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 기술과 예술, 현실과 상상 사이

파벨만스

극장 앞에서 어린 샘(마테오 조리안)은 겁에 질려 있다. 영화에는 거인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샘에서 아버지 버트(폴 다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르지 않으며 여러 사진을 빠르게 돌려 빛에 투과시키면 동영상이 된다는 ‘모션 픽처’의 원리를 설명한다. 그것이 그저 기술이고 허구라는 걸 알려줌으로써 샘이 겁먹지 않게 하려는 아버지의 노력이다. 

 

버트는 컴퓨터 천재 공학도로서 산업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문제들을 기술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극복해가며 기술을 발전시키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가 샘에게 하는 영화에 대한 설명은 다소 어린 아이에게는 과하고 딱딱하게 느껴지지만 이해되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런 버트와 달리 피아노에 천재성을 가졌지만 아이 셋을 낳고 가정에 눌러 앉게 된 엄마 미치(미셸 윌리암스>는 샘에게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아들아, 영화는 꿈이란다. 영원히 잊히지 않는 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파벨만스>의 이 같은 오프닝은 짧지만 영화에 대한 두 관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카메라로 찍고 이를 편집해 영사기에 돌림으로써 가능한 과학적 기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기술이 발전해 더 좋은 카메라가 등장하면 더 좋은 영상들을 보다 쉽게 찍어 영화로 만드는 게 가능해진다. 그것은 결국 영화 역시 자본이 투입되는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영화는 미치가 말하듯 현실을 훌쩍 넘어서는 상상의 세계를 담아내고, 인간이 꿈꾸는 것을 영상으로 표현해내는 예술이다. 샘은 그래서 버트와 미치라는 서로 다른 삶과 예술에 대한 입장을 가진 인물들 사이에서 태어났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성장한다.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모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 않기 위해 애써 자신을 누른 채 가족을 지키려 하지만 그건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결국 파열음을 낸다. 

 

샘은 아버지가 평생 엄마를 숭배하듯 헌신해왔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예술과 예술적 삶에 대한 갈증을 억누른 채 평범한 가정에 눌러 앉아 스스로 파괴되어가는 엄마를 이해한다. 어린 샘은 서로 다른 부모를 각각 이해하지만 그들의 부딪침이 갈등을 만들어내는 것을 수용하기가 어렵지만 영화 속에서는 이 배타적으로 보이는 양자들을 끌어안는다. 친구들과 영화를 찍으면서 아버지가 아이디어를 내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것처럼 특수효과를 만들어내는데 재기발랄한 아이디어를 낸다. 그러면서 기술과 현실의 차원을 뛰어넘는 예술과 상상으로 그가 만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을 감동시킨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 <파벨만스>는 샘이라는 아이를 통해 그가 가족들과 더불어 친구, 연인들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보고 찍은 영화에 어떤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가를 에둘러 담고 있다. 엄마와 아빠의 설득을 통해 처음 그가 보게 된 영화 <지상 최대의 쇼>에서 기차와 자동차가 충돌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에 빠진 샘이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와 자동차를 충돌시켜 보고 엄마의 제안으로 그걸 카메라에 찍게 되는 장면은 그의 영화가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영화에 대한 헌사를 담은 영화들이 있다. 엔리오 모리꼬네의 음악으로 기억되는 <시네마 천국>이 그렇고, 최근 방영됐던 <바빌론>도 그렇다. 이중 <파벨만스>는 <시네마 천국>에 더 가까운 영화지만, 그 안에는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거장의 영화가 어떤 토양에서 어떤 영향들을 받아 탄생했는가에 대한 단초들이 담겨있다. 영화 속에서 보리스 삼촌이 등장해 “예술과 가족, 그게 너를 둘로 찢어놓을 거란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가족과 예술의 대립항은 그에게는 중요한 숙제였던 걸로 보인다.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동화 같은 가족애를 담은 영화를 그려내곤 했던 감독이다. <파벨만스>라는 제목이 달린 것도 그래서다. 이것은 샘 파벨만이라는 거장의 탄생을 그리는 영화지만, 그걸 만들어낸 건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을 향해 달려가지만 그 지향점으로서 늘 가족을 담았던 스티븐 스필버그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동시에 <파벨만스>는 이를 기반으로 영화가 어떻게 탄생하는가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각별한 영향을 주고받는 우리에게도 이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것은 한 재능 있는 아이가 현실을 넘어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들을 부모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지지해줘야 하는가에 대한 단초가 이 영화 속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두 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지만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보고 나오는 길에 그 누구라도 자신의 가족들을 되돌아보게 되는 영화가 아닐 수 없다. 아마도 그것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끝내 이 영화를 통해 하고픈 말이었을 지도.(사진:영화 '파벨만스')

변화의 시대, ‘바빌론’이 100년 전 할리우드를 추억한 건

바빌론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말을 태워 옮기는 트럭이 멈춰서고 운전수가 내려 그를 기다리고 있는 매니 토레스(디에고 칼바)에게 트럭을 불렀냐고 묻는다. 그러자 매니는 말이 아니라 코끼리라고 말한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며 화를 내던 운전수는 그러나 뒤편에 서 있는 진짜 코끼리를 보며 깜짝 놀란다. 절대 안된다는 운전수에게 매니는 할리우드 인사들이 벌이는 파티로 코끼리를 옮기려 하는 것이고, 그걸 해주면 파티에도 들어가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그러자 운전수는 기꺼이 이를 수락한다. 그리고 경사가 심한 길에서 코끼리를 태운 트럭을 거대한 똥 세례까지 받아가며 매니와 운전수가 오르는 기상천외하면서도 코믹한 광경이 펼쳐진다.

 

데미안 셔젤 감독의 영화 <바빌론>의 이 도입부는 그가 영화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한 편의 기발한 은유처럼 그려진다. 도대체 어떤 파티길래 코끼리까지 등장할까 궁금하지만 심장을 쿵쿵 뛰게 만드는 재즈음악이 가득한 그 곳은 한 마디로 광란과 난장의 끝판이다. 마약과 섹스에 취해 반나로 춤을 추며 갈수록 혼돈 그 자체가 되어가는 그 난장은 자극의 끝판이다. 그러니 코끼리가 등장해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다. 그 곳은 돈과 화려함으로 빛나는 할리우드 스타들, 제작자들, 감독들, 배우들이 모여 코끼리처럼 매혹적으로 시선을 끌지만 똥 세례를 싸대는 코끼리 같은 엉망진창의 대혼돈이 뒤섞여 있다. 

 

엉망진창이지만 유혹적이고 무엇보다 그것이 현실 공간이지만 완전한 비현실적인 판타지처럼 보이는 환각 파티 현장은 바로 데미안 셔젤 감독이 영화에 대해 갖는 양가감정을 잘 보여준다. 현실에서 허공으로 붕 떠있는 듯한 광경들이 펼쳐지고 실제로 혼몽해진 이들이 인파들 위에 올려져 옮겨지며, 뒤섞여 혼음을 펼치는 모습은, 파티 다음 날 보여지는 영화 촬영장의 난장과 기막힌 댓구를 이룬다. 환각 파티 현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전쟁통이 따로 없는 영화 촬영장이다. 

 

그런데 그 정신없는 난장판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인물들이 눈에 띤다. 전날 파티장에 대뜸 찾아와 스스로를 ‘타고난 스타’라 말하며 그 혼돈 속에서도 시선을 잡아 끌던 넬리 라로이(마고 로비)는 파티 때문에 펑크 낸 배우 대신 창녀 역할을 맡아 단박에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 파티장에서 넬리 라로이를 만나 첫 눈에 사랑에 빠져버린 매니는 넬리에게 영화판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고백한다. 그는 무성영화의 스타인 잭 콘래드(브래드 피트) 때문에 영화 촬영장에 우연히 왔다가 기회를 잡는다. 잭 콘래드는 술과 마약에 쩔어 제대로 걷지도 못하지만 감독의 ‘액션’ 소리에 영화 속 인물이 되어 연기한다. 영화 촬영장은 대 혼돈 속이지만 그 안에는 이마저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데미안 셔젤 감독은 이들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조악하고 나아가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 영화의 현장들은 다름 아닌 1920년대 무성영화 시대의 할리우드다. 녹음기술이 들어가 있지 않아 하나하나 자막을 찍어 인서트 컷으로 넣었던 시대의 풍경이다. 잭 콘래드는 그 무성영화 시대 영화가 탄생시킨 스타다. 대사를 할 필요가 없고, 영화는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주기보다는 그저 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극장의 관객들을 환호하게 했던 시대. 당시 영화는 기차역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장면을 찍어 보여줘도 경탄의 박수를 받던 시절이었다. 

 

넬리 라로이 역시 이런 시대의 끝자락에 기회를 잡아 벼락스타가 된다. 저 환각의 파티에서 누가 더 과감한 행동과 춤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주목을 받게 되는 것처럼, 넬리 라로이는 타고난 끼로 대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다. 하지만 <바빌론>은 무성영화 시대에 탄생한 스타의 성장담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당시 정점에 올랐던 스타가 유성영화로 변화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심지어 엽기적인 느낌을 주는 현장을 그저 카메라에 담기만 해도 영화가 되고, 그것이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했던 무성영화 시대는, 목소리와 현장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는 유성영화 시대를 맞아 영화와 대중들 사이에 놓여있던 가림막이 한 꺼풀 벗겨진다. 잭 콘래드는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된 영화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관객들을 목격하고, 가식 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는 것으로 무성영화 시대에 벼락스타가 됐던 넬리 라로이는 이제 말도 안 되는 불어까지 구사해가며 자신을 포장해야 상업성을 유지할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다. 결국 그 끝은 우리가 이미 영화사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비극이다. 한 때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타들은 그 빛을 지나 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왜 하필이면 지금 데이먼 셔젤 감독은 시간을 100년 전으로 되돌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을 들여다본 것일까. 그건 다시 현재 영화가 마주하고 있는 변화에 대한 아름다운 도발이 아닐 수 없다. OTT가 생겨나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극장이 위기를 겪고 있는 지금은 분명 영화에 변화가 생기고 있는 시대다.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스타와 감독과 제작자들이 탄생할 테지만, 그렇다고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밀려난 저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라는 걸 한참이 지난 후 다시 할리우드를 찾았다가 우연히 극장에서 옛날 영화를 보며 눈물 흘리는 매니를 통해 전한다. 

 

시대는 계속 바뀐다. 그건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2023년 한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리고 바뀐 새로운 시대는 과거의 시대를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만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타가 변화된 시대를 맞아 어느 날 갑자기 비웃음을 사는 위치로 추락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디 스타들만의 이야기랴. 보통 사람들 역시 한 때를 구가하지만 시대 변화 속에서 기성세대로 구세대로 밀려나지 않던가. 그래서 할리우드 가십 평론가 엘리노어 세인트 존(스마트 진)이 혹평을 한 일에 화가 난 잭을 위로하는 한 마디는 우리의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당신의 재능으로 빚은 영화만큼은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시대가 바뀌어도 그 시대를 만들었던 이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도 데이먼 셔젤 감독은 이 또다시 맞이하게 된 영화의 변화의 시대에 대해 100년 전 이야기를 통해 그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대를 맞아 과거의 시대는 몰상식하고 때론 폭력적이며 때론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난장판처럼 치부되지만, 그 안에도 빛나는 열정들이 있었고 그것은 당대의 영화라는 기록을 통해 후대에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것. 무려 세 시간짜리 영화지만 극장에서 봐야 진짜 맛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작품으로 데이먼 셔젤 감독은 영화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전하고 있다. (사진:영화'바빌론')

'#살아있다' 흥행으로 유아인·박신혜가 진짜 살려낸 건

 

지난 24일 개봉한 영화 <#살아있다>가 100만 관객을 넘겼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첫 100만 관객 돌파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뚝 끊겨버렸던 영화관 발길이 이 영화로 인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 건 아닌가 영화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살아있다>가 이 같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던 건 먼저 코로나19 시국이 장기화되면서 철저한 사전방역과 검사, 마스크 쓰기 그리고 극장 내 좌석 간 띄어 앉기 같은 예비책을 통해 극장에서의 영화 보기가 어느 정도는 용이해졌다는 관객들의 판단이 생겼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예비책보다 더 중요한 건 영화가 그만큼 관객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유인이 충분한가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살아있다>는 확실히 코로나 시국에 더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면이 있다. 최근 <부산행>에 이어 <킹덤> 그리고 개봉 예정인 <반도>로 이어지는 이른바 K좀비에 대한 관심이 급증한데다, 이 좀비 세상이 그려내는 풍경이 지금의 시국을 통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면이 있어서다.

 

<#살아있다>는 갑자기 터진 알 수 없는 이유로 서로 공격하는 좀비들 세상에 아파트에 고립된 채 생존해가는 준우(유아인)가 건너편 아파트의 다른 생존자 유빈(박신혜)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집 밖에 자유롭게 나가지 못하게 된 현 상황이 떠오를 수밖에 없는 영화다.

 

반드시 살아남으라는 부모의 마지막 메시지를 들은 후 홀로 아슬아슬한 순간들을 이겨내며 버텨내던 준우가 결국 절망에 빠져 생존의 끈을 놓으려 할 때 나타난 또 다른 생존자 유빈의 존재는 그가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의미가 된다. 그는 자신의 생존은 물론이고 유빈이 살 수 있게 하기 위해 좀비들과도 맞서게 되는 상황을 맞이한다.

 

좀체 쉽게 꺾일 것 같지 않은 코로나 시국에 답답함과 절망감마저 느끼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던지는 이야기는 의미심장하다. 준우는 과연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걱정하고, 또 가족은 살아 있을까를 궁금해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살아있다'는 것의 가치와 의미가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 그렇다.

 

영화는 아파트 한 동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채워져 있어 다소 단순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초반 3분의1 정도는 대부분 준우의 집에 카메라가 집중되어 있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한 아파트라는 공간에 집중함으로써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달려드는 좀비떼들의 움직임이 더 긴박감 있게 펼쳐지는 효과를 내는 것도 사실이다.

 

준우와 유빈 사이에 애써 멜로 구도 같은 걸 넣지 않은 것도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위해서는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그들이 서로 돕고 함께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건 개인적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증명 같은 것이니 말이다. "살아있어요!"라는 외침이 "사람 있어요!"라는 외침과 겹쳐지는 대목은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인간성이 살아있는 그 존재여야 비로소 사람이고, 살아있다 말할 수 있는 것일 테니.

 

영화 제목이 <#살아있다>여서인지 이 영화가 개봉 첫 주말을 지나며 코로나 시국이후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사실 또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절망적인 영화계에 여전히 영화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철저한 사전방역과 검사, 거리두기를 통해 안전한 관람이 지켜져야 하겠지만 모쪼록 이 영화를 기점으로 우리네 영화들이 살아있다는 걸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사진:영화#살아있다)

넷플릭스가 바꾸는 영화의 풍경들

 

2020년 골든글로브상이 발표한 후보들을 보면 단연 넷플릭스의 선전이 눈에 띈다. 특히 영화는 도드라진다.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아이리시맨’>,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두 교황>이 영화 작품상 드라마 부문 후보에 오른 것. 드라마 부문 작품상 다섯 편 중 세 편이 넷플릭스 영화라는 건 지금 세계 영화판에 넷플릭스가 가진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건 이들 작품들이 가진 새로운 특징들이다. 사실 넷플릭스라는 플랫폼의 특징은 극장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이 점점 더 효과에 집중하고 실감나는 영상과 음향을 강조하면서 거기 걸리는 영화들도 그 특징에 맞게 변화한 면이 있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이른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그래서 극장을 하나의 놀이공원이자 체험관처럼 만드는 극장용 영화들로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그러다 보니 영화 고유의 진중한 스토리텔링이나 미장센 같은 것들보다 효과에 집중되는 면들이 강했다. ‘볼거리 영화들’이 많아진 이유다. 하지만 <아이리시맨> 같은 영화를 보면 마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이 로버트 드니로나 알 파치노 그리고 조 페시, 하비 케이틀 같은 어찌 보면 자신의 영화적 아이콘들을 한 자리로 끌어 모아 “본래 영화란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아주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이 영화는 무려 런닝타임이 209분이나 되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저 볼거리가 만드는 극장용 몰입감과는 너무나 다른.

 

<결혼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사랑했지만 작은 균열이 차츰 거대해지면서 파경을 맞게 된 부부가 이혼을 하게 되는 과정을 통해 결혼과 이혼, 사랑, 가족 등에 대한 의미들을 찬찬히 담아낸다. 대단히 극적인 사건들이 담겨지진 않지만 이혼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들이 굉장한 폭발력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사실 <아이리시맨>이나 <결혼 이야기>는 극장용 영화로 본다면 사실 기획되기가 쉽지 않고 또 나아가 대중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 애매한 작품들이다. 그건 작품이 가진 성취의 문제가 아니라, 극장이라는 공간과 거기서 관객들이 요구하게 된 걸맞는 영화의 틀이 이들 영화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극장용 영화와 넷플릭스 같은 OTT에 세워지는 영화의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건 런닝타임이다. 사실 <아이리시맨> 같은 3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영화는 아무래도 극장에서는 부담스럽다. 물론 최근 들어 극장에서도 런닝타임이 긴 영화들이 세워지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몇 편의 에피소드로 나눠진 영화들도 상영되었지만 그런 작품들은 대부분 블록버스터였다. 충분한 볼거리가 제공되기 때문에 한 편에 마무리되지 않더라도 그 과정에서의 즐거움만으로 상영이 가능했던 것.

 

하지만 <아이리시맨> 같은 블록버스터라기보다는 긴 이야기에 가까운 영화는 얘기가 다르다. 어찌 보면 <아이리시맨>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었던 건 넷플릭스처럼 집에서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새로운 플랫폼이 있었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극장은 어느 정도 거기에 적합한 러닝타임을 요구한다. 너무 짧아도 애매하지만 너무 길어도 성공이 어렵다. 그래서 한 시간이 살짝 넘는 정도의 중편 영화들은 극장에서 세워지지 않아 잘 만들어지지 않는 경향도 생긴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고 있는 프랑스 애니메이션 <내 몸이 사라졌다> 같은 80분짜리 영화는 극장만이 플랫폼이라면 만들어지기 애매한 작품이다.

 

넷플릭스는 한 때 봉준호 감독의 <옥자>를 방영하며 멀티플렉스와 한 판 갈등을 일으킨 적이 있다. 멀티플렉스가 영화를 걸어주지 않은 것. 하지만 최근 들어 멀티플렉스들은 넷플릭스 영화들을 하나 둘 걸기 시작했다. 물론 오래 걸어놓거나, 상영관을 많이 잡지는 않지만 그래도 외면할 수 없는 좋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흐름은 마치 멀티플렉스가 그 특성상 만들어온 볼거리 경향을 이제는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 맞춰진 영화들이 조금씩 보완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그 화려한 효과들을 보여주는 영화에 도취되어 잠시 잊고 있던 영화 본래의 맛을 넷플릭스 같은 새로운 플랫폼이 오히려 복원해내고 있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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