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된 논란을 먹고 사는 이상한 방송, <화성인>

 

지난 27일 방영된 tvN <화성인 X파일(이하 화성인)>에 나온 이른바 ‘시스터보이’는 도를 넘은 이 논란 방송의 정체를 보여주었다. ‘시스터보이’. 마마보이에서 따온 이 작명은 누나들이 동생의 엄마 역할을 하는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그 실체는 ‘선정성’ 그 자체였다. 다 큰 남동생을 거의 업어 키우다시피 하고, 1분마다 뽀뽀를 해대며 엉덩이를 만지고 가슴에 입바람을 불어 넣는 등 지나친 스킨십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잠잘 때까지 꼭 껴안고 자는 모습은 이게 친 남매가 맞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자아내게 만들었다.

 

'화성인X파일(사진출처:tvN)'

사실 누나가 아니라 엄마라고 하더라도 다 큰 아들이라면 이러한 스킨십 자체가 어색했을 것이다. 물론 <화성인>이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이렇게 ‘특이한 사람들’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넘어서지 않아야 할 선은 있는 법이다. 조작 논란까지 나오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것이 제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라는 화성인이라고 하더라도 도무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화성인>의 조작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출연자들의 상당 부분이 쇼핑몰 관련된 일들을 하는 경우가 많아 끊임없이 홍보 목적의 노이즈 마케팅이라는 논란이 생겨왔던 게 사실이다. 이번 시스터보이 논란에서도 이 대목이 빠지지 않는다. 시스터보이 도한봉씨가 2012년부터 인터넷 얼짱 출신으로 피팅모델 경력이 있다고 네티즌들은 주장하고 있는 것. 결국 ‘다른 목적’으로 조작방송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SNS 상에 조작을 주장하다가 이를 다시 부인한 것에 대해서 문태주 PD는 직접 만나 확인한 결과 “악성 댓글에 상처를 받아서 사실을 부인했다고 하더라”고 밝혔다며 방송은 조작이 아님을 설명했다. 또 문태주 PD는 모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화성인들은 일반인들로, 평범하게 살던 분들이다. 방송이후 악플에 시달리다보면 항상 논란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부인을 하는 것”이라며 “<화성인>이 조작 논란에 왕왕 휩싸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문태주 PD의 인터뷰 내용 속에는 이 프로그램의 성격이 은연 중에 드러나 있다. 즉 <화성인>은 그 방송 자체가 조작 논란이 생길 수 있고, 또 방송 이후에 출연한 일반인들이 악플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시스터보이 역시 방영되었을 때 이 정도의 노이즈가 만들어질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는 PD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이미 밝혀진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굳이 그렇게 한 일반인에게 집중적인 악플이 쏟아질 수 있는 내용을 방송하는 것일까. 그것이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논란을 먹고 자라는 프로그램. 그리고 이들은 논란이 나올 때마다 원론적인 이야기로 문제를 덮으려고 한다. 즉 <화성인>은 ‘남다른 사상과 가치관을 가진 분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이며, ‘다르다는 것이 나쁘다거나 틀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라는 얘기다. 얼핏 들으면 다양성의 가치를 내세우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다양성의 가치는 중요하다. 하지만 자칫 다양성을 빌미삼아 논란 방송을 일관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다양성의 가치를 호도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시스터보이라는 화성인은 물론 존재할 수 있다. 진짜 엄마를 대신해 애틋한 마음을 가진 누나를 다루는 건 어쩌면 훈훈한 일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방송이 시스터보이라고 하면서 보여준 장면들을 보라. 대부분이 스킨십에만 집중적으로 맞춰져 있었던 것은 그 목적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그대로 말해주는 대목이 아닌가. 다양성 운운하면서 적당히 포장해 선정적인 논란 방송을 추구하는 이 이상한 프로그램을 언제까지 참고 봐야 하는 것일까.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잃었던 아버지

 

사실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어딘지 클리쉐에 발목이 잡힌 듯한 인상이다. IMF 이후 줄곧 콘텐츠 속의 아버지들은 고개 숙인 남자, 허리 휘는 가장, 그래도 꿈을 꾸려는 아저씨들,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 식탁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가족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혹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이런 클리쉐는 어찌 보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딘지 권위적인 상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대변한다. 지금은 그래서 아버지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추적자'(사진출처:SBS)

그런 의미에서 <추적자>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은 지금까지 봐왔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던 아버지의 틀을 깨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 세상의 온갖 부조리 앞에 무릎 꿇고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던 아버지와는 다른, 그 부조리에 분노하고 싸우고 있는 아버지라는 점. 이것이 기존 아버지들과는 다른 백홍석이란 아버지의 면모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다. 그것은 <아저씨>와 <마더>다. 이 두 영화는 제목처럼 모두 사회 내의 특정 부류, 즉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들과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을 세워두고는 그 클리쉐를 뒤집는다. 남자라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게만 여겨지는 아저씨라는 어딘지 늙수구레한 이미지는 이 <아저씨>라는 영화에서는 반전요소다. 이 영화 속에서 원빈이 옆집 소녀를 위해 조폭들을 하나 하나 깨부술 때, 아저씨라는 클리쉐도 부서졌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마더>는 기존 모성애로서 주로 소비되던 엄마라는 클리쉐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섬뜩한 본능으로까지 바꿔놓는 영화다. 이 영화는 엄마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그저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왔던 그 이미지를 깬다. 그런데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그간 웅크려왔던 본성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들 존재의 새로운 면모가 포착된다.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그 안에 <아저씨>도 <마더>도 갖고 있는 드라마다. 기존 아버지로 그려졌던 그 쓸쓸한 뒷모습의 아버지만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분노를 마침내 드러내는 그런 아버지. '세상 어차피 다 그런 거야' 하고 세파에 찌들어 살아오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왔던 그 아버지에게 가족은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런데 그 가족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면?

 

이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드러내는 절망과 분노에 수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 것은 작금의 사회적 상황이 아버지들에게 똑같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히며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자신을 퇴출시키는 사회의 비정함과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아버지들의 권위, 그리고 가진 자들에 의해 여전히 농단당하는 좀체 바뀌지 않는 세상이 주는 절망감과 분노.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분노하는 순간, 아버지의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회의 부조리 속에 타협하며 살아가던 아버지는 이제 그 사회와 싸워나가는 새로운 존재로 각인된다.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깨치고 새로운 아버지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아저씨의 이미지를 깨버린 원빈과 엄마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김혜자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단연 도드라지는 손현주라는 배우가 있다. 사실 손현주는 그 연기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배우지만, 어딘지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나 착한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전은 더 효과적이다. 마치 모든 어머니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김혜자가 <마더>의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이처럼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이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웬만한 충격에도 끄덕 않던 아버지들 역시 그 맷집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은 아닐까. <추적자>의 백홍길이라는 아버지를 보며 자기 일처럼 분노했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를 기꺼이 응원했다면 이미 우리가 생각해왔던 아버지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그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천일', 멜로를 넘어 인간을 담다

'천일의 약속'(사진출처:SBS)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급하게 결혼을 서두르는 모습에 아이를 갖게 된 줄 아는 엄마 강수정(김해숙). 그래서 찾아온 그녀에게 임신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임을 밝히고, 그러기 때문에 절대로 결혼 같은 건 할 수 없다 말하는 서연(수애). 강수정은 서연의 상황을 안쓰러워하고 안타까워 하지만 아들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자신을 용서하라고 한다. 그러자 서연은 말한다. 자기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다고.

어찌 보면 흔하디 흔한 멜로드라마의 한 장면 같지만 이 장면이 깊은 감흥을 주는 건 왜일까. 상황은 뻔해도 그 속에 있는 두 인물, 남자의 엄마와 남자의 여자가 서로 자기 입장만 주장하고 대립하기보다는 서로를 깊게 이해하고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때문일 게다. 강수정이 "어쩌면 그렇게 침착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로 차분한 모습을 보이는 서연은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하마터면 1년만 아드님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말할 뻔 했던 속내를 내레이션을 통해 털어놓는다. 이것은 강수정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안쓰러운 서연의 모습이 못내 눈에 밟힌다.

이 짧은 장면 속에는 '천일의 약속'이 하려는 이야기와 그것을 담아내는 이 드라마만의 방식이 잘 드러난다. 무모한 결혼을 하려는 아들을 반대하는 엄마가 그 아들의 여자를 찾아오는 이 전형적인 멜로드라마의 장면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건 모든 관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애'다. 아들의 여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꼭 껴안아주었을 강수정과, 남자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한 여자로서 이해를 구하고 그 넉넉한 품에 안겼을 서연. 그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거리를 두고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한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숨기지는 못한다. "손 한 번 잡아 봐도 돼요?" 이렇게 조심스럽게 물으며 서연의 손을 잡아주는 강수정의 모습은 그 따뜻한 마음을 드러낸다.

이것은 흔히 가족이기주의에 의해 '빗나간 모성'이 드라마의 갈등을 만들어내는 멜로드라마나 가족드라마의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다. 이 드라마는 전형적인 멜로와 가족드라마의 틀 속에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게 된 한 여자(아니 한 인간)를 세워두고 이 가족들이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가를 실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도대체 이제 모든 기억을 서서히 잃어버리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 아픈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그 인간을 위해 모든 걸 버리고 그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자식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녀를 위해 정해진 결혼마저 깨버린 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실 지극히 현실적인 잣대로 바라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식상할 정도로 뻔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보다는 자신의 혹은 자기 자식이 겪을 고통을 더 생각하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인지상정이 아닌가. 따라서 '천일의 약속'의 강수정 같은 엄마는 현실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녀는 최소한 모성과 인간애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니까. 보통의 엄마들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식을 위한 선택에는 면죄부가 성립되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그러니 이 이상적인 강수정이라는 엄마가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건, 모성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했던 그 많은 일들에 대한 참회가 섞여있을 법도 하다.

우리는 강수정 같은 엄마를 김수현 작가의 전작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본 적이 있다. 바로 그 작품에서 김해숙이 엄마 역할을 했던 김민재나, 그 아빠였던 양병태(김영철) 같은 인물들이다. 동성애자인 아들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은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성과 부성으로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일의 약속'은 여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모성애와 가족애를 넘어서는 인간애를 잡아내려 한다.

어쩌면 이것은 하나의 판타지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자식이 아닌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적어도 드라마라는 판타지를 통해 우리는 그 '인간에 대한 이해'의 자세가 갖는 위대함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제 마음이 어머니 마음과 같습니다"라고 서연이 말할 때 느껴지는 그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이해는, '결혼'이라는 지극히 통속적인 틀 따위는 벗어던진 인간 대 인간 사이에 흐르는 따스한 온기를 담고 있다. '천일의 약속'은 그래서 지금 알츠하이머라는 소재를 통해 멜로를 넘어 인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엄마의 로망은 불륜이 아니라 자기생활이다

주말 밤 가족들의 때아닌 토론(?)이 벌어진다. 그간 엄마로서 희생하며 살아온 것은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1년 간 휴가’를 간다는 건 좀 아니라는 의견과 그간 희생해온 대가로 ‘1년도 적다’는 의견이 팽팽하다. 다름 아닌 ‘엄마가 뿔났다’ 이야기. 모든 가사활동에서의 해방을 주장한 뿔난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결국 집을 나오는 길에 남편의 차안에서 “너무 좋아!”하고 소리지른다. 그 장면은 마치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하던 모 회사 광고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 ‘달콤한 나의 도시’의 은수엄마(김혜옥)는 늘 자신을 무시해온 권위적인 남편에게 “이제 헤어지자”고 말한다. 애써 차려준 밥상에서 곱게 먹어도 시원찮을 판에 늘 투덜투덜 반찬투정을 해대는 남편은 그 말마저 무시한다. 은수(최강희)는 그런 아빠를 잘 알기에 엄마의 심정을 이해한다. 심지어 엄마가 아빠 몰래 다른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까지도. 하지만 은수는 여전히 엄마가 이혼까지 하겠다는 것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이유는? 엄마니까.

은수나 김한자네 식구들이 엄마가 집을 나가겠다는데 동의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많은 시청자들도 어쩌면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다들 그렇게 사는데 유난 떠네’하면서. 하지만 이런 정서에는 무언가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암묵적인 동의, 즉 엄마로써 당연히 해야하는 의무 같은 것에 대한 가족 구성원들의 뿌리깊은 정당화가 숨겨져 있다. 이런 엄마들을 이해는 하지만 동의하지 못하는 이유가 단순히 ‘엄마니까’라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다.

이틀이 지나서야 엄마의 생일이 지난 걸 알게된 자식들에게 “너희들 왜 날 무시해?”하고 김한자가 말하는 것은 단지 그 기억 못한 생일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일 년 중 하루, 생일날에 선물이나 용돈 챙겨주고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말하면서 나머지 364일을 엄마로서의 의무에 더 충실하라 강요받아온 그 숨막히는 세월 때문이다. 뒤늦게 하게된 생일 상에 선물들을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자식들은 그것으로 또 일 년을 넘겨보려 했지만, 김한자는 이미 알아버렸다. 그런 매년의 이벤트가 자신의 인생에서 자기만의 삶을 지워버리고 있었다는 걸.

매년 5월8일이면 떠들썩하게 어버이날이라 해서 이 땅의 자식들을 부모님께 카네이션을 달아드린다. 자식이 부모 공경하는 것이 무에 나쁠 것인가. 중요한 것은 그 하루의 이벤트가 아니라 평상시에 부모의 행복을 살뜰히 살피는 것이 아닐까. 이 어버이날의 전신으로 만들어졌던 ‘어머니날(1956)’이 사실은 전통적인 부모의 상(신사임당 같은)을 내세우며, 끊임없는 인내와 희생을 강요하는 역할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은수가 이혼을 결심한 엄마에게 “엄마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도 늘 엄마는 자신의 이름이 거세된 엄마로만 불려지길 바랐던 건 아닐까. 엄마가 원하는 건, 생일이나 어버이날 같은 기념일도 아니고, 그렇다고 탈법적인 불륜이나 탈선도 아니다. 그저 자기 생활을 갖고 싶을 뿐이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엄마들의 자기 주장은 그저 뿔난 엄마들의 반란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는 여전히 꿈꾸기 힘든 엄마들의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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