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예뻤다>, 지금도 충분히 예쁜 청춘들을 위한 위로

 

그녀는 예뻤다. 어린 시절 김혜진은 예뻤다. 그런데 나이 들어 이제 취업 전선 앞에 내몰린 김혜진(황정음)은 역변했다. 그녀는 블링블링한 외모와 스펙을 가진 절친 민하리(고준희)와는 사뭇 대조되는 인물이다. 민하리가 돈 많고 잘생긴 남자들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는 처지라면, 역변한 외모에 초라한 스펙, 면접만 보면 불합격하는 취업준비생인 김혜진은 그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하는 처지다.

 


'그녀는 예뻤다(사진출처:MBC)'

그녀는 겉으로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쾌활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축될 대로 위축되었다. 어린 시절 그녀와 특별한 관계였던 뚱뚱보 지성준(박서준)이 멋진 훈남이 되어 돌아오자 그녀는 그의 앞에 역변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자신이 없다. 어찌 어찌해 회사에 들어가고 그 회사의 핵심부서에서 시키는 일이면 뭐든 척척 해내는 능력도 갖고 있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이 그런 능력의 소유자인 것을 모른다.

 

MBC 수목드라마 <그녀는 예뻤다>는 자신의 가치를 어느 순간부터 잊어버린 채 잔뜩 주눅 든 삶을 살아가는 김혜진과 그녀 앞에 운명처럼 나타난 지성준 사이에 벌어지는 밀고 당기는 멜로를 담고 있다. 그녀가 진짜 김혜진인 줄 모른 채 상사로 들어온 지성준이 그녀에게 능력 운운하며 독설을 쏟아내는 장면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툭툭 건드린다. 두 사람의 살짝 엇나간 멜로는 시청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런데 그것뿐일까. <그녀는 예뻤다>는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류의 멜로드라마가 가진 모든 요건들을 다 갖추고 있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마음을 잡아끄는 요소가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멜로라는 틀을 가져와 취업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우리네 청춘들에 대한 깊은 위로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김혜진은 마치 그 청춘들의 초상처럼 그려진다.

 

따라서 제목에 들어간 예뻤다는 표현은 단지 외모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그녀가 갖고 있던 가능성들과 감춰진 능력과 매력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어린 시절 뚱뚱보라고 모두가 놀리던 지성준을 감싸주던 김혜진의 따뜻한 마음이 그 표현 속에는 들어있고, 빗속에서 떨고 있던 그에게 이어폰을 끼워주며 카펜터스의 목소리를 들려준 그 예쁜마음이 담겨져 있다. 물론 이것은 더 확장해서 바라보면 청춘이라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얘기하는 것일 게다. 세상에 예쁘지 않은 청춘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드라마의 제목은 현재형이 아니라 과거형이다. ‘그녀는 예뻤다라는 말은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뉘앙스도 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녀를 과거형의 인물로만 기억되게 만드는 것일까. 나아가 누구나 예쁠 수밖에 없는 청춘들을 그 무엇이 과거의 행복으로만 회귀하게 만드는 것일까. 드라마는 간접적으로 청춘들을 이렇게 내모는 현실을 담고 있다. 스펙이니 외모니 집안이니 돈이니 배경이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거기에 과도한 취업경쟁의 현실까지.

 

<그녀는 예뻤다>는 물론 멋지게 나타난 옛 첫사랑과 밀고 당기는 멜로의 맛을 충분히 내는 드라마다. 무엇보다 김혜진 역할을 연기하는 황정음은 제대로 연기에 물이 올랐다. 거의 전편을 그녀의 원맨쇼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그녀는 압도적인 캐릭터 장악력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상큼 발랄한 로맨틱 코미디의 뒤안길에서 마음 한 구석을 찌르는 저릿한 아픔이 느껴지는 건 이 드라마가 저 밑바닥에 깔아놓은 지금의 청춘들의 정서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녀는 예뻤다? 왜 과거형인가. 그들은 여전히 예쁘다. 다만 그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그들을 모욕주고 있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그녀는 예뻤다그녀는 예쁘다로 달리 보이는 과정. 이 드라마는 그걸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지금도 여전히 예쁘다. 우리네 청춘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직장 드라마가 <미생>일 필요가 있나

 

기대가 너무 큰 것일까. 아니면 너무 엄밀한 잣대를 들이밀기 때문일까. 이제 2회를 남긴 <프로듀사>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다. 여러 이유들이 제시되고 있지만 그 중 가장 큰 건 <프로듀사>가 애초에 예능 PD들의 세계를 다룬다고 해놓고서 사실은 예능국에서 연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프로듀사(사진출처:KBS)'

그러면서 항상 나오는 이야기는 <미생>과의 비교다. 연애 없이도 샐러리맨의 현실을 절절하게 다룬 <미생>. 두 말할 여지없이 <미생>은 수작 중의 수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직장을 다루는 드라마가 <미생>이 될 필요가 있을까.

 

<프로듀사><미생>처럼 샐러리맨들을 치열한 하루하루를 통해 그려내려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것은 <프로듀사>라는 제목에 이미 들어있다. 많은 이들이 PD라고 하면 막연히 갖게 되는 그 편견과 선입견. 그래서 심지어 자 직업인 양 프로듀사라고 부르는 그 관점을 뒤집고 풍자해내는 것이 이 드라마의 진짜 목적이다.

 

그러니 <프로듀사>의 신입PD 백승찬(김수현)<미생>의 인턴사원 장그래(임시완)는 같은 신입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캐릭터다. 장그래가 스펙 없는 청춘의 절망과 그것을 뛰어넘는 판타지를 담고 있는 캐릭터라면(이건 <미생> 역시 100% 현실이 아닌 판타지를 담은 드라마라는 걸 말해준다), 백승찬은 괜찮은 집안에 서울대생의 스펙을 가진 청춘으로 누구나 선망할만한 PD가 되지만 사실은 그게 다 쓸 데 없이 고스펙이라는 걸 웃음의 코드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그러니 백승찬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실로 미천한 것들이 아닐 수 없다. 장그래가 딱풀 하나 때문에 엄청난 시련을 겪는 주인공이라면, 백승찬은 A4지 한 부를 얻기 위해 수차례 왔다 갔다 하는 일이 마치 엄청 중요한 일인 양 진지하게 해야 하는 주인공이다. 그는 프로그램을 멋지게 기획하고 만들어내는 일보다 먼저 선배들의 점심 식단을 각각의 기호에 맞춰 주문해줘야 하는 인물이다.

 

이것은 <프로듀사>가 예능국 사람들을 그리는 시각이다. 거기에는 일보다는 윗사람 눈치를 더 많이 보며 의전에 더 신경 쓰는 김홍순(김종국) PD도 있고, 프로그램보다 자신의 안위와 가족의 안락만을 먼저 추구하는 이름만 김태호 PD(박혁권)도 있다. 예능국장인 장인표(서기철)는 심지어 기획사 사장의 눈치를 보는 인물이다. 물론 전혀 방송국과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의외로 능력을 발휘하는 <뮤직뱅크> 막내 작가 김다정(김선아) 같은 인물도 있다.

 

물론 백승찬을 비롯한 이런 인물들이 예능국 사람들의 전부를 대표해서 보여주는 건 아니다. 하지만 <프로듀사>는 이런 예능국 PD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캐릭터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연히 드라마틱한 일의 세계는 잘 보이지 않는다. ? 이것은 일종의 풍자이면서 선입견 깨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국에서 일하려면 엄청난 스펙이 필요해? 하지만 정작 하는 일은 너무 소소해 비루하게 보일 정도다.

 

<프로듀사>는 이렇게 쓸 데 없이 고스펙인 예능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코미디의 요소로서 바탕에 깔아놓고 그 위에 누구나 집중할 수 있는 연애 이야기를 얹어 놓았다. 즉 연애 이야기가 전면에 나와 있는 건 드라마의 대중적인 선택이다. 김수현이 있고 아이유, 공효진이 있는데 연애 이야기를 안 한다고? 그건 대중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프로듀사>의 연애 이야기가 전면에 보인다고 해서 예능국에서 벌어지는 일의 세계를 다루지 않은 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그 방식이 <미생>의 방식이 아니라 차라리 <개그콘서트><무한도전>무한상사같은 예능의 방식이었기 때문에 너무 소소하거나 가볍게 여겨졌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왜 모든 걸 다큐처럼 그려야 할까. 그건 또한 예능의 방식을 너무 낮게만 치부하는 편견은 아닌가.

 

크게 바라보면 <미생>이나 <프로듀사>나 그 기저에 깔려있는 메시지는 다를 것이 없다. <미생>이 스펙 없는 청춘의 문제를 다룬다면, <프로듀사>는 쓸 데 없는 스펙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니까. <미생>이 그것을 눈물로서 그렸다면 <프로듀사>는 웃음으로 그려낸 것뿐이다.

 

<프로듀사>예능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세운 것처럼 충분히 예능의 성격을 가져와 예능국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 그러면서도 예능 프로그램의 제작현장에서 벌어지는 편집이나, 예고, 결방 같은 사안들을 소재로 가져와 달달한 멜로와 섞어 인간관계의 문제로 확장시켜 바라보는 괜찮은 시도도 보여줬다. 아마도 <프로듀사>는 올해를 통틀어 KBS가 그나마 시도한 유일한 실험작일 것이다. 그 괜찮은 시도들을 단지 덮어놓고 예능국에서 연애하는 드라마로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안타까운 면이 남는다.

 

<12>과 서울대, 그 부조화의 재미

 

우리에게 서울대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혹 막연한 스펙의 가면으로만 존재하는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가면 뒤에 실제로 웃고 우는 학생들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던 건 아닐까. 서울대를 찾아간 <12>이 흥미로웠던 건 그 막연한 느낌으로만 다가왔던 그 곳에서 공부하고 땀 흘리고 있는 학생들과 직접 어우러지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1박2일(사진출처:KBS)'

물론 대학은 본래 예능의 텃밭이었다. 대학 특유의 자유로움은 예능과 만나 특별한 재미를 선사하곤 했으니 말이다. 과거 1998년에 방영됐던 <캠퍼스 영상가요>는 대표적이다. 강호동이 MC를 맡은 이 프로그램은 끼 많고 재주 많은 대학생들을 발굴해냈는데, 이 프로그램이 인연이 되어 연예계에 입성한 이들도 적지 않다. 이혁재는 대표적이고 전현무, 류수영, 샘 해밍턴도 이 프로그램에서 주목받은 인물들이었다.

 

<12>도 대학과의 특별한 인연이 있다. 과거 충주대에서 깜짝 이벤트로 일이 커진 게릴라 콘서트<12>의 레전드에 해당한다. 본래 목적지는 문경이었으나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들르게 된 충주대에서 군것질할 돈이나 벌어보자고 했던 게릴라 콘서트는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학이라는 공간이 가진 열기가 <12>과 잘 맞아떨어졌던 것.

 

하지만 서울대를 찾아간 <12>의 그림은 이와는 사뭇 다르다. 공부 잘하는 수재들 많기로 유명한 서울대는 어찌 보면 무식하고 놀기 좋아하는 <12>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부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수능 만점자 세 명을 찾아오라는 미션이 너무나 쉬운 서울대라는 공간과 수능수학으로 알고 있는 정준영과의 만남이라니.

 

수조의 물의 양을 재오라는 미션을 받고 황당해하던 정준영은 그러나 지나는 학생의 차분한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했고, ‘이성의 방에서 세 명의 학생을 오목으로 이기라는 미션을 받은 데프콘은 그 게임이 오목인 줄 몰라 모눈지에 갖가지 귀여운 그림을 그려내는 여학생들을 만나고는 즐거워했다.

 

또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학생들에게 연주시키라는 미션을 받은 김종민은 단 10분 연습으로 환상적인 곡 연주를 성공시킨 음대생을 만났고, 사진의 주인공을 찾아오라는 미션을 받은 차태현은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SNS를 뒤져 김태희 뺨치는 미모의 주인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 반짝반짝 빛나는 매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우리가 막연히 생각했던 서울대생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느껴지는.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수능 만점자를 찾아오라고 해서 막막해 했던 김주혁이 나중에는 만점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발견했던 순간이었다. 몇 시간을 돌아다니다 집결지로 왔는데, 그 장소에서만 만점자들을 몇 명 발견할 수 있었던 것. 서울대라는 공간을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공부의 대명사처럼 보이는 서울대가 어딘지 놀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다면, 늘 퀴즈 게임 등을 통해 무식을 뽐내왔던 <12>은 공부와는 영 관계가 없을 것처럼 보인다. 서울대와 <12>이 의외로 잘 어울리고 그 섞여드는 과정이 흥미로울 수 있었던 건 공부와 놀이의 부조화가 그 안에서 깨지는 모습들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12>의 놀이에 적극적이었고, <12>은 서울대의 그 면학 분위기에 자못 진지해지기도 했다. 이 놀이와 공부가 어우러지는 공간은 또한 서울대 캠퍼스가 해외의 대학들처럼 하나의 관광명소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도시인들에게는 녹지와 공원의 역할을 해주기도 하는 대학 캠퍼스는 특유의 지성적인 분위기가 발길을 잡아끄는 매력적인 공간이 아닌가.

 

대학이 어느 순간부터 스펙이 되어버린 지금, ‘서울대라는 이름은 그 스펙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이처럼 스펙으로만 막연히 그려지는 서울대는 허상일 뿐이다. 그 안에는 치열하게 공부하며 젊음의 열정을 불태우고 각각 저마다의 매력을 가진 실제적인 대학생들이 있다. 그 가면으로서의 스펙이 아닌 실제 서울대의 민낯을 살짝 보여주는 시간. <12>과 서울대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장그래와 장백기, 스펙과는 상관없는 사회생활

 

<미생>에서 장그래(임시완)라는 인물은 하나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스펙 없는 그가 원 인터내셔널 같은 대기업에 입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회사 내에서의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그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또 위기상황을 넘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미생(사진출처:tvN)'

새롭게 온 박과장(김희원)의 비리를 파헤치는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는 장그래의 행동은 일개 사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신입사원이라면 그런 핍박받는 상황에서 장백기(강하늘)처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스펙 좋은 장백기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을 꺾지 못한다. 당장의 것들만 눈에 보이고 좀 더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장그래는 다르다. 그는 이 박과장 같은 상식 이하의 선임의 명령을 반발 없이 수행하며 집으로 돌아와 자기가 바둑공부를 할 때 적어뒀던 내용을 펼쳐든다.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곳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는 것이다.’

 

웬만큼 회사생활을 경험한 사람도, 또 스펙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코 생각해내기 어려운 삶의 지혜다. 바로 이 지점은 왜 <미생>이 굳이 주인공 장그래를 스펙 없는 청춘으로 그리는 대신, 그에게 유년시절을 온통 바둑이라는 세계 속에서 살게 했는가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미생>은 그저 직장생활의 애환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애환 속에서도 어떻게 버텨내는가에 대한 노하우도 담겨져 있다.

 

<미생>에서 그것은 바둑의 세계로 제시된다. 장그래라는 인물이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수긍이 가는 이유는 그가 스펙은 없어도 바로 이 바둑을 이해하고 있다는 설정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평범 이하처럼 보이지만 그는 비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왜 하필 바둑을 세상살이의 지침으로 삼았을까. 바둑의 어떤 점이 그토록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장그래 같은 인물조차 회사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걸까.

 

이것은 바둑이라는 세계가 가진 현실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특징 때문이다. 바둑판이 하나의 현실이라면 그 위에 바둑돌 하나씩을 얹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바둑의 세계다. 그러니 이러한 관조적 자세는 바둑이 세상 현실을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만들어준다.

 

바로 이 한 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는 우리네 샐러리맨들은 그 시스템 안에 있기 때문에 괴물의 정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장그래처럼 바둑 같은 자신만의 축소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한 발 물러나 그 시스템을 확인하고 대처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스펙사회에 대해 <미생>이라는 작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영어, 수학 점수 좀 더 많이 나온다고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 <미생>은 바둑을 예로 들고 있지만, 그것은 여행 같은 세상 경험일 수 있고, 인문학 서적 같은 세상 공부일 수도 있다. 장백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펙은 어쩌면 자신의 발목을 오히려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미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장그래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이 현실에 던지는 질문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