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들>의 성취와 이병헌에 대한 호불호는 별개

 

영화 <내부자들>에 대한 관객 반응은 뜨겁다. 개봉 첫 주에 160만 관객을 동원해 역대 청불 영화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고 최단기간 100만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웠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건 지금이 영화 비수기로 불리는 시기라는 점이다. 이런 시점에 <내부자들>이 이런 결과를 냈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출처:영화<내부자들>

<내부자들>은 확실히 이런 기록을 낼만한 영화적 성취를 갖고 있다. 그 첫 번째 힘은 윤태호 원작이 갖는 그 스토리에서 나온다. 이미 <베테랑>에서 우리가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 사회 현실 속에 상존하는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대중들의 공분은 깊다. <내부자들>은 이 부조리의 심층부를 모두 도려내서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정계, 재계, 언론계, 법조계가 <내부자들>의 도마 위에 오른다. 그것만으로도 대중들은 반색할 만하다.

 

두 번째 힘은 이런 스토리를 실제처럼 만들어버리는 연기자들의 빈틈없는 연기다. 백윤식이나 이경영, 조승우, 이병헌까지 착한 역할은 좀체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 욕망의 질주를 보여주는 연기들은 보는 이들을 공분하게도 하고 때로는 통쾌하게도 만든다. 이 정도면 악역 연기의 각축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흥미로운 건 <내부자들>의 이런 성공과 함께 솔솔 피어나고 있는 이병헌에 대한 언론의 반응이다. 마치 <내부자들> 하나로 그간 이병헌에게 쏟아졌던 비난들이 모두 잠재워지기나 한 것 같은 호들갑이다. 성급하게는 이제 모든 액땜을 한 이병헌이 <내부자들> 한 편으로 대중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영화고 이병헌은 이병헌이다. 야속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영화에 대한 호평은 당연하다. 실로 잘 만들어진 영화니까. 또 연기에 대한 호평도 마찬가지다. 실로 이 영화 속에서 이병헌은 연기를 잘했다. 게다가 연기를 떠나서 그 밑바닥까지 보여주는 악역은 지금 현재의 이병헌에게는 그토록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그러니 연기는 잘 했다고 칭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병헌에게 면죄부가 될 순 없다. 대중들은 여전히 지난 50억 협박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이병헌의 행실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건 영화가 성공하든, 연기를 잘했든 쉽게 사라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마침 그에게 딱 맞는 캐릭터가 <내부자들>에 있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만일 그가 지금 시점에 깡패 역할이 아닌 순애보의 남자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같은 반응이 나왔을까. 제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대중들이 몰입하긴 어려웠을 것이다.

 

영화의 성공 때문일까. 이병헌은 광고에 공공연히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제 논란이 만들어냈던 그 불편함을 스스로 털어 버린 듯한 모습이다. 여기에 공조해 언론들도 일제히 이병헌의 재기를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반응에 대해 대중들은 여전히 냉담하다. 이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이병헌이 오롯이 연기자로 다시 서게 되는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작품 하나 잘 한 것으로 호들갑을 떨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기자는 연기만 잘하면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 연기자의 어떤 일상적인 행동이나 태도는 고스란히 그의 연기를 바라보는 대중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러니 연기는 어찌 보면 그저 만들어서 가짜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제 첫 단추를 끼운 것이나 마찬가지다. 섣부른 샴페인 터트리기보다는 자신을 한껏 낮추고 지금부터 한 걸음 한 걸음 연기로 대중들에게 다가가겠다는 그런 겸허함이 필요할 때가 아닐까.



이병헌 때문에 안 본다? 그러기엔 <내부자들>이 너무 아깝다

 

이병헌 때문에 안 본다? 여전히 대중들에게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이병헌이다. 그래서 그가 출연하는 영화마다 그런 얘기가 나온다. <터미네이터 제네시스>가 방영됐을 때도 그랬고 <협녀>가 영화관에 걸렸을 때도 마찬가지 목소리가 나왔다. 결과적으로 보면 <터미네이터><협녀>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 안 좋은 성적에는 크든 작든 어떤 식으로든 이병헌의 이미지가 작용했을 수밖에 없다.

 


사진출처:영화<내부자들>

그렇다면 <내부자들>은 어떨까. 이병헌에 대한 대중들의 좋지 않은 이미지를 떼놓고 보면 꽤 잘 만들어진 영화다. 대본도 촘촘하고 연기도 나무랄 데가 없다. 우리네 현실의 암담함을 부패한 정계와 재계 그리고 언론과 법조계까지를 망라해 싸그리 그 추악한 맨얼굴을 드러내 보이는 영화이니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소 과장되게 엽기적인 일들을 벌이면 벌일수록 묘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영화다.

 

그 느낌은 이렇다. 우리가 신문지상이나 방송을 통해 접하듯, 짐짓 정의를 부르짖고 또 너무나 신사적인 행동과 지적인 말들을 번지르르하게 하던 그런 인물들이 시종잡배들처럼 쌍욕을 섞어서 얘기하는 장면을 볼 때의 느낌이다. 그건 그 자체로 폭로의 성격을 띤다. <내부자들>은 그런 영화다. 착한 인물 찾기가 어려운 이 영화는 그 더러움을 더욱 더럽게 그려내는 것으로서 숨겨진 실체를 폭로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이 영화에서 이병헌이 맡은 역할은 정치깡패 안상구라는 인물이다. 잔혹하기가 이를 데 없고 몰디브와 모히또를 헷갈릴 정도로 무식하다. 결코 착한 인물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안상구라는 인물은 처음 볼 때는 살벌한 깡패였지만 차츰 동정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게 된다. 그 이유는 나쁜 놈들보다 더 나쁜 놈들이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안상구는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해 보이는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건 복수심이다. 안상구의 복수심은 그래서 관객들이 이 영화 속의 추잡한 정재계언론에 있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보며 갖게 되는 증오와 잘 맞아떨어진다. 절대 좋은 인물은 아니지만 공동의 적을 갖게 되면서 일종의 동지의식 같은 걸 느끼게 된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보면 이병헌과 안상구라는 인물의 만남은 기막힐 정도로 주효했다고 여겨진다.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병헌에 대한 불편함은 이 영화 속 안상구라는 인물이 주는 불편함과 기묘하게 어우러진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더 큰 악당들과 마주하면서 조금씩 상쇄되고 급기야는 시시껄렁해도 그나마 인간적인 안상구라는 인물에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을 영화가 그리고 있다는 건 배우 이병헌으로서는 굉장한 기회가 아닐 수 없었을 게다.

 

물론 연기를 기가 막히게 했다고 해도 그걸로 대중들의 마음이 쉽게 풀어질 것 같지는 않다. 연기는 연기고 남는 불편함은 불편함이다. 하지만 연기자로서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괜찮은 영화조차 망가지게 할 수도 있다는 그 불안감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불거진 사건 때문에 아마도 이병헌은 순수한 이미지나 고고한 이미지의 역할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기자는 물론 연기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의 평상시 이미지와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몰입을 방해하는 역할은 응당 피하는 게 대중들에 대한 예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부자들>의 안상구라는 인물은 꽤 이병헌에게는 맞춤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걱정 마시라. 이병헌은 이 영화에 기능적으로 잘 어우러져 있고 그것이 불편한 느낌을 주지도 않으니. 그 때문에 영화를 안 보기엔 <내부자들>이 너무나 아까운 걸작이다.



참가상 된 대종상, 누가 참가하겠나

 

국민이 함께 하는 영화제인데 대리 수상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참석하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주기로 결정했다.” 공식기자회견 자리에서 대종상측이 이런 입장을 밝혔다는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제 아무리 참석을 독려한다는 취지로 했다고 하더라도 그걸 그런 식으로 공표하는 건 무리수 중의 무리수라고밖에 볼 수 없다.

 


사진 : 제52회 대종상영화제 포스터

물론 대종상측의 입장이 일견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결국 시상식의 꽃은 역시 연기자들이다. 어떤 스타가 참석하느냐에 따라 시상식의 위상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니 대리수상이 남발되는 것은 피해야할 일이다. 그래서 그런 식의 엄포를 놓은 것일 게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도대체 언제 적 대종상인가. 대종상의 권위와 위상이 땅에 떨어진 건 이미 오래 전이다.

 

오죽하면 대충상이라고까지 불리게 됐을까. 상영도 안된 영화에 상을 주고,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없는 시상에 심지어 몰아주기식 시상으로 매 해 빈축을 사왔던 대종상이다. 그러니 공정성에 흠집이 간 건 오래고 신뢰도 권위도 없는 상이 되어버렸다. 가장 오래된 영화상이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구태의연한 관행으로 점철된 영화상이라는 의미처럼 들리게 되었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 대종상은 참가하지 않으면 상을 주지 않는다고 엄포가 아닌 사정을 해도 모자랄 일이다. 배우들의 대거 불참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대종상이 밝힌 대로라면 논란이 불거진 대로 상은 참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좋은 작품에서 열심히 연기를 해 그 공정한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시상식에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에 받는 듯한 그 뉘앙스는 연기자들로서는 부담스럽고 불편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유아인, 하정우, 엄정화, 한효주, 김혜수, 황정민, 전지현 등등 모두가 자신들의 스케줄을 이유로 불참을 양해하고는 있지만 이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빠져나간 건 단지 우연적인 일로 보기는 어렵다. 그 시상의 불편함이 몇몇 연기자들의 발길을 돌리게 만들었을 테고 그건 도미노처럼 다른 연기자들의 불참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다들 빠져나가는데 혼자 나가 앉아 있는 것도 우스운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것도 참가상이라는 오명까지 덧붙여지니 더더욱.

 

참가를 독려하려 했다면 공표할 일이 아니라 조용히 배우들에게 협조를 요청했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대종상측의 경거망동은 그잖아도 땅에 떨어진 상의 권위를 더 바닥으로 내팽개쳐버린 결과로 이어졌다. 도대체 왜 이런 자충수를 두게 된 것일까.

 

가장 큰 것은 대종상측이 아직까지도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는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간 매해 반복되어온 시상의 잡음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불러왔다. 그 누구도 대종상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고 여기는 마당에 주최측만은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대종상이 앞으로도 계속 존속하기를 원한다면 대중들이 이 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오랜 상의 역사는 그 자체로 권위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꾸준히 대중들과 공감대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이 그 역사는 비로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권위도 없고 소통도 되지 않는 상. 어쩌다 참가상이 되어버린 대종상에 참가할 연기자가 누가 있겠는가.



<용팔이>, 한여진과 김태희의 반전은 가능할까

 

무릎 꿇어!” 한여진(김태희)의 이 한 마디는 <용팔이> 핏빛 복수극의 서막이 될까. VIP 병동에 따로 마련되어 있는 한여진의 개인병동은 병실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화려한 최첨단 시설들이 들어차 있다. 마치 SF 장르에 나오는 미래의 공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최첨단의 공간은 그간 한여진을 묶어 놓는 감옥이었다. 그녀는 그 곳에 눕혀진 채,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처지였다.

 


'용팔이(사진출처:SBS)'

그런데 이제 깨어나 다시 그 병실로 돌아온 한여진에게 그의 아버지는 그 곳이 바로 너의 왕좌라고 말했다. 눕혀져 있던 병상은 세워져 왕좌가 되어 있었고, 그 곳에 앉은 한여진은 아버지가 남겨놓은 한신그룹의 비자금 내역을 손에 쥐고 회사의 모든 중역들과 정재계 인물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병상을 용상으로. <용팔이>에서 이 한여진의 병실은 중요한 이중적인 의미를 띄고 있다. 한편으로는 일반 서민들의 병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최첨단 시설이 들어간 화려한 외관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관에도 불구하고 한여진은 그 시설에 갇히고 묶여진 존재로 그려졌다. 만일 이 화려한 병실이 부유한 삶이 가진 자본의 풍경을 표징하는 것이라면 한여진이라는 인물의 기구함은 재벌의 화려함이 아니라 자본에 포획된 기구한 운명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한신그룹이라는 재벌가는 그래서 마치 자본 쟁탈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자본기계들의 정글이다. 고사장(장광)이 자본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는 범죄자의 얼굴을 갖고 있고, 그와 모의하는 한도준(조현재) 회장과 나누는 이야기들이 마치 조폭의 세계를 보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자본의 세계가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에둘러 말해준다.

 

결국 <용팔이>에서 이 비정한 자본의 세계와 맞설 수 있는 인물은 한여진이다. 그녀는 오랜 동안 병상에 묶여진 사슬을 끊고 나와 이제 그 곳을 용상으로 바꾸려 한다. 물론 그녀의 옆에서 그녀가 싸울 수 있게 지지해주는 김태현(주원)이란 존재가 있지만, 그녀의 핏빛 복수극이 향후 어떤 방식으로 흘러갈 지가 <용팔이>의 주요 관전 포인트가 되는 셈이다.

 

<용팔이>가 초반의 그 몰아치는 힘을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김태현이라는 캐릭터에서 비롯됐다. 스스로 속물의사라고 말하면서 사실은 돈 없으면 살 사람도 죽을 수밖에 없는 병동에서 어떻게든 환자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이 숨은 휴머니스트의 안간힘에 시청자들은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김태현이라는 휴머니스트의 동분서주에만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이 한신병원으로 표징되는 자본의 부조리한 세계와 그 폭력을 해결하는 방법은 이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일이다. 그 열쇠를 쥔 인물은 결국 한여진이다. <용팔이>의 후반부 이야기가 한여진에 의해 주도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늘 누워 있고, 깨어나서도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며, 심지어 실어증을 가장한 채 한신병원에 숨어들어 있는 한여진이란 존재는 마치 연기자 김태희의 처지를 그대로 닮았다. 물론 그 누워 있는 연기가, 얼굴을 가린 채 실어증을 가장하는 연기가 쉬운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자로서 드라마에서 확실한 자기 존재를 드러낼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병상을 용상으로 바꾸려는 한여진이라는 인물의 변신과 누워만 있다가 이제 깨어나 핏빛 복수극을 시작하려는 김태희라는 연기자의 반전은 서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과연 한여진은 병상을 용상으로 바꿀 수 있을까. 또한 김태희는 이 연기를 통해 자신의 연기자로서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을까. 한여진과 김태희의 반전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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