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가?” 김희진 ‘로기완’

로기완

탈북해 중국 공안에게 쫓기다 어머니까지 사고로 잃게 된 로기완(송중기)은 홀로 낯선 땅 벨기에까지 와 그 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한다. 난민 지위를 얻어야 살 자격이 주어지지만 벨기에 당국에 그걸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다.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가끔은 여행을 떠나기도 하는, 우리에게는 숨쉬듯 주어진 것들이 로기완에게는 ‘자격’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 그가 마리(유성은)라는 한 여성을 만나 사랑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는 자신 때문에 어머니까지 돌아가셨던 아픈 기억을 마리에게 꺼내놓으며 말한다.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거가?” 

 

김희진 감독의 영화 ‘로기완’은 이 탈북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유롭게 살아갈 자격에 대해 묻는다. 탈북해 쫓기며 어느 곳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 마리는 그래도 우리는 지금 충만하지 않냐며 이 행복은 아무런 자격 없이 이미 주어진 거라고 위로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사적인 차원에서의 행복이란 마리의 말대로 자격이 필요없어 보이지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데 어찌 자격이 요구되지 않을까. 그 곳에서 태어났거나 외국인이라도 법적 요건을 갖춰 귀화했거나, 자격이 있어야 자유롭게 살 권리가 주어진다. 생계를 위한 경제활동도,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정치적 참여도 하다못해 여행을 떠나거나 심지어 누군가를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아갈 권리 또한 자격이 필요하다. 자격을 부여받지 못한 삶이란 뿌리 뽑혀 서서히 말라가는 로기완의 삶처럼 처절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권리처럼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자격을 갖추고 있어 가능하다는 것. 떳떳하게 사람답게 사는 일 또한 자격이 필요하다는 걸 우리는 종종 잊어버린다. 그래서인지 자격에 부여된 권리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을 때도 있다. 때되면 돌아오는 선거에 한 표를 행사하는 일이 얼마나 큰 권리이자 자격을 요구하는 일이란 걸 로기완이라면 얼마나 절절하게 생각했을까. 선거를 통해 자격과 권리를 부여받은 정치인들 또한 그 한 표 한 표에 담긴 막중한 무게감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글:동아일보,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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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기완’, 중년의 깊이와 무게감으로 돌아온 송중기

로기완

“긴데 이런 내가 행복해질 자격 있는 거가?”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에서 탈북 청년 로기완 역할을 연기한 송중기는 그런 대사를 던진다. 특유의 북한 억양이 들어있는 그 목소리에는 그가 느끼는 행복감과 더불어 그런 행복을 자신이 누려도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담겼다. 그래서 거기에는 지독한 슬픔 같은 게 묻어난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를 당해 죽어가는 걸 보면서도 탈북자라는 사실 때문에 공안을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청년. 살기 위해 탈북한 이후 그 어디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뿌리내릴 작은 땅조차 없이 살아야했던 그는 거의 유일한 마음의 터전이나 다름 없던 어머니를 떠나보낸 후 어디서도 뿌리 내리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낯선 땅 벨기에까지 날아와 난민 지위를 얻어보려 하지만, 탈북자라는 사실을 입증하지 못하면 그곳에서도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그런 그에게 마리(최성은)라는 또 하나의 ‘흔들리는 청춘’이 나타난다. 벨기에 국적 한국인 사격 선수였지만 어머니의 안락사를 아버지가 허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방황하며 함부로 자신의 삶을 내동댕이쳐온 그녀는, 자신은 상상조차할 수 없는 생존 상황에도 끝까지 버텨내며 살아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로기완을 보며 마음이 움직인다. 

 

‘로기완’은 그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탈북 청년과 이국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거기에는 미래가 불안한 청춘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보편적인 서사도 들어있다. 로기완의 인상적인 대사에 들어 있듯이, 청춘들이 느끼는 만만찮은 현실은 그들에게 ‘행복해질 자격’을 묻는다. 그런데 행복에 왜 자격 따위가 필요할까. 행복은 그냥 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자격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래서 탈북청년 로기완의 이 질문은 왜 모든 청춘들이 그저 행복할 수는 없는 세상인가를 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기완은 끝내 마리를 먼저 떠나보내면서 말한다. “너 붙잡아 줄 단단한 사람”이 되겠다고. 그래서 꼭 만나러 가겠다고. 그건 세상이 흔들어 놓은 청춘들 모두의 마음 그대로다. 

 

또한 이건 아마도 배우 송중기의 마음이기도 했을 터다. 이제 30대 후반의 나이에 접어든 이 배우 역시 ‘성균관 스캔들(2010)’ 같은 그를 스타덤에 올린 초창기 작품을 하면서 언젠가는 흔들리지 않는 보다 단단한 연기를 해내겠다 다짐했을 테니 말이다. 연기자라기보다는 ‘꽃미남’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렸던 당시의 송중기는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남장여자 캐릭터의 개연성’이라고까지 이야기됐던 미모의 소년이었다. 박민영이 연기했던 남장여자 캐릭터가 성균관에 출입한다는 설정이 바로 이 송중기라는 꽃미남(여성이라고 해도 될 법한)에 의해 설득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여성성에 가까운 꽃미남 이미지로 소비되는 자신을 못견뎌했던 송중기는 그 후로 부단한 변신의 노력을 한다. 영화 ‘늑대소년(2012)’이 송중기에게는 가진 늑대의 야성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끄집어내는 도전이었다면, 드라마 ‘뿌리깊은나무(2011)’의 젊은 세종 역할과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2012)’의 선과 악을 넘나드는 모습은 꽃미남 스타가 배우라는 이름에 걸맞는 필모를 쌓아가는 과정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그는 독특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여리디 여릴 것 같은 꽃미남의 외모를 갖고 있지만 앙다문 입술과 살짝 미간이 좁혀지면서 나오는 대사의 톤을 들어보면 강인한 내면이 느껴진다. 밝게 웃으면 착하디 착한 미소년의 모습이지만, 분노에 한껏 일그러진 얼굴은 순간 분노의 화신으로 그를 변신시킨다. 이러한 다면적인 이미지는 송중기를 그저 꽃미남에 머물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배우라는 무게에만 침잠하지 않게 해주는 스타와 배우 사이의 균형을 만들어줬다.  

 

그 진가는 ‘태양의 후예(2016)’라는 작품으로 꽃을 피웠다. 테러리스트들과 맞서는 강인한 군인이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유시진이라는 캐릭터는 송중기의 이 균형잡힌 이미지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당시 군인이라는 직업을 이토록 판타지로 느껴지게 만들었던 건 다름아닌 송중기의 이미지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처럼 글로벌 스타로까지 떠올랐다고 해서 그가 젊은 날 꿈꿨던 그 단단한 사람이 된 건 아니었다. 그는 그 후에도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지옥섬 군함도에 끌려간 조선인(군함도 2017), 선사시대의 영웅(아스달 연대기 2019), 우주 SF의 히어로(승리호 2021), 이태리에서 온 마피아 변호사(빈센조 2021)까지 여러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역할들을 소화했다. 또 시간을 되돌려 인생리셋을 꿈꾸는 1인2역(재벌집 막내아들 2022)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최근 그가 출연한 영화 ‘화란(2023)’과 ‘로기완’은, 꽃미남으로 등장해 그 껍질을 벗겨내려 흔들리면서도 무던 애를 쓰고 결국 스타덤에 올랐던 청춘의 나날을 지나 이제 30대 후반 중년기에 접어든 송중기의 출사표 같은 작품으로 다가온다. ‘화란’에서 아버지가 술독에 빠져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지만, 그 죽음의 끝에서 자신을 구해준 조폭의 수족으로 살아가는 치건(송중기)이나, ‘로기완’에서 뿌리가 뽑혀져 그 어디에도 발을 디디지 못한 채 부유하는 로기완이나 모두 모든 걸 잃은 채 살아가는 밑바닥의 삶을 보여준다. 치건이 아버지 없는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었다면, 로기완은 어머니 없는 세상 앞에 던져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연기하는 송중기는 ‘꽃미남’ 같은 수식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멍자국 핏자국의 상처들이 가득한 얼굴을 드러낸다. 그건 마치 영화 ‘늑대소년’에서의 모습처럼 보인다. 다만 다른 건 ‘늑대소년’의 송중기가 미소년에서 야성 같은 새로운 이미지를 끄집어내려는 청춘의 도전이었다면, ‘화란’이나 ‘로기완’의 송중기는 보다 사회적 의미를 질문하기 시작하는 중년의 도전 같은 느낌이라는 점이다. 물론 여전히 흔들리는 청춘을 연기하고 있지만 송중기의 연기는 중년의 무게감을 얻어가고 있다. 또한 그렇게 단단해져 웬만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 그건 어쩌면 청춘의 시기를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꿈꾸는 중년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사진:넷플릭스)

대사 한 마디에 밈 조짐, 이준기라서 ‘아라문’에 빠져든다

아라문의 검

“세상 참 재밌네. 이거 무슨 병인가 봐.” tvN 토일드라마 <아라문의 검>에서 은섬(이준기)이 던진 그 한 마디에 탄야(신세경)는 깜짝 놀란다. 그 말은 은섬이 자주 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탄야는 눈앞에 서서 그 말을 건네는 이가 사야(이준기)가 아닌 은섬이라는 걸 알아챈다. 오랜 세월을 건너 드디어 마주한 두 사람의 드라마틱한 재회. 대놓고 반가워할 수 없어 더 애틋한 재회가 아닐 수 없다. 

 

은섬과 사야가 만나는 자리를 급습한 샤하티의 아이들. 태알하의 명으로 움직이는 이 아이들은 지명한 자를 죽일 때까지 덤벼드는 자객들이다. 아이라는 점 때문에 방심했던 무백(박해준)이 죽고, 은섬은 아스달의 병사들에 의해 또 사야는 약바치인 채은(하승리)과 뇌안탈들에 의해 구조됨으로써 그 위치가 뒤바뀐 상황. 사야로 오인된 은섬은 그렇게 아스달의 궁에서 깨어나게 됐다. 

 

배냇벗(쌍둥이)이라는 점 때문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사야인 척 해야 되는 은섬.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그토록 그리워했던 탄야를 눈앞에 보고도 반갑게 만날 수 없는 그 애틋함이 얼마나 크겠는가. 참다 못 참은 은섬은 결국 탄야를 껴안고 눈물을 쏟아낸다. 주변 사람들이 이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탄야 역시 그가 은섬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사야야 이러지 마”라고 그를 제지한다. 

 

그러자 탄야로부터 떨어져 계단을 오르던 은섬이 뒤를 돌아보며 던진 말이 어려서 탄야에게 은섬이 자주 했던 그 말이다. “이거 무슨 병인가 봐.” 그 말에는 병처럼 아프고 설렜던 탄야에 대한 마음 또한 담겨 있을 터다. 이 짧은 순간에 은섬의 감정은 복잡하게 변화한다. 참아내야 한다는 마음과 참을 수 없는 마음이 교차되고 탄야에 대한 그리움과 반가움과 더불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탄야에 대한 미움 같은 것들도 뒤섞인다. 그러면서도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모습에서는 은섬 특유의 여유 또한 엿보인다. 

 

이 대사가 워낙 임팩트 있게 다가와서인지 시청자들 중에는 이 대사를 따서 “아라문의 검 참 재미있네. 이거 무슨 병인가 봐”라는 재치 있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런 임팩트에는 이준기라는 배우의 지분이 상당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스달 연대기>의 시즌2에 해당하는 <아라문의 검>이 주연 배우를 바꿔놓았는데, 이물감이 아닌 몰입감을 주는 건 다름 아닌 이준기의 연기 덕분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라문의 검>에서 이준기는 부족 연맹을 이끄는 재림 이나이신기로서 전쟁의 선봉에 서는 은섬의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탄야와의 애틋한 사랑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전투 장면에서는 시원시원한 액션 신을 선사하고, 적과 대치할 때는 눈에 핏발이 설 정도로 강렬한 눈빛을 보내지만, 탄야와 오랜만에 다시 재회한 순간에는 애절한 사랑이 담긴 눈을 보여준다. 그러니 이런 감정 변화를 어느 쪽으로든 몰입감 넘치게 만들어주는 이준기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드라마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아라문의 검>은 종족의 이름부터 낯선 고어들이 사용되고,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상상으로 조영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결코 쉬울 수는 없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복잡해 보이는 세계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존재가 바로 이준기가 아닐까 싶다. 그의 연기를 따라 은섬이라는 인물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이 세계를 여행하는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시청자들의 손을 잡고 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길잡이 역할이랄까. 이 낯선 세계가 이토록 흥미롭게 전개되다니, 이거 무슨 병인가 싶다. (사진:tvN)

 

부진했던 JTBC 드라마들과 ‘재벌집 막내아들’은 뭐가 달랐을까

재벌집 막내아들

올 한 해 JTBC 드라마는 “부진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게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드라마가 없었던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도드라지는 작품이 박해영 작가의 <나의 해방일지>다. 이 작품은 올해 기억될 드라마라고 해도 될 법한 깊이를 보여줬지만, 그렇다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입소문으로 6%대(닐슨 코리아)에 이르는 시청률을 거뒀지만 두 자릿 수 시청률은 요원했다. 

 

이런 사정은 작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괴물>, <구경이>, <인간실격> 같은 완성도 높은 작품이 있었지만 세 드라마 모두 최고 시청률은 각각 5.9%, 2.7%, 4.1%에 머물렀다. 그간 <밀회>나 <부부의 세계>, <SKY캐슬> 같은 완성도도 높고 대중성도 확보했던 드라마들을 내놨던 JTBC로서는 너무나 타율이 떨어지는 성적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새로 시작한 JTBC 금토일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은 그 편성부터가 공격적이었다. 주 2회 편성인 보통의 경향과 달리, 금토일 3회 편성을 시도했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러한 공격적인 편성은 첫 주에 이미 효과를 거두었다. 첫 회 시청률 6%에서 2회 8.8% 그리고 3회에 10%를 돌파하며 드라마를 궤도에 올려놓은 것. 

 

<재벌집 막내아들>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작품을 보다보면 금세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작품은 최근 웹툰이나 웹소설에서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는 ‘회귀물’이다. 죽은 이가 과거로 되돌려져 다시 살아가게 되는 판타지 장르. 이른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 정서를 자극하는 이 장르는 인생 자체를 리셋해서 다시 살아보고픈 이 시대 민초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른바 ‘수저계급’이 이야기 될 정도로 태생적으로 삶이 결정되는 현실이 아닌가. 

 

윤현우(송중기)는 순양그룹 미래자산관리팀장이라는 그럴 듯한 직책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오너가의 갖가지 리스크들을 관리하고 해결해주는 머슴에 가깝다. 그런 그가 회사의 숨겨진 자산을 회수하기 위해 해외에 나갔다가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살해당한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서 비극적인 엔딩이어야 하지만 회귀물은 여기부터가 시작이다. 죽었던 그가 1987년으로 회귀해 순양그룹 오너가 진양철(이성민) 회장의 막내 손자 진도준(김강훈)으로 깨어난 것. 

 

이미 한 번 살아봤기 때문에 당대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다 알고 있고, 순양그룹의 속사정 또한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이 꼬마는 놀라운 감으로 진양철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1987년 6.29 선언 이후에 직선제로 치러진 대선에서 노태우가 당선될 걸 알고 진양철 회장에게 직접 비자금을 전달하라 조언하고, 대한항공 폭파 사건에서 죽을 위기에 처한 진양철 회장을 메모 하나를 남김으로써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해준다. 진양철 회장에게 그 보상으로 대신 분당에 땅을 받은 그는 몇 년 만에 그 부동산으로 240억을 벌어들인다. 회귀물이 갖고 있는 다시 사는 삶이어서 뭐든 해낼 수 있는 그 판타지가 시청자들을 사로잡는다. 

 

이 작품에는 8,90년대에 대한 복고가 끌어내는 정서적인 매력 또한 담겨 있다. 아날로그적인 영상과 당대를 떠올리게 하는 음악, 스타일 등이 지금의 ‘뉴트로’ 트렌드를 자극한다. 이를 세련되게 보여주는 배우 송중기나 신현빈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게다가 이성민부터 김현, 윤제문, 김정난, 김남희, 조한철, 서재희, 김신록, 김도현, 정희태, 허정도 등등 만만찮은 중견 배우들이 포진해 극에 긴장감을 높이고, 이들 속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어린 주인공(김강훈에서 송중기까지)들의 대결구도는 흥미진진해진다. 

 

무엇보다 극의 중심을 잡아주는 이성민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단단한 카리스마와 그 단단함을 순식간에 풀어내 껄껄 웃게 만드는 송중기의 천진함이 묘한 긴장감과 훈훈함을 오간다. 이러니 드라마가 확신을 가질만하다. 판타지가 있고 시대극적 요소와 복고가 더해진데다 삶을 재설계하는 스토리가 주는 묘미가 있다. 여기에 윤현우와 다시 태어난 진도준 모두 누군가의 사주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이 문제를 주인공이 향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 또한 불러일으킨다. 일종의 복수 서사도 더해져 있는 것. 

 

3회 연속 편성에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러고 보면 <재벌집 막내아들>이라는 다소 평이한(어찌 보면 일일드라마 제목 같은) 제목도 그런 자신감의 표현처럼 보인다. 어쨌든 약 2년간에 걸쳐 부진의 늪에 빠져 있던 JTBC 드라마가 단 3회 만에 부활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JTBC측에서 ‘대중성’을 중심에 놓고 라인업을 세우겠다고 했던 그 말들이 진심이었다는 게 실감나는 결과다. 과연 <재벌집 막내아들>은 어디까지 나갈 수 있을까. 이제 시작에 불과하지만 벌써 어떤 성과를 거둔 작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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