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 전개보다 인물들의 묘사가 뛰어난 '짝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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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패'(사진출처:MBC)

'짝패', 이 사극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첫 회에 같은 날 태어난 아기들이 뒤바뀌는 장면에서는 역시 '출생의 비밀'인가 했다가, 그렇게 다른 환경에서 한 명은 양반집 자제로 또 다른 한 명은 거지로 자라난 천둥과 귀동이 서로 "짝패 먹자"고 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운명 따위는 개척하기 나름이라는 성장드라마의 일면을 보게 된다. 성장한 천둥(천정명)이 동녀(한지혜)와 상단을 꾸려나가는 이야기는 '상도'를 떠올리게 하고, 포교가 된 귀동(이상윤)이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장면에서는 '별순검'류의 조선법의학 드라마나 '다모'류의 조선형사물이 떠오른다. 물론 갓바치나 거지패들의 이야기에서는 민초들을 다룬 '추노'류의 민중사극이 연상된다. 도대체 이 사극은 정체가 뭘까.

시대적 배경도 전통적인 사극이 주로 다루던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그 시점에 걸쳐있다. 칼 대신 총을 쏘고, 서양의 문물들이 시장으로 들어온다. 민중봉기의 열기가 피어나고 있는 이 시대는 양반제라는 틀이 서서히 균열을 드러내는 시기다.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에 각기 출신이 다른 천둥과 귀동, 그리고 여성인 동녀가 서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는 장면들이 개연성을 갖는다. 사극이라면 늘상 등장하는 멜로보다, 우정이 더 많이 느껴지는 관계들도 이 사극의 독특한 위치를 보여준다.

드라마의 극적 구성도 기존 우리가 흔히 보던 현대 사극의 틀과는 상당히 다르다. 최근의 퓨전사극으로 주로 다뤄지던 성장드라마나, 장르사극으로 다뤄지던 극적인 전개는 이 사극에서는 그다지 발견하기 어렵다. 물론 그런 요소들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그 자극이 강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대체로 사극이 그리는 한 회의 흐름은 전회에 이어지는 강한 사건의 연속과 함께 중간에 새로운 이야기의 국면이 전개되고 그것이 조금씩 마지막의 극적 갈등으로 이어지다가 다음 회로 넘어가는 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짝패'는 그런 전형적인 구도를 벗어나 있다. 어찌 보면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이 사극은 담담하다. 마치 일일드라마를 보듯, 인물들 간의 담담한 이야기가 무리 없이 전개되어 나갈 뿐이다.

물론 이 사극도 극적으로 상승하는 어떤 폭발적인 지점이 있다. 예를 들어 스승의 원수를 갚으려고 현감을 저격하는 장면이 그렇고, 참다못한 민중들이 봉기해 관아를 점령하는 장면들이 그러하며, 스승의 원수지만 친구 귀동의 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김진사(최종환)를 살려주는 장면이 그렇다. 즉 '짝패'는 극적 장면이 있지만, 그것을 통해 의도적으로 다음회를 낚시하는 식의 억지 구성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담담하다.

사극의 정체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이 작품을 쓰고 있는 김운경 작가의 필모그래피다. 81년 '전설의 고향'으로 데뷔한 김운경 작가는 '한 지붕 세 가족(1986)', '서울 뚝배기(1990)', '서울의 달(1994)', '파랑새는 있다(1997)' 등으로 잘 알려진 베테랑 작가다. 작품의 면면에서 알 수 있듯이 김운경 작가의 작품에는 늘 서민들이 어른거린다. '짝패'는 그래서 어쩌면 이 작가가 고집하는 서민들, 민중들의 이야기에서 그 흐름을 가늠할 수 있는 사극이다.

천둥이 본래는 양반집 자제지만 거지로 성장하고, 귀동이 본래는 거지로 자라야할 운명이지만 양반집 자제로 자라나는 그 상황에서, '출생의 비밀'로 빠져들지 않고 서로 상생하는 성장드라마로 넘겨올 수 있었던 건 김운경 작가가 늘 쥐고 있는 이 서민 코드 덕분이다. 그들은 뒤바뀌어진 운명 속에서도 자신이 갈 길을 간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는 지점은 서민들을 향해 걸어가는 그 길 위에서 있다. 그들은 다른 신분에서 출발하지만 같은 길을 걷는 짝패가 된다.

따라서 '짝패'라는 사극을 즐기는 법은 저 성장드라마의 끝없이 치고 달리는 욕망의 흐름이 아니라, 조금은 차분하게 운명을 관조하며 그 속의 인물들이 따뜻하게 서로를 감싸안아주는 그 흐뭇한 장면들을 바라보는 그 지점에서 생겨난다. 천둥과 귀동이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신분이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런 장면들이나, 동녀를 찾아온 귀동이 친구처럼 같이 술을 나누는 장면들이나, 어딘지 정이 가는 거지 도둑 장꼭지(이문식)의 배꼽빠지는 면면을 보게 되는 장면들 속에서 '짝패'의 진가가 묻어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딘지 수더분해 보이면서 정이 가는 이 사극은 우리가 막연히 부르는 민중의 이미지를 닮았다. '짝패'는 그런 사극이다.

'자이언트'가 소화한 것, 다양한 장르, 시청층, 연기

실로 '거인'다운 소화력이었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시대극이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 장르들의 문법들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중요한 건 '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화해냈다'는 것. 시청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흥미와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삼켜서 기어이 소화해내고 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자이언트'의 세계였다.

시대극은 넓게 보면 사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역사를 다룬다는 것.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작품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한계를 지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이언트'는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하지만 '대조영'을 겪은 장영철 작가의 뚝심은 여전했다. 시대극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실제 사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장영철 작가는 그 속에 인물들의 대결에 좀 더 과감한 허구적 상상력을 끼워 넣었다.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미션과 그 미션의 해결과정에 부딪치게 되는 대결구도는 사극의 장르적 특성처럼 '자이언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극이 부여하는 현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쳐나간 점은 초반의 오인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뚝심은 오해마저 삼켜버리고 소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초반의 시청률 부진은 단지 이런 오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극적인 대결구도와 치밀한 심리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정서적인 공감대가 따라오질 못했다. 물론 남성들은 이 사극적인 특징에 매료되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언트'가 어떤 전환점이 된 것은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이언트'는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이 주는 특유의 스릴러적인 특징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가족드라마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여성 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들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모는 다시 만난 정연(박진희)과 사랑에 빠지고, 미주는 민우(주상욱)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 아버지들이 원수라는 걸 알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이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은 시대극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들 위에서 말랑말랑한 매력을 첨부했다. '자이언트'는 자칫 특정 세대로만 집중될 수 있었던 시청층을 삼키고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의 공존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잘 이해하는 유인식 감독의 공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뭐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배우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의 결을 연기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미주 역할을 한 황정음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가족드라마의 여동생에서 갑자기 비운의 줄리엣이 되는 멜로드라마의 여자로 변신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가수로 성장해가는 성장드라마의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민우 역할의 주상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멜로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박소태를 연기한 이문식은 적과 친구를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재발견된 배우는 정보석과 박상민이다. 정보석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악역으로 처음부터 마지막회까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아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는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상민은 액션연기에서부터 맏형으로서의 애틋한 가족애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에 뇌손상을 입은 모습까지 말 그대로 연기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 이후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는 '자이언트'를 통해 확고하게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자이언트'는 이처럼 연기자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의 극점까지 낱낱이 끄집어내 삼켜버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장르를 삼키고, 시청률을 삼키고는, 연기자들의 거의 모든 연기까지 끄집어낸 '자이언트'가 결국 소화해낸 것은 강남과 개발로 축약되는 한 시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누군가는 복수하듯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꼭대기에 선 자의 처절함과 쓸쓸함'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뛰어왔던가. '자이언트'가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가족이다. 성모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 마치 그 자리를 메워주듯 막내가 찾아오고, 강모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기나긴 개발시대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알게 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청춘멜로의 가벼움과 사극의 진지함은 어떻게 만났을까

청춘 사극. 이 조어는 잘 어울리는 듯하지만, '청춘'이라는 단어가 갖고 있는 하이틴 로맨스적인 가벼움과 사극이 가진 어딘지 진중한 분위기는 부딪치는 점이 많다. 이 조어가 그다지 어색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은 최근 사극이 가진 특유의 퓨전 가능성 덕분일 뿐이다. 즉 이 '청춘 사극'은 결코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데 '성균관 스캔들'을 단 한 마디로 말하라면 주저 없이 '청춘 사극'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어려운 조합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남장여자'라는 열쇠다. 이미 '커피 프린스 1호점'이라는 청춘 멜로에서 '남장여자'라는 콘셉트가 가진 힘을 우리는 이미 발견했다. 꽃미남들의 세계로 '남장여자'가 들어감으로 해서 벌어질 수 있는 우정과 사랑 사이의 소용돌이는 청춘 멜로로서의 한 극점을 그려냈다. '성균관 스캔들'이 이 청춘 멜로의 '남장여자'를 조선시대 성균관으로 끌고 온 의도는 명백하다. 사극이라는 공간에서 청춘 멜로를 극대화 해보겠다는 것. 꽃선비들이 넘쳐나는 그 곳에서 같은 기숙사 방을 써가면서. 그것도 옷깃만 스쳐도 두근거리는 조선이라는 시대적 정서 속에서라면 더더욱.

그 남장여자라는 마법의 열쇠로 인해 "나 구용하다"라는 말 한 마디로 여성보다 더 예쁜 미모(?)를 가진 그 유쾌한 구용하(송중기) 캐릭터가 탄생했다. 또 '걸오앓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겉은 짐승남이나 속은 수줍은 소년인 문재신(유아인), 그리고 앞뒤 꽉 막힌 선비에서 사랑을 알아가는 이선준(믹키유천)이 탄생했고, 그들이 서로 가슴 졸이며 사랑했던 여인 김윤희(박민영)와의 두근두근 청춘 멜로가 탄생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었다면 '성균관 스캔들'은 그저 사극판 '커피 프린스 1호점'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성균관 스캔들'은 남장여자라는 열쇠가 가진 또 다른 측면을 포착해낸다. 여자가 남장여자 행세를 해야 꿈이라는 것을 꿀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꺾지 않은 것이다. 비록 남자 행세를 하는 여자로 대변되어 있지만 이 개혁의 그림은 이미 정조(조성하)가 화성천도의 뜻으로 말한 대로 '남녀귀천 없는 세상'이다.

이 주제의식은 김윤희가 금등지사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김윤희에게 배움을 주려 노력했던 그녀의 아버지가 단서로 제공한 퍼즐 위에 쓰여진 글귀 '문(門)'은 성별과 귀천에 따라 닫혀버리는 이 시대의 문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정조가 차별 없는 세상을 꿈꾸며 찾았던 금등지사가 묻혀진 곳이 성균관에서 반촌으로 난 문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 문은 '조선의 가장 천한 이를 향해 열린 곳'이고 '배움이 향하는 곳'이며 '나라가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남장여자의 또 다른 측면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성균관 스캔들'은 청춘 멜로의 가벼움 위에서도 사극에 걸맞는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모든 일을 해결한 잘금4인방이 한 방에서 술을 마시고 한 방에 어우러져 잠을 자는 모습은 그래서 청춘 멜로의 한 장면처럼도 보이지만, 양반(이선준), 중인(구용하), 여성(김윤희), 혁명가(문재신)가 함께 어우러지는 세상을 상징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성균관 스캔들'은 말 그대로 '청춘'에 '사극'을 잘 이어붙인 '청춘사극'의 새지평을 열었다.

'인생은 아름다워'와 '동이', 거장들도 반복된 코드로는 어렵다

김수현 작가의 '인생은 아름다워'는 왜 20% 시청률에서 머물러 있을까. 과거 작가의 작품들이 거의 모두 국민드라마 반열에 올랐던 것을 생각해보면 '인생은 아름다워'의 시청률 난항은 이례적이다. 주말 저녁에 '인생은 아름다워'에 대적할만한 굵직한 타 방송사의 드라마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좀체 시청률이 오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최근 시작한 '욕망의 불꽃'이 서서히 시청률 시동을 걸면서 '인생은 아름다워'를 위협할 기세다.

한편 이병훈 감독이 연출을 맡고 김이영 작가가 대본을 쓴 '동이' 역시 마찬가지다. 끝없이 추락하더니 결국 새롭게 부상한 '자이언트'에 월화극 1위 자리를 내줬다. 사극의 거장으로서 시청률 보증수표라 불리던 이병훈 감독이 만들어낸 일련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행보다. 사극이라는 극성이 강한 장르는 보통 관성적인 시청이 존재하기 때문에 시청률 하락은 단지 수치 하락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도대체 무엇이 이 거장들의 작품에 브레이크를 걸었을까.

먼저 이 두 거장이 주로 다루었던 장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김수현 작가는 가족드라마의 거장이고, 이병훈 감독은 사극의 거장이다. 가족드라마와 사극. 이 두 장르는 한때 우리네 드라마의 대명사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했다. 이 힘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최근 들어 그 힘이 급격히 빠지고 있는 중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다. 가족드라마라는 틀이 너무 오랫동안 비슷한 코드들, 예를 들면 두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혼사장애 같은 것들을 반복적으로 다뤄왔기 때문에 이제는 식상해졌다는 점이 한몫을 차지한다. 여기에 최근에 여기저기 생겨난 막장에 가까운 통속극들이 가족의 끝없는 해체를 부추기면서 이제 웬만한 자극에는 둔감해진 대중들도 영향이 있다. 무엇보다 가족드라마가 그려내는 가족지상주의의 판타지가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어려울 정도로 지독해진 현실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아무리 인생은 아름답다고 얘기해도 그것이 피부에 잘 와 닿지 않는 시대다.

사극은 '선덕여왕'과 '추노'를 겪으면서(?) 기대치가 한층 높아졌다. 따라서 그 기대에 호응하지 못하는 과거의 방식들로는 달라진 대중들의 입맛을 잡아내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사극이라는 장르는 이제 역사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점점 장르화되는 경향을 띄고 있다. 이 말은 굳이 사극과 현대극 사이의 구분이 그다지 새롭게 여겨지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극을 그렸던 '추노'의 곽정환 감독과 천성일 작가가 현대극으로 '도망자'를 그리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은 일반론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인생은 아름다워'나 '동이'라는 작품의 시청률 난항에는 이런 환경적인 요인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가장 중심적인 사건이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가족드라마는 여러 가족들의 다양한 이야기가 뒤섞이기 마련이지만 그것을 하나로 엮어내는 시각이 존재해야 한다. '엄마가 뿔났다'는 가족들의 자잘한 이야기들을 다루면서 그것을 엄마의 시각으로 담아냈지만 '인생은 아름다워'는 가족들의 이야기가 병렬적으로 흐를 뿐 하나의 구심점이 좀체 보이지 않는다. '인생은 아름다워'는 매번 비슷비슷한 자잘함이 가득하지만 어떤 추동력을 만들어내는 도드라진 이야기가 잘 보이지 않는다.

가장 강한 이야기로 동성애가 소재로 들어 있지만, 이 소재는 오히려 보수적인 시청층에게 반감으로만 작용하고 있다. 동성애를 가족주의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시각은 참신하지만, 그 이야기 하나가 이 작품의 전체 이야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또한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일이 있어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보편적인 주제는 분명 존재하지만, 그것이 작금의 냉혹한 현실에서 수긍할만한 것인가는 의문이다.

'동이'는 스토리의 아이디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 패인이다. 경쟁작인 '자이언트'에서 한 회 분량에 벌어지는 많은 사건들은, '동이'의 부족한 사건들과 비교해보면 거의 극과 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연장방영은 더더욱 독이 되었다. 그잖아도 없는 스토리를 더욱 늘려서 보여주게 된 것. 물론 이것은 작가의 역량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지만, 작가와 함께 작업했을 이병훈 감독의 책임 또한 피할 수 없다.

가족드라마와 사극이라는 시청률을 보증하는 장르들, 게다가 이름만 들어도 기본 이상을 생각하게 하는 김수현 작가와 이병훈 PD라는 거장의 작품. '인생은 아름다워'와 '동이'는 그만큼 높아진 기대치를 맞춰주지 못함으로서 현재의 지지부진함에 머물게 되었다. 물론 시청률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작품들의 시청률 하락은 작품 내적인 문제들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거장이라도 같은 코드의 반복으로는 안된다. 오를 대로 오른 작금의 대중들의 기대치를 맞출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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