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유산>의 호평,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의 혹평

 

부활의 김태원은 연주를 끝내고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자폐를 갖고 있는 아들과의 음악을 통한 교감. 밴드와 함께 한 연주는 여전히 서툴렀지만 적어도 김태원에게는 기적 같은 연주로 기억될 것이었다. 자폐를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무려 15년 동안이나 피하다시피 해왔다는 아들이었다. 하지만 짐으로 생각했던 아들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라는 걸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위대한 유산(사진출처:MBC)'

랩퍼 산이 역시 울컥하는 마음에 인터뷰를 중단시켰다. 힘겨운 이민 생활에서 오래도록 청소원으로 일해오신 아버지. 너무 힘겨운 삶 때문에 한 때는 엇나가기도 했던 아버지를 미워했다는 산이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학교에서 하는 청소 일을 도우며 산이는 아버지가 겪었을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변명을 하기보다 사과의 말을 먼저 전하는 아버지를 보며 산이는 아버지가 타지에서 겪었을 외로움을 공감했다.

 

에이핑크 보미는 365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슈퍼를 운영하는 부모를 잠시 쉴 수 있게 해드리고 그 일을 대신 하는 시간을 가졌다. 손님들과의 약속 때문에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가게 문을 여는 부모님. 보미 앞에서 그토록 강한 모습만 보여 왔던 엄마가 살짝 눈물을 보였을 때 보미는 결코 쉽지 않으셨을 그 삶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어디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유산이 재산 같은 것일까. <위대한 유산>에서 김태원은 아버지와 행복했던 기억을 아들에게 유산으로 주고 싶어 했고, 산이와 보미는 아마도 그렇게 성실하게 살아오신 부모님의 삶 자체가 커다란 유산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위대한 유산>의 감동은 그것이 억지스럽게 짜낸 것이 아니라 진짜 날것의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파일럿 프로그램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는 건 그래서다.

 

반면 노홍철의 복귀작으로 이미 방영 전부터 많은 말들이 쏟아져 나왔던 또다른 MBC의 추석 파일럿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왜 호평보다 혹평을 더 듣게 되었을까. 자숙 중이었던 노홍철과 여행작가 태원준, 스트리트 아티스트 료니, 모델 겸 배우 송원석, 대학생 이동욱이 함께 1인당 18만원으로 20일간 유럽 여행을 하는 것이 프로그램의 콘셉트. 사실 동명의 다큐멘터리 영화가 가진 콘셉트를 거의 대부분 예능으로 차용한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 혹평이 쏟아진 건 단지 노홍철의 복귀를 둘러싼 이견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잉여라는 제목을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여기 출연하는 출연자들이 과연 잉여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그 진정성의 문제가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즉 진짜가 아닌 잉여라는 콘셉트를 가장한 듯한 출연자들의 면면은 실제로 그들의 힘겨운 유럽 일정조차 공감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세상에 자칭 잉여라고 강조하는 진짜 잉여가 있을까. 하지만 서로 자신이 잉여라고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진짜 그런 처지에 놓인 청춘들에게는 어찌 보면 씁쓸한 일이 될 수도 있다. 특히 이렇게 잉여라는 타이틀로 자숙 후 첫 복귀 방송을 한 노홍철이 향후 방송에 버젓이 출연하는 모습을 그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결국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그 진정성의 실패로 인해 즐겁게 웃으며 볼 수 없는 프로그램이 되고 말았다.

 

<위대한 유산>MBC가 추석을 맞아 내놓은 파일럿 예능 프로그램의 성과가 되었지만 <잉여들의 히치하이킹>은 그 진성성의 결여로 인해 혹평받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이 두 프로그램의 성패는 예능 프로그램에 있어서 그 어느 때보다 진성성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걸 잘 말해주고 있다



<사도>, 왜 하필 지금 사도세자의 이야기일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사도세자를 소재로 한 사극들은 너무나 많다. MBC <조선왕조 오백년>은 물론이고 <이산>, 최근에는 <비밀의 문>에서도 사도세자가 다뤄졌다. 그러니 역사책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사도>는 이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일까.

 


사진출처:영화<사도>

물론 이 <사도>라는 영화를 읽는 독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 거의 광인으로 기록해놓은 사도세자에 대해 이토록 온정적인 시선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영화로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나, 제 아무리 왕이라도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그 비정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영조의 비애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 어떤 상징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영화가 사도세자(유아인) 스스로 짠 관 속에서 그가 나와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향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접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궁궐에 무덤을 세우고 그 안에 관을 짜고 누웠다는 것이 역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사도세자는 그것이 산송장 취급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말해줄 뿐 역모의 뜻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하지만 그 때마다 영조와 노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미 영조가 보위에 오를 때부터 연결되어 있던 노론 세력을 떨쳐내지 못하고 어떤 합의를 해나가며 오히려 사도세자를 압박하는 영조 앞에서 그는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는 자주 떳떳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앞에서 과녁이 아닌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는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말한다. 정해진 과녁에 화살을 던지는 일에서 무슨 자유와 자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뭐든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일을 처결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거침없이 펼쳐내는 정사와 삶을.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미 구축된 영조의 시스템 속에서는 노론 세력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 영조 또한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세자를 강건하면서도 노련하게 세우고 싶었을 것이지만 그는 노련함이 결국은 타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부러지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을 선택한다.

 

<사도>에서 이 떳떳함과 관의 이미지는 상당히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져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그의 궁에서의 삶을 보여주는데 그 삶이 뒤주 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왕재가 궁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구속만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산송장이라 표현했듯 자신이 원하는 뜻을 떳떳하게 펼쳐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있다.

 

거의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영화의 공간은 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궁 안에서 사도세자는 끊임없이 관에 들어가거나 뒤주에 들어가 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영조의 어명이지만 사실은 왕과 신하 사이에 만들어진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영조는 스스로도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왕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자기만의 관과 뒤주에 갇혀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지금 현재 특히 큰 울림을 만드는 건 그 모습이 현재 우리네 청춘들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떳떳하고싶을 청춘들이지만 아버지들의 원죄가 구축해놓은 부조리한 시스템은 그들의 아들들을 저 마다의 뒤주에 가둬놓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저 허공으로 떳떳하게 날아간 화살이 되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 속에 관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관을 뛰쳐나와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저 사도세자가 처한 상황 그대로가 아닌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사도>라는 영화를 통해 보다가 문득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거기서 우리네 청춘들의 좌절을 읽어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또한 그런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물 또한 들어있다. ‘떳떳한삶을 산다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비틀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관계를 만든 것일까



<장수상회>, 먹먹한 꽃할배, 아련한 꽃누나

 

<꽃보다 할배>에서 박근형은 여전히 정력적인 청년의 모습이다. 하지만 영화 <장수상회>에서 그가 연기하는 성칠은 이름에 걸맞게 성질머리 고약하고 고집 센 노인네다. <꽃보다 누나>에서 윤여정은 세련되고 섬세한 여배우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영화 <장수상회>에서 그녀가 연기하는 금님은 나이 들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가녀린 여성이다.

 

사진출처:영화 <장수상회>

꽃할배와 꽃누나의 만남은 의외로 가슴 설레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고약하고 고집 센 노인네였던 성칠이 금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이런 저런 노력을 하는 모습은 마치 이제 첫사랑에 빠진 청춘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어딘지 금님이라는 인물은 수상하다. 마침 재개발을 추진하는 마을에서 유일한 반대자인 성칠의 마음을 되돌리려 일부러 접근한 인물처럼 보인다.

 

이러한 수상함은 영화가 중반 이후로 넘어가면서 반전을 예고한다. 그 반전의 이야기는 <장수상회>가 단순한 노년의 사랑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던 이야기를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시킨다. 여기서 남녀 간의 사랑의 이야기는 가족 간의 사랑의 이야기로 나아가 사람이라면 마땅히 가질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로 커져간다.

 

<장수상회>의 아버지 성칠은 어느새 짐이 되어버린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떠올리게 한다. 혼자 살기 때문에 자신이 죽으면 장례를 지내달라며 통장과 비밀번호를 적어 놓은 성칠의 봉투를 발견하고 금님이 미안하다며 오열하는 장면은 은근슬쩍 숨겨두었던 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끌어낸다. 아마도 그 장면을 보며 뭉클해졌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이 표현은 하지 않아도 그처럼 외로웠을 거라는 걸 금님처럼 똑같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짐처럼 취급되어온 아버지에 대한 각성은 영화 속의 공간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만든다. 한 때는 논밭이었던 땅이 도시가 되고 그 도시의 한 구석에 장수상회가 세워진다. 그 장수상회는 다시 장수마트가 된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재개발을 꿈꾼다. 과거는 그렇게 조금씩 지워지고 사라져간다. 성칠이 그토록 재개발을 반대했던 것은 그저 성질 고약한 노인네의 고집에 불과했던 게 아니다. 사라져 가는 것들을 끝까지 한 자락이나마 쥐고 있고 싶은 그 간절함이 거기에는 묻어난다.

 

죽어가는 것. 사라져가는 것을 보는 일은 슬픈 일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남아있는 자식들만을 생각하는 건 아버지들의 인지상정이다. “자식은 부모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돌덩이와 같다는 말은 이런 아버지들이 표현하지 않는 속내를 잘 드러낸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건 결국 사랑이다.

 

우리 둘 중에 누가 먼저 죽든 울지 맙시다. 어차피 잠깐 떨어져 있는 거니까.” 성당에서 성칠이 금님에게 하는 이 말 속에는 사랑만이 가능하게 하는 불멸의 가능성이 담겨있다. 모든 것은 사라져가지만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그들은 여전히 살아있을 것이다. 금님과 성칠이 서로의 이름을 건네던 그 설레던 첫 만남의 기억이 영원히 남아있는 한.

 

삶은 희극처럼 경쾌해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비극처럼 묵직해진다. <장수상회>는 그래서 코미디의 발랄함과 동시에 휴먼드라마의 진지함을 동시에 보여준다. 물론 드라마틱한 장치들을 하기 위해 조금은 작위성이 들어가 있지만 그래도 그것이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어찌 보면 뻔한 노년의 사랑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영화는 거기에 멈추지 않는다. 한참 웃다가 먹먹해지고 아련해지는 그런 영화다.

 

시대, 세대, 국적을 뛰어넘는 '허삼관'의 아버지

 

한때 콘텐츠에 사용되는 무국적이라는 수식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 적이 있다. 영화에 있어서 특히 어느 나라 얘긴지 모르겠다는 평가는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나라에서 상영되는 영화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평가는 상업적으로도 성공하기 힘든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우리 영화는 역시 우리나라라는 국적을 담아낼 때 그 힘이 발휘할 수 있다고 믿어졌다.

 

사진출처 : 영화 <허삼관>

하지만 적어도 <허삼관>이라는 영화에서만은 이 무국적이라는 표현이 단지 부정적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96년에 출간된 중국 3세대 소설가인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가 원작이다. 원작의 이야기와 인물(이름도 그대로다)을 거의 가져왔지만 영화는 전후 5,60년대 우리나라가 시간적 공간적 배경이다.

 

즉 중국의 이야기를 한국화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국적을 알 수 없는 애매한 지점들이 나온다. 지명도 대전, 수원, 용인, 서울 같은 우리의 지명을 쓰고 있지만 어딘지 마을 풍경은 중국의 한 시골 같은 느낌을 준다. 중요한 것은 중국과 한국이 걸쳐져 있는 듯한 이러한 애매한 국적성이 영화에 그다지 장애물로 여겨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는 시대를 얘기하려 하지 않고, 대신 허삼관이라는 초국적이며 보편적인 아버지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허삼관>이 아버지를 그리면서도 시대를 얘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최근 <국제시장>의 아버지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국제시장>은 덕수(황정민)라는 아버지를 통해 시대를 훑어내는 영화다. 그러다보니 생겨난 선택과 집중은 시대를 재단하고 세대를 재단한다. 과거의 시대는 아버지들의 희생으로 점철된 것이고, 그 피땀 어린 희생이 있어 후세대가 이만큼 살게 됐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국제시장>이 논쟁적인 부분은 이 덕수가 살아낸 국가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현저하게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삼관>은 국가나 시대 나아가 세대를 얘기하지 않는다. 대신 어느 나라나 시대, 세대를 불문하고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는 아버지의 부성애를 얘기한다. <허삼관 매혈기>라는 원작 제목이 말해주듯이 자신의 피를 팔아 가족을 부양하는 아버지 허삼관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라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피를 판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상징적이다. 그것은 이 땅의 아버지들이 지금도 생계를 위해 고혈을 짜내듯 일을 하고, 윗사람들의 모욕을 참아내며 기꺼이 무릎을 꿇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아버지들은 누구나 가족을 위해서라면 지금도 피를 판다. 가족이 한 때의 만두 한 그릇과 붕어찜의 행복을 느끼며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말이다.

 

<허삼관>은 기묘하게도 모든 것들의 경계를 무화시킴으로써 오히려 그것을 긍정하게 만드는 영화다. 중국이든 한국이든 국적이 다르다는 게 무슨 상관일까. 과거와 현재의 삶의 양태가 달라졌다고 해서 뭐가 다를까. 심지어 내 친 자식이냐 아니냐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옛 세대의 아버지와 지금 세대의 아버지라고 해서 다를 건 뭔가. <허삼관>의 아버지는 이 모든 것들을 무화시켜버리는 보편적인 힘을 발휘한다.

 

흥미로운 건 <허삼관>을 연출하고 또 주인공으로 연기를 한 하정우 역시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그가 감독이건 배우이건 무슨 상관일까. 어쨌든 이 영화의 허삼관이라는 인물은 생색내지 않고도 감동적이니 말이다. 만일 영화를 통한 국가와 시대와 세대의 소통을 이야기한다면 경계를 해체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에 이르는 길이 아닐까. 아버지와 또 누군가의 아버지인 아들이 함께 봐도 충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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