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삼시세끼>, 결국은 노동에 대한 이야기

 

<미생><삼시세끼>는 같은 날인 1017일 시작해 각각 1221, 1220일 시즌을 끝냈다. 마치 tvN의 짝패처럼 두 프로그램이 동반상승했다가 유종의 미를 거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서로 달라 보이는 두 프로그램에서는 의외로 비슷한 느낌이 묻어난다. 그것은 이 두 프로그램이 모두 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치열한 일의 세계 그 안쪽을 들여다봤다면, 다른 하나는 그 치열한 일의 세계로부터의 탈주를 보여주었다.

 

'미생(사진출처:tvN)'

<미생>은 결말에 이르러 결국 떠나는 자와 떠나게 될 자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팀장까지 잘 버텨왔으나 사업의 실패로 인해 희생양이 되어 회사를 떠나게 된 오차장(이성민),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 왔지만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회사를 떠나게 될 장그래(임시완). 이 두 직장인이 보여주는 그림은 지독할 정도로 비극적이다. 아예 일의 세계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도 못하는 젊은이가 우리 세태의 한 면을 보여준다면, 그렇게 들어와 제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결국은 회사의 희생양이 되어 쫓기듯 나가게 되는 차장, 부장들이 우리네 현실의 또 다른 면이다.

 

그들은 생계를 위해 그 쉼 없는 일중독을 스스로 강요하며 살아간다. <미생>의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는 그래서 때때로 거대한 괴물의 뱃속 같다는 느낌마저 준다. 그 괴물을 살찌우기 위해서 그 안에 있는 존재들은 끝없이 괴물처럼 일해야 한다. 그 힘이 다하거나, 아니면 괴물과 이질감이 느껴지는 존재가 되는 순간, 그들은 그 뱃속으로부터 퇴출된다. 그것은 어찌 보면 자유지만, 끝없이 일 속에서 중독적으로 살아온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배제의 뉘앙스로 다가온다.

 

<피로사회>의 한병철은 우리네 사회가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바뀌었다고 말하며, 바로 그 성과사회에서는 누군가의 통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과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스스로 자신을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시스템이 굴러간다고 한다. 원작 <미생>에서 왜 오차장이란 캐릭터가 빨간 눈으로 그려졌는지 이해되는 부분이다. 그는 끊임없이 일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물론 그것은 가장으로서의 깊은 책임감 때문이지만, 밥 먹듯이 야근하고 주말마저 반납하며 일에 빠져드는 건 지극히 강박적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일 하지 않으면 스스로 미칠 것만 같은 오차장들을 소진시키며 굴러가고 있다.

 

바로 이 개인을 자발적으로 소진시켜 굴러가는 성과사회의 극단에 서게 되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삼시세끼> 같은 정반대의 삶에 대한 로망이다. 강원도 정선의 벽지라는 도시에서의 거리는 어쩌면 일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의 거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는 떨어져 고립되어야 겨우 일에서 벗어난 금단현상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삼시세끼만 챙겨먹으라는 유일한 미션의 공간은 그래서 이 일중독의 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낯설면서도 어색하고 그러면서도 어딘지 부러움을 사는 장소가 된다.

 

밍키나 잭슨 같은 동물들과의 교감을 보여주고, 조금씩 자라나는 채소들의 성장을 바라보고, 지천으로 떠 있는 별과 드디어 들리기 시작한 시골의 소리들을 들려주는 건 그래서 마치 일중독을 치유하는 하나하나의 처방전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물론 그렇게 처방전이 주어져도 그 안에 들어온 잠재적 일중독자들은 노동의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이 스스로를 노예라고 부르는 대목에서는 그래서 벗어나도 스스로 노동을 찾아가는 자신들을 희화화 한다. 그 안에는 씁쓸한 자조도 섞여있다.

 

이서진이 독특한 것은 그가 끊임없이 투덜대면서도 일을 한다는 점이다. 그는 마치 일 중독 사회가 만들어내는 소진을 극도로 싫어하면서도 결국은 그 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들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수수지옥으로 불리는 공간은 그래서 자못 상징적이다. 일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들은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일 속으로 들어간다. 다만 그 일이 아무런 목적이나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들을 그것을 마치 일이 아닌 놀이처럼 받아들인다. 성과주의 바깥에서의 일이란 그처럼 놀이화된다. 노예놀이 혹은 소꿉장난처럼.

 

<미생><삼시세끼>가 모두 대단한 성공을 거둔 이면에는 이처럼 노동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우리가 늘 그 안에서 살아가며 벗어나지 못하는 일의 세계에 대해 <미생>은 그 괴물 같은 시스템의 전모를 보여주면서도 그 안에서 소진되어가는 이들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보여준다. 그 버티는 삶을 긍정해주는 시선에서는 보는 이들을 똑같이 위로해주는 힘이 생겨난다. <미생> 신드롬은 바로 그 공감대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면 <삼시세끼>는 그 노동 바깥으로 빠져나와 자연 속으로 고립됨으로써 일중독을 치유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들의 행위는 그래서 도시의 노동자들에게는 로망이 된다. 그들은 일 바깥에서 비로소 발견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을 드러낸다. 결국 이 두 프로그램의 성취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성과사회의 두 측면을 담아낸 데서 비롯한 것이다. 11주 동안 우리는 그 노동의 두 얼굴을 마주했던 셈이다.

 

더하기보다 빼기 나누기, 절실해진 삶의 다이어트

 

기계도 쉬지 않고 돌리면 과부하로 고장 나기 십상이다. 하다못해 사람은 오죽할까. 최근 들어 급증하고 있는 이른바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은 그 이름부터가 살벌하다.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하고 난 어느 순간 무력감에 빠지는 상태. 이 상태에 빠지면 잠이 잘 안 오거나, 혹은 자꾸만 졸리고, 우울감을 넘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한다. ‘인지능력 저하’, 즉 시쳇말로 멍 때리는상황이 반복될 수 있어 자칫 사고의 위험까지 생겨날 수 있다고 한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쉬지 않고 하루 10시간 이상씩 일에 몰두하다보면 생겨날 수 있는 증상이라고 하는데, 만일 이렇다면 우리네 직장인들의 대부분은 이 증후군에 노출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하루 10시간이 뭔가. 그것도 모자라 야근을 밥 먹듯 하는 게 우리네 직장인들의 일상이 아닌가. 실제로 한 취업포털사이트에서 남녀 직장인 601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의 74.7%가 스스로를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작년 서점가를 강타한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은 그 제목만으로도 직장인들의 손을 잡아끈다. 직장인들은 그 멈춘다는 단어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미생> 신드롬을 들여다보면 거기 등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일중독자들라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그런 일중독자들은 심지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일 안하면 좀비 취급하는 사회의 노동 강박증이 얼마나 심각한 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PC처럼 점점 컴퓨터 기능이 우리 몸에 가까이 다가오면서 우리의 일상은 쉬면서도 쉬는 것이 아닌 상태에 놓여지게 되었다. 움직이는 컴퓨터(?)는 움직이면서 우리를 일하게 한다. 끊임없이 전화가 울리고, 문자가 들어오고, 메일이 날아온다. 그 때마다 우리는 신경이라는 안테나를 곧추 세우고 일 속으로 빠져든다. 주말을 쉬고 났는데도 별로 쉰 것 같은 느낌이 영 들지 않는 건 사실 몸만 집으로 왔을 뿐 일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되면 좀 더 단순한 삶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이 된다. 뭔가 비워내지 않으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 이럴 땐 차라리 아무도 없는 산골 같은 데 들어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게 상책이다. 최근 <12>부터 <꽃보다 할배>, <꽃보다 청춘> 등을 만들어 여행의 트렌드를 바꾼 나영석 PD가 새롭게 들고 온 <삼시세끼>가 잔잔한 열풍을 만들고 있는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실 강원도 산골 농가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게 다인 이 프로그램이 케이블 채널로서는 놀라운 8% 시청률(이건 지상파도 흔치 않은 시청률이다)을 내고 있는 건 복잡한 세상에 대한 염증과 단순한 삶에 대한 욕구가 반영된 결과다. 아침 차려 먹고 나면 점심 준비하고, 점심 차려 먹고 나면 저녁 준비하는 삶. 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바로 그 하지 않기 때문에 성공한 프로그램이 됐다.

 

다이어트 열풍이라지만 빼야할 건 살만이 아니다. 이미 일과 욕망으로 덕지덕지 살이 붙어버린 우리네 비대해진 삶 역시 다이어트 대상이다. 개발시대의 삶이 성장만을 목표로 하는 더하기의 삶이었다면 이제 21세기에 맞닥뜨린 우리네 삶은 빼기와 나누기의 삶이어야 한다. 비만이 성인병을 가져오는 것처럼, 삶의 비만은 정신적인 부작용을 초래한다. 번아웃 되기 전에 그 에너지를 나누고 빼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삼시세끼>, 수수밭에 수수노예들은 없다

 

<삼시세끼>는 드디어 수수지옥을 벗어났다. 이서진과 옥택연에 이승기와 김광규라는 두 노예(?)를 충원한 노예 수수F4’는 끝끝내 수수밭에 남은 수수들을 모두 베었다. 그 과정에서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일을 보다 못한 제작진까지 모두 수수밭에 투입되기도 했다. 일을 해본 나영석 PD는 뒤늦게 노동 강도가 외외로 세다는 걸 깨닫고는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이 있다. 왜 그들은 굳이 그 수수밭을 끝까지 베었을까. 수수를 갖고 뭔가 만들어먹는 것도 아니다. 설혹 그 수확한 수수를 내다 판다고 해도 그런 돈벌이가 프로그램에 어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수수에 그렇게 집착했는가가 궁금해진다.

 

그 의문은 그러나 의외로 쉽게 풀린다. 그 수수밭을 베는 장면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수수밭 앞에 마름처럼 나타난 나PD고기 한 근에 수수 한 가마라고 얘기하는 장면은 우습다. 그것은 물론 예능의 코드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또한 제작진과 출연진 사이에 일종에 암묵적으로 허용된 놀이를 하는 듯한 뉘앙스도 들어있다. 고기를 먹으려면 수수를 베어야 하는 놀이.

 

여기에는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놀라운 매력의 원천이 숨겨져 있다. 많은 이들이 <삼시세끼>가 시골 라이프를 권장하는 귀농 프로젝트처럼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사실 <삼시세끼>와 귀농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나영석 PD 또한 인터뷰를 통해 밝힌 사실이다. <삼시세끼>는 시골에서 살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바쁜 도시생활에 지쳤을 때 나도 하루 정도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단순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그 소박한 소망을 채워준다.

 

이것은 생활이라고 하기 보다는 23일 정도의 작은 여행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것은 아마도 나영석 PD가 일관되게 해온 여행이라는 소재의 또 다른 버전일 수 있다는 것이다. <삼시세끼>는 이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실생활과는 조금 거리를 둔 프로그램이다. 거기서 출연자들은 <12>처럼 한 끼를 먹기 위해 돈을 벌거나 미션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필요하다면 읍내에 나가 음식 재료들을 사와도 된다. 나영석 PD는 의외로 거기에 기꺼이 주머니를 열어준다.

 

만일 <삼시세끼>귀농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리얼리티를 갖고 만들어졌다면 이처럼 대중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현실 자체보다는 그것을 잠시 벗어나 소소한 삶이 주는 또다른 풍요로움을 누려보게 한 것이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성공 포인트다. 그래서 그들이 하루 종일 삼시세끼를 챙겨먹으며 하는 일들은 하나의 어른들을 위한 소꿉장난의 성격을 갖는다.

 

소꿉장난이라고 하면 어딘가 너무 한가로운 이야기가 아니냐고 말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이 일이나 생산성에서 벗어나 온전히 놀이로서 접하는 <삼시세끼>의 세상은 우리에게 그동안 잊고 있던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면이 있다. 그토록 외치던 생산성이 사실은 우리를 삶의 주인이 아닌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거기서 깨닫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성과 무관한 수수밭 베는 일에 투입된 네 사람을 노예라 부르고 수수 F4’라고 부르지만 거기 진짜 노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을 했다기보다는 하나의 게임 같은 놀이를 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수수밭은 그래서 노동의 공간을 놀이의 공간으로 바꿔놓은 <삼시세끼>의 상징물처럼 보인다. 그들은 물론 허리가 빠지게 수수를 베었지만 그것이 고기 한 점이라는 흥미로운 놀이 때문이라는 점은 이 수수밭의 의미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늘 일과 생산성 관점으로만 살아온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이런 놀이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을 위한 소꿉장난은 그래서 어쩌면 그 어떤 위로나 위안보다도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

 

여행과 잃어버린 청춘, 감회 없는 사람이 있을까

 

나영석 PD가 새롭게 들고온 tvN <꽃보다 청춘><꽃보다 누나>의 남자편 같은 성격으로 어찌 보면 <꽃보다 아저씨>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남자의 자격>의 아저씨들이 보여줬던 나이 들어감과 그럼에도 여전한 청춘에 대한 욕망이 공존하는 그런 이야기. 하지만 이것을 <꽃보다 청춘>이라고 지칭하고 그들 속에 숨겨진 소년을 여행을 통해 깨어내는 이야기로 풀어낸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꽃보다 청춘(사진출처:tvN)'

<꽃보다> 시리즈 3부작이 본래 배낭여행 프로젝트라는 부제로 만들어졌다는 걸 생각해보면 그 이야기들이 결국은 모두 청춘에 닿아있다는 걸 말해준다. ‘배낭여행은 마치 청춘들의 전유물처럼 불리워진 여행의 한 종류다. 그러니 그 틀 안에서 어르신을 넣어보고 또 누나들을 넣어보고 그리고 여전히 청춘의 소년을 갖고 있는 아저씨들을 넣어보는 여행 실험이 나영석 PD가 본래 하려던 그림이었던 셈이다.

 

<꽃보다 청춘>에서 윤상은 우리가 그의 음악을 통해 생각해왔던 것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아왔던 자신을 드러내주었다. 술 없이는 지낼 수 없었던 나날들을 조용히 고백하고 지금은 우울증 치료제로 대신하며 술을 끊어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여행을 통해 술도 우울증 치료제도 떨궈내고 싶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술 없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던 청춘을 찾아가는 여행일 것이다.

 

이적은 그런 윤상의 이야기를 듣고는 조용히 눈물을 떨궈냈다. 같은 음악인으로서 살아왔던 그 아픔을 공감하는 것이고 또 같이 나이 들어감을 공감 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지만 그런 배려를 받아주지 않을 때는 마치 아이처럼 화를 내는 이적은 감정에 솔직하다. 유희열은 늘 밝고 어떤 환경에서도 리더십을 발휘하며 스스럼없는 행동을 하는 소년처럼 보이지만 그 나이라면 익숙해질 만도 한 심각함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물이다.

 

윤상은 담담하고 이적은 솔직하며 유희열은 리더십이 강하다. 이처럼 잘 맞는 조합이 있을까. 유희열이 길을 찾고 계획을 세우면 이적은 그 길 위에서 행동하고 윤상은 옆에서 그들이 놓칠지도 모르는 것들을 조용히 지켜낸다. 그들에게 짐꾼이 없는 이유는 당연하다. 그들 스스로 재미와 의미 모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툭탁대고 셀프 카메라를 들고 그 나이에 -”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웃기면서도 짠한 느낌을 준다.

 

이런 여행의 특징은 나영석 PD<꽃보다> 시리즈가 3연타 홈런을 날린 가장 큰 이유다. 그의 여행은 특별한 조합이 만들어내는 기대감과 그 기대감에서 비롯되는 재미가 있고 무엇보다 이것이 재미에 끝나지 않고 대중정서를 자극하는 의미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폭발력이 있다. <꽃보다 할배>도 그랬고 <꽃보다 누나>도 그랬던 것처럼 왜 하필 청춘이라는 키워드일까.

 

우리에게 여행이란 한때는 계속되는 일 속에서 잠시 떠나는 것이었고 멈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젊어서 일만 하다 나이 들어버린 이들에게는 여행이란 마치 잃어버린 청춘과 비견되는 어떤 것일 게다. 그러니 여행을 통해서 그 청춘을 확인하는 건 즐겁고 설레는 일이면서도 동시에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일이다. <꽃보다> 시리즈가 지금껏 배낭여행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준 것이 그것이다.

 

휴가시즌, 이제 맘만 먹으면 해외로 나가는 일이 그다지 새로운 일은 아닌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더 팍팍해졌다. 무리해서 해외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그 한 자락의 추억을 가슴에 부여안고 한 해의 힘겨움을 버텨내는 건 이제 우리 사회의 한 삶의 패턴이 되었다. 우리 삶의 꽃 같은 시간들은 그렇게 빠르게도 지나가고 시들어간다. 하지만 시간은 지나도 기억은 남는 것. 나영석 PD의 여행은 그 청춘의 기억을 되살려내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저들처럼 한번쯤 청춘의 시간 속으로 떠나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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