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맛>, 어떤 맛일까

 

"이 맛에 우리가 이거 하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사람이 죽었는데, 돈을 건네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이 맛'이란 다름 아닌 '돈의 맛'이다. 도대체 이 '돈의 맛'이란 어떤 맛일까. 물론 돈에 맛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 뉘앙스에서 우리가 느끼는 맛은 분명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탐하게 되는(혹은 탐할 수 있게 하는) 그런 맛이다.

 

 

사진출처: 돈의 맛

온통 지폐다발로 쌓여진 방에 윤회장(백윤식)과 그의 비서인 영작(김강우)이 들어오는, 영화 <돈의 맛>의 첫 장면에는 사실 이 영화가 맛보여주려는 '돈의 맛'의 대부분이 들어 있다. 그저 종잇조각의 더미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영작은 이 돈 더미에 압도된다. 튼실한 가방에 누군가에게 뇌물로 전해줄 돈을 챙겨 넣는 영작에게 윤회장은 농담하듯 몇 다발 챙기라고 한다. 누구나 다 그렇게 하는 짓이라고.

 

이미 윤회장은 그 때부터 이미 돈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셈이다. 왜 그렇지 않을까. 여기저기 정관계에 돈을 찔러주면 그것으로 죄도 사라져버리는 그런 세상, 돈이 말 그대로 산더미처럼 쌓여있지만 그래도 더 많은 돈에 대한 탐욕이 끝이 없는 사람들, 돈이면 뭐든 다 되는 것을 목도한 후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하나의 욕망으로 바라보는 그 멘탈 붕괴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섬뜩한 느낌. 윤회장은 이런 '돈의 맛'을 '모욕적인 맛'으로 느낀다.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하면서도 돈을 챙기는 그 맛에 만족하는 인간이란 모욕적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인간이길 포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짐멜이 모더니티 분석을 통해 돈이 가진 이중성을 말한 것처럼, 돈이란 개인의 자유를 가능하게 해 이른바 평준화된 삶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각각의 개인들이 갖고 있는 고유의 개성이나 자질 역시 돈이라는 양적인 기준에 의해 그 가치를 잃게 만든다. 결국 "이 맛에 우리가 이거 하는 거예요"라는 말은, 노동조차 그 일이 주는 고유의 맛(보람, 즐거움 같은)이 아니라 돈의 맛(양적인 수치)으로 치러지는 우리네 삶을 말해준다. 하긴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하고 심지어 목적을 위해 누군가를 해치는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무슨 보람을 얻겠는가. 이는 뒤집어 말하면 돈이 있기 때문에 하게 되는 일들이다.

 

이 초재벌그룹의 가족들이 유령가족처럼 느껴지는 건 그 관계가 가족지간이라는 본래의 가치를 벗어나 돈의 관계라는 교환가치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공간은 서민들이 보기에는 이질적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고, 흐트러짐 하나 없이 늘 말끔하고 단정하게 치워져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 사는 공간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그 말끔함은 무슨 얘기를 하건, 무슨 사건이 벌어지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이들 가족들의 표정과 닮아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군가와 섹스를 한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내놓는다. 물론 대화를 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들만 생각한다. 다만 그 파장에 자신이 피해를 보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돈의 맛>이 주는 충격은 그 겉으론 말끔하게 생긴 재벌가 사람들의 때론 동물의 왕국 같은 질퍽한 실체가 아니다. 그것은 저 첫 장면에서 영작이 돈 더미가 쌓인 방에서 느꼈던 그 압도적인 돈의 마력을 깨닫게 되는 데서 생겨난다. 돈에 대한 욕망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하지만 그 돈에 대한 욕망의 끝단은 결국 멘탈 붕괴로 이어진다는 것을 이 영화는 우리 앞에 불편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심지어 죽은 후에도 마찬가지다. 편안한 안식을 취해야할 관 속에까지 그 놈의 돈은 지긋지긋하게 달라붙는다.

 

이제 그 질문은 우리에게 되돌려진다. 우리는 과연 무슨 맛에 사는걸까. 그 멘탈 붕괴의 크기는 다르지만 여전히 그들과 같은 '돈의 맛'에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래도 삶의 다른 가치들을 찾으려 노력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돈의 맛>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저들의 삶을 통해, 지금 우리들의 삶에 그 질문을 되돌리는 영화다.

그럼에도 <패션왕>에 빠지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패션왕>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다. 이 불안한 청춘들의 끝없는 방황이 못내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가영(신세경)을 사랑하면서도 끝내 그녀를 밀어내고 최안나(유리)의 접근을 허용하는 강영걸(유아인)을 이해할 수 없다가도, 그 성공에 대한 뜨거운 욕망과 사랑하면서도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는 강영걸의 트라우마는 이 모든 걸 이해하기 해준다.

 

 

'패션왕'(사진출처:SBS)

"무서웠어. 누가 날 사랑한다는 게 무서웠어. 너한테 상처주고 너한테 상처받을까봐." 뉴욕출장에서 만나 뜨거운 키스로 마음을 확인한 이가영이 왜 자신을 돌아오지 말라고 했냐고 묻자 강영걸은 그렇게 답한다. 어린 시절 바람난 엄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고 여동생도 죽게 된 것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그는 마음을 열지 못하고 사랑을 하지 못한다. 엄마처럼 자기를 버릴까봐, 여동생처럼 자기를 떠날까봐.

 

이것은 가난이 만들어낸 왜곡이다. 불우한 어린 시절의 경험은 사랑마저 늘 불안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를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이미 성공한 디자이너이고 심지어 가영의 마음을 확인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불안해한다. 정재혁(이제훈)의 회사에서 이가영이 디자인 팀장이 되고 개인 사무실에 차까지 선물 받게 되자 강영걸은 그녀가 '저들의 세계'로 편입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가영 역시 강영걸을 사랑하지만 당장 눈앞의 작은 배려와 대접에 마음이 흔들린다. 그녀는 부유함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 갑자기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모두 돌아가시자 모든 것을 가로챈 조사장(장미희) 밑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온 그녀는, 그 돈이 만들어내는 권력적인 상황에 진저리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 욕망에 흔들린다. 그래서 그녀는 강영걸이 뭐든 해주고 싶다며 집과 차를 사주겠다고 하자 "갑자기 딴 사람이 된 것 같아요"하며 불안해한다. 하지만 정작 정재혁의 회사에서 디자인팀장으로 승진하고 개인 사무실과 자동차까지 선물 받자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한편 정재혁은 겉으로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황태자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갖지 못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 같은 인물이다. 그가 이가영에게 빠져드는 것도 바로 자신과 똑같은 결핍을 그녀에게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없이 조사장 밑에서 굴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가영은, 모든 게 부모의 뜻에 의해 휘둘리며 살아가는 정재혁에게는 또 다른 자신인 셈이다.

 

이런 동병상련의 감정은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병적이다. 정재혁은 그래서 때론 어린아이로 퇴행된 듯한 모습을 보이곤 한다. 이런 동병상련의 병적인 감정을 보이는 또 한 명의 인물이 최안나(유리)다. 그녀가 강영걸을 찾는 이유는 그가 자신과 같은 성공에 대한 욕망과 좌절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욕망을 가진 최안나를 강영걸은 역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친구로 받아들이지만, 최안나는 이것을 사랑으로 착각한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성공 그 자체를 사랑과 동일시하게 만든다. 그녀의 애초 목표가 자신의 성공이 아니라 '정재혁과의 결혼'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말해준다. 정재혁에게 한 번 버려지고 나서 다시 돌아온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버려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기가 두려운 것이다. 그녀의 성공에 대한 욕망은 사랑마저 왜곡되게 만들었다.

 

<패션왕>의 반복되어 엇갈리는 남녀를 멜로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그 복잡함에 진저리가 쳐지게 된다. 심지어 이 끝없이 변하는 관계의 변주곡은 세속적인 '어장관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이 복잡한 <패션왕>의 멜로의 늪에 빠져들면 좀체 헤어 나오기가 힘든 것은 말이다. 이것은 <패션왕>이 그리는 세계가 단순한 멜로가 아니라 그 멜로를 통해 그 바탕에 깔려있는 이 불안한 청춘들의 욕망과 트라우마이기 때문이다.

 

왜 그들은 편안하게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패션왕>은 관계 속에서 끝없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인물들의 감정을 통해 그 사랑을 방해하는 그 무엇을 거꾸로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것은 사회가 만들어낸 계급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고, 기성사회가 청춘들에게 강요하는 압력 때문이기도 하며, 어쩌면 비뚤어진 기성세대의 욕망이 만들어낸 왜곡된 세상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프레임 안에 끝없이 얽혀있는 멜로만을 보여주는 듯한 <패션왕>은 어쩌면 거꾸로 프레임 바깥의 무수한 사회적인 문제들을 드러내주는 드라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명의 청춘 남녀들이 겪고 있는 이 사랑과 욕망의 변주곡이 그저 감정게임에 머물지 않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처럼 눈을 사로잡는 이유는 그 비뚤어지고 엇나간 이들의 사랑이 이상하게도 이해되기 때문일 게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는 당연하게도 이들의 사랑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우리가 공감한다는 얘기다. <패션왕>은 이처럼 멜로만을 가지고 멜로 바깥의 사회적 프레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독특한 성취를 하고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


'초한지', 우리가 모가비에 열광한 이유

'샐러리맨 초한지'(사진출처:SBS)

'샐러리맨 초한지'는 여러 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이 모든 걸 덮어줄만한 한 가지를 얻었다. 바로 모가비라는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김서형이라는 연기자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모가비라는 캐릭터는 도대체 뭘까. 악역이면서도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존재감을 차지했던 캐릭터. 이 캐릭터의 무엇이 대중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만든 걸까.

유방(이범수)이 "모가지"라고 비아냥대는 이 인물 속에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모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다. 내적인 성취를 하지 못한 채 어떻게든 빠르게 성공하려는 욕망과, 그래서 속 빈 강정처럼 허하기만 한 천민자본주의의 소비적인 성향, 그래도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위해 타인을 불행하게 하고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이코 패스적 정신분열, 그리고 결국은 욕망의 늪에 빠져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그런 인물.

모가비가 주목됐던 것은 어쩌면 지금 현재의 한국 사회가 가진 거의 모든 문제점들을 절대 악으로서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샐러리맨 초한지'에서 모가비는 먼저 파업과 직장폐쇄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 사회가 가진 그 경제적인 폭력의 문제를 드러내는 인물이고, 후반부에는 심지어 사람을 죽게 만들고도 법이라는 갑옷을 입고 버젓이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정의의 문제를 드러내는 캐릭터다. 경제와 사법. 지금 현재 이만큼 우리를 공분하게 하는 단어가 있을까.

코미디라는 장르를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모가비가 가진 이 모든 문제들은 조금은 지나칠 정도로 과장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무너뜨리는 유방과 여치(정려원)의 복수는 그만큼 통쾌하게 다가올 수 있다. 모가비라는 거대한 한국사회의 공분을 세워놓음으로써 우리가 마음껏 비난하고 분노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 복수극의 외형을 벗겨내고 나면 거기에 모가비라는 캐릭터 속에 내재된 우리네 근대사의 문제들이 드러난다. 전근대를 재빨리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속도에 집착했던 시대, 그 속도 때문에 근대화가 주창하는 진정한 개인주의나 합리성을 체득하지는 못했던 우리네 근대사. 그래서 합리성 대신 서열과 신분이라는 전근대적인 가치를 그대로 물려받은 그 자리에 과시하듯 피어난 천민자본주의가 있었다. 모가비가 회장직에 오른 후 한 것이라고는 그 신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소비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지르게 된 범죄마저 돈으로 법을 사 덮어버리려는 모럴 해저드로 이어졌다.

모가비가 그토록 한국사회의 어두운 면을 끄집어낼수록 대중들이 열광한 것은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가 권선징악을 보장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파멸될 모가비라는 인물이 한국사회의 어둠을 더 많이 껴안고 있을수록 이 이상한 복수극의 통쾌함은 더 커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보면 샐러리맨이 언뜻 보이지 않는 '샐러리맨 초한지'라는 작품이 왜 굳이 '샐러리맨'을 붙였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드라마는 현재를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에게 '초한지'가 보여주는 처세술을 가르치기보다는, 잘못된 자본주의의 파멸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카타르시스를 주는 작품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샐러리맨'들을 위안해주는 '초한지'가 '샐러리맨 초한지'였던 셈이다.

흥미로운 건 이 드라마의 초반부에 진시황(이덕화) 회장이 천하그룹에 들어오는 장면, 즉 직원들이 도열해 있고 마치 제왕이나 되는 듯 그 사이를 위풍당당하게 들어오는 진시황의 모습이 맨 마지막 유방이 천하그룹에 들어오는 장면과 겹친다는 점이다. 누가 봐도 전근대적인 이 풍경은 그래서 드라마의 해피엔딩을 알리는 경쾌함과 동시에, 인물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는 기업 문화의 씁쓸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것은 모가비라는 인물은 결국 정신병동에 감금되었지만, 모가비 같은 인물을 양산하는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암시처럼 여겨진다.

무엇보다 이 모든 위악을 모가비라는 한 캐릭터 안에서 독기어린 연기로 풀어낸 김서형이라는 배우의 공적을 지울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녀가 있었기에 모가비라는 문제적 캐릭터가 살았고, 그것이 결국 자칫 지리멸렬해질 수 있었던 이 드라마의 산만함을 깨뜨려 주었다. 많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지만, 그래도 모가비라는 캐릭터와 그걸 연기한 김서형이라는 배우가 있어 그 아쉬움이 덮어지는 작품, '샐러리맨 초한지'다.

'욕망의 불꽃', 욕망에 대한 탐구, 한 시대를 그리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가 돈을 욕망하게 만들었을까. 대신 감옥에 간 부채감 때문에 친구 태진(이순재)이 놓고 간 돈다발을 아버지가 집어던지자, 그녀는 그 흩어진 돈을 주우려 아귀처럼 달겨든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는 아버지보다 돈이 더 좋다!"

'욕망의 불꽃'의 이 한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려는 이야기들의 많은 단서들을 제공한다. 먼저 불꽃 욕망을 품고 있는 이 여자, 윤나영(신은경)이라는 캐릭터.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부자와 결혼해 팔자를 고치려는 그녀의 뜨거운 욕망은 이 드라마의 시작점이다. 그녀의 욕망은 가족조차 불태워버릴 만큼 뜨겁다.

본래 태진의 아들 영민(조민기)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착하디 착한 언니 정숙(김희정)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슬쩍 자리는 내주는 정숙에게 그녀는 오히려 "너는 욕망이 없다"며 "그건 착한 게 아냐. 두려운 거지."하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혼은 했지만 사랑이 없는 태진을 찾아 미국까지 간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태진에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불변의 진리가 아녜요. 변하잖아요."하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 따위'는 필요하다면 "만들어 가면 되는" 어떤 것이다.

신은경이 연기하는 나영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희대의 악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거 다 차지할거야"하고 소리치는 그녀가, 인륜을 넘어설 만큼 욕망에 불타는 희대의 악녀가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이 드라마가 시대극으로서 한 시대의 욕망과 상처를 나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투영해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갖게 된 그 엄청난 욕망 속에는 개발시대를 살아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그려진다. 그녀의 꺼지지 않는 욕망은 그녀를 수직상승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점이 되게 된다.

'욕망의 불꽃'이 막장에 가까운 설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장드라마로 흐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시대적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신은경의 캐릭터 덕분이다. 이 캐릭터가 갖는 욕망과 그로 인해 빚어진 비극은 그 속에 시대적 정서를 담아낸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한 가족의 치정극에 머물지 않는다. 나영이 그 어린 시절, "아버지보다 돈이 더 좋다"고 소리치던 그 시절, 악착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가 버린, 혹은 잃어버린 것을 이 드라마는 그 후에 벌어지는 비극을 통해 들여다본다.

성공을 위해 가족까지 다 내버렸고, 사랑 따위는 만들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바로 그 파편화된 가족과 사랑 없는 욕망의 세계 속에서 파멸해간다. 인간이 품는 욕망에 대한 탐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겪어낸 한 시대의 빗나간 욕망을 담아내고 있는 '욕망의 불꽃'. 그 욕망을 캐릭터로 보여주는 신은경의 연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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