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그깟 딱풀이 뭐라고 사람을 울리나

 

도대체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던가. tvN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자꾸만 자책한다. 딱풀을 빌려 쓰러 온 옆 팀의 인턴이 장그래의 책상에 놓여있던 문서에 풀을 묻혀 흘렸고, 그 문서를 우연히 전무가 발견하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었다. 전무는 오상식(이상민) 과장에게 주의를 주었고, 오과장은 그잖아도 낙하산이라는 얘기에 탐탁찮았던 장그래에게 나가라!”고 소리쳤다.

 

'미생(사진출처:tvN)'

그건 그의 죄가 아니었다. 하지만 김동식(김대명) 대리에게 옥상으로 불려가 벌을 받는 장그래는 끊임없이 자신의 바보 같음을 자책했다. 이 아무 것도 아닌 듯한 짧은 에피소드가 한없이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건 그것이 단지 장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슨 잘못을 했던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자책하는 청춘들.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이런 상처를 주었단 말인가.

 

그것이 오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상식 과장이 자신이 독설을 퍼부은 장그래에게 한없이 미안함을 느끼고, 술기운을 빌어 옆 팀 과장에게 너희 애가 문서에 풀을 묻혀 흘리는 바람에 우리애가 혼났잖아!”하고 소리치는 장면은 그래서 마음 한 구석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것은 오과장의 입을 빌어 기성세대가 한없이 자책하는 지금의 청춘들에게 던지는 위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딱풀 말야. 얘가 실수한 거 아니다. 얘가 한 거 아니란 말야 임마. 오해받으면 안된단 말야!”

 

<미생>이 더욱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장그래라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건실하게 살아가는 청춘이 보여주는 자학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실패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라고 이를 치부해버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과장이 그에게 남들과 달리 잘하는 것이 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남다른 노력이라고 답한다. 자신의 노력은 질이 다르다고.

 

하지만 어디 세상이 노력으로 인정받는 곳인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하려는 그는 스펙이 없다는 이유로 조직으로부터 고립된다. 열심히 일하면 회사는 혼자 사는 곳이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고, 열심히 노력하려고 해도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혼자 사는 곳이 아니라며 혼자 남게 만드는 세상. 그것이 장그래라는 스펙 없는 청춘이 딛고 선 현실이다. 그것을 항변하기보다는 내면화하고 자책하는 모습은 어쩌면 지금의 청춘들이 처한 상황일 것이다. 노력이 부족했다고 여기지 않으면 이 도저히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답답한 현실에 미쳐버릴 것 같으니 말이다.

 

윤태호 작가가 그린 <미생>에 첫 권에 등장하는 이 딱풀 에피소드는 아주 사소해 보이지만 그래서 우리 사회가 처한 청춘과 현실의 문제를 제대로 건드린 면이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그 똑같은 에피소드가 드라마를 통해 보여지자 그 울림이 더 커졌다는 점이다. 보통은 원작이 주는 힘에 드라마 리메이크는 힘이 빠지기 마련이 아닌가.

 

이렇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윤태호 작가가 그린 웹툰 <미생>은 바둑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어서인지 상당히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반면, 드라마 <미생>은 역시 드라마답게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극적 구성이 갖는 힘은 이미 <미생>의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시청자들마저도 그 마음을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 여기에 몰입감 좋은 배우, 임시완은 장그래라는 캐릭터를 통해 이 시대 청춘의 자화상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다.

 

문서에 풀을 묻혀 흘리는 바람에 우리애가 혼났잖아!” 술기운을 빌어 자신의 오해를 풀어준 오과장의 말을 떠올리는 장그래의 장면에서 그 대사가 계속 반복되는 연출은 그래서 시청자들을 더욱 짠하게 만든다. ‘우리애라는 말이 이 주변으로만 자꾸 내몰리던 청춘에게 얼마나 큰 의미로 다가갔을지. 장그래의 모습은 이 땅의 청춘들의 모습과 교차되며 우리의 마음을 울린다. <미생>이라는 작품의 대단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

 

이 애끓는 아빠의 분노를 어찌 공감하지 않을까

 

늘 미안한 딸이었다. 엄마를 암으로 먼저 보내고 나서도 잘 챙겨주지 못했다. 일 때문에 그 흔한 스키장도 한 번 놀러가지 못했다. 그런 딸이 어느 날 싸늘한 시신으로 그것도 심각한 성폭행의 흔적이 있는 몸으로 돌아왔다. 이걸 받아들일 수 있는 부모가 있을까.

 

사진출처:영화 <방황하는 칼날>

<방황하는 칼날>이 던지는 화두는 이토록 섬뜩하고 아득하다. 시신을 확인하러 간 아빠가 문 앞에서 버럭 화를 내며 내가 왜 여길 가야되는데하고 소리칠 때부터 관객의 마음은 이 아빠의 고통을 실감한다. 텅 빈 눈. 떨리는 손. 그리고 오열.

 

오로지 딸의 죽음에 너무나 미안해서, 이렇게 그냥 가버리면 모두가 기억에서 지워버릴 것만 같아 아빠는 복수의 칼날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린다. 이렇게 아빠의 마음이 바탕에 깔려 있는 처절한 복수극에는 그래서 액션 같은 화려함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고행 같다. 눈 밭 위의 아빠가 온 몸이 얼음장처럼 꽁꽁 얼어붙은 채 누워 있는 첫 장면은 이 영화가 심지어 삶이 지옥인 아빠의 구원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아이들은 한 없이 잔인하고 영악해진다. 하지만 법은 그들은 쉽게 놓아버린다. 하지만 딸을 잃은 아빠는 그렇게 쉽게 모든 걸 놓을 수가 없다.

 

눈이 계속 내리는 강원도의 산길을 오로지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 다리를 절어가며 오르는 아빠의 모습은 그 집념 속에 딸을 잃은 고통 또한 고스란히 담아낸다. 얼마나 안타깝고 얼마나 미안하며 얼마나 자신이 미웠으면 그렇게 온전히 몸 하나를 던져버리겠는가. 아빠가 포기해버린 듯한 자신의 몸은 그래서 점점 사체로 돌아온 훼손된 딸을 닮아간다. 아빠는 사실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씩 딸 곁으로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법정 싸움으로까지 가게 된 논란이 된 청솔학원은 이 영화의 또 다른 중요한 장면이다. 아이들은 어쩌다 이렇게 잔인하게 되었을까. 게임 한 팩을 사기 위해서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아이들. 그 밑바탕에는 썩어 버린 사회의 교육문제가 깔려 있다. 학원이 가출 청소년들의 성매매 현장으로 돌변한 상황은 이 교육문제를 고스란히 표징하는 장면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유명한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지만 정재영과 이성민의 미친 연기는 이를 충분히 한국적인 느낌으로 바꾸어 준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 따위는 사실 기대할 수 없고 기대해서도 안되는 작품이다. 그것보다는 이 아빠의 미칠 듯한 절절함을 그저 느끼는 것이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다.

 

그래서 딸 가진 아빠라면 이 극단적인 선택과 상황에 내몰린 아빠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는 수간을 맞이하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놀라움이다. 피해자였지만 살인자가 된 아빠. 그 아빠의 손에 쥐어진 칼날이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 속에는 그래서 수많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이 아빠에 공감한다면, 그 뒤에 놓여진 우리 사회와 교육의 문제를 들여다봐야 한다. 그것이 어쩌면 살아남은 아빠들이 이 땅의 자식들에게 해줘야할 진짜 중요한 일일 테니 말이다.

<미스코리아>, 치열한 일과 멜로가 만났을 때

 

역시 서숙향 작가의 멜로는 확실히 다르다. 그저 그런 잘 난 남자와 신데렐라의 이야기 따위는 그녀의 드라마에서는 좀체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드라마에는 치열한 일터의 현실이 있고, 그 안에서 고군분투하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를 구원하는 왕자 같은 남자? 아마도 여성들은 그런 판타지를 꿈꿀지 몰라도 그것이 현실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판타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서숙향 작가의 작품 속 남자들은 그래도 우리 주변에서 있음직한 그런 남자들이 대부분이다.

 

'미스코리아(사진출처:MBC)'

리얼리티 멜로라고나 할까. <별에서 온 그대>가 심지어 외계인을 등장시켜 여심을 사로잡는 판타지 멜로의 극점이라면 <미스코리아>는 치열한 삶의 현장 속에서 벌어지는 리얼리티 멜로의 극점이다. 97IMF 시절, 한창 벤처 붐이 일었던 그 시대의 공기를 <미스코리아>는 제대로 포착해낸다. 순수한 벤처 정신을 가진 많은 창업자들이 한편으로는 조폭 같은 대부업체의 손에 의해 도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벤처 투자가라는 명목으로 된다 싶은 업체를 사냥하는 이들에 의해 회사를 빼앗겼던 시절이다.

 

비비화장품 주변을 맴도는 정선생(이성민)이나 이윤(이기우) 같은 캐릭터는 그래서 당시의 조폭과 벤처 투자가라는 벤처의 위협을 표징하는 인물들이다. 비비화장품 사장 김형준(이선균)은 순수한 벤처정신으로 똘똘 뭉친 인물이지만 바로 그렇게 곧기 때문에 번번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다. 성희롱이 일상이 된 엘리베이터걸 오지영(이연희) 역시 이 사라져버릴 직종의 끝자락에서 미스코리아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안간힘을 쓰는 인물이다.

 

미스코리아라고 하면 어딘지 부정적인 인상이 먼저 떠오르지만 오지영이 미스코리아를 선택하는 건 그녀가 결국 가진 것이 몸뚱어리 하나뿐이라는 그 절박함을 드러내준다. 하지만 그녀가 미스코리아를 키워내는 마애리(이미숙)가 아닌, 가진 건 없지만 진짜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녀를 미스코리아로 만들어주려는 김형준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는 단지 멜로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상품화되는 몸이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몸으로서 오지영이 미스코리아가 되려는 진심을 담아내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 언젠가부터 멜로는 사랑 하나만이 아닌 이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여성들의 달라진 삶이 반영된 탓이다. 점점 늘고 있는 직장여성들에게 사랑은 일과 무관하지 않고 또 일 역시 사랑과 무관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사랑을 다루는 멜로에서 남녀 주인공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점은 실로 드라마에 중요한 포인트가 되었다.

 

하지만 서숙향 작가의 멜로드라마가 남다른 것은 그 일의 세계가 그저 배경이 아니라 마치 전쟁터 같은 느낌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남녀 간의 성차별이 존재하고 그러기 때문에 파리 목숨이 되기도 하는 일하는 여성의 고충이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파스타>가 라스페로라는 이태리 레스토랑의 주방을 사나운 불길과 날카로운 칼이 난무하는 전쟁터로 그려지듯이 <미스코리아>의 드림백화점의 엘리베이터라는 폐쇄된 공간은 숨 막히지만 어쩔 수 없이 버텨내는 감옥 같은 공간으로 그려진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 앞에 나타난 남성들이 사랑 그 자체의 마취적인 탈출구로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성들은 여성들의 일을 지지해지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도와주는 인물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들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일에서의 성공과 사랑으로의 성공. 이것은 현대여성들이 꿈꾸는 가장 현실적인 판타지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별에서 온 그대>에 밀려 조금 저조한 시청률을 냈지만 그렇다고 <미스코리아>가 실패한 드라마는 아니다. 97년의 한 시대적 풍경 속에서 그려낸 서숙향 작가의 일과 사랑은 충분히 의미와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서숙향 작가가 여성들의 성장 멜로에 있어서 각별한 재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드라마의 제왕>과 <골든타임> 작가 논란

 

<드라마의 제왕>의 이고은(정려원)은 신인작가다. 아직 정식데뷔도 못했고 유명작가 밑에서 갖은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보조작가 생활을 해왔다. 그러다 악명 높은 제작자인 앤서니 김(김명민)에게 이용당하고는 드라마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몇 년 후 쫄딱 망한 앤서니 김은 이고은의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일본투자자에게 투자받기 위해 그녀와 다시 계약한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의 편성권을 따내게 되자 신인작가에게 작품을 맡길 수 없다는 방송국측의 의견에 따라 앤서니 김은 이고은을 교체해버린다.

 

'드라마의 제왕'(사진출처:SBS)

드라마라서 극화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적어도 여기 등장하는 신인작가 이고은이 당하는 처지는 그다지 과장이 없다. 외주제작 시스템 속에서 신인작가들이 겪는 고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제작자에 의해, PD에 의해, 방송국에 의해 이리저리 끌려 다니고 조금만 반응이 달리 나와도 전면적인 작품 수정을 요구 당한다. 심지어 이고은처럼 아이디어만 쪽쪽 빼먹고 이용만 하다 버려지는 경우까지 있다. 제 아무리 무던한 사람이라도 이런 환경에서 작품 하나를 하고나면 자신이 생각했던 작가라는 세계와의 괴리감에 자괴감마저 들게 마련이다.

 

<드라마의 제왕>을 보면서 최근 월간 <방송작가>에 게재된 인터뷰로 논란이 된 <골든타임>의 최희라 작가가 문득 떠오른 것은 왜였을까. “완장을 찬 돼지 같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이 한 줄의 표현이 그대로 문자화되면서 최인혁이라는 놀라운 캐릭터를 연기한 이성민이 도마에 오른 것이 최희라 작가에게는 논란의 빌미가 되었다. 만일 그 표현을 하지 않았더라면, 또 했더라도 그것이 기자에 의해 활자화되지 않았다면 그 인터뷰의 전체 내용은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겼을 것이다.

 

물론 그녀가 한 인터뷰와 그 인터뷰 내용을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다룬 <방송작가>측의 행동이 경솔했고 잘못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추호도 두둔할 마음이 없다. 하지만 이 인터뷰의 진짜 내용은 배우를 디스하려는 그런 목적에 있지 않았다. 거기에는 신인작가가 드라마판에서 겪고 있는 많은 충돌과 고충, 그리고 작가로서 지켜야할 소신과 현실 사이의 갈등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다만 그것이 너무 거친 표현으로 직설적으로 다뤄졌다는 것이 본질을 호도하게 된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최희라 작가는 2010년 <산부인과>로 데뷔한 후, <골든타임>이 두 번째 작품으로 거의 신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녀는 <방송작가>와의 인터뷰의 첫머리에서 <산부인과>를 쓸 때 겪었던 고충을 밝히기도 했다. “신인작가가 쓴다고 하니 제작 여건이 어땠겠어요. 그런데 시청률이 오르고 조금씩 반응이 오니까 그제서야 오만 군데서 달려들어 흔들어 대기 시작하는 거예요. 한번은 한 회 대본 전체를 다시 써야 했죠. 한 회가 바뀌면 이미 써 놓은 뒷부분의 대본도 다 고쳐 써야 하는 거잖아요. 드라마가 방송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9일 동안 5회 대본을 다시 썼어요. 그런 고통을 겪고 나니까 이 바닥이 나와 맞을까? 하는 근원적인 의문이 들었어요.”

 

흔히들 드라마 작가라고 하면 모두가 엄청난 고료를 받고 배우들 누구나 고개를 숙이며 존경하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전체 작가들 중 상위 몇 프로에 해당되는 얘기다. 최희라 작가는 <골든타임>을 하면서도 권석장 감독과 부딪쳤던 점들을 인터뷰를 통해 피력했다. 그녀의 말로는 권석장 감독은 “청년 인턴의 알콩달콩 사랑이야기”를 찍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희라 작가가 쓰려던 것은 좀 더 중증외상학과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과 실랑이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10회를 넘어서부터 상황이 더 힘들어졌어요. 현장에서는 대본 대로 찍을 수 없다고 하지, 배우들은 자신의 분량을 늘려달라고 하지... 이 드라마를 지켜야 하는 건 순전히 작가의 몫이었어요.” 최희라 작가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권석장 감독이 “최인혁과 이민우의 이야기보다 이민우와 장재인이 함께 하는 장면을 더 넣어달라고 요구”한 것은 나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시청률에 있어서 달달한 멜로라인이 갖는 힘이 분명 있다는 것을 권석장 감독이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하지만 작가는 시청자가 “이미 최인혁과 이민우를 통해 중증외상환자들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의견충돌은 당시 그녀를 괴롭혔을 게다. 물론 그녀는 인터뷰에서 “지금은 감독님께 미안한 마음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인터뷰 내용에서 문제가 된 배우에 대한 이야기는 격앙된 표현 부분만 떼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 게 아니다. <드라마의 제왕>에서 강현민(최시원)이라는 배우가 이고은 작가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면 드라마 제작에 있어서의 힘겨루기가 역할에 따라 나눠지기보다는 누가 힘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희라 작가는 “캐릭터를 일관성 있게 끌고 가 줘야 하는 게 주인공의 몫”이라고 했다. 최인혁이라는 캐릭터가 점점 대중들에 의해 중심으로 오면서 본래 다루려 했던 멘토와 멘티 관계를 넘어 지나치게 주목되고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작가로서는 부담이었을 수 있다.

 

이러한 불편함은 주목받으면서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갑자기 생겨난 최인혁과 신은아의 멜로에 대해 그녀가 인터뷰에서 말한 내용에 어느 정도 담겨있다. “최인혁과 신은아 두 사람의 멜로도 그랬어요. 나이답지 않게 순수하고, 어색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봐야 하는 시점에서 마치 작가 몰래 둘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처럼 연기했어요.” 이 캐릭터의 균형에 대한 작가의 생각은 이선균에 대한 칭찬 속에 들어 있다. “그에 비하면 이선균씨는 분량이 제일 많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지 않게 주위 배우들과 밸런스를 맞추면서 최인혁의 캐릭터가 빛이 날 수 있도록 해줬어요. 이선균씨가 그동안 왜 그렇게 많은 작품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는지 느꼈죠.”

 

<골든타임>에서 이성민의 연기는 분명 작품을 살리는 힘이 되어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또한 분명한 건 연기가 살아나는 것이 전적으로 연기자의 힘만으로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최인혁이라는 캐릭터가 작가에 의해 축조된 바탕에서 가능한 일이다. 이성민이 수많은 작품을 해왔지만 <골든타임>을 통해 주목받게 된 것은 그런 이유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최희라 작가가 최인혁이라는 캐릭터를 잘 만들었기 때문에, 이 인터뷰의 논란은 더 큰 파장을 낳게 되었다. 여전히 최인혁이라는 캐릭터는 서민들의 메시아 같은 이미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분명 경솔한 인터뷰였지만 거기에는 아직 신참으로서 현실의 때가 묻지 않은 작가의 순진함도 묻어난다. <드라마의 제왕>이 그리고 있는 것처럼 드라마 제작현실은 낭만적이지 않다. 그것은 전쟁터나 마찬가지니까. 최희라 작가는 인터뷰 말미에서 여전히 작가를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 중이라고 했다. 신인작가라는 현실 속에서 작가라는 정체성 자체를 고민하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골든타임>이 좋은 드라마였다는 것이다. 모쪼록 이 한 때의 실수로(그것이 작은 실수는 아니지만) 또 다른 좋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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