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사>20대, <응팔> 40대, 세대를 뛰어넘은 김성균

 

도대체 이런 연기가 어떻게 가능할까. tvN <응답하라1988>에서 김성균은 44년생으로 45세 아버지 역할을 연기한다. 현재 나이로 치면 72세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김성균은 실제로는 80년생으로 만 35세다. 무려 10살이 더 많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더 놀라운 건 <응답하라1994>에서 그는 75년생 스무 살의 김성균을 연기했다는 점이다. 20대부터 40대까지 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연기라니. 도대체 이런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그의 자연스런 연기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시도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이물감 없이 소화해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응답하라1988>에서 라미란의 남편이자 정봉(안재홍)과 정환(류준열)의 아버지 역할로서 김성균의 연기는 부족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 그가 40대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웃음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만큼 노안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결코 우습지 않다. 연기로서 그 역할에 확실히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응답하라1988>에서의 김성균 역할이 기성의 아버지들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권위의식이 별로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한다. 입만 열면 유행어를 하려고 하는 그는 아들의 친구인 덕선(혜리)과도 반갑구만 반가워요-”를 하며 즐거워하는 어른이다. 어딘지 가벼움이 느껴지는 어른이지만 그렇다고 진중함이 없는 건 아니다. 어머니의 기일에 한없이 우울해지고 표현 없는 아들의 무뚝뚝함 앞에 쓸쓸함을 느끼는 아버지다.

 

아내인 라미란에게는 철딱서니 없는 남편이지만 의외로 닭살 행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위를 내보이기도 하는 그런 남편이기도 하다. 라미란의 실제 나이가 만 40세다. 그러니 김성균하고는 다섯 살 연상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어딘지 라미란에게 김성균이라는 남편은 누나에게 의지하는 동생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것은 이 독특한 부부 캐릭터와도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응답하라1994>에서 김성균은 무려 열 살이 넘게 어린 스무 살 청년 삼천포의 연기를 시도했다. 거기에도 역시 신원호 PD가 의도한 웃음의 코드가 들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시골에서 상경한 촌놈 캐릭터로서 노안의 김성균은 그 자체로 웃음을 주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때도 역시 드라마가 진행되며 그의 이런 나이에 대한 이물감은 사라져갔다. 조윤진(도희)과의 러브 라인은 그래서 의외의 설렘을 만들어내며 그에게 포블리라는 닉네임을 선사하기도 했다.

 

<응답하라1994>의 포블리에서 <응답하라1988>은 이제 균블리라는 닉네임을 그에게 선사하고 있다. 10년 정도의 세월은 훌쩍 뛰어넘어, 처음에는 웃음을 주다가 차츰 그 캐릭터가 주는 새로운 매력에 빠져들게 만드는 힘. 그것은 아마도 김성균의 녹록치 않은 연기 공력에서 비롯되는 일일 게다. 20대부터 40대까지 넘나드는 연기가 어디 쉬울 수 있겠는가.

 

20대들에게는 친근함과 웃음을 주고, 40대들에게는 어떤 짠함까지 선사하는 가장의 모습은 김성균이 가진 폭넓은 연기의 결을 잘 보여준다. 그래서 이제는 그의 향후 캐스팅이 어떤 나이에 어떤 인물로까지 나아갈 지가 못내 기대된다. 세대 차이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훌쩍 뛰어넘어 버리는 그 모습에서 서로 다른 세대들은 그를 통해 어떤 공유점을 발견하고는 뿌듯해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대가 달라도 충분히 소통 가능한.



<응팔>, 평범해서 더 예쁜 안재홍-이민지 커플

 

tvN <응답하라1988>에는 못생김을 연기하는 이민지가 있다. 그녀는 덕선(혜리)의 절친으로 장만옥으로 불리는 미옥 역할을 연기하고 있다. 이민지가 못생김을 연기한다면 그녀의 남자친구 정봉 역할의 안재홍은 어눌함을 연기하고 있다. 어딘지 바보스러운 그는 그래서 웃음을 주지만 동시에 짠한 느낌을 선사하는 인물이다.

 


'응답하라1988(사진출처:tvN)'

미옥과 정봉이 만나서 사랑하게 되는 그 과정은 너무나 옛날식의 느낌을 준다. 비오는 날 갑자기 우산 속으로 뛰어 들어온 정봉이 그 만남을 운명이라고 미옥에게 말하는 장면은 과거 구닥다리 멜로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물론 그건 <늑대의 유혹>을 패러디한 장면이지만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그 설정은 지금의 청춘들에게는 어딘지 예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마음을 키워가는 장면도 그렇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얼굴까지 봐가며 화상통화를 할 수 있는 시대에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만 해도 전화기 앞에서 전화를 기다리는 건 다반사였다. 그런데 정봉과 미옥은 전화보다도 편지를 택한다. 미옥의 편지를 기다리며 우편함 앞을 서성이는 정봉의 모습은 그래서 더 절절한 느낌을 준다.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 층이 엇갈려 서로 다른 층에서 기다리는 장면도 지금의 커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장면이다. 커피 한 잔이 다 식어갈 동안 하염없이 기다리는 그 마음은 휴대전화가 일상화되지 않던 시절을 겪은 이들에게는 아련한 추억의 하나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결국 기다리다 지쳐 돌아온 미옥에게 아직도 그 카페에서 정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혜리의 안타까움이나, 그 얘길 듣고 카페로 달려가는 미옥, 그리고 추위에 손이 꽁꽁 얼어도 꽃다발을 꼭 쥔 채 그녀를 꿋꿋이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정봉. 이런 풍경들은 아날로그 시대의 아련함을 전해준다.

 

꽁꽁 얼어 벌겋게 된 정봉의 손을 잡아주는 미옥과 그 가슴 설렘이 과연 사랑인가를 시험해보고 싶어 그녀에게 입맞춤을 하는 정봉의 모습은 그래서 그 어떤 멋진 커플들보다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거기에는 어떤 삿된 계산도 의도도 들어가 있지 않은 순수한 사랑 그 자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응답하라1988>이 정봉과 미옥 커플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못생김어눌함은 이 드라마가 추구하고 있는 하나의 미학처럼 보인다. 이 드라마에는 물론 잘생긴 택이(박보검) 같은 인물도 있지만 어딘지 평범해보여도 멋지게 느껴지는 정환(류준열)이나 선우(고경표) 같은 인물이 대부분이다. 이건 단지 젊은 역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라미란과 김성균, 김선영과 최무성 같은 인물들은 지극히 평범해보여서 오히려 더 우리의 마음을 울리는 면면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것은 못생김과 어눌함의 미학일 것이다. 세상에서 주목받는 이들은 잘생기고 언변도 좋은 인물들이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특별한 사람들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평범하거나 아니면 평범 그 이하의 인물들에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평범한 보통의 이야기들은 어딘지 남 얘기라기보다는 우리 이야기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다. 그리고 이 드라마가 이제는 사라져가는 아날로그 정서를 건드리는 것도 상당부분 이 못생김과 어눌함의 미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육룡이>, 박혁권이 만들어낸 악역의 품격

 

이토록 모스트스러운 악역이라니.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육룡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활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악역들이 있다. 이른바 도당3인방이라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 그들이다. 고려 말 혼돈기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전제되기 때문에 육룡이라는 시대의 영웅들이 훨훨 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 구조상 이들 악역은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세 명의 악역이 모두 강렬한 저마다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인겸은 정치력을 갖춘 악역이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천호진)의 약점을 잡아 무릎 꿇린 바 있고 그의 정계 진출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홍인방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본래 성균관의 스승이었지만 모진 고문 앞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욕망을 터트리는 인물. 해동갑족의 수장에게 대놓고 협박을 하는 모습에서 소름돋는 악역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세 명의 악역 중 단연 주목을 끄는 캐릭터가 길태미일 것이다. 삼인방 중 무력을 상징하는 그는 삼한제일검이라 불리며 초절정의 무공을 갖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는 행동이나 외모, 말투는 여성스럽기 그지없다. 진한 화장에 말할 때 목소리나 손동작은 영락없는 여성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부드러움이 칼을 뽑을 들 때 더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해동갑족 전원의 서명이 들어간 상소를 이방원(유아인)이 가져옴으로써 최영(전국환) 시중이 주상의 윤허를 받아 이뤄진 길태미의 추포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어떤 사극 속 악역들보다 압도적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다며 국밥을 먹는 장면은 길태미의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준다. 평상시에는 전혀 무공을 할 것 같지 않는 듯한 허술함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수의 면면으로 느껴지는 그런 캐릭터.

 

그가 저잣거리로 걸어 나올 때 그를 본 백성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마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같다. 그만큼 그 캐릭터가 가진 살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왠지 길태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모도 느껴진다. “어이 이인겸 따까리!” 라고 부르자 그가 분노하는 건 그 역시 스스로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실상은 이인겸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걸 자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돈인 홍인방과 헤어지면서 그래서 사돈 때문에 재밌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은 할 것 다 해봤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끝까지 손에 쥔 걸 놓지 않는 홍인방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땅새(변요한)와 대결을 하게 되자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에서는 무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난다. 마치 최고의 무인에 의해 마지막을 장식하기를 바랐다는 듯이.

 

여성스러움과 난폭함을 동시에 갖춘 이 이중적인 캐릭터가 제대로 구현된 건 다름 아닌 박혁권이라는 연기자의 공력 덕분이다. 지금껏 어딘지 찌질하거나 소심한 중년의 모습을 자주 보여왔던 그지만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악역 길태미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남겨놓았다. 길태미는 시쳇말로 모스트스러운 악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박혁권은 악역의 품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심지어 심청, 춘향이 보였던 <도리화가>의 배수지

 

이제 아이돌 그룹의 수지라는 호칭보다는 연기자 배수지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듯싶다. <건축학개론>으로 얻은 국민첫사랑 수지는 이제 <도리화가>를 통해 연기자 배수지로 기억되지 않을까. 극중 배수지가 연기한 채선이 신재효(류승룡)쑥대머리를 들으며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다고 표현했던 것처럼 <도리화가>의 배수지는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다.

 


사진출처:영화<도리화가>

그것은 그녀의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녀가 하고 있는 연기가 그렇다는 거다. 어찌 보면 배수지 본인이 아이돌로서 그 연습생 시절 겪었던 일들이 채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제대로 접신하고 있는 느낌이다. <도리화가>라는 작품이 아프고 슬프고 아름답게 여겨지는 데는 연기자 배수지와 극중 인물 채선이 시대를 한참 뛰어넘어 같은 예인으로서 주고받는 공감대가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극중 인물인 채선은 슬픔을 잉태하고 자라난 인물. 아비는 어린 시절 처자식 버리고 떠나버렸고, 어미는 가난 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알고선 딸을 기방에 맡기고 먼저 떠나버렸다. 그러니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듣게 된 심청가의 애끓는 한 자락이 제 맘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었을 게다. 그걸 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는 어린 채선에게 신재효 선생이 다가가 던진 말, “그래 맘껏 울거라. 그러다보면 웃게 될 것이다라는 그 말은 판소리가 가진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그 힘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잘 말해준다. 한을 뛰어넘으면 거기 남는 게 예술이 아닌가.

 

조선 말기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 여성들은 결코 오를 수 없었던 그 판소리 무대에 당당히 올라 개방을 반대하던 대원군 앞에서 펼친 낙성연(1867년 흥선대원군이 전국의 소리꾼들을 위해 열었던 경연)으로 조선 최초의 여성 소리꾼이 된 진채선이라는 실존인물의 이야기다. 그녀가 심청가와 춘향전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그 힘은 아마도 그녀 스스로가 심청이 되기도 하고 춘향이 되기도 했던 삶 그 자체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이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너름새(연기)의 핵심이다.

 

진채선은 판에 올라 심청과 춘향을 연기하고, 배수지는 그런 진채선을 연기한다. 그리고 그 진채선과 배수지는 직업적으로 노래하고 연기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기묘한 어우러짐은 그래서 한참 영화를 보다보면 배수지에게서 심지어 심청과 춘향이 보이기도 하는 그런 몰입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판소리라는 소재가 떠올리는 것은 저 <서편제>의 분위기지만 <도리화가>는 그렇게 한의 정서를 처절하게 담으려 하지는 않는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판소리 경연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대신 유려하고도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 정조를 담아내는 연출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경복궁에서 펼치는 낙성연은 마치 지금의 오디션 프로그램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다이내믹하다. 또 눈발을 헤치고 나아가는 채선의 영상은 이 영화의 정조가 되고 있는 아프고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무엇보다 그 중심에 배수지라는 예사롭지 않은 잠재력의 배우가 있다. 사실 <건축학개론>에서 그녀가 한 것은 연기라기보다는 그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도리화가>에서 배수지는 확실히 자신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연기 잠재력을 살짝 끄집어내 보여준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저 진채선이라는 인물이 가진 힘일 것이다. 어쩌면 관객들은 그녀의 연기에 한없이 몰입되어 눈물을 흘리다 어느 순간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저 극중의 어린 채선이 그랬듯이. 또 배수지라는 연기자가 <도리화가>라는 작품을 통해 경험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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