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드라마를 보면 연기자가 보인다

최근 홀연히 나타나 주말 드라마의 판도를 바꿔놓은 연기자가 있다. 바로 사극의 제왕, 유동근. 그는 갖은 비판과 혹 허우적대던 ‘연개소문’을 단박에 기대감으로 채웠다. 그의 출연과 함께 ‘연개소문’이란 사극은 지금부터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심지어는 지금까지의 ‘연개소문’이 걸어온 길은 그저 사족에 지나지 않았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만든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렇게도 어려웠던 시청률 25%를 손쉽게 넘기면서 수위를 지켜오던 경쟁사극 ‘대조영’을 제쳐버렸다. 그런데 이런 결과가 단지 유동근이라는 대배우만의 힘이었을까. 여기에는 물고 물리면서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하는 연기자들의 부침이 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지킨 ‘대조영’의 연기자들
주말드라마 삼파전에서 가장 불리한 시간대를 갖고 있는 것이 ‘대조영’이다. 9시부터 시작하는 ‘연개소문’과 10시부터 시작하는 MBC 주말극 사이인 9시30분대에 끼어있어, 양 드라마의 공격을 받는 형국이 되기 때문. 만일 ‘연개소문’의 청년시절이 좀더 존재감 있게 흘러왔다면 ‘대조영’은 맥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시절의 ‘연개소문’은 존재감이 없었다. 그나마 그 드라마의 힘을 이어준 것은 김갑수라는 괴물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특유의 광기 어린 연기로 수양제역을 소화함으로써 연개소문의 공백을 채워 넣었다.

‘연개소문’과 함께 한창 ‘환상의 커플’이 상종가를 치며 앞뒤로 압박해왔을 때 ‘대조영’을 지켜낸 인물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조영’의 연개소문 역을 한 김진태였다. 호랑이 같은 눈빛을 부라리며 안면근육을 떨며 호통을 치는 모습에 빨려들지 않을 시청자가 없었다. 때론 자상한 아버지처럼, 때론 광기 어린 제왕처럼 변신의 변신을 보여주는 김진태 앞에 양만춘 역할의 임동진이 가세하자 그 힘은 하늘을 찔렀다. 심지어 연개소문이 죽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이 두 카리스마의 충돌이 빚어내는 숨막히는 연기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드라마는 제목이 ‘연개소문’이나 ‘양만춘’이 아닌 ‘대조영’이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인공 대조영이 차츰 앞으로 나오고 그들은 역사 속에 사라져야할 인물들이었다.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김진태가 사라진 자리를 양만춘 역의 임동진이 채워 넣었으나 그마저 사부구(정호근 분)가 제거해버리자 ‘대조영’의 드라마적인 힘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빈 자리를 온전히 대조영 역할의 최수종이 채워놓기도 전에 유동근이 출연한 것이다.

진짜 ‘연개소문’을 만드는 연기자들
결과적으로 ‘대조영’에서 만들어놓은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기대감은 새로운 ‘연개소문’을 도와준 격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새롭게 주말드라마의 강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유동근 이외에도 새롭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이 선 굵은 카리스마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의 책사 역할로 돌아온 우리의 영원한 시라소니 조상구, ‘야인시대’의 나미코 역할은 물론이고 ‘대장금’에서 장금과 열띤 경쟁을 벌였던 이세은, ‘태조 왕건’에서 견훤 역할을 했던 서인석 등이 가세하자 유동근의 절대 카리스마와 조화를 이루면서 기대감을 만들었던 것. 여기에 ‘대조영’에서 익숙해진 ‘검모잠(안승훈 분)’같은 인물의 출연은 재미를 더해주었다.

따라서 이것은 지금까지의 ‘연개소문’과는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드라마가 연출될 공산이 크다. 적어도 연기자들만큼은 확실한 힘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걱정되는 것은 마치 역사를 가르치는 듯한, 설명조의 지지부진한 전개로 비판을 받아온 이환경 작가가 얼마나 속도감 있게 이들 연기자들의 맥을 살리면서 긴박한 드라마를 엮어나갈 것인가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기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제대로 살릴 수 있는 캐릭터의 설정이나 스토리 진행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지금 ‘연개소문’은 그 연기자만으로 충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
이 경쟁에 가세하는 것이 바로 ‘하얀거탑’의 노련한 연기자들이다. 상황으로 보면 ‘대조영’을 진퇴양난의 입장에 빠뜨린 것은 바로 이들이다. 이름만 들어도 존재감이 팍팍 느껴지는 외과과장 이주완 역할의 이정길. 그는 특유의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상황에 따라 굴욕적인 면모 역시 거침없이 보여주는 호연에 힘입어 네티즌들에게 ‘인쇄정길’, ‘굴욕정길’로 불릴 정도다. 의국실로 프린트되는 외과과장후보 이력서를 가로채기 위해 달리는 모습과 노민국의 호텔방 앞에서 무릎을 꿇는 장면으로 이런 호칭이 붙여졌다.

이정길과 손을 잡았다가 또 뒤통수를 때리는 부원장 우용길 역할의 김창완은 특유의 능구렁이 연기로 호평을 받고 있다. 그의 연기는 뒤통수를 치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럽다는 것. 그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그 놀라운 연기변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물론 주인공 장준혁 역할의 김명민은 특유의 야누스적인 면모를 과시하며 악마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정이 느껴지는 쉽지 않은 인물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에 저 영화 ‘괴물’에서 주목받은 변희봉(오경환 역), ‘영웅시대’에서 천태산의 차남 역할로 나왔던 정한용(민충식 역), ‘제5공화국’에서 허문도 역할로 열연했으며 각종 사극에서 감초 역할을 확실히 해준 이희도(유필상 역) 역시 이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주는 연기자들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이들 얼굴
요즘 주말드라마는 유독 클로즈샷이 많다. 그것도 극단적인 클로즈샷이다.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까지 보일 정도로 화면의 거의 2/3를 채우는 이들 연기자들의 얼굴. 이러한 장면들은 드라마의 성패에 얼마나 연기자들의 존재감이 중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드라마 속에 확실한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있다면 그 드라마는 그 힘을 기반으로 어떻게든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이들 존재감을 주는 연기자가 주연이 아닐 경우, 이들 연기자들 사이에서 그 힘에 눌린다면 드라마의 중심 축이 흔들린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유동근이라는 확실한 중심축이 선 ‘연개소문’은 일단 기선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하얀거탑’ 역시 차츰 주인공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이미 고정층을 확보한 ‘연개소문’의 아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대조영’. 사실 지금의 주말드라마 판도를 가장 도와준 격이 되었지만, 가장 곤란한 시간대에 자리잡아 양측에 공격을 받는데다 아직까지 대조영으로서의 최수종이 확실히 자리매김을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힘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분명한 것은 그 힘을 만들어 드라마를 성공으로 웃게도 하고 실패로 울게도 만드는 이들이 연기자들이라는 것이다.

MBC 사극 ‘주몽’이 연장에 돌입한 이래, 시청률은 조금씩 반등하고 있다. 그렇지만 연장을 하면서 “완성도를 높이겠다”던 애초의 약속은 실종된 상태. 여전히 에피소드식 전개와 개연성 없는 설정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긴장감의 결여. 현재 드라마 ‘주몽’의 전개방식은 사전에 모든 정보를 누출하는 치명적인 결함을 보여주고 있다. 부분노가 부여에 있는주몽의 충실한 세작 역할을 할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이미 주몽이 죽었다고 판단하는 데다, 먼저 200여 명의 선발대만을 끌고 온 대소와 주몽의 전투는 보나마나한 것이 된다. 아무래도 이것은 스케일 논란을 벗어나려는 무리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이런 상황에서 그 결과를 짐작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다.

앞으로 벌어질 부여의 봉쇄 조치로 졸본이 위험에 처한다는 설정 역시, 이미 긴장감을 잃은 상태다. 그것은 벌써 저 해적대장 부위염이 자신의 아버지 유품을 꺼내놓을 때부터 시작됐다. 아버지가 본래 다물군이었다는 것. 그래서 주몽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은 굳이 없었으면 더 좋았을 설정이다. 주몽 스스로의 설득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를 올리고 쓰러지는 주몽을 본다해도 거기서 어떤 긴장감을 찾기 어려운 것은 이미 주몽이 보내놓은 해결책들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좀더 극적으로 끌고 가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책이 제시되었다면 더 긴장도를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긴장감을 한층 더 떨어뜨린다. 부분노가 고작 네 명의 별동대를 데리고 가는 장면도 이해하기가 어렵고, 화공을 한다고 하면서 불화살 몇 번 쏘고 결국에는 백병전으로 가는 장면은 아무리 주몽과 대소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이 중요하다 해도 기대감을 무색하게 만든다. 더 문제가 있는 것은 바로 한 겨울의 역병이라는 설정. 봉쇄조치에 이은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라고는 하지만 허점이 너무 많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드라마 전개에 있어 사족이 될 뿐인 난데없는 예소야와 설란의 유리 쟁탈전은 물론이고, 금와의 지나칠 정도의 광기(유화부인을 죽이겠다고 할 정도로)는 불필요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드라마적인 완성도의 실종에도 불구하고, 드라마 ‘주몽’이 어떤 힘을 갖는 것은 그나마 캐릭터 자체가 갖고 있는 힘과 연기자들의 호연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 자신이 주몽인 것처럼 혼신의 열연을 펼치고 있는 송일국은 카리스마는 물론이고 따뜻한 인간애까지 연기로 소화해내고 있으며, 역시 대소 역할의 김승수는 제대로 된 악역을 서릿발 넘치는 눈빛으로 연기해내고 있다. 주목할 인물로 최근 스토리에서 중요해진 부분노는 그 캐릭터 하나만으로 몇 회분의 드라마를 이끌어가고 있다. 가장 연기력이 돋보이는 인물은 금와왕 역의 전광렬. 그 억지스런 설정에도 오히려 전율을 느끼게 만드는 그의 호연은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게 한다.

하지만 아무리 연기자들이 호연을 해도 긴장감이 떨어지면 드라마는 힘을 잃게 된다. 빠른 전개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지금처럼 확실한 호적수가 보이지 않는 ‘주몽’에서는 한 템포 늦춰야 한다. 이제 주몽을 대적할 호적수가 천재지변 같은 것이라면 미리 예견할 수 있는 장면들은 피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너무 주몽 혼자 앞으로 계속 달리는 형국이라 적으로 설정된 대소나 금와, 한나라가 뒤쫓아오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그 외의 인물들, 예를 들면 영포나 설란, 원후, 유화부인 등등이 드라마에 재미를 주지 못하고 사족이 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주몽’은 인물 전체가 움직이지 못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에피소드의 인물들이 나왔다가 주몽에게 패퇴하는 장면만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다. 연기자들의 호연에 긴장감 있고 짜임새 있는 극적인 스토리가 덧붙여진다면 시청률이라는 호랑이에 완성도라는 날개도 달 수 있지 않을까.

최근 연기력을 두고 논란이 되는 연예인들이 있다. 이들에 대한 비판은 배역과 연기가 따로 노는 데서 비롯한다. 관객 혹은 시청자 입장에서는 도무지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 비판받는 연예인들을 우리는 굳이 연기자라 부르기가 꺼려진다. 진정한 연기자라면 자신을 과감히 훌훌 털어 버리고 배역에 자신을 완전히 몰입시킬 수 있어야 한다. 연기자들이 배역 때문에 수없이 망가지면서도 그것으로 인해 오히려 아름답고 박수 받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올 한 해도 망가진 만큼 아름다웠던 많은 연기자들이 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끼, 류덕환
‘웰컴 투 동막골’에서 동구 역으로 그 가능성을 보여준 류덕환은 ‘천하장사 마돈나’에서 역시 동구 역으로 확고한 연기자로서 자리매김했다. 이 나이(1987년생)에 이처럼 깊이 있는 내면연기가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영화 속 오동구가 되기 위해 20kg을 찌우는 것은 어쩌면 내면연기보다는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마돈나가 되고 싶은 천하장사’. 자칫 잘못하면 코미디에 묻혀 영화가 말하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진정성을 놓칠 수도 있었던 상황. 그러나 이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된 연기를 류덕환은 너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진짜 연기자가 아니면 난감할 수 있는 이 오동구라는 역에 기꺼이 자신을 망가뜨렸다. 그는 디렉터스 컷의 신인연기상을 받았다.

광기와 감성을 잡은 김래원
MBC 드라마,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김래원은 늘 하던 그 모습을 연기했다. 도회적이면서 장난기 많은 김래원표 연기. 하지만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작년 개봉했던 ‘미스터 소크라테스’에서 살짝 드러냈던 광기를 ‘해바라기’에서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영화는 반 이상이 김래원의 공이라 할 정도로 그의 온몸을 던지는 미친 듯한 연기가 한 몫을 해주었다.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죄의식에, 순간 순간 튕겨 나오는 광기가 어루러져 마지막 라스트 신의 폭발력을 갖게 만들었다. 김래원은 이 연기를 통해 액션연기에도 감성적인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0여 년 연기 세월의 내공, 변희봉
영화 ‘괴물’을 통해 비로소 그 진가를 알아보게 된 배우. 그러나 그의 연기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었으니 40여 년 조연과 단역으로 잔뼈가 굵은 결과였다. ‘수사반장’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범법자의 역할을 단골로 해오던 그는 차츰차츰 자신만의 스타일로 개성강한 단역들(점쟁이 같은)을 소화해낸다. 그를 제대로 알고 제대로 기용한 인물은 바로 봉준호 감독. ‘플란다스의 개’서부터 ‘괴물’까지 함께 작업을 해오다 드디어 ‘괴물’의 박노인이란 캐릭터로 들어와서는 그 진가를 발휘한다. 부성 가득한 할아버지면서도 어딘지 기괴하고 괴팍한 구석이 있는 연기를 연기9단답게 소화해냈다.

웃으면서 우는 연기의 달인, 유오성
KBS 드라마 ‘투명인간 최장수’로 돌아온 유오성은 영화 ‘친구’에서의 섬뜩한 카리스마는 버렸다. 대신 그가 입은 최장수라는 옷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헌신적인 ‘우리 시대의 아버지’이다.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는 역할을 맡아 진짜 환자 같은 섬뜩한 연기를 보여준 유오성은 특히 웃으면서 우는 연기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웃음 끝에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과 오열하며 콧물에 범벅이 되었지만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그것을 아름답게 느꼈다. 이미 똑같이 최장수가 되어 눈물, 콧물을 같이 흘렸기 때문이다.

솔직 대담해진 연기, 고현정
다시 돌아온 고현정은 과거 청순 이미지를 과감히 벗어버렸다.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 문숙 역을 맡은 그녀는 그간의 공백기간을 단 몇 마디의 꾸미지 않은 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채워버렸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답변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그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마저 느껴졌다. TV 속으로 돌아온 고현정은 ‘여우야 뭐하니’에서 노처녀 고병희 역할을 맡아 어딘지 어리숙하면서도 솔직하고, 내성적이면서도 대담한 연기를 소화해냈다. 그녀의 거침없는 망가짐은 오히려 ‘그 속에서 더 귀여운’ 그녀만의 독특한 자신감으로 나타난다.

변신의 귀재, 김윤석
KBS 드라마, ‘인생이여 고마워요’에서 평범해 보이는 남편 역할을 보여준 김윤석. 우리는 그가 ‘타짜’의 아귀로 등장했을 때 동일인물인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평범한 얼굴은 순식간에 살 떨리는 카리스마로 변신해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약간 기우뚱한 자세로 노려보는 그는 저 허영만 만화 원작에서 보았던 그 인물, 천상 아귀였다. 사실 만화 속의 아귀는 그 이름에서부터 풍겨나듯 만화적인 인물. 따라서 영화화되면서 그 형상화하기가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김윤석은 오히려 이 어려움을 기회로 만들었다. 그는 온전히 아귀를 자신의 한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개성으로 승부, 유해진
유해진을 통해 우리는 연기자의 얼굴이 때로는 보통, 아니 보통 이하여야 더 유리할 수도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다 잘생긴 연기자들이 작품 속에 들어오는 경우, 유해진의 얼굴은 오히려 강력한 무기가 될 수도 있다. 물론 전제가 있다. 그 얼굴을 개성으로 바꿀 수 있어야 된다는 것. 영화 ‘타짜’를 통해 유해진은 바로 그것을 보여주었다. 어설프게 폼잡지 않고 완전 캐릭터에 몰입해 시종일관 입을 가만두지 않는 이 정이 가는 타짜를 보면서 유해진의 연기 공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천의 얼굴, 박용우
13년 동안 그닥 눈에 띄지 않았던 박용우는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그 진가를 보여주었다. 소심하면서도 우습고 그러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느낌마저 주는 눈빛 연기가 예사롭지 않았는데 그걸 통해 박용우는 ‘달콤하고 살벌한’ 느낌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연기에 대한 욕심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조용한 세상’의 김형사는 ‘달콤 살벌’의 대우와는 상반된 캐릭터. 일상에 찌들어 있는 유들유들한 성격의 인물이다. 코믹으로 성공한 그가 다시 코믹이 아닌 장르로 뛰어든다는 것은 모험이지만 그것은 연기자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바닥을 치고 올라온 추자현
영화 ‘사생결단’에서 마약에 취한 추자현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손을 부들부들 떨고 불안한 듯 허공을 쳐다보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자신을 버리고 저 바닥에 드러누운 연기자의 그것이었다. 그녀의 역할은 어찌 보면 황정민, 류승범 사이의 대결구도 속에서 그다지 큰 비중의 역할이 아니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순간들에 자신을 버리고 혼신을 다해 연기한 그녀는 대종상 신인여우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신인여우상, 여우조연상에다 올해 감독들이 시상하는 디렉터스 컷의 신인연기상까지 거머쥐었다. 노출연기에서부터 부산사투리까지 소화해낸 그녀는 바닥에서 비로소 연기를 낚은 연기자이다.

망가짐이 아름다운 배우, 예지원
연기자가 망가질수록 더 아름답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이가 바로 예지원이다. ‘올드미스다이어리’에서 그녀는 손톱만큼도 ‘예쁜 척’을 하지 않는다. 그냥 그 캐릭터 그대로의 최미자가 된 셈인데, 술에 취해 비틀거려도, 과하게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려도, 심지어는 심한 키스로 입술이 퉁퉁 불어도 어찌된 일인지 밉지가 않다. 이 정도면 거의 빙의가 된 셈인데, 예지원이 최미자가 된 것인지, 본래 최미자가 예지원에서 비롯된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다. 망가짐의 미학을 기대할 수 있는 연기자다.

연기자는 매번 망가져야 한다
이밖에도 자신을 충분히 망가뜨려 작품을 살린 배우들은 많다.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박중훈, ‘왕의 남자’의 감우성, 이준기, 정진영, ‘타짜’의 조승우, 김혜수, 백윤식, 드라마 ‘연애시대’에서 제대로 연기맛을 보여준 손예진, 드라마 ‘주몽’에서 제대로 악역을 해준 대소 역의 김승수와 굴욕을 보여준 영포 역의 원기준 등등 일일이 거론하지 못할 정도로 훌륭한 연기자들은 많다. 반면, 연기변신이나 자신을 철저히 부숴 새로운 인물을 받아들이는데 실패한 연기자들도 있다. 대부분 연기력 논란이 되는 이들 배우들이 출연해서 성공한 작품들은 보기가 어렵다. 이런 작품들을 보면서 심지어 불쾌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연기자를 통해 작품 속의 인물에 감정이입되고 싶은 것이지, 본래의 연기자 자신에 감정이입되고 싶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연기자는 작품을 위해 기꺼이 망가져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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