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문>, 상류사회의 전근대성, 그 시대착오의 쓴 웃음

 

이건 왜 사극을 보는 느낌일까. SBS <풍문으로 들었소>는 알다시피 지금 현재가 시대적 배경이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딘지 사극을 닮았다. 한인상(이준)이 사는 집은 마치 조선시대의 거대한 권문세가를 연상시킨다. 한정호(유준상)와 최연희(유호정)는 이 권문세가의 주인들이고 그들의 비서들인 양재화(길해연)나 이선숙(서정연)은 사극으로 말하면 하인들 중에서도 집안의 대소사를 꾸리는 수노(首奴)에 가깝다. 물론 이 집에는 운전기사부터 유모까지 하인들(?)이 수두룩하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신분제가 사라진 지 백년이 넘게 흘렀지만 어찌된 일인지 <풍문으로 들었소>의 풍경은 여전히 전근대적인 신분제의 틀에 멈춰져 있다. 물론 그 신분제는 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태생으로 이미 빈부가 결정되는 자본주의의 시스템 안에서 태생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그다지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과거의 신분제보다 더 나빠진 건 이들 상류사회의 일원들인 현대판 양반들에게는 거기에 걸맞는 소양이나 예의 또한 별로 기대할 게 없다는 점이다. 겉으로 보기엔 번지르르하게 보이고, 교양 있어 보이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토록 속물이 없다. 이성을 강조하는 이 집안에서 최연희가 용하다는 점쟁이를 불러 부적을 붙이는 건 그 속물근성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장면이다. 체신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은 뒤로는 돈이면 뭐든 다 해결해줄 것처럼 행동하지만 앞에서는 교양인인 척 하느라 속내를 숨기고 어색하게 웃기 바쁘다.

 

이런 집에 간판 집 딸 서봄(고아성)이 배가 남산만한 체 들어와 그 날 안방마님(?)의 침대에서 아기를 낳는 이야기는 그래서 대단히 흥미롭고 우스꽝스럽게 다가온다. 거기에는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작품이 가진 상류사회의 위선에 대한 신랄한 폭로가 들어있다. 아기를 낳은 서봄에게 흥분한 최연희가 교양 없이 쌍소리를 해대고 그러면 안 된다는 비서의 이야기를 듣고는 얼굴을 바꿔 교양인인 척 다시 찾아와 사과하는 모습은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우습다.

 

게다가 서봄으로부터 한인상을 떼어놓으려고 거의 감금에 가까운 일을 벌이는 한정호나, 거기서 탈출해 마치 도둑놈처럼 자기 집에 몰래 들어오는 한인상은 그 비정상적인 상황 때문에 웃음을 준다. 한인상과 서봄 본인들은 실로 절절한 비극의 주인공들이지만 그 상황은 희극이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집에 자기가 못 들어가고, 시댁에서 아이를 낳은 후 거의 갇혀 있으며 혼인신고를 마치 007 작전 치르듯 하는 이런 상황이 어디 정상적인가.

 

유배 갈 처지에 몰린 애 아빠가 몰래 집에 들어와 애 엄마에게 마치 감옥이나 되는 듯이 집안 구조를 가르쳐주며 그 감옥살이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장면은 또 얼마나 황당한가. 이런 장면들이 우습게 다가오는 건 그것이 조선시대에나 가능할 법한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금 현재 상류사회의 전근대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얼마나 기발한 착상이란 말인가.

 

중요한 건 이 드라마의 제목이 <풍문으로 들었소>라는 점이다. 이것은 이렇게 교양 있는(?) 상류사회의 집안에서 벌어져서는 도저히 안 되는 일들을 주인들이 감추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결코 그것이 감춰지기 어렵다는 걸 말해준다. 우선 그들 자신이 이 상황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이 첫 번째지만 그 많은 현대판 하인들의 시선과 입소문은 이 풍문들을 집 바깥으로 퍼져나가게 만들 것이다.

 

우리네 서민들이 가끔씩 보게 되는 상류사회에서 벌어진다는 전근대적인 일들(이를 테면 왕처럼 살아간다는 재벌가 이야기 같은)의 부조리가 풍문으로 떠돌 듯이 이 드라마는 그 풍문의 실체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점은 이 사극처럼 느껴지기까지 하는 전근대적 상황을 보여주는 이 드라마가 현실에 던지는 도발일 것이다.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것은 도대체 뭘까. <배우는 배우다>는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고 어찌 보면 너무나 모호한 이 질문을 도발적으로 던지는 영화다. 배우의 존재 근거를 질문하는 영화에 이준이라는 아이돌 스타를 세웠다는 것이 그 도발의 증거다. 왜 하필 이준이었을까.

 

사진출처: 영화 '배우는 배우다'

물론 이준은 <닌자 어쌔신> 같은 영화를 통해 액션 연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준의 연기에서 장점으로 보이는 것은 단순히 말로 전달하는 장면에서조차 그것을 액션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은 몸의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연기에 있어서 그가 가진 굉장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렇게 연기에 대한 타고난 자산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준은 연기자로서는 여전히 초보에 가깝다. 배우라고 부르기보다는 아이돌 스타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그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바로 이 부분에 이 영화가 가진 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배우나 연기 같은 조금은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거나 혹은 우리네 일상일 수 있다는 것.

 

<배우는 배우다>에서 이준이 연기하는 오영이라는 인물은 연기의 기술은 잘 모르지만 몰입이 뛰어난 친구다. 그래서 서툴게도 연극을 하면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지나치게 빠져들어 극을 망치기 일쑤다. 즉 연극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연기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품을 망치는 위험성이 있지만 연기자로서 이보다 중요한 덕목은 없을게다. 최고의 연기란 연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 오영이란 인물에게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매니저가 달라붙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영화의 단역 캐릭터를 조역까지 바꿔놓아 말 그대로 일약 스타를 만들어버리자 오영은 진정한 연기가 아니라 마치 스타를 연기하는 인물처럼 바뀌어버린다. 그토록 자신을 밟았던 여배우를 마치 정복하고 복수하듯 정사를 치른 후 그래서 그가 무심코 내뱉는 말은 이렇다. “여배우라고 별거 아니잖아.”

 

정점에 올라 스타가 되자 그는 작품의 캐릭터에 몰두하기보다는 스타가 된 자신에 더 몰입한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바라보는 연기라는 세계가 단지 스크린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시점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페르소나’라고도 흔히 표현되는 이 가면은 그래서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너무 가면을 오래 쓰다보면 자신의 맨얼굴을 잊게 된다는 점이다.

 

오영은 스타라는 가면을 쓰면서 배우라는 자신의 본래 얼굴을 잊어버린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컷을 외치는 건 그가 전혀 배역에 몰입되어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결국 그는 그렇게 추락한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찾아낸다. 중요한 것은 이 일련의 성공과 추락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배우라는 직업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는 점이다. 어디서 어떤 역할을 하든 ‘배우는 배우다’라고 편안히 말할 수 있다는 것.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두 시퀀스가 있다. 그 하나는 오영이 어느 날 우연히 룸싸롱에서 알게 된 조폭 같은 깡다구(마동석)에게 이끌려 억지로 형 동생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스타를 연기하며 살아가던 오영은 갑자기 조폭 영화(이를테면 <영화는 영화다> 같은)의 한 인물을 연기하게 된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굴욕적인 일을 당하면서 그가 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연기를 하게 되는 우리네 삶을 잘 보여준다.

 

또 한 시퀀스는 마치 오영에게 구원처럼 등장하는 여자 서영희와 길거리에서 만나 즉석에서 벌이는 연기 장면이다. 이 장면은 마치 남녀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그 애증의 갈등을 그저 평범하게 일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와 그녀가 함께 연극에서 했던 연기를 재연하는 것이다. 즉 연기와 일상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이 장면에서는 도대체 어떤 게 연기이고 어떤 게 실제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연기적인 행동들이 대부분 이럴 것이다.

 

<배우는 배우다>는 이처럼 연기가 연기자들의 것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는 일상적인 것이란 걸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연기자와 일반인을 가르는 것은 오영이 경험했던 것처럼 실제 연기생활을 통해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그래서 어디서 연기해도 ‘배우는 배우다’라고 얘기할 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경험한 이준은 어떨까. 그는 과연 이 영화를 통해 ‘배우는 배우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왔을까.

 

영화를 통해서 보면 분명 이준은 신연식 감독이 그려낸 이 치밀한 연기의 세계 속에서 진짜 연기자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투박한 면이 보여도 그는 분명 꽤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전라 정사 신을 찍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누구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 “이준, 역시 배우는 배우네.” 이것만큼 배우에게 좋은 찬사가 있을까.

왜 사유리의 도발은 허용될까

 

<라디오스타>가 마련한 입방정 특집은 사유리와 클라라의 몸매 대결로 후끈 달아올랐다. <결혼의 여신>이 40% 시청률을 내면 누드화보를 찍겠다는 클라라의 도발적인 공약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사유리는 갑자기 “가슴이 있어?”하고 클라라에게 물었고 클라라는 의상이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이라 그렇다며 “사유리보다는 큰 것 같아요”라고 받아쳤다.

 

'라디오스타(사진출처:MBC)'

그러자 사유리는 “클라라가 가슴이 크다는 얘기를 들어서 비교될까 봐 걱정했는데 뭐 이 정도 밖에 안 되네요”라며 가슴에 넣어놓은 휴지를 빼는 돌발행동을 해 MC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MC들이 민망해할 정도니 그걸 보는 시청자들은 오죽했을까. 실로 우리네 지상파 토크쇼에서 다뤄지기엔 민망한 대결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남자들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면 그 자체로 성희롱이 될 법한 수위였다. 여성 시청자들이라면 토크쇼에서 ‘가슴 운운’ 하는 이야기가 불쾌한 느낌을 주었을 수도 있다. 지나치게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려내는 뉘앙스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상황은 ‘입방정(몸방정 포함)’ 특집이라고 붙이고 사유리, 김흥국, 이준, 클라라를 게스트로 앉힐 때부터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클라라가 “노출로 뜨려고 한 적이 없지만” 잘못 입으면 아줌마처럼 보여서 “몸에 붙는 의상을 자주 입다 보니” 노출로 이슈가 됐다며 고민을 털어놓을 때 이준이 자신도 “노출로 떴다”고 말하면서 남자가 벗으면 멋있다고 하면서 여자가 벗으면 노출로만 몰고 가는 이중 잣대를 거론하는 방식의 이야기 흐름은 <라디오스타>다운 솔직 과감한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지상파 토크쇼에서 난데없이 벌어진 가슴대결은 그 수위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사유리라는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사차원 매력의 소유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심지어 순진무구하게까지 보이는 사유리가 던진 도발에는 마치 아이 같은 솔직함이 묻어났다. 그것은 아마도 대중들에게 각인된 사유리의 평소 모습과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갖게 된 엉뚱 캐릭터 덕분이었을 게다. 사유리의 돌발행동이 대중들에게 허용되는 것은 그것이 가식이 아니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클라라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사유리의 돌발 행동이 허용되는 반면, 클라라의 노출과 그 노출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는 왜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그것은 클라라의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노출로 뜨려한 적 없다”고 말했지만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다음 시구의상이 고민된다”며 ‘코르셋’을 거론하기도 했던 그녀가 아닌가.

 

결국 방송 이미지는 일관된 모습을 통해 생겨나기 마련이다. 박명수에게 호통이 허용되는 것은 그가 일관되게 그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준이 아이돌 세계를 ‘동물의 왕국’으로 표현하고서도 욕을 먹지 않은 건 그가 가진 일관된 솔직함 때문이다. 사유리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엉뚱 도발에는 그녀의 진심이 묻어난다.

 

이것은 클라라가 배워야할 점이다. 그녀는 훌륭한 연기자가 목표라고 했지만 그 연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현재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노출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자신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고 거기서부터 노력을 시작하는 것. 이것이 그녀의 진짜 목표에 다가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우결> 논란이 환기시킨 사생활 엿보기에 대한 불감증 

 

<우리 결혼했어요(이하 우결)>라는 프로그램이 사생활과 밀접하다는 것은 이미 그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즉 결혼이라는 사적인 영역을 들여다보겠다는 의도가 그 안에는 들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 결혼을 도둑촬영 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결혼이고, 그 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점은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엿본다는 다소 우리네 정서에 민감할 수 있는 이 프로그램에 일종의 착시로서의 안전장치를 제공한다. <우결>은 그래서 어찌 보면 리얼한(?) 드라마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형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드라마.

 

'우리 결혼했어요4'(사진출처:MBC)

하지만 가상과 현실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이 아슬아슬함은 보는 이들에게 ‘안전한(?) 도촬 장면을 훔쳐보는 것 같은 자극을 주기 마련이다. 시청자들은 ‘저건 드라마 같은 가상일 거야’하고 치부하며, 남의 사생활을 바라본다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를 가볍게 회피하면서, 동시에 저건 진짜 리얼한 반응이 맞을 거라는 본능적인 자극을 즐긴다. 게다가 이것이 다름 아닌 연예인의 사생활이라는 점은 대중들로 하여금 이 양가적 감정을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해준다. 연예인 사생활은 <우결> 같은 프로그램이 나오기 이전에도 이미 연예 매체를 통해 일상적으로 유통되던 가십이었으니까.

 

바로 이런 양가적 입장을 받아들이던 대중들의 입장에서 보면, <우결>에서 이준과 가상 부부로 출연한 오연서가, <오자룡이 간다>라는 일일극을 통해 가까워진 이장우와 열애 중이라는 보도는 그 자체로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만일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거꾸로 <우결>이라는 프로그램에게는 섭섭한 일이 될 수도 있을 게다. <우결>이 보여준 일련의 리얼한 장면들이 사실은 모두 가상이었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들켜버렸다는 얘기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결>은 늘 이 상황이 가상이긴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반응들은 리얼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옴으로써 이준과 오연서가 실제로도 가깝다는 걸 강조해왔다.

 

보도가 나왔을 때 오연서 소속사측의 반응은 “드라마 촬영을 하며 만남을 가져 서로 알아가는 단계로 보인다”고 밝혀 열애설에 수긍하는 입장을 내비쳤다. 4일 발표된 소속사의 공식자료는 실로 애매했다. 두 사람은 “같은 드라마에서 연인 역할로 등장하다 보니 부딪히는 시간도 많고 학교 선후배 관계이기도 해 친한 사이가 됐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정식으로 사귄다고 말하기도 부담스러운 입장”이며 “더 많은 시간이 지나 감정이 통하면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연인 관계로 단정 짓기에 조심스럽고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애매모호한 관계라는 얘기다.

 

하지만 하루 지나 발표된 <우결>측의 공식 입장은 ‘열애설 공식 부인’이었다. 알아보니 “좋은 선후배 사이”이지 “이성적인 감정은 전혀 없으며 열애설은 사실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렇게 소속사 측의 발표와 <우결>측의 입장에서 온도차가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사안이 <우결>이라는 프로그램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것이라는 양측의 공감대가 형성되었기 때문이었을 게다. 당장 하와이에서 촬영된 분량들을 모두 버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준과 오연서 커플만 나오는 것도 아니고 세 커플 모두가 함께 모여 있으니 이 방송분량의 문제는 단지 이들 커플의 문제로만 다룰 수 없게 된다. 그 피해는 누가 보상해줄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강행된 방송분량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미 드러날 대로 드러난 사실을 알고 있는 시청자라면 이준과 오연서가 ‘첫날밤’ 콘셉트로 침대에 함께 누워 손깍지를 끼는 장면을 보며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게다. 게다가 이번 시즌 들어서 <우결>은 그 표현 수위를 더 높이기까지 했다. 과거에도 커플이 함께 해외여행을 떠나는 모습이 있었지만 그래도 각자의 방에서 자는 모습으로 연출하곤 했었다. 하지만 이번 하와이 여행은 아예 내놓고 ‘첫날밤’이라는 타이틀로 야릇한 대화와 스킨십을 나누는 장면으로 연출되었다. 하필 오연서의 행동이 가식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데, 여기에 과도함까지 얹어진 격이다.

 

그런데 이 갑작스런 열애설로 가식과 과도함이 새삼 느껴지는 지점에서 번뜩 떠오르는 것이 있다. 프로그램의 진정성이 훼손된 상황에서 저런 장면들은 왜 굳이 연출해서 보여주는 것일까. 아무리 가상이라고 해도 사랑 같은 진정성 있는 감정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자극밖에 없다. 그 자극은 결국 <우결>이라는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연예인의 내밀한 사생활을 엿본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 아무리 설정이지만 저토록 첫날밤의 침실까지 들여다보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게 된 우리들은(특히 청소년들에겐 더더욱) 얼마나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둔감하게 된 걸까.

 

사실 오연서의 마음이 어느 쪽에 있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한다는 사실조차 사생활이 아무렇지 않게 소비되는 시대에 대한 우리의 불감증을 잘 말해주는 일이다. 그래서 오연서 열애설로 번진 이번 <우결>의 문제는 이 프로그램이 가진 사생활 소비의 측면을, 둔감해진 대중들에게 각성시킨 결과가 되기도 했다. 진짜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그것이 <우결>과 부딪친 것은, 그 자체로 <우결>이 보여준 것이 다름 아닌 연예인들의 사생활 소비였다는 것을 일깨워준 셈이니 말이다.

 

사생활 노출에 대한 대중들의 감각의 차원에서 바라보면, 오연서가 누굴 진짜로 좋아하는가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제 버젓이 사생활을 팔고 사는 데 있어서 이제는 둔감해진 우리의 정서가 될 것이다. 연예인들의 일이라고 치부하며 그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이것은 곧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가 타인의 사생활을 바라보고 즐길 때, 그것은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내 자신의 사생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할 시점이다. 그것이 오연서의 마음이 이준인지 아니면 이장우인지를 궁금해 하고 있는 우리들이 진짜 직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우결>은 우리에게 그 디스토피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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