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풍이거나, 민폐거나 어쩌다 아버지들은?

드라마 세상이 바로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다. 언제부턴가 드라마 속에 아버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현실에서 자꾸만 좁아져가는 아버지라는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아버지는 집 담보까지 집어넣었지만 결국 망한 회사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그 회사를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린 사장 앞에서 쓰러져버린다(SBS '천만번 사랑해). 이혼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어머니를, 수선집을 하는 아버지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보냈다며 그래도 여전히 생각이 난다고 쓸쓸하게 말한다(SBS '스타일').

이것은 전통적으로 남성 시청자들의 몫이었던 사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과 천명(박예진)의 아버지인 진평왕(조민기)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무능력한 왕이자 아버지다. 그는 미실(고현정)의 권력 앞에 딸을 버리고, 심지어 명백히 살해된 천명의 죽음 앞에서도 그 죽음이 사고였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실종된 드라마 세상은 어느새 여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남자들은 여성들의 간택을 받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향수어린 과거의 가치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로 그려진다. '꽃보다 남자' 이후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내조의 여왕', '아가씨를 부탁해' 같은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하나 같이 부자에 꽃미남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여성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남자의 세상을 그리고 있는 '드림'이나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종영한 '친구' 같은 작품 속에서 거친 남자는 지금 시대와는 아무런 공감을 일으키지 않는 향수로 그려진다. 그들은 여전히 성공에 목말라 하고 있고, 그 성공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미래의 성공보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작금의 가치관에서 보면, 그들의 사투는 안쓰럽게만 보일 뿐이다. 도대체 왜 그들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지 잘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젊은 남자들조차 여성의 대상이 되거나, 과거의 향수 속으로 숨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이제는 나이 들어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더더욱 자리할 곳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드라마 세상 속에서 병풍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젊은이들의 민폐로서 기능한다.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그 시대의 감정이입할 대상을 나이와 성별을 넘어 포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의 실종과 그 실종된 아버지에 대한 무관심은, 현실의 아버지들이 서 있는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이제는 한발 물러나 가족들 틈에서도 늘 뒷전에 앉아계시는 아버지들은, 그나마 소일거리로 찾아보는 드라마 속에서조차 감정이입할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대는 달라졌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그 달라진 사회를 반영하는 드라마가 과거 억압되었던 여성들을 살려내고, 마초적이기만 하던 남성들을 여성성 가득한 남성들로 그려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세계에 던져놓거나, 현실의 패배자로서만 그려지는 아버지의 존재는 문제가 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아버지 상은 도대체 없는 것일까.

‘돌아온 일지매’, 그 모성 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에서 심마니의 딸로 살아가던 달이(윤진서)는 우연히 만나게 된 일지매(정일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일지매. 무슨 이름이 계집애 같애... 눈썹이랑 코, 입 모두 여자 애 같애.” 그녀의 아찔한 도발에 일지매는 진짜 계집애(?)처럼 답한다. “놔라. 부끄럽다. 멋쩍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로 일지매는 아예 달이의 옷을 입고는 마을로 내려가 닭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여장한 일지매는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생뚱맞아 보인다. 왜 굳이 여장까지 해 보일까. 재미있어서? 일지매가 본래 꽃미남의 원조라서?

고우영 원작의 ‘일지매’를 보면 그 얼굴은 고우영 화백이 즐겨 그리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이가 지적한 것처럼 ‘일지매’라는 이름 또한 여성적이다. 훗날 일지매가 일을 치르고 나서(?) 사라지며 남겨놓는 매화 한 가지도 이 활극에 어울리지 않게 자못 여성적이다 못해 미적이기까지 하다. 왜 일지매라는 특별한 영웅은 굳이 여성의 얼굴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일지매, 그 모성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가 그리는 세계에는 모성이 삭제되어 있다. 일지매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저자거리의 걸인인 걸치(이계인)는 버려진 일지매를 데려다 젖동냥을 해가며 키운다. 이 모성 없는 세상에 버려진 일지매와, 그를 키워낸 걸인 아버지 걸치라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그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압축한다.

모성 부재의 세계 속에는 두 개의 아버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들을 눈앞에서 부정해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간 쓸개까지 다 내어줄 정도로 지극 정성인 걸치라는 아버지다. 비정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치면서(혹은 방조했고) 일지매 앞에 모성부재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일지매는 그 부재한 모성을 야성처럼 품고 있는 달이를 만나지만 그녀 역시 아버지들의 세계 앞에 목이 떨어진다.

일지매가 찾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로 인해 잃어버린 모성의 세계다. 반 미쳐 짐승이 되어버린 일지매를 굴(이 드라마 속에는 굴, 즉 자궁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한다. 달이와 만나던 동굴 같은)에 가둬버리며 열공스님은 “그 곳이 바로 네 어미 뱃속이다”라고 말한다. 열공스님은 일지매를 가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모성의 세계로 되돌려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게 될 즈음, “너는 누구냐”고 묻는 열공스님의 질문에 일지매는 말한다. “저는 이입니다. 어미를 찾아 옷섶을 헤매던 더러운 이.”

모성부재의 세계, 서민 아버지들의 모습은?
이 사극에는 모성을 빼앗아버린 아버지와 상반되는 걸치와 열공스님 이외에도 또 존재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그것은 구자명(김민종), 배선달(강남길) 같은 서민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는 근접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며 문득문득 부성애를 끄집어낸다. 구자명은 포도청의 냉철한 수사관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힘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일지매 앞에서 그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걱정을 해준다.

한편 배선달과 차돌이(이현우)는 일지매의 모성부재 상황을 또 다른 버전으로 반복한다. 차돌이는 부모가 없는 천애고아에 동네 왈패들에게 약취를 당하던 아이. 배선달은 차돌이를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며 아버지의 정을 보인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상을 보이는 구자명과 배선달 같은 캐릭터는 어딘지 고개 숙인 모습들이다. 구자명은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지만 법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배선달은 화려한 무예의 세계에 빠져있지만 자신 하나 지켜낼 힘이 없는 소시민이다.

일지매, 여성의 얼굴로 서민들을 품에 안다
모성이 삭제되어있고, 자궁의 이미지가 강조되며, 일지매라는 캐릭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사극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부재한 모성의 회복이다. 일지매는 바로 여성의 얼굴로 굶주린 서민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다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러니 이 일찌감치 어머니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일지매가 그 먼 길을 돌아 스스로 품게 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다.

국가를 흔히 어머니에 비유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자식으로 여기는 마음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의 세계 속에서 국가는 백성을 착취하는 아버지(당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아버지는 종종 권력을 좇는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의 마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일지매는 소년기 그 어머니를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서민들의 어머니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가부장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서민들의 아버지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측은한 마음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이미 살해된 존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지매를 통해 그 모성 회복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도 변하게 된다. 이것은 일지매가 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전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모성을 형상화한 영웅 일지매가 여타의 영웅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 실종의 시대, 노동의 가치를 말하다

개봉 15일만에 5만 명의 관객을 넘어선 ‘워낭소리’. 독립다큐영화로서 단 7개관 개봉으로 시작한 이 영화가 32개관으로 극장을 늘려가며 관객들의 폭발적인 찬사를 받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간에는 2007년 10개관 개봉에서 시작해 점점 개봉관을 늘려가며 22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은 ‘원스’ 성공과 비교하며, 그 흥행속도가 오히려 ‘원스’보다 빠르다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극영화가 아닌 다큐영화로서 ‘워낭소리’가 거두고 있는 이 놀라운 성적은 ‘원스’의 기염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에 이다지도 폭발적인 반응을 만드는 것일까.

사라져 버린 부리는 소, 달라진 소의 실존
‘워낭소리’에서 최원균 할아버지(80)는 이미 노쇠해버린 소를 대체할 젊은 소를 찾기 위해 소 시장을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부리는 소 있어?”하고 묻지만 그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부리는 소’, 즉 일하는 목적으로 기르는 소는 이제 거의 없기 때문이다. 후에 소가 일을 할 수 없게 된 소를 팔기 위해 소 시장에 나온 할아버지가 5백만 원 정도로 소의 가치를 매기자, 모두가 껄껄 웃으며 “그런 가격으론 못 팔아요. 일만 한 소는 고기가 질겨서 못 먹어요.”라고 말한다.

시장에서 소의 가치는 ‘일’이 아니라 고기가 되는 ‘중량’으로 판단되는 이 상황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여주려는 노동 실종 시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의 달라진 실존이 드러나는 이 대목과 함께 영화는 시종일관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 농사짓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남들이 기계로 모를 심고 농약으로 해충을 잡고, 기계로 수확할 때 할아버지는 무모하리 만큼 그 모든 일을 소와 자신의 손으로 해나간다. 말 그대로 ‘소처럼 일하는’ 이들을 보며 이삼순 할머니(77)는 연실 혀를 끌끌 차며 달라진 세상 속에서 여전히 소를 고집하는 농사를 짓는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소를 안타까워한다.

최원균 할아버지의 ‘소를 이용한 농사’는 단지 ‘소’라는 자리에 ‘트랙터’나 ‘농약’ 같은 단어를 단순히 대치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소를 이용한 농사’란 그 소와 함께 밭을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함을 뜻하고, 그 소가 먹을 꼴을 유지하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 농사를 지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와 함께 지내야할 우사가 있어야 하고, 병이 들면 수의사를 불러 고쳐주기도 해야 하는 그런 농사를 말한다. ‘일하는 소’는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사라진 소, 사라진 노동, 사라진 아버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을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 위태롭게 걸어가는 소, 트랙터가 질주하며 순식간에 일을 해버리는 논 한 옆에서 힘겹게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와 소. 이 풍경을 찾는 일은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맨 이충렬 감독에게도 그다지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전국을 거의 뒤지다시피 해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을 찾아냈다는 이 일화는 작금의 사라져버린 일하는 소의 달라진 실존을 증언해준다.

사라진 소가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라진 노동이다. 이제 노동이라고 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대부분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 일하는 소가 전하는 사라진 노동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일하는 소의 죽음과 그 소가 죽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선물처럼 남겨놓은 엄청난 양의 노동 앞에 현대인들의 무장해제되는 것은, 약삭빠르고 영리해진 세상 속에서 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소가 전하는 노동의 신성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성한 사라진 노동의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고개를 드는 얼굴이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얼굴이다. 그 노동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해왔으나 이제는 시대에 의해 거세되어 폄하되어버린 과거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소와 할아버지의 실존을 다룬 이 영화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실존이기도 하다. ‘워낭소리’에 쏟아지는 폭발적인 찬사는 불황의 된서리를 맞아 점점 더 영악해지기만 해가는 사회 속에서 바로 이 오래 전 사라져버린 아버지들이 해온 정직한 노동이 전하는 감동에 현대인들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죽어 사라진 소를 바람이 흔드는 워낭소리를 통해 할아버지가 추억하듯이,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귓가에 끊임없이 울리는 ‘워낭소리’가 대중들의 입을 타고 귀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드라마,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말하다

아버지는 죽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것처럼.

‘엄마가 뿔났다’에서 엄마가 뿔을 내는 동안,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늘 그 엄마 주변을 빙빙 돌며 눈치를 보거나 혼자 씩 웃고 있거나 가족 대소사에서 한 걸음 뒤편에 서 있었다. 그러면서 엄마가 내는 뿔을 거의 다 받아주었다. 심지어 ‘1년 간의 휴가’를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이 나서서 엄마가 살 전셋집을 구하러 다닐 정도였다.

‘엄뿔’이 보여준 아버지의 존재감
이 가족드라마에서, 그것도 가족의 변화형태를 가장 잘 포착한다는 주말 저녁 드라마가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과거의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주말 드라마의 주 시청층이 중장년 여성이란 점이 영향을 끼친 결과이겠지만, ‘엄마가 뿔났다’에서 남성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성의 시점으로 타자화되어 그려진다.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독백으로 설명되는 가족의 이야기는 그 자체가 엄마의 시선으로만 채워진다. 장남은 어딘지 부족한 인물이며, 맏사위는 이혼남이고, 둘째 사위는 어딘지 부모의 치맛폭에 사는 듯한 엄친아다. 반면 맏며느리는 생활력 강한 여성이고, 장녀는 능력 있는 커리어 우먼이며, 차녀는 성격 좋고 늘 밝고 솔직한 여성이다.

이것이 엄마의 시선이기 때문에 여성을 좀더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시선 속에서 제외되어 있는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아버지 나일석이다. 한없이 열려진 마음을 가진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은 아직까지 집안의 어르신으로 서 있는 반면, 나일석은 늘 그 바깥에 존재한다. 김한자가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할 때, 그 허락을 구하는 당사자는 나일석이 아니고 나충복이다.

이 시대 드라마가 향수하는 아버지
최근 이 같은 아버지 부재의 신호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드러난다. ‘에덴의 동쪽’은 아버지 부재의 시대에, 그 빈자리에 대한 향수를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이 비극적인 가족의 탄생은 시대가 살해한 아버지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여기서부터 강한 엄마, 양춘희(이미숙)가 탄생하고, 그 빈자리를 채우고 해체된 가족을 묶어두려 안간힘을 쓰는 이동철(송승헌)이 자리한다. 이 드라마의 힘은 시대를 과거로 돌려 현재에는 시대착오가 되어버린 강력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끌어내는 데 있다.

이렇게 강력한 아버지를 찾는 드라마들이 거의 시간대를 과거로 되돌리고 있는 점은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주말 저녁을 오랜 시간 점유하던 KBS 사극은 바로 이 아버지의 시간대였던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대 역시 흔들리고 있다. 주말 밤에 대거 포진되어 점차 사세를 넓히고 있는 엄마들의 드라마(이것은 엄마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말할 뿐이다. 사실 이 드라마는 이제 아버지들도 즐기는 드라마가 되었다)가 그걸 말해준다.

사극이 그리는 왕은 이제 아버지로서의 역할과 왕으로서의 역할을 나누게 되었다. ‘대왕 세종’은 물론 신하들과의 우여곡절이 많지만 왕으로서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펼쳐나가는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반면, 아버지로서는 한없이 약한 존재로 자리한다. 주중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 유리왕(정진영)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왕이지만, 국가의 존폐를 위해 자식을 버려야 하는 비운의 아버지다. 즉 사극 속에서 아버지라는 위치는 왕이라는 직능과 늘 부딪치는 거추장스런 옷이 되고 있다.

나일석의 어깨가 쓸쓸해보이는 이유
이것은 가족드라마가 아닌 현대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주인공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짐이 부여되지 않는다. 강마에(김명민), 두루미(이지아), 강건우(장근석)의 가족들은 드라마를 위해서 거세되었다. 반면 아버지의 모습은 ‘똥 덩어리’라 모욕을 당한 정희연(송옥숙)의 남편 박진만(이봉규)이나, 가족을 위해 오케스트라의 꿈을 접고 후배에게까지 고개를 숙이며 사회생활을 해온 박혁권(정석용)을 통해 드러난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아버지를 찾기 위해 뒤돌아보지는 않는다. 그저 지금 현실이 그렇다는 걸 말해주고는 꿈을 향해 달려간다.

‘타짜’에서 아버지는 도박 때문에 돈도 다 날리고 결국엔 죽음을 당하는 존재다. 고니(장혁)가 잡으려고 하는 욕망은 어쩌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 그 돈을 가지려는 것이며, 따라서 도박판은 이 시대 아버지들의 생사를 건 생존경쟁의 축소판이 된다. 속고 속이는 현실 속에서 늘 손모가지든 목이든 걸어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상황, 그것이 바로 ‘타짜’의 세계다.

드라마 속 이 시대의 아버지는 죽었다. 삶은 아버지에게 그만큼 팍팍해졌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아버지가 짊어졌던 현실의 짐을 나누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위의 시대가 가버린 그 자리에 남겨져 아내에게 구박을 들어도 뭐가 그리 좋은 지 킥킥 혼자 웃는 나일석의 어깨가 가끔씩 쓸쓸해 보이는 건 왜일까. 이것은 아마도 “신은 죽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가 갖게되는 상반된 두 감정, 즉 해방감과 함께 솟아나는 어떤 안타까움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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