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아버지들, ‘되고송’을 불러라

아버지는 늘 한 자리 물러나 앉아 계셨다. 다들 모여 밥을 먹을 때도, 함께 놀러갈 때도, 심지어 저녁에 모처럼 모여 TV를 볼 때도 늘 한 자리 뒤쪽에 앉아 계셨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우처럼 보였다. 특별대우 말이다. 하지만 퇴직 전에도 그랬지만 퇴직 후에도 아버지는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족 중 누가 말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실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자기 삶을 늘 뒷전에 두고 계셨던 아버지는 새삼스레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주어진 것이 못내 어색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늘 뒷전에 있는 아버지에 익숙해진 가족들의 관성은 아니었을까.

이른바 아버지 수난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의 아버지들은 가장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혀 살아왔다. 젊어서는 경제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산업의 현장에서 밤낮 없이 일했고, 이제 그 결실을 얻어야 할 나이에 IMF를 맞았다. 평생 등골 휘게 살아온 대가로 돌아온 보상이라곤 구조조정으로 일찌감치 명퇴한 아버지가 앉을 뒷전뿐이었다. 어린 시절 권위의 상징처럼 보였던 아버지, 그 자리에 자신이 와 있건만 자꾸 뒤로 밀려나면서 가슴 한 편에 남는 공허함은 도대체 뭘까. 권위의 끝자락에서 보게 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엄마가 뿔날 때, 아버지는 왜?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엄마 김한자(김혜자)다. 제 맘대로 되는 자식 없다고 김한자는 자식 하나 하나가 미덥지 못하다. 참다 참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김한자는 결국 뿔을 낸다. 엄마의 뿔은 온 가족을 비상으로 몰고 간다. 가족들은 모두 엄마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뿔을 가라앉힐까 고민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어떤가. 같은 부모 입장이 다를 리 없겠지만 나일석은 그 와중에도 아내 김한자의 심기를 살피기에 바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아내를 뿔나게 한 자식에게도 똑같이 마음을 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늘 어느 한 편만을 고집하지 않는 이 몸에 밴 습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생활 속에서 위로 눈치보고 아래로 눈치보며 살아왔던 세월의 흔적은 아닐까.

이렇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마인 김한자는 축복 받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뿔나는 일이 있어도 늘 살뜰히 신경 써주는 남편이 있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는 멋진 시아버지(이순재)가 있다. 게다가 시누이(강부자)는 거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격이 없고 친근하다. 이 뿔난 엄마네 가족을 찬찬히 살펴보면 가장 쓸쓸한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낮이면 세탁소 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가 저녁이면 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바로 그 존재다.

엄마의 세상, 지워져버린 아버지들
요즘은 이른바 엄마의 세상이라고 한다. ‘엄마마케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택의 순간에까지 엄마의 파워는 그만큼 강력해졌다. TV드라마는 바로 이런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최근 들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 아줌마드라마의 배경 역시 바로 이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들은 서민적 삶이 주는 끈끈함을 체험하다가(엄마가 뿔났다), 바람난 남편에 대한 상쾌한 복수를 하고(조강지처클럽), 상류층의 삶을 대리경험(행복합니다)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잘 생긴 젊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아줌마 신데렐라(천하일색 박정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왜소해지고 있다.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이나 ‘온에어’의 서영은(송윤아)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싱글맘이고, ‘행복합니다’에서의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선택받는 신데렐라거나(이준수, 이훈역), 아이까지 갖게 하고는 도망친 남자거나(박상욱, 이종원역), 그 버려진 아이까지 떠맡아 기르려는 남자이거나(이용재, 김철기역), 죽은 아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진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남자(이철곤, 이계인역)들이다.

아버지들이여 ‘되고송’을 불러라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 두면 되고, 견디다보면 또 월급날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통신사의 ‘되고송’. 특유의 긍정어법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노래 가사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은 ‘○면 ☆되고’가 반복되는데 여기서 ‘○면’의 ○은 부정적 상황을 말하고, ‘☆되고’의 ☆는 그 부정적 상황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말한다. 그러니 가사가 계속 반복되면서 안 좋은 상황들은 하나하나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쐐기를 찍듯이 후렴구처럼 ‘생각대로 하면 되고’로 끝나면서 ‘모든 건 생각에 달렸다’고 되짚는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이제 이 달라진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긍정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책하면서 뒷전을 찾아 서는 아버지들의 진짜 자리를 찾는 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잊고 있던 꿈이라도 들춰내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자. “회사 잘리면 내 생활하면 되고, 누가 뭐라면 그저 웃어주면 되고, 삶이 힘들면 잠시 쉬면 되고, 못 참겠으면 뿔 내면 되고,” 그렇게 되고송을 부르자. 뿔이라도 내보자.
(이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http://www.kaeri.re.kr/) 사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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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될까

왜 이 땅에 사는 아버지들은 즐거우면 안되는 걸까. 이준익 감독의 ‘즐거운 인생’에는 인생이 즐겁지 못한 아버지들이 등장한다. 실직해 잘 나가는 교사 아내에 얹혀 살아가는 기영(정진영), 낮에는 택배, 밤에는 대리운전으로 자식 교육비 대기 바쁜 성욱(김윤석), 기러기 아빠로 한 대라도 더 중고차를 팔아 돈을 벌어야 하는 혁수(김상호)가 그들이다.

세대의 마이너리티, 가장
그래도 한 때 그들은 자신들이 조직했던 활화산이란 밴드 이름처럼 활활 타올랐던 적이 있다. 지금은 휴화산이 되어버린 그들. 그들이 ‘왕의 남자’, ‘라디오스타’를 통해 줄곧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던져주었던 이준익 감독이 ‘즐거운 인생’을 통해 보듬고자 하는 이들이다.

‘왕의 남자’에서 광대들을 왕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리고, ‘라디오스타’에서 한물간 스타를 영월이란 변방으로 보내 다시 중심으로 치고 들어온 것처럼, ‘즐거운 인생’은 명퇴나 구조조정으로 고개 숙인 가장을 그 이전의 시간, 즉 젊음의 시간으로 돌려보내 한바탕 즐거운 난장을 벌인다. 즉 ‘왕의 남자’는 신분의 마이너리티를, ‘라디오스타’는 지역적인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즐거운 인생’은 말하자면 가장이라는 ‘세대의 마이너리티’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가 어떤 통쾌한 구석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마이너리티들이 중심을 치고 가는 이야기 얼개에 숨겨져 있다. 즉 이 소외된 이들이 본래의 모습을 통해 세상의 인정을 받는 순간, 그들을 소외되게 만들었던 현실의 제도나 왜곡 같은 것들이 깨지는 쾌감을 주기 때문이다. 비천한 광대가 왕과 마주서서는 그보다 더 많은 자유를 가진 존재로 부각되고, 세월에 의해 밀려난 왕년의 스타가 영월이란 변방에서 그 주민들과 라디오를 통해 진심으로 소통하면서 그 진가를 보여주는 그런 이야기 구조 말이다.

가장들과 어깨동무 해주는 청춘들
‘즐거운 인생’은 그 연장선상에서 현실에 한없이 무너져 내리면서 불행한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들을 청춘의 꿈이었던 음악을 끌어들여 즐거운 인생으로 복권시킨다. 중요한 것은 이 마이너리티들의 위치상승이 욕망이 아닌 본 모습으로의 귀환을 뜻한다는 점이다. 즉 ‘즐거운 인생’은 특별할 것 없이 누구나 즐거워야 하는 인생을 즐겁지 못하게 살아가는 가장들에게 당신도 즐거울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영화다.

마이너리티를 넘어서는데 있어서 이준익 감독이 쓰는 또 하나의 방식은 당대의 동지들을 끌어 모으는 것이다. ‘왕의 남자’가 저 육갑(유해진), 칠득(정석용), 팔복(이승훈) 같은 광대를 끌어들였다면, ‘라디오스타’는 영월이란 변방의 주민들을 동지로 끌어들인다. 마찬가지로 ‘즐거운 인생’이 동참시키는 동지들은 대책 없는 청춘들이다. ‘라디오스타’에서 최곤(박중훈)을 따라다니는 노브레인을 통해 전조를 보였던, 음습한 지하클럽에서 미래가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음악이 있어 마냥 즐겁기 만한 청춘들은 ‘즐거운 인생’에서 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있는 가장들과 기꺼이 어깨동무를 해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음악이라는 소통의 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아저씨는 믹 재거를 닮았어!”, “니가 믹 재거를 아니?”, “당근이지, 내가 롤링스톤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활화산 밴드를 따라다니는 젊은 여자애들과 늙다리 가장들이 술좌석에서 음악을 통해 소통되듯, 음악은 또한 현준(장근석)이란 조금은 까칠한 청춘과 이 가장들을 엮어놓는다. 억눌린 청춘들은 억압되어 자기의 즐거운 삶을 찾지 못하는 가장들과 동격으로 읽히면서 락이란 음악으로 공명한다. 이것은 락이 가진 저항성, 억압의 분출 같은 강력한 촉매제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꺾어진 꿈들이 각각으로 있을 때는 자학적인 삶을 살아가다가, 하나둘 모이게 되자 “왜 우린 안되는데?”하는 현실에 대한 모반을 꿈꾸게 된다. 가족의 행복이라는 미명 하에 거추장스런 양복이나, ‘365일 6000원’이란 문구가 덕지덕지 써진 택배직원 제복을 걸쳐 입고 동분서주하는 자신의 삶이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들은 찢어진 청바지와 티셔츠에 문신을 한 채 ‘즐거운 인생’을 찾아간다.

성욱의 처가 40대 중반에 밴드를 한다는 이 엄청난(?) 탈선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 그러나 성욱의 답변은 단순하다. “하고 싶으니까.” 이 단순한 한 마디가 깊게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는 현실의 가장들이 눈에 밟히기 때문이다. 저 ‘브라보 마이라이프’에서 조민혁 부장(백윤식)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적은데 한번쯤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한번쯤은... 그러면 사치일까...”라고 말하듯, 이 시대의 마이너리티, 가장들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의 어깨가 무언가를 걸머지는 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했었다면, 한없이 작아질 것을 요구하는 가장수난시대에 이제 가족들이 그 중압감을 덜어내고 어깨동무를 해줘야하지 않을까. 아버지들은 충분히 즐거울 자격이 있다.

‘우아한 세계’가 보여주는 가장의 딜레마

“또 조폭영화야? 한국영화는 소재가 겨우 조폭 밖에 없냐?” 영화 개봉 시점에 맞춰 이런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그래서일까. 최근 조폭이 등장하는 영화를 만든 제작자들은 ‘조폭영화’ 범주 속에 자신의 작품이 들어가는 걸 극도로 꺼린다.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도 그렇다. ‘생활 느와르’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지만 이 영화, 분명 조폭영화다.

조폭영화? 느와르?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미국에 서부영화, 갱스터영화가 있고 일본엔 사무라이영화가 있다는 맥락에서 보면, 조폭영화란 어찌 보면 우리사회가 만들어낸 독특한 장르영화가 아닐까. 조폭영화라며 싸잡아 욕을 하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조폭이라는 소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소재에 기대 자극적인 설정으로 흥행만을 노린 기획영화들 때문이다. 물론 조폭영화라는 용어 속에는 그런 류의 영화에 대한 비아냥이 들어있다. 이것과 구분하기 위해 느와르라는 표현을 쓰지만 그것 역시 적합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비아냥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조폭이라는 소재에 연연하는 것일까. 혹시 조폭은 우리 사회와 시대를 표상하는 그 무엇은 아닐까. ‘우아한 세계’에 이르러 추정되는 결론은 조폭은 이제 그저 칼부림에 쌍스러운 욕이나 하는 그런 표피적인 존재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 함의는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이다.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게임의 법칙(1994)’, ‘초록물고기(1997)’, ‘넘버3(1997)’로 귀결되는 초창기 조폭영화들은 조폭이라는 소재를 통해 사회문제를 에둘러 고발했다. 철저히 조폭의 세계를 그려냄으로써 그 안에 존재하는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건드렸던 것. 그것은 권력의 문제이고 경제의 법칙이면서 결국 사회라는 시스템이 움직이는 법칙이다. 사회라는 체계 속에서 벌이는 게임에서 결국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하는가에 대한 문제. 정답은 시스템을 만들고 법칙을 정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넘버3가 넘버2나 넘버1이 되려고 해도 넘지 못하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는다손 치더라도 치러야할 대가는 혹독하다는 것을 이들 영화들은 조폭의 세계를 통해 보여주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조폭의 세계가 갖는 단순명쾌한 폭력으로 그 아래 숨겨진 가진 자들만을 위한 시스템을 목격한다는 것은 똑같은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친구(2001)’는 이런 현실에 어린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부여했다. 그러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던’ 그 시절의 친구를, 이제 죽여야만 하는 비정한 어른들의 세상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이런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조폭영화 속에서 우회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성공의 욕망을 향해 달리지만 결국 그 시스템의 벽에 무너지는 우리네 가장의 모습들이다.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
하지만 초창기 조폭영화가 가진 이러한 풍자 내지는 사회비판의 요소들은 상업적으로 기획된 조폭 코미디물로 인해 퇴색된다. ‘조폭마누라’나 ‘두사부일체’, 그리고 ‘가문의 영광’은 시리즈물로 제작되어 명절 극장가를 달구었다. 조폭영화가 가진 현실적 함의들이 사라지면서 이야기는 공중에 붕 떠버린다. ‘또 조폭영화냐’라는 비판은 여기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소재는 2006년 개봉된 ‘비열한 거리(2006)’를 통해 다시 원상태로 돌려진다.

‘비열한 거리’는 똑같이 초창기 조폭영화에서 다루던 사회 시스템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달라진 것은 좀더 생활기반으로 조폭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점이다. 과거 조폭의 모습은 조폭 세계 속에서의 비장한 인물로만 그려졌지만, ‘비열한 거리’에 와서는 생활인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야기는 더 리얼해지고 사회적인 함의는 좀더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집안에서는 가족이 살 아파트 한 채를 얻기 위해, 아파트가 들어설 자리의 철거민들을 몰아내는 일을 해야하는 병두(조인성)는 이 시대 가장의 자가당착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가장이 갖는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
수직적인 시스템 속에서 그 위로 올라가려 노력하지만 또한 그 가장에게 존재하는 세계는 가족이나 연인 같은 수평적인 세계이다. 병두가 수직으로 상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할 대가가 있다. 누군가를 밟고 서야한다는 것.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순간, 그 자신도 언젠가는 누군가에 의해 밟혀질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셈이다. 수평적인 세계의 안정을 위해 수직적인 세계로 올라가려는 가장들의 희망은 시스템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된다.

‘우아한 세계’가 그려내는 세계 역시 바로 가장들이 갖는 이 두 가지 이질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집안과 집밖으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며, 가족이란 안전망과 사회라는 현실 싸움터로 나누어지는 세계이다. 공기 좋은 전원주택에서 가족들과 우아하게 살려는 강인구(송강호)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저 현실세계의 치열한 생존경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이 부분이 현실적 가장들이 겪는 딜레마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보여졌듯이 시스템은 절대로 희생 없는 대가를 주지 않는데, 우리네 가장들은 그 시스템에서의 성공을 통해 가족들과의 ‘우아한 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아한 세계’가 또다시 조폭의 세계를 들고 온 이유이자, 조폭이 이 시대의 가장이 된 사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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