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소리>, 이성민의 연기 속에 담긴 희생자들의 절절한 판타지

 

영화 <로봇소리>는 우리네 영화사에서는 독특하게도 로봇이 등장하는 영화다. 위성에서 뚝 떨어져 나온 로봇. 스스로 움직이기도 하고 소리를 내기도 한다. 영화 속 설정으로는 갈수록 인지기능이 높아지고 어떤 인간적인 감정까지도 슬쩍 내보이는 그런 로봇이다.

 


사진출처: 영화 <로봇소리>

하지만 이것은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로봇 설정이지 실제 과학적으로 엄밀히 따져보면 허술한 면이 꽤 많은 로봇이다. 기판을 다 드러낸 채 바닷물에 빠져도 고장이 나지 않는 것도 그렇고, 거의 모든 전화 기록들을 감청하고 저장한다는 설정도 과학적으로 따지면 가능할 것 같지 않다.

 

할리우드에서 만일 이런 영화를 만들었다면 로봇에 현실감을 주려 노력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실제 과학적으로 구현될 법한 개연성을 로봇의 캐릭터에 넣으려 했을 것이다. <터미네이터>처럼 가능하면 감정까지 보여주는 그런 캐릭터. 하지만 <로봇소리>는 애초에 이러한 과학적 개연성을 추구하는 SF 영화를 지향하지 않았다. 대신 이런 능력을 가진 로봇이 있다면 하는 가정 하에 한 아버지의 절절한 부성애를 그리려 했다.

 

그러니 과학적인 허술함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살짝 살짝 들어가 있는 유머코드는 이 과학적 허술함을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그것보다는 다른 것에 더 집중하라고 영화는 말한다. 그 다른 것은 다름 아닌 실종된 딸을 10년 간 찾아다닌 해관(이성민)이라는 아빠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건 해관과 로봇이 그럴 듯하게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점이다. 극의 설정 상 로봇은 갈수록 해관과 마치 친한 동료처럼 가까워지고 교감해나가야 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토록 찾으려 애쓴 실종된 딸의 모습과 겹쳐지는 단계로까지 가야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로봇은 연기를 할 수가 없다. 그 몫은 오로지 해관을 연기하는 이성민에게 돌아간다.

 

이성민의 연기가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 로봇과의 관계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심도를 만들어가는 그 지점이다. 이성민은 처음에는 그 로봇의 낯설음에 놀랐다가 차츰 어쩌면 이 로봇이 자신의 딸을 찾게 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 속에 한없이 가까워진다. 로봇과 툭탁대기도 하고, 투덜거리며 핀잔을 주기도 하는 그 자연스러운 이성민의 모습은 그래서 이 어찌 보면 차가운 쇳덩어리에 불과한 로봇이 점점 따뜻함을 가진 존재로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이성민은 이 차갑기만 한 로봇에 소리라는 예쁜 이름을 지어준다. 그리고 마치 10년 전 실종되어 버린 딸에게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부채감을 소리를 통해 풀어내보려 한다. 그가 딸이 사라진 지하철 철로에 내려가 그 차가운 철로를 매만지며 흘리는 통한의 눈물이 말해주듯, 해관의 절절한 딸에 대한 마음은 그래서 그가 소리라는 로봇을 마치 딸이나 되는 듯 보호해주고 말을 건네는 장면에 아무런 이물감을 느끼게 만들지 않는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감정도 없는 무생물인 로봇이 그 함께 있는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 하나의 생명력을 부여받게 된 것은.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로봇 소리에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건 사실 알고 보면 이성민이라는 든든한 연기자 덕분이다. 그의 연기는 차가운 로봇마저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이성민의 연기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사건 사고가 유달리 많은 우리사회의 현실이다. 그 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이 사라져갔던가. 그 부채의식은 이성민의 절절함 속에서도 또 심지어 로봇이라는 조금은 과한 설정 속에서도 그 판타지를 긍정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저렇게라도 해서라도 희생자들의 아픔과 고통이 위로받을 수 있다면 판타지라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테니.

<손님>, 타자에 대한 폭력은 어떻게 일어날까

 

<손님>은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영화다. 유명한 피리 부는 사나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갖고 있지만 1950년대 한국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겹쳐지면서 무국적성의 이야기는 특수한 우리네 상황의 이야기로 전화된다. 공포를 다루는 영화처럼 보이지만 잘 들여다보면 판타지가 있고 그 안에는 사회 비판적인 요소들이 은유적으로 담겨져 있다. 중요한 건 공포가 갖고 있는 장르적 속성 따위가 아니다. 대신 그 공포가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사진출처:영화 <손님>

이 공포의 연원은 제목에 이미 들어가 있다. ‘손님은 주인이 아니다. 주인이 제 집처럼 생각하라고 해도 손님은 손님이다. 그런데 만일 주인들이 손님을 철저히 타자로 바라보고 낯선 이방인으로 경계를 그어버린다면 어떨까. <손님>의 피리 부는 사나이 우룡(유승룡)이 아들 영남(구승현)과 들어가게 된 마을은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모습을 보인다. 그것은 마을의 형태뿐만이 아니라, 그 마을사람들이 외부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맞닿아 있다.

 

우룡은 아들 영남의 이름을 설명하며 호남에서 태어났지만 이름은 영남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이것은 아마도 호남과 영남으로 대변되는 오랜 세월동안 반복된 지역갈등과 경계, 타자화를 적어도 우룡과 그 아들은 뛰어넘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자신들을 타자로만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과 점점 가까워지는 건 그래서 오로지 이 우룡의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과 우룡이 가까워지는 걸 탐탁찮게 바라보는 이도 있다. 그것은 이 배타적이고 고립된 마을의 권력을 쥐고 있는 촌장(이성민)이다.

 

마을 사람들이 촌장과 공동운명체가 된 이유로 원죄가 있다는 사실 역시 우리네 불행한 현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짓밟은 땅 위에 세워진 공동운명체는 그래서 공포를 기반으로 유지된다. 쿠데타의 이미지와 그로 인해 권력을 쥐게 된 권력자의 이미지, 여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는 전쟁의 이미지 그리고 고양이를 잡아먹는 쥐의 공포는 두렵지만 이 마을이 유지되는 이유다. 공포로서 유지되는 마을과 지도자가 독재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 우리의 뒤틀린 현대사와 이 마을이 처한 상황이 너무나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포를 신비로운 피리소리로 물러나게 만드는 악사는 권력자에게는 자신의 권력 유지 기반을 지워내는 두려운 존재가 된다. 촌장과 악사는 약속으로 맺어지지만 그 약속이 파기되면서 죽고 죽이는 비극은 시작된다. 공포는 이미 주인과 손님,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그 지점에서부터 이미 심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구분이 비정상적인 이 마을의 권력체계를 유지하는 기반이었으며, 따라서 공포가 사라지는 것은 그 권력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것이다.

 

<손님>이 놀라운 건 이 작은 마을의 가상의 이야기 속에 우리네 현대사의 비극들을 대부분 담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가 시대적 배경으로 한국전쟁의 상황을 두고 있다는 건 이처럼 나와 타자를 구분하는 시선이 바로 그 비극적인 전쟁으로부터 비롯됐다는 걸 말해준다. 그리고 고립된 마을에서 벌어지는 공포와 권력의 이중주는 우리네 비극적인 현대사를 고스란히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손님>은 그러나 이러한 사뭇 현대사의 복잡한 심리적 배경들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거기에 판타지와 영상 미학 또한 담아내고 있다. 피리 부는 사나이가 가진 그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그림들은 그래서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잘 살려내고 있다. 우룡이라는 주인공을 악사이자 광대로 세워놓은 것은 그래서 이런 영화 미학과 맞물려 잘못된 권력의 악순환을 폭로하고 저항하는 예술의 힘을 에둘러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예술은 이처럼 그 미적인 장치를 통해서 현실과 대적한다.

 

<손님>은 한 가지로만 해석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완결된 상징적 이야기를 그리면서 어떤 주석을 달지 않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우리네 현실이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아마도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들이 권력 체계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인이어야 마땅한 우리들이 어쩐지 늘 손님으로만 대해져 왔다는 그 불편함 때문이 아닐까.



<미생><삼시세끼>, 결국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

 

<미생><삼시세끼>는 같은 날인 1017일 시작해 각각 1221, 1220일 시즌을 끝냈다. 마치 tvN의 짝패처럼 두 프로그램이 동반상승했다가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로 달라 보이는 두 프로그램에서는 의외로 비슷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것은 이 두 프로그램이 모두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치열한 일의 세계 그 안쪽을 들여다봤다면,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일의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보여주었다.

 

'미생(사진출처:tvN)'

<미생>은 결말에 이르러 결국 떠나는 자와 떠나게 될 자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팀장까지 잘 버텨왔으나 사업의 실패로 인해 희생양이 되어 회사를 떠나게 된 오차장(이성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왔지만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나게 될 장그래(임시완). 이 두 직장인이 보여주는 그림은 지독할 정도로 비극적이다. 아예 일의 세계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젊은이가 우리 세태의 한 면을 보여준다면, 그렇게 들어와 제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결국은 회사의 희생양이 되어 쫓기듯 나가게 되는 차장, 부장들이 우리네 현실의 또 다른 면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그 쉼 없는 일중독을 스스로 강요하며 살아간다. <미생>의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는 그래서 때때로 거대한 괴물의 뱃속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 괴물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은 끝없이 괴물처럼 일해야 한다. 그 힘이 다하거나, 아니면 괴물과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가 되는 순간, 그들은 그 뱃속으로부터 퇴출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유지만, 끝없이 일 속에서 중독적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배제의 뉘앙스로 다가온다.

 

<피로사회>의 한병철은 우리네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하며, 바로 그 성과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굴러간다고 한다. 원작 <미생>에서 왜 오차장이란 캐릭터가 빨간 눈으로 그려졌는지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는 끊임없이 일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물론 그것은 가장으로서의 깊은 책임감 때문이지만, 밥 먹듯이 야근하고 주말마저 반납하며 일에 빠져드는 건 지극히 강박적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미칠 것만 같은 오차장들을 소진시키며 굴러가고 있다.

 

바로 이 개인을 자발적으로 소진시켜 굴러가는 성과사회의 극단에 서게 되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삼시세끼> 같은 정반대의 삶에 대한 로망이다. 강원도 정선의 벽지라는 도시에서의 거리는 어쩌면 일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의 거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떨어져 고립되어야 겨우 일에서 벗어난 금단현상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삼시세끼만 챙겨먹으라는 유일한 미션의 공간은 그래서 이 일중독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낯설면서도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부러움을 사는 장소가 된다.

 

밍키나 잭슨 같은 동물들과의 교감을 보여주고, 조금씩 자라나는 채소들의 성장을 바라보고, 지천으로 떠 있는 별과 드디어 들리기 시작한 시골의 소리들을 들려주는 건 그래서 마치 일중독을 치유하는 하나하나의 처방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렇게 처방전이 주어져도 그 안에 들어온 잠재적 일중독자들은 노동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노예라고 부르는 대목에서는 그래서 벗어나도 스스로 노동을 찾아가는 자신들을 희화화 한다. 그 안에는 씁쓸한 자조도 섞여있다.

 

이서진이 독특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일을 한다는 점이다. 그는 마치 일 중독 사회가 만들어내는 소진을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결국은 그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수수지옥으로 불리는 공간은 그래서 자못 상징적이다. 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일 속으로 들어간다. 다만 그 일이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그것을 마치 일이 아닌 놀이처럼 받아들인다. 성과주의 바깥에서의 일이란 그처럼 놀이화된다. 노예놀이 혹은 소꿉장난처럼.

 

<미생><삼시세끼>가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이처럼 노동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우리가 늘 그 안에서 살아가며 벗어나지 못하는 일의 세계에 대해 <미생>은 그 괴물 같은 시스템의 전모를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소진되어가는 이들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그 버티는 삶을 긍정해주는 시선에서는 보는 이들을 똑같이 위로해주는 힘이 생겨난다. <미생> 신드롬은 바로 그 공감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삼시세끼>는 그 노동 바깥으로 빠져나와 자연 속으로 고립됨으로써 일중독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행위는 그래서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는 로망이 된다. 그들은 일 바깥에서 비로소 발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드러낸다. 결국 이 두 프로그램의 성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성과사회의 두 측면을 담아낸 데서 비롯한 것이다. 11주 동안 우리는 그 노동의 두 얼굴을 마주했던 셈이다.

 

<미생> 신드롬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을까

 

이제 <미생>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끝날 때가 다 됐지만 정작 주인공인 장그래(임시완)의 위치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다. 물론 인턴으로 들어왔다가 겨우겨우 계약직으로 버텨내고 있지만, 그에게 아직 정규직 소식은 없다. 오히려 그 정규직을 억지로라도 만들려고 위험성 있는 사업을 덜컥 하려는 오차장(이성민)과 그 사실을 알고는 퇴사를 고민하는 장그래가 갈등을 일으키는 중이다.

 

'미생(사진출처:tvN)'

그나마 만년 과장이었던 오과장이 오차장이 된 게 이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인물들의 성취다. 물론 풋내기 신입사원이었던 장그래나 안영이(강소라), 장백기(강하늘), 한석률(변요한) 같은 인물들이 이제 제법 회사에 적응해 척척 자기 몫을 해내는 건 큰 변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진 건 별로 없다. 그들은 여전히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미생들일 뿐이다.

 

많은 이들이 이렇게 커다란 성취나 판타지를 보여주지 않는 <미생>이 왜 그토록 신드롬을 만들었는가를 의아해 한다. 하지만 <미생> 신드롬은 바로 그 커다란 성취나 판타지를 말하지 않는 데서 나온 것이다. 사실 직장생활이라는 현실 속에서 커다란 성공이나 성취를 말할 수 있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던가. 그들은 그저 그 힘겨운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뿐이다.

 

이런 현실에서 섣부른 판타지는 헛웃음을 만들 수밖에 없다. <미생>은 그런 점에서 보면 헛된 희망을 얘기하지 않은 드라마다. 거기에는 그 흔한 멜로적 성취조차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사회현실 속에서의 성취가 불가능하다면 멜로 같은 사적인 성취라도 취하는 것이 기존 드라마들의 공식이었다. 하지만 미생은 그런 곁가지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사원과 대리, 팀장 사이에서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을 담아냄으로써 그 미생으로서의 삶에 자그마한 숨통을 만들었을 뿐이다.

 

멜로도 없고 가족도 그렇게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이 일중독자들의 세상이 그토록 우리를 잡아끌었던 건 거기에 직장인들의 디테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직장인이란 유리지갑월급쟁이과로과음으로 점철된 어떤 존재들일 뿐이었다. 그 누구도 이렇게 일 속에 푹 빠져 살아가는 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하지만 <미생>은 달랐다. 이 드라마는 그렇게 뻔하게 치부해 왔던 직장인들의 면면을 깊숙이 들어가 자세한 디테일로 그려냈다. 거기에 특별한 판타지는 없었지만, 바로 이 디테일은 그 자체가 하나의 위안과 위로를 주는 힘을 발휘한다. 누구도 자세히 보려 하지 않았던 삶을 조명해준다는 것. 그리고 그 미생의 삶에 나름의 가치 부여를 한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왜 직장인들에게 그토록 큰 공감을 일으켰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다.

 

<미생>의 인물들은 그 드라마의 시작과 끝이 그다지 다르지 않은 변함없음을 보여주지만, 이런 헛된 판타지보다 이 드라마가 선택한 것은 그 자체로서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직장인들의 삶이다. “이왕 들어왔으니까 어떻게든 버텨봐라. 여긴 버티는 게 이기는 거야. 버틴다는 건 어떻게든 완생으로 나간다는 거니까. 바둑에는 이런 말이 있어. 미생. 완생.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 오차장의 이 말에서 방점은 우린 아직 다라는 단어에 찍힌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가 다 아픈 현실에 대한 공감. 그것이 <미생>이 신드롬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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