캐릭터들 역시 키덜트라는 것을 확인하게 한다. 은초딩이라는 캐릭터는 그러니까 이 요소를 재미의 하나로 끌어낸 상징적인 사례가 될 것이다.

성공사례로서의 ‘무한도전’, ‘1박2일’이 보유한 이 키덜트적 요소는 어찌 보면 그것이 없는 ‘라인업’의 실패가 애초부터 예고되어 있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이른바 ‘생존’이라는 무거운 성인들의 주제를 특징으로 갖고 있는 ‘라인업’은 어떤 식으로든 성인유머의 틀을 벗어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후반부에 이르러 이 성인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것은 사회적 의미, 감동 같은 공익적 부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리얼 버라이어티 생존경쟁에서 이겨내기가 어려웠다.

이 키덜트적 요소의 성공과, ‘생존’이라는 직설어법을 구사한 ‘라인업’의 실패는 우리 사회에서 TV가 가진 역할이 점점 재미와 오락을 통한 몰입(현실을 잊고)으로 규정되고 있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현실의 창이 될 수도 있는 TV를 보면서, 현실을 보기보다는 퇴행하더라도 현실을 잊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의 성공의 이면에는 성인들의 시청요인만큼이나 10대들의 열광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램의 주 시청층을 보면 10대들이 많고 특히 인터넷을 통해 프로그램을 확대재생산하는 층도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한 시청층은 키덜트적 요소를 가진 ‘무한도전’과 ‘1박2일’의 성공가능성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10대와 30대가 함께 이들 프로그램을 공유할 수 있는 지점은 다름 아닌 ‘키덜트적 요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른 같은 아이들’에 환호하는 시대
‘키덜트적 요소’는 이제 TV 프로그램 시청에 있어서 점점 어른과 아이들 사이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아이들은 이제 아이들 프로그램을 시시하게 여긴다. 그러나 아이들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들의 외면이 만든 것은 단지 아이들 프로그램의 실종만이 아니다. 현대의 가장 큰 교사로 풍자되기도 하는 TV가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어른처럼 만들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TV 드라마 속 어른 같은 아이들은 이 상황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어른들의 욕망이 투사된 드라마 속 아이들 캐릭터를 어른 뺨치게 연기해내는 아역스타들은, 이렇게 양산된 어른 같은 아이들이 어떻게 상품 속에서 더 잘 확대 재생산되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유치해 보이지만 순수하고 때로는 리얼리티가 드러나는 ‘키덜트적 요소’에 열광하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의 상품화는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명절이나 어린이날 같은 날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신동들’(트로트 신동으로 대변되는), 즉 어른 같은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어른들을 흉내내는 것으로 어른들에게 환호 받는다. 신기함, 기이함과 함께 어른들의 욕망이 투사된(신동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이 아이들의 모습은, 순수함이나 동심 같은 꾸밈없는 모습조차 TV 예능 프로그램의 리얼리티 요소로서 상품화시키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TV는 점점 어려지고(퇴행하고) 아이들은 점점 조숙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반복되며 이를 통해 상품화의 측면에서 그 파이는 점점 커져 간다. 이 지점에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TV가 아이들(혹은 아이라는 이미지)을 그간 어떻게 활용했는가를 말이다. TV는 점점 조숙한(혹은 조숙하다고 착각하는) 아이들을 요구하고 또 세상은 이미 그런 아이들로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혹시 그것이 좀더 돈벌이에 유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것은 어린이날 같은 날마저 아이들을 상품화하는 프로그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영되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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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학성은 쇼의 생리지만, 지나치면 리얼리티를 없앤다

‘무한도전’의 ‘무모한 도전’시절, 출연진들이 삽을 들고 포크레인과 도전을 했을 때, 시청자들은 왜 저들이 저런 무모한 짓을 할까 의아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그 몸 개그를 유발할 수 있는 가학적인 설정은 이제 그것이 ‘웃기다’는 것으로 인정되고 받아들여진다. ‘무한도전’의 황사대비특집에 대한 예고장면에서, 정형돈의 얼굴에 한 초록색 물감칠에 대한 네티즌 의견이 엇갈리는 건, 이 가학성이 어디까지 왔고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시청자들은 그 장면에 정형돈을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가학적 설정은 이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한 특징을 이루었다. 복불복 게임으로 대변되는 ‘1박2일’의 가학적인 장면들은, 단지 누가 한 겨울에 밖에서 잘 것인가 같은 비교적 보이스카우트 시절을 연상케 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임에서 진 그들은 간장이나 까나리 액젓을 통째로 들이마시거나, 보기에도 위험천만인 겨울철 높은 파도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 이것은 생계 버라이어티쇼라는 ‘라인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출연진들의 실제상황, 즉 생계가 거기서 언뜻언뜻 보이기 때문에 그 자극적 상황이 종종 진정성으로 연결되는 미덕이 있을 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가학성은 출연진들과 연출자와의 묘한 대결구도까지 만들었다. ‘무한도전’ 멤버들은 김태호 PD를 종종 ‘악마’라고 부른다. 자신들이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빠뜨리고는, 그들이 그 상황 속에서 허우적댈 때 오히려 연출자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는 걸, 출연진들은 이제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박2일’에서 멤버들은 어느 순간 잘 대해주면, ‘이건 또 무슨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식으로 의심을 한다.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상황과 반응이지만, 그래서 실제로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지만, 그래도 웃음 끝에 씁쓸한 구석이 남는 건 왜일까.

단지 가학적인 장면을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쇼에 포함된 가학적 상황과 그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멤버들의 모습은 기실, 현실사회 속에서의 우리네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는 그 모든 상황들이 통제되는 것에 만족한 웃음을 지을 수 있지만, 그 상황의 중심부에 서게 되는 밑바닥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대중들은 도무지 자기 앞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들로 하여금 묘한 가학-피학적 심리상황을 만들어낸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피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속에 가학적인 앙금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TV쇼는 이런 상황을 역전시켜 그 현실의 앙금을 털어 낸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의 멤버들을 우리는 위에서 보면서 즐긴다. 밑에 있는 그들은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는데 그 상황 자체가 가학적일수록 우리는 더 리얼하게 느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쇼가 끝났을 때이다. 그 순간 시청자는 바로 저 TV 속 캐릭터들이 처한 현실 상황 속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끄트머리에 남는 씁쓸함의 정체이다.

그러니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설정하는 상황의 지나친 가학성이 왜 논란을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가학적인 장면을 보는 시청자의 마음 속에는 가학-피학의 양면성이 존재하는데, 지나친 장면은 오히려 그 몰입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가진 가학성은 쇼의 생리다. 그리고 일주일간의 피곤한 삶을 살아온 시청자들에게 그 짧은 시간의 일탈을 위한 가학성을 그다지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너무 지나친 상황은 오히려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하여 불편하게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면으로 보나 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전성시대는 이 시대의 현실을 거꾸로 보여주는 구석이 있다.

‘무한도전’, 팀원 집착 버리고 유연해져라

예능 프로그램의 지존이었던 ‘무한도전’의 시청률 하락을 갖고 요즘 말들이 많다. 인터넷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제 ‘무한도전’이 한계에 봉착했다느니, 군 복무로 빠져버린 하하의 빈자리가 크다느니 하면서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김태호 PD는 “시청률 하락에 신경 쓰지 않는다”며 “시청률 보다 중요한 건 실험성”이라고 못박았다. 하지만 시청률 하락에 대해 스스로 ‘나들이가 많아지는 봄철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해석을 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시청률에 신경이 쓰이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김태호 PD가 가진 지금의 문제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대박 났던 아이템을 반복하기보다는 실험성에 중점을 둔 아이템들을 계속 발굴할 것이며, 이 점이 ‘무한도전’만의 차별성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이것은 지금의 ‘무한도전’을 있게 해준 힘이다. 아무도 도전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마다 시청자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시청률 하락은 김태호 PD가 말하듯 봄철 한 때의 소소한 현상에 불과할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아 보인다. 이것은 ‘무한도전’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무한도전’은 특별한 프로그램 형식이 없는 자칭 ‘무형식’ 프로그램이다. 물론 ‘무한도전’이라는 틀이 존재하지만, 그 안에는 기존 프로그램들이 갖던 특별한 진행방식 같은 정해진 형식이 없다고 해서 이렇게 불리는 것이다. 바로 이 ‘무형식’은 그간 짜고 치는 고스톱 같던 대본에 맞춰 진행되던 프로그램에 식상한 시청자들을 끌어 모은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이 ‘무형식’은 과연 장점만 있는 것일까.

시청자들의 요구를 잘 살펴보면 이율배반적인 구석이 있다. 시청자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닌 진짜 리얼한 상황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편안함’을 느끼고 싶어한다. 리얼한 상황이야 무형식에서 나오는 것이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편안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일관된 형식, 즉 프로그램의 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런데 ‘무한도전’은 바로 그 일관된 형식을 찾기가 쉽지 않다. 팀원들은 어떤 때는 무도장에 갔다가, 어떤 때는 하하의 집에 간다. 이 두 형식 간의 일관성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다.

이것은 물론 저 김태호 PD가 말하는 ‘실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일관된 형식이 부재하다는 점은 또한 ‘무한도전’의 아킬레스건이 되기도 한다.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의 리얼리티가 좋았다고 하더라도, ‘무한도전’처럼 그것이 일관된 형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음 번을 기약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댄스스포츠를 하며 박수갈채를 받았던 ‘무한도전’이 인도를 간다고 해서 똑같이 박수를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일관된 형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정 아이템에 따라 시청자들의 호응이 들쭉날쭉할 수밖에 없다.

‘무한도전’이 형식을 버리고 대신 취한 것은 캐릭터다. ‘무한도전’은 프로그램의 일관성을 형식이 아닌 등장하는 캐릭터로 유지해나간다. 즉 ‘무한도전’은 매 회마다 계속 상황이 바뀌고, 상황에 따른 형식 또한 바뀌는데, 여기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캐릭터다. 이것이 유난히 ‘무한도전’의 캐릭터 의존도가 높은 이유이다. 캐릭터 의존도로 치면 여타의 리얼버라이어티쇼들도 마찬가지로 높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무한도전’만큼은 아니다.

예를 들어 ‘1박2일’은 지상렬이나 김종민, 노홍철 같은 캐릭터가 빠져나가도 새로운 멤버가 들어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반면, ‘무한도전’은 하하 한 명이 빠져나가는 것에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이것을 가지고 ‘‘무한도전’ 멤버들이 그만큼 결속력이 강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그것은 ‘무한도전’의 캐릭터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1박2일’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에는 없는 그 무엇이 ‘1박2일’의 캐릭터 의존도를 낮춘 것일까.

그것은 ‘1박2일’이 적어도 ‘여행’이라는 편안한 일관된 형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독도를 가거나 가거도를 가고, 제주도를 가거나, 혹은 서울 한강 둔치를 간다고 해도 그것은 모두 여행이라는 틀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시청자들이 ‘1박2일’에 기대하는 것은 그것이 어디가 됐든(여기서 어디는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아이템이다), 여행 그 자체다. 이것은 무슨 무슨 특집이라고 매번 홍보해야 하는 ‘무한도전’이나 ‘라인업’이 갖지 못한 ‘1박2일’만의 장점이다. 이 ‘1박2일’이 가진 ‘일정한 틀(여행) 안에서의 무형식(리얼리티)’은 저 이율배반적인 대중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해결책이 된다.

‘무한도전’의 도전상황은 바로 그 ‘무한도전’만의 장점이었던 무형식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무형식은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청자들을 만족시켰지만, 동시에 어떤 편안한 틀을 요구하는 시청자들을 불편하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의 성격 자체이기도 하다. 도전이란 고정된 틀이 아닌 늘 새로운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니까.

이런 분석을 하는 것은 ‘무한도전’이 그간 우리네 예능 프로그램에 끼친 영향력을 깎아 내리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지금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한도전’ 역시 변화해야할 시기에 와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 위함이다. ‘무한도전’은 지금의 ‘도전에 대한 강박’을 벗어버리고 좀더 유연해질 필요가 있다. 어떤 ‘도전의 형식’이라도 갖추어 그 안으로 시청자들이 요구하는 ‘편안한 리얼리티’를 마련해야 한다. 요즘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캐릭터가 이끌어 가는 게 분명하지만, 그것보다 앞서는 것은 캐릭터로부터 계속되는 애드립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일관된 상황, 즉 프로그램 형식이다.

이렇게 한다면 ‘무한도전’은 캐릭터에 대한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다양한 외부의 캐릭터들이 이 열려진 형식 속으로 마음껏 들어와 제 기량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러한 틀이 갖추어지지 않는다면, 특정 방송사가 특정 개그맨을 붙들어맬 수 없는 지금의 상황 속에서, ‘무한도전’이 발굴한 캐릭터들은 ‘해피투게더’ 같은 어느 정도 형식이 갖추어진 쇼에서 그 힘을 발휘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될 수 있다. ‘무한도전’은 지금 바로 그 만만찮은 도전 상황에 서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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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본좌에서 상근이까지, 캐릭터로 보는 세태

유반장, 하찮은형, 상꼬마, 뚱보, 바보형, 돌+아이. 예능의 지존 ‘무한도전’을 키운 캐릭터들이다. 여기에 도전장을 내민 ‘1박2일’의 캐릭터가 최근 주목받고 있는데 은초딩과 허당이 그 주역이다. 본래 드라마 같은 극 속에서만 존재했던 캐릭터들이 이젠 예능 프로그램까지 장악한 것. 하지만 이것은 단지 연예인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허본좌, 빵상아줌마 같은 캐릭터는 연예인은 아니지만 그 특유의 황당함을 무기로 급속도로 퍼져나갔고 최근에는 상근이 같은 견공 또한 캐릭터로 주목받고 있다. 이른바 캐릭터 공화국이라 해도 좋을 만큼 하룻밤 자고 나면 캐릭터 하나가 생겨나는 세상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캐릭터 열풍을 만들었고, 또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어떤 세태를 반영할까.

캐릭터에 대한 열광, 게임을 닮았다
인터넷을 통해 익명의 새로운 이름이 나의 또 다른 이름이 되는 아바타(avatar 분신)시대가 열렸을 때 캐릭터 열풍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것은 RPG 게임을 통해 연습된 것처럼, ‘자신이 만들어가는’ 캐릭터와 자신의 동일시를 일상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쉽게 캐릭터와 동화되기 쉬운 상황은, 인터넷이라는 게임판에서 ‘캐릭터 가지고 놀기’라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게임이 이른바 ‘-빠’문화라는 이상 열기로까지 번지게 된 이유가 된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TV 속의 캐릭터들이 수많은 패러디로 만들어지고 새롭게 인터넷을 통해 폭발적으로 번져나가는 현상을 목도한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이제 이 인터넷이라는 캐릭터 게임판 위에 자신들의 프로그램 속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홍보한다. 예능 프로그램이 캐릭터들의 전시장이 되어 가는 것은 프로그램을 띄우는데 있어서 캐릭터만큼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게임판 위에 제시된 캐릭터는 네티즌들에 의해 키워지고, 어떤 경우에는 캐릭터들간의 관계나 사건, 이야기를 통해 뜻밖의 캐릭터가 자생적으로 띄워지기도 한다. ‘1박2일’의 은초딩에서 허당, 그리고 상근이로 확장되는 캐릭터들의 탄생은 바로 이런 캐릭터 키우기 게임을 닮은 인터넷 문화에서부터 비롯된다.

네티즌의 성향을 반영하는 캐릭터들
따라서 이렇게 뜨는 캐릭터들은 이러한 네티즌들의 성향을 상당부분 반영한다. ‘무한도전’의 보통 이하 캐릭터들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최고의 캐릭터들로 뜬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직적인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인 다양성의 관계로 엮어진 권력구조 속의 네티즌들은, 태생적인 이유로 소외 받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극복하고 최고에 오르는 캐릭터에 더 열광적인 성향을 띈다. 이것은 ‘무한도전’ 멤버들에 대한 열광뿐만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 심형래 감독 같은 입지전적인 인물들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2인자, 3인자 캐릭터들이 주목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전혀 관심 바깥에 존재하던 2인자들은 이제 그 자신이 1인자가 아니라 2인자라는 이유 때문에 더 주목받는다. 그것은 이제 3인자, 혹은 상근이 같은 ‘제7의 멤버’까지 등장하면서 점점 외연을 넓혀나간다. 드라마나 영화 속 주연보다 더 주목받는 조연 또한 이것과 관련이 있다. 네티즌들은 이미 최고의 위치에 있어 자신들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캐릭터보다는 아직은 주목받지 못하지만 앞으로 클 가능성이 높은 캐릭터에 더 매력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성장 드라마를 갖고 있는 캐릭터들의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가상현실을 반영하는 빵상아줌마, 허본좌
하지만 문제는 계속해서 등장하는 캐릭터들로 인해 이미 캐릭터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는 이때,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요구도 더 많아진다는 사실이다. 허본좌나 빵상아줌마 같은 황당한 캐릭터가 주목받는 것은 그 자체가 기존에 봐왔던 캐릭터들과는 다른 4차원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계속 쏟아내는 이들 캐릭터들에 대한 열광을 이해하기가 어렵겠지만, 그것을 인터넷이라는 가상현실의 공간으로서 바라본다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터넷은 본래부터가 가상 즉 허구와 현실이 공존하는 공간이다.

그러니 이 황당무계한 캐릭터들은 가상과 현실이 적절히 섞여진 인터넷 풍토에서는 그다지 이상한 인물들이 아니다. 캐릭터 게임판 위의 그저 재미있는 하나의 캐릭터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 가상현실의 캐릭터들이 거기서 얻은 명성(?)을 실제 현실에서 활용했을 때 벌어진다. 그것은 놀이판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는 자칫 사기가 될 수 있다. 허본좌가 구속됐지만, 이와 유사한 캐릭터를 가진 ‘개그 콘서트’의 달인이 여전히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건 그 때문이다.

끝없는 캐릭터들이 양산되어 나오는 이 캐릭터 공화국은 상당부분 디지털화된 사회의 세태를 반영한다. 거기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은 다양화된 사회를 말해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이 복잡한 현실을 잊고 게임 속 가상세계로 빠져드는 퇴행적인 양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예능 프로그램의 뜨는 캐릭터들이 대부분 어린이를 모델로 하고 있으며 또한 그 프로그램 속 상황이 본능적이고 유아적인 욕구를 끄집어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해 볼만한 일이다. 은초딩이나 상꼬마 같은 캐릭터는 그 대표적인 캐릭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어른들의 세계를 직접적으로 끌어들인 ‘라인업’의 캐릭터들이 좀체 뜨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캐릭터 공화국, 대중들이 원하는 캐릭터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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