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은 왜 점점 슬퍼지는가

 

30년 전 한 사내가 뉴기니의 해변을 걷다가 얄리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이 사내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백인들은 짐이 많은데 우리 뉴기니인들은 짐이 적은 걸까요?” 뉴기니에서 짐이라는 단어는 재산이라는 뜻이다. 이 뉴기니인 얄리의 질문은 지극히 단순해 보였고 쉽게 답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됐다. 하지만 이 사내는 그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사실 같은 지구에 살면서도 왜 누구는 부자로 살게 됐고 또 누구는 가난하게 살게 됐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내는 그 답을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 해답은 <총,균,쇠>라는 방대한 분량의 책으로 쓰여졌다. 이 사내의 이름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였다. 그는 이 책으로 1998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사진출처:KBS)

얄리의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제시한 것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총, 균, 쇠이다. 즉 유럽인들이 신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해 지금처럼 삶의 분균형이 생길 수 있었던 원인이 그들이 발명한 총과 그들이 보유한 균(그들에게는 내성이 생겼지만 원시부족에겐 치명적인 이를테면 천연두 같은), 그리고 무시무시하게 벼려진 칼을 생산하게 해준 강철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로 생겨난 현재의 빈부가 거기 사는 부족들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유럽인들이 이 모든 것들을 미리 가질 수 있게 만들어준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유럽인은 다만 운이 좋았을 뿐이라는.

 

그렇다면 거꾸로 이들이 ‘운이 좋아’ 갖게 된 총, 균, 쇠에 무참히 쓰러져간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요구된다. 레비 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가 다시 읽히고 다시 주목되는 건 바로 이런 자각 때문일 게다. 중세를 넘어 근대로 오면서 서구인들의 사실상의 정복 전쟁을 마치 신대륙 발견 같은 문명의 전파로 보는 그들 중심적인 시각에 대한 반성은 20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 계속 되고 있다. 힘의 논리가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의 논리로서 경쟁보다는 공존의 의미를 찾는 건 결국 서구 중심적 사고방식이 초래한 전 지구적인 위기상황을 우리가 이미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 게다.

 

최근 들어 <아마존의 눈물>, <아프리카의 눈물>, <남극의 눈물> 같은 눈물 시리즈 다큐멘터리가 오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21세기적인 새로운 시각으로 이 공간을 다시 바라보기 위함이다. 아마존에 들어간 이들은 도시인들에게는 말 그대로 오지일 수밖에 없는 그 곳에서 벌거벗고 살아가는 원시 부족들의 삶이 어쩌면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삶일 수 있다고 증언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인 도시의 침탈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그들의 삶을 아프게 포착해낸다. 그들의 눈물이 우리들의 풍요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삶을 다시 자각시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이제는 <정글의 법칙> 같은 예능 프로그램 또한 이 슬픈 정글로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고 있다. 최근 이 프로그램은 일부 장면들이 과장되게 연출되고 때로는 섭외된 원주민들을 출연시켜 조작방송을 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으로 홍역을 겪기도 했다. 물론 <정글의 법칙>은 그 기획의도가 서구의 대표적인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인 베어 그릴스의 <인간과 자연의 대결>과는 확연히 다르다. 베어 그릴스의 프로그램이 제목처럼 인간과 자연을 여전히 대결구도로 그리고 있다면, <정글의 법칙>은 그 혹독한 환경 속에서 다시 찾아내는 가족개념이라든가 원주민들이나 자연과 도시인이 어우러지는 공존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느껴지는 비애감은 이러한 좋은 의도로 찾아간 카메라조차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일 게다. 이미 도시의 바람을 쐰 원주민들은 과거 그들의 전통적인 삶의 공간에 머물지 못하고 도시로 떠나기 일쑤다.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아프리카에 가서 목격한 것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살아왔던 공간에서 벗어나 도시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과거에는 백인 침략자들을 위협하곤 했던 말라리아가 이제는 도시에 모여든(전염이 강해졌다) 원주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현실이다. 아마도 수많은 방송사들이 이들의 삶을 지켜내기 위해 재조명하겠다고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어도 그것은 어쩌면 그 자체로 그들의 삶을 도시로 끌고 와 결국은 파괴하는 행위가 된 것은 아니었을지. 그들의 삶에 집중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혹여나 방송 프로그램으로서 도시인들의 시각과 욕망을 더 투영한 것은 아니었을지.

 

 

'정글의 법칙'(사진출처:SBS)

<정글의 법칙>이 정글 속에서 발견한 미덕은 뭐든 문명의 이기를 덕지덕지 붙인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서 그것들을 떼어내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진짜 삶의 의미일 게다. 그들은 문명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오로지 자연 뿐인 그 깊은 정글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네온사인 불빛대신 별을 보기 시작했고 자동차 소리 대신 새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너무나 많이 소비되는 통에 그 가치를 알 수 없었던 한 끼 식사의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고, 따뜻한 집에 안락한 침대에 널브러져 진짜 안락의 의미를 모르던 우리들에게 그저 비 피하고 등 펼 수 있는 곳에서의 하룻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정글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도시의 시선으로 정글을 바라본 것일 지도 모른다. 진짜 정글은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때 그 자체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아마존의 눈물>에 이어 <남극의 눈물>을 찍고 돌아온 김진만 PD는 이 ‘조심스러움’에 대해 필자에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저희가 황제 펭귄을 찍을 때도 짝짓기부터 산란과 부화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으로부터 애정이 우러나더라고요. 어제 아팠던 펭귄들이 오늘 가보면 얼어 죽어가고 있는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마음이 아프죠. 규정 때문에 펭귄들이 알을 품을 때는 70m 안쪽으로는 접근 자체를 못해요. 그러니 만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죠. 만약 규정을 어겼다가는 바로 쫓겨납니다. 촬영하는 동안 호주기지 대원들이 내내 감시를 하고 있어요. 새끼들이 오들오들 떨고 있는 걸 보면 옷 안으로 넣어주고 싶고 대피소로 데려가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먹이고 싶었어요. 그러면 바로 원기를 찾을 것 같았거든요. 그러나 가슴이 미어져도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이 얘기는 지금 현재 원주민을 바라보는 우리의 일방적인 시선과 그 조심스러움을 그대로 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의 논란 속에서 불쑥 불거져 나온 몇몇 이야기들은 또 다른 비극이 정글에서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불길한 예감을 만든다. 실제로 원주민들은 이제 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위협적인 동작을 연출하고, 때로는 춤을 추고, 때로는 사냥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조금 심한 농담 속에는 감독이 “액션!”을 외치면 옷을 하나 둘 벗고는 원주민 차림(사실은 거의 벌거벗은)으로 카메라 앞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돌고 돈다. 물론 이것이 모두 사실일 리는 없을 테지만 어쨌든 카메라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원주민들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거 정복의 시대에 원주민들을 정글에서 몰아낸 것이 총, 균, 쇠였다면 이제 정보의 시대에 여기에 덧붙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가 아닐까. 카메라는 심지어 그 카메라의 목적이 그들의 삶을 지켜내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그들의 삶 속에 도시의 이야기들을 물어 나르고 도시에 그들의 삶조차 상품화하고 대상화시켜버린다. 따라서 카메라의 세례(?)를 받은 원주민들은 더 이상 과거의 원주민으로 살아가기가 어려워진다. 카메라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첨병인지도 모른다. 정글이나 오지마저도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만드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상품화해버리는 자본의 속성이 미치지 않는 곳은 이제 더 이상 없다는 암울한 징후처럼 보인다. 이제 카메라는 어디든 들어가고 그래서 그 내밀한 정글을 파헤쳐 그들의 삶을 하룻밤의 오지 체험으로 바꾸고 있다. 또 그렇게 카메라를 따라 들어간 자본은 그 원주민들의 삶 또한 변화시키고 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원주민들이 카메라가 영혼을 뺏어간다고 믿었던 것은 그만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셈이 아닌가. (이 글은 교보문고에서 발행하는 <사람과 책>에 연재되는 글입니다.)

김기덕의 <피에타>가 보여주려는 것

 

“돈 받아오라고 했지. 병신 만들라고 했어? 인간백정 같은 놈...”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피에타>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강도(이정진)에게 그의 고용주(?)는 이렇게 말한다. 고용주의 말대로 강도는 빌려간 돈을 받아내기 위해(이자가 무려 열배에 가깝지만) 청계천 공장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험에 들게 하고는 손목을 절단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식으로 돈을 갚게 한다. 말 그대로 인간백정 저리 가라 하는 인물이다.

 

'피에타'(사진출처:김기덕필름)

<피에타>가 이 인간백정을 내세운 것은 돈이라는 기괴한 장치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폭력과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용주는 강도에게 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돈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강도를 시켜서 자신이 저지른 죄는 숨겨지고 체감되지 않는다. 즉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병신을 만든 건 강도의 짓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

 

이 짧은 장면은 자본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의 끔찍한 풍경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자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치환시켜주는 돈이란 괴물은 모든 단면들을 말끔하게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영화 속 자살을 결심한 한 사내가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계단에서 이제 사라져버릴 청계천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그저 죽기 직전의 넋두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던 그 공장들은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밀어내지고 저 멀리 세워진 빌딩들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것이다. 마치 한 노동자의 손목이 말끔하게 잘려져 버리는 것처럼.

 

그 땅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한 때 과도하고도 조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제 손목을 자본의 제물로 바치곤 했다. 지금의 자본의 풍경이 세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 무덤들이 세워졌던가. 하지만 이 풍경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는 돈을 갚지 못해 손목을 대신 저당 잡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태어나는 자식 앞에서 해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손목을 자른다. 그것으로 받아낼 수 있는 보험금으로나마 자식에게 이 손 무덤의 노동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결국 이 말도 안되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심지어 죄의식조차 없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저 강도의 고용주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돈 뒤에 숨어서 “그저 돈을 받아오라고 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것도 자신이 빌려준 돈을. 이것은 강도가 그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으려고 한 그들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가 되는 세상의 풍경이다. 돈을 빌려준 자는 받는 것이 정당하고 빌린 자는 갚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든 게 정당화된다.

 

돈의 논리가 지상가치가 된 세상에서는 죽음이 만연하지만 그 죽음은 돈 뒤에 가려진다. 자본이 자연을 인공으로 채울 때, 생명은 죽어나가기 마련이 아닌가. 나무들이 뽑혀져 나간 후에야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 살아가던 생명들은.

 

<피에타>는 원경에서 보면 스카이라인과 랜드마크로 웅장하게 보이는 그 말끔한 도시의 빌딩이 주는 안온함을 들춰내고, 근경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폭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다. 말끔한 도심의 이면에 놓여진 쓰레기더미와 비닐하우스촌, 방치되고 버려지는 공장의 기계들, 그 기계에 기대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 그 기계에 제 살을 집어넣어야 살 수 있고, 급기야 그 기계에 몸을 걸어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영화다.

 

<피에타>는 바로 이 자본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또 한 축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구원처럼 다가오는 모성은 과연 이 폭력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남자와 모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대결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끝단이 만들어낸 자본의 살풍경이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폭력과 모성의 대결로 다뤄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피에타>는 우리 모두가 돈이라는 자본의 장치에 얽매여 살아가면서 보지 못했던(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 저편의 세계를 불편한 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저예산 영화가 자본 앞에 처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채워지는 멀티플렉스들 그 이면에 놓여진 작은 영화들의 절규. 영화 속에서 자살을 택한 한 젊은 청년이 일기장에 마구 거칠게 적어놓은 것처럼, 김기덕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돈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넌 뭐냐.

'나쁜 남자', 유리가면 뒤에 숨겨진 자본의 얼굴

'여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기억에서 조차 사라진 이들은 이렇게 작고 초라한 죽음으로 남아있는데 그들은 죽음으로 몬 사람들은 여전히 평온하다...(중략) 그들에게서 모든 걸 빼앗을 수만 있다면 난 기꺼이 악마이길 선택한다. 신이 그들 편이라면 악마는 나의 편이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 '나쁜 남자'의 심건욱(김남길)이 살해된 부모의 묘 앞에서 오열하며 하는 이 내레이션은 일종의 선언문 같다. 심건욱은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다른 사람 인생 따위는 벌레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해신이라는 그 껍데기를 쓴 그 인간들"을 무참히 부숴버릴 것이라 선언한다.

도대체 해신(으로 대변되는 인간들)은 무엇이고, 그들이 심건욱과 그 가족들에게 한 짓은 무엇일까. 그들이 무엇을 했기에 심건욱이라는 남자를 나쁘게 만든 걸까. 어린 시절 그를 입양했다 친자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후 파양했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그렇게 파양되면서 돌아가려던 부모마저 죽음에 이른 그 비극적인 운명 때문일까. 물론 그것이 심건욱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이 이 나쁜 남자가 그토록 부숴버리려는 해신의 실체를 전부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해신은 좀 더 보편적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자본의 얼굴을 대변한다.

높은 빌딩과 화려한 파티, 값비싼 스포츠카와 요트, 갖고 있지만 사용하지도 않는 오피스텔. 해신이라는 자본이 가진 외모는 실로 유혹적이다. 거기 살아가는 이들은 명품백에 우아한 옷, 게다가 자본에 의해 잘 관리된 외모로 보는 이들을 선망하게 만든다. 문재인(한가인)이라는 캐릭터는 우리 같은 보통 사람의 시선으로 이 해신을 기웃거린다. 이 단단한 자본의 틀 안에서 태생적으로 평범하게 살도록 운명 지워진 그녀가 홍태성(김재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고 신여사(김혜옥)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이유는 그 해신이라는 자본 속으로 자신도 편입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녀의 판타지일 뿐이다. 홍태성에게 접근해 그 어떤 선을 넘어서는 순간, 신여사는 그녀의 뺨을 때리며 "네까짓 게 뭔데 선을 넘어오려고" 하느냐며 다시 선을 긋는다. 그렇게 모욕을 당하면서도 다음날 다시 회사에 출근한 그녀는 오히려 신여사에게 사과를 한다. 잘못한 것도 없지만 생존하기 위해서. 우리가 문재인이라는 조금은 속물적인 캐릭터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그녀가 우리 같은 보통 샐러리맨들의 삶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번 자본의 세계 속으로 출근해 때론 모욕을 받으면서도 그 쥐꼬리 만한 월급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줄 한 자락을 잡기 위해 오히려 고개를 숙이며 살아가고 있지 않나.

해신으로 대변되는 자본의 추악한 이면을 드러내기 위해 그 유리가면을 깨버리려는 나쁜 남자 심건욱은 경험적으로 그 실체를 아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 자본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문재인이 홍태성에게 접근하고 그 해신으로 편입되려는 욕망을 이해한다. "나는 어떻게든 홍태성이랑 결혼해서 저 사람들 가족으로 만들 테니까. 나까지 밟고 올라오고 싶으면 어디 니 마음대로 한번 해봐." 심건욱이 해신에 복수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문재인이 그에게 하는 이 말은 그래서 자본에 대한 두 태도의 대결처럼 보인다. 편입되려는 욕구와 파괴하려는 욕구. 이 양반감정은 우리네 현대인들이 자본에 대해 동시에 갖는 두 가지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사실 심건욱이 본래 홍태성이었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문제는 극적 재미를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드라마가 전하려는 메시지에는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다. '나쁜 남자'가 말하려는 것은 겉보기에는 우아해 보이지만 그 실체는 추악한 해신이라는 얼굴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사표를 내고 나오면서 신여사에게 "멀리서 봤을 때 그 우아해보였던 모습의 실체를 본 게 가장 실망스러웠던 일"이라고 말하는 건, 그녀 역시 이제 심건욱이라는 나쁜 남자를 통해 막연히 동경했던 세상의 실체를 보게 됐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나쁜 남자'는 마치 제목만 두고 보면 현 트렌드를 반영하는 멜로처럼 보이지만 그 멜로 이면의 사회극을 담고 있는 드라마다. "나쁘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진짜 나쁜 것은 그를 그런 '나쁜 남자'로 만든 세상이다. 물론 드라마는 후반부에 이르러 신여사로 대변되는 절대악에 의해 만들어진 불행한 한 가족사로 회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벗겨낸 자본의 유리가면은 여전히 우리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멜로라는 가면을 쓰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거침없이 끄집어낸 '나쁜 남자'는 이 장르를 넘나들며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전개해낸 대본의 힘과, 미스테리와 스릴러적인 요소에 절절한 멜로를 잘 연결한 연출력, 그리고 무엇보다 김남길에서부터 오연수, 한가인, 김재욱은 물론이고 드라마를 팽팽하게 만들어낸 악역으로서의 김혜옥 같은 연기자들의 발군의 연기력(사실 이 드라마를 통해 발견된 것이나 다름없는)이 잘 어우러져 보기 드문 수작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천 원짜리도 하나 안 갖고 다니냐. 동그라미 하나 적다고 무시하면 못써요." 재인의 동생 원인(심은경)의 요구에 홍태성이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를 꺼내 주자 그녀가 건네는 이 말은 유머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안에 깊은 페이소스를 담고 있다. 뭐든 손만 내밀면 다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돈. 하지만 그래서 추악해질 수 있는 돈의 세계는 우리가 늘 경험하는 바로 그 세계의 실체다. 우리가 '나쁜 남자'에 깊게 공감했던 이유는 바로 이 세계를 나쁜 남자의 시선으로 들여다봤기 때문일 것이다.

'나쁜 남자', 위선적인 세상을 뒤집다

세상은 얼마나 위선적일까. 가진 자들은 뭐든 손만 뻗으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불필요하다면 언제든 버릴 수 있지만, 그렇게 돈으로 산 세계에 진심은 남아있지 않다. 그저 행복한 척 웃고 있지만 사실은 거래에 가까운 삶을 그저 버티고 있을 뿐. 그렇다면 '나쁜 남자'가 그려내는 못 가진 자들은 어떤가. 늘 가진 자들에게 당하는 순박한 존재들인가. 그렇지 않다. 그들도 못 가진 걸 갖기 위해 가진 자들 앞에서 가면의 사랑을 서슴없이 하는 존재들이다. '나쁜 남자'는 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가진 자들의 품속에 억지로 던져져 홍태성이란 이름으로 살 뻔했으나, 곧 버려지면서 심건욱(김남길)이란 괴물이 탄생했다. 심건욱이 누군가의 위험한 대역을 대신하며 살아가는 스턴트맨이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심건욱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버린 해신그룹 홍회장(전국환)의 가족들에게 접근해서 하려는 복수극이 남다르다. 그는 폭력으로 물리적인 상처를 주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그들에게 치유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기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가면의 사랑'이다. 그는 해신그룹의 막내딸인 홍모네(정소민)의 마음을 뒤흔들고, 동시에 장녀인 홍태라(오연수)에게 접근한다. 심건욱이 그토록 쉽게 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위선적인 세계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홍모네는 이 돈 냄새와는 상관없는(관심이 없는) 야성적인 남자에게 빠져들고, 홍태라는 정략결혼이라는 진심 없는 삶 속에서 이 거침없는 남자에게 흔들린다.

한편 심건욱은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홍태성(김재욱)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 이 상황에 갑자기 이들 사이에 나타난 문재인(한가인)이 의도적으로 홍태성(사실은 심건욱)에게 접근할 정도의 속물근성을 갖고 있다는 점은 흥미로운 대목이다. 그러나 그녀는 심건욱이 진짜 홍태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도 그의 진심에 끌린다. 하지만 유리가면을 구하기 위해 간 일본 출장에서 진짜 홍태성을 만나게 되면서 문재인의 마음은 갈등을 일으킨다. 가난한 진심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위선이라도 화려함을 택할 것인가. 이 양 갈래 사이에 놓인 이 드라마의 멜로는 따라서 심건욱이 하려는 복수와 그대로 맞닿아 있다. 그녀가 돈이 아닌 진심을 선택하는 순간, 심건욱은 어쩌면 구원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진정한 복수가 될 지도.

유리가면을 홍태성이 제 어머니 앞에서 복수하듯 집어던져 깨뜨릴 때, 순간 이 모든 가면의 상황들을 깨져버리고 제 모습을 드러낸다. 홍태성에게 "네가 그렇게 깨뜨릴 물건이 아냐"하고 대드는 문재인에게 오히려 뺨을 올려 부치며 "네가 뭔데, 선을 넘어오는 거야?"하고 말하는 신여사(김혜옥). 그만큼 위선의 세계는 견고한 듯 보이지만, 던지면 쉽게 깨져버리는 유리가면처럼 약하기 그지없다.

'나쁜 남자'가 매력적인 것은 이 자본 위에 세워놓은 세계의 위선과 속물근성을 이 심건욱이라는 사내가 적나라하게 헤집어놓는 통쾌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문재인이 끈이 떨어진 자신의 백을 맨 채, 명품 백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VVIP고객을 위한 홍보용 콜렉션인지도 모르고 신여사에게 선물로 받은 옷을 돈 때문에 환불하는 장면에는, 자본이 만들어놓은 부에 대한 선망과 속물근성에 대한 혐오가 뒤섞여 있다. 이것은 남녀 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사랑은 과연 진심인가, 아니면 또 다른 속물근성의 하나인가. '나쁜 남자'는 지금 이것을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가 '나쁜 남자'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없는 척 쓰고 있는 유리가면을 그가 거침없이 벗겨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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