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회>의 불륜,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까닭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게 하고 또 돈 벌고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봤어?” 상류사회에서 혜원(김희애)이 당하는 갑질을 보고는 분노하는 선재(유아인)에게 그녀는 자신이 우아한 노비라고 말한다. 혜원을 하인처럼 막 대하는 서영우(김혜은)가 제일 꼭대기냐는 선재의 질문에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도대체 이 마귀란 뭘까.

 

'밀회(사진출처:JTBC)'

중년 여인과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을 소재로 다루지만 <밀회>를 단순한 불륜 치정극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이 가진 다양한 결들을 놓치게 된다. 혜원이 조금씩 선재에게 허물어지고 결국 그의 품에 안기게 되지만, 사실 그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혜원은 왜 선재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안온해 보였던 삶에 균열을 느끼게 되었을까.

 

<밀회>의 영우는 혜원의 친구지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마작패를 집어던져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이다. 친구사이지만 이런 짓을 버젓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뭘까. 그건 바로 혜원이 말한 그 마귀. 마귀는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속삭임으로써 그 어떤 친구사이의 패악질조차 서슴없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상류층의 갑질을 하는 영우도 그렇지만, 우아한 노비로 그 갑질을 감당해내는 혜원도 그 마귀의 희생자들이다.

 

선재는 모차르트 역시 마귀의 희생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모차르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난 이제부터 귀족들한테 주문 안 받는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쓸 거다. 그러다가 일찍 죽은 거라면서요. 그러다 미치고 병들고.” 혜원은 애써 부정한다. “부자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얼마든지 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그녀는 선재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녀가 선재에게 하는 말은 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

혜원이 한 사이트에서 막귀형이란 이름으로 선재에게 던지는 말은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혜원에게 되돌려진다.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어떤 형이 그러더라구요. 스펙따위 필요 없고 그냥 막 즐기면서 살라고.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저는 이 곡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갖고 그래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고 변주 8번 스타카토 더럽게 맘에 안 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려서 기분 째지고 그게 최고로 사랑해주는 거죠. 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고 먹이고 뭐.”

 

어쩌다 여신이라 믿었던 그녀는 실상 노비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밀회>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이면은 실로 더럽다.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우아하게 처리해주는 일을 한다. 아트센터라는 우아함 이면에는 아트는 없고 온갖 비리들만 넘쳐난다. 갑질은 일상이고 오입질 또한 스스럼없다. 그것은 심지어 당연시된다. 마귀 덕분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마귀의 포로다.

 

선재는 그래서 혜원에게는 자신을 마귀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짱땡이니 짱난다는 식의 우아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져줄 때 혜원은 그것을 순수로 읽어낸다. <밀회>가 가진 진짜 힘은 이 불륜의 과정이 마치 마귀에 의해 잘 굴러가던 선으로부터의 탈출처럼 그려지는데서 나온다. 혜원의 밀회는 그래서 아찔하면서도 슬프다.

 

<밀회>가 이런 불륜의 과정들을 통해 상류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는 피아노 같은 예술적인 장치가 한 몫을 차지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결코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도 역시 마귀가 존재했다는 것을.

 

좁은 계단을 지나 그녀는 남루한 선재의 방을 찾는다. 그 방은 마치 겉으로는 우아해도 속으로는 한없이 남루해진 자신의 처지 같다. 선재와의 첫 번째 정사가 온전히 이 남루한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장면과 두 사람의 소리로만 채워진 것은 이 장면이 가진 아픔과 슬픔을 제대로 전해준다. 그 속에서 그녀는 흐느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자신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제복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잠든 선재를 둔 채 나가면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예 이사장님 지금 출발합니다.” 다시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신산함. <밀회>의 불륜은 그 어떤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면이 있다.

<무도>와 유재석의 낮은 눈높이에 대한 의지 

 

이토록 다양한 아이템들과 기획의도가 어떻게 하나로 묶여질 수 있었을까. <무한도전> ‘관상 특집’은 이제는 하나의 역사가 되어가는 <무한도전>의 자신감과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늘 대중의 눈높이 아래에 자신들을 세우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특집이기도 하다. 이 한 편에는 지금껏 <무한도전>이 걸어온 역사가 자연스럽게 묻어있고 그 역사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에 대한 비법 또한 들어가 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관상 특집’은 이 놀라운 시도를 통해 <무한도전>이 지금 현재 어떻게 진화하고 있는가를 정확히 보여주었다. 이 세계에는 지금껏 <무한도전>이 해왔던 무수한 아이템들이 한꺼번에 들어와 있다. 관상 전문가를 데려다 놓고 조선시대였다면 누가 양반이고 누가 상놈이며 누가 왕이고 누가 상놈 중의 상놈인 망나니인가를 가려내는 장면은 지금껏 <무한도전>의 확실한 성공아이템으로 자리했던 외모 대결의 진화된 형태다.

 

하지만 ‘관상특집’의 스토리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라는 상황극 속으로 뛰어들더니 지금껏 <무한도전>이 상황극을 통해 현실을 비틀기도 했던 그 풍자정신을 녹여낸다. 왕은 신하의 말을 듣지 않고 향락에만 빠진 폭군이며, 고언을 하는 충신을 말 한 마디로 망나니 신분으로 떨어뜨린다. 떡을 입에서 입으로 옮겨 받는 식의 무모한 도전 시절부터 시도되던 원초적인 게임들이 오가고 게임 결과에 의해 신분이 뒤바뀌면서 권력구도가 재편된다.

 

굳이 <무한도전>이 엄청난 화제와 함께 무수한 말들까지 쏟아냈던 자유로 가요제 이후, 갑자기 ‘관상특집’을 통해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든 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의도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든 대단히 시의적절하고 의미심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자유로 가요제가 보여준 <무한도전>의 위상은 누구나 주지하듯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겨난 높아진 위상은 <무한도전>에게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관상특집’이 다루는 잘못된 권력의 문제나 권력의 무상함에 대한 이야기는 대중들에게 건네는 <무한도전> 방식의 대답이 되기도 한다.

 

상황극이 타임슬립 설정으로 갑자기 현대로 넘어오는 건 <무한도전>의 이제는 어디로 튀어도 이야기가 가능한 자신감을 드러내는 부분이다. 상황극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었고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묶어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의 무상함이 자연스럽게 보여진다. 조선시대 폭군이었던 정형돈은 현재에는 지나는 행인과 똑같은 한 사람으로 그저 이상한 사람으로 보여질 뿐이다. 또 조선시대 망나니로 신분이 하락한 유재석은 한 착한 아줌마에게 계란을 얻어먹고 누군가 먹다 남은 잔반으로 배를 채우며 복수를 꿈꾸지만(신분의 복귀) 그건 현대에는 사실 의미 없는 일이다.

 

여전히 계급 제도의 권력의 틀에 묶여 있는 이들이 그래서 대중들 속으로 들어와 거리를 활보하는 건 <무한도전>이 과거 ‘지못미’ 특집 등으로 선보였던 벌칙 미션의 새로운 형태이면서 동시에 신분과 계급 그리고 권력이 가진 우스꽝스러움을 보여주는 놀라운 연출을 보여주었다. 흥미로운 건 한 지나는 직장인에게 신분을 묻자 그가 ‘노비’라고 하면서 ‘주인님’한테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점이다. 갑자기 상황극과 현실이 또 조선시대와 현재가 하나로 묶여지는 이 장면은 계급제도는 없지만 자본이 만들어내는 신분과 권력의 문제가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신분을 바꾸기 위한 추격전이다. 조선시대에 궁궐에서 벌어졌던 원초적인 게임들이 과거 <무한도전> 초창기의 게임 형태였다면 현대로 들어온 인물들이 도심에서 벌이는 추격전은 현재 <무한도전>의 진화된 형태의 게임인 셈이다. 그러니 <무한도전> ‘관상특집’은 외모순위 특집이나 상황극, 시민들과 함께 하는 지못미 벌칙에 이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게임의 진화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다. 이 많은 성공 아이템들이 무수히 배치되면서도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무한도전> 월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반증이다.

 

여기서 <무한도전>의 위치를 대변하는 듯 주목되는 인물은 역시 유재석이다. 그는 양반의 위치에서 졸지에 망나니가 되어 현재의 거리로 내던져진다. 이른바 유재석이 가진 막강한 힘은 이미 모두가 주지하는 바이지만, 그의 의지는 대중들보다 항상 낮은 눈높이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길바닥에 누군가 버리고 간 이쑤시개를 아무렇게나 쓰고, 심지어 누군가 남긴 잔반을 먹으며 대중들에게 웃음을 주려 노력한다.

 

대중들을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기꺼이 내려와 진심으로 뒹굴 수 있는 의지. 어쩌면 유재석과 <무한도전>이 가장 높은 곳에서 그 위치를 지킬 수 있는 힘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일 게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무한도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현재 권력을 가진 이들이 그 권력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그 힘이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황금의 제국>, 이 지옥에서 살고 싶은가

 

또 다른 <추적자>를 기대했다면 실망했을 수 있다. <황금의 제국>에는 <추적자>에서 보여졌던 서민 대 재벌의 대결구도가 본격적으로 그려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추적자>의 백홍석(손현주)과 <황금의 제국>의 장태주(고수)는 같은 서민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 변해가는 모습이 다르다. 백홍석이 가진 자들의 편에 선 잘못된 사법정의와 맞선다면, 장태주는 “당신 아버지 최동성 회장은 그렇게 살아도 되는데 난 왜 안돼죠?”하고 되묻는 인물이다.

 

'황금의 제국(사진출처:SBS)

장태주가 살아보겠다는 그 최동성(박근형) 회장은 “수십 번의 고소를 당했고 몇 번이나 검찰 조사를 받았고 시멘트 공장으로 시작해서 불량 시멘트로 큰 돈을 벌고 멀쩡한 회사를 자금압박해서 인수하고 마흔 두 군데의 계열사를 만든” 인물이다. 장태주가 최동성 회장처럼 살겠다 마음먹는 근거는 아버지가 남긴 말 때문이다. “아버지가 한 번도 못 이겨본 이 세상에서 태주 니는 꼭 한번 이겨봐라.”

 

즉 <황금의 제국>에 가난한 자의 선함과 부자인 자의 악함 같은 단순히 빈부 차이로 나눠지는 선악대립구도 따위는 없다. 다만 황금의 법칙으로 굴러가는 돈이라는 감정 없는 괴물이 있을 뿐, 선함으로 호소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이겨야 한다. 착하게 살았다며 자기 위안에 빠지는 일은 이 ‘황금의 제국’에서는 패자의 넋두리가 될 뿐이다.

 

<황금의 제국>에는 이처럼 정의의 수호자나 서민의 대변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추적자>가 정의를 수호하려는 서민의 주인공을 내세워 만들어낸 ‘공분’이나 사필귀정(事必歸正)의 카타르시스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황금의 제국>은 이러한 단순 해소의 카타르시스보다 더 중요한 대결의식을 보여준다.

 

재벌가 하나가 무너진다고 해서 이 ‘황금의 제국’이 사람 냄새 나는 곳이 될 것인가. 시스템이 건재한 이상 또 다른 제국의 지배자가 그 자리에 생겨날 것이다. <황금의 제국>이 겨냥하는 것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를 만들어내는 그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은 제목이 말해주듯 ‘돈’의 흐름이 지배한다.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의 악역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게 이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악역은 ‘돈’이 만들어내는 자본의 시스템 그 자체이니까.

 

최동성 회장의 집안은 ‘황금의 제국’의 축소판이다. 가족이 모여 함께 밥을 먹으면서도 말 한 마디로 회사의 사장이 바뀌고 수만 명 노동자들의 운명이 바뀌며 수백 억 원의 손실을 입혔어도 용서가 되는 곳. 최동성 회장의 병환이 깊어지면서 형제와 자식들 간에 회장 자리를 놓고 벌어진 이전투구는 이 곳이 과연 한 가족의 보금자리가 맞는가 의심하게 만들 정도다.

 

동생이 형에게 총을 겨누며 위협하고, 그 형은 동생의 자식을 교도소로 보내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들며 그 동생의 아들은 큰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칼을 가는 곳. 또 지주회사 쟁탈전을 벌이면서 형제들 간에 자기 지분과 회사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싸움을 벌이는 곳. 그 곳이 바로 황금의 제국의 축소판인 최동성 회장의 집안 풍경이다. 혈육이 서로에게 칼을 들이대는 이곳을 최동성 회장은 어떻게 느끼겠는가. 지옥도 이런 지옥이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태주는 그 최동성 회장처럼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그는 성진그룹의 새로운 회장이 된 최서윤(이요원)에게 ‘해님 달님’ 동화를 얘기하면서 자신은 동아줄을 잡기보다는 쫓아오는 호랑이와 싸우겠다고 말한다. 그것은 아마도 ‘야망’ 같은 것이겠지만 그 야망이 불러올 비극적인 결말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가 꿈꾸는 최동성 회장의 삶은 결국 그 지옥 같은 황금의 제국 속에서 초라한 죽음으로 끝을 맺을테니 말이다.

 

본래 돈은 모두를 평등하게 구분 짓는 힘을 가졌다. 즉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고 그 가진 만큼으로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태생으로 신분이 결정되던 시대를 무너뜨리고 근대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과연 돈이 상징하는 평등한 사회는 이뤄졌는가.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그러자 없는 자는 더 적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다면 많이 가진 자는 진정 ‘황금의 제국’의 제왕이 되었을까. 이것은 환상일 수밖에 없다. ‘황금의 제국’의 주인은 오로지 하나, ‘황금’일뿐이니까. <황금의 제국>이 최동성 회장의 몰락과 장태주의 끝없이 타오르는 야망을 통해 보여주는 세상은 그래서 <추적자>의 다소 낭만적인 카타르시스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황금의 제국>이 <추적자>보다 더 도발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 겨울', 이미 해피엔딩인 이유

 

멜로라는 장르는 그저 판타지에 불과할까. 우연적인 만남, 운명적인 사랑, 신분과 죽음마저 초월하는 사랑... 멜로라는 장르에는 분명 판타지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 판타지들이 하나 둘 모여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어떤 울림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멜로가 단지 판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판타지가 환기하는 현실을 지향하기도 한다는 걸 말해준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이하 그 겨울)>는 ‘슬픈 동화’ 같은 판타지를 통해 돈에 지배된 살벌한 현실을 에둘러 보여주는 멜로다.

 

'그 겨울 바람이 분다'(사진출처:SBS)

“차라리 사기를 치지. 사랑을 하게 하지 말 걸. 나 같은 놈, 사랑을 하게 하지 말 걸.” 오수(조인성)의 참회는 이 드라마가 가진 대결의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가짜 오빠 행세를 하며 78억을 받아내기 위해 시각장애인 오영(송혜교)에게 접근했지만 그 사기가 사랑에 무릎 꿇어버린 것. “사랑했어. 너랑 함께 있어서 나도 행복하기도 했어. 그러니까 네가 날 속인 건 무죄야." 오영의 이 비수 같은 말은 오수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78억이 없으면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오수의 삶이란 기실 우리네 현대인들의 처지를 그대로 재연한다. 자본주의의 삶 속에서 돈이란 어느새 생명이 되어버렸다. 살기 위해 사기 치는 삶. 그 삶에 의미가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오수나 조무철(김태우)은 삶이 살아지니 사는 그런 자본주의에 포획된 삶을 살아가며 힘겨워 한다.

 

반면 어마어마한 자산을 가졌지만 왕비서(배종옥)의 뒤틀어진 모성에 대한 집착으로 눈이 멀게 되는 불행한 삶을 살아온 오영에게 돈은 추악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여타의 자산가와 오영이 다른 점이란 그녀는 늘 죽음을 옆에 끼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런 그녀에게 78억 정도는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오빠에서 연인으로 다가온 오수는 그녀에게 한 자락 의미를 전해준 인물이다. 비록 사기로 시작된 것이지만.

 

<그 겨울>의 드라마 구조가 자본과의 대결을 그리고 있다는 것은 인물들의 변화를 통해 보여진다. 돈을 목적으로 혹은 자신의 이기주의를 채우기 위해 시작된 관계는 후반으로 오면서 그 돈의 관계를 털어버린다. 오수는 결국 받았던 78억의 돈을 거부하고, 그 돈을 종용했던 조무철은 오수를 통해 사랑이 있다는 걸 확인하곤 죽음을 선택하며, 모성이 아닌 집착으로 오영과의 관계를 유지해온 왕비서는 그 집에서 나옴으로써 진정한 모성을 알아간다. 돈 때문에 친구를 배신했던 손미라(임세미)는 돈을 거부하고 진정한 친구관계를 선택한다.

 

눈 먼 오영을 중심으로 세워진 거대한 돈의 관계들이 오수라는 부족하지만 사람 냄새나는 인간과의 부딪침을 통해 사람의 관계로 복원되는 것. 이것이 <그 겨울>이 그리고 있는 세계다. 오영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돈에 눈먼 인간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오영의 감긴 눈은 오히려 세상과 사람들을 더 명료하게 보게 만드는 장치인 셈이다. 우리는 모두 이 오영의 감긴 눈을 통해 어쩌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을 지도 모른다. 도대체 진정으로 눈먼 자는 누구인가.

 

<그 겨울>이라는 멜로의 주인공들이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기약하면서도 웃고 있는 것은 그 자본에 의해 맞이하는 파국 속에서 비로소 그들이 인간 혹은 사랑을 회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수는 죽음을 앞두고서야 비로소 오영을 사랑하게 됐고, 조무철은 죽음을 맞이해서야 비소로 오수를 통해 사랑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왕비서는 쫓겨남으로써 오영을 통해 모성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자본이 그들의 피부 속에 각인시킨 그 무엇을 털어버리는(그것은 죽음일 수 있지만) 것으로 진정한 관계를 회복한다.

 

이 메시지는 <그 겨울>이라는 멜로가 얼마나 세상과의 대결을 첨예하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한없이 끌어당겨진 클로즈업 속에서 우리는 이들의 멜로에, 이들의 사랑에, 이들의 체온에 한없이 빠져들었지만, 그들의 파국을 바라보면서 또한 그 프레임 바깥에 놓여진 비극적인 현실을 떠올린다. 조무철과 오수를 옥죄어오는 저 김사장이라는 인물은 그래서 그 숨겨진 차가운 현실의 표상이나 다름없다. 돈이라면 목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워버리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이라는 이름의 캐릭터.

 

그래서 <그 겨울>은 비극이면서도 비극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의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이지만 그 자본을 벗어나 사랑으로 탈주하려는 이들에게는 비극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달라져 있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에게 돈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래서 <그 겨울>은 눈물 속에서 웃고 있는 캐릭터들처럼 이미 해피엔딩인지도 모른다. 물론 표면적인 결론이 해피엔딩일지 새드엔딩일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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