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아름다운’ 슬픈데 웃기고, 천국인데 현생이 떠오르는 역설

천국보다 아름다운

“스릴러로 살다가 갑자기 교육방송이 되니까 이건 적응하기가 참...” JTBC 토일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에서 해숙(김혜자)은 너무나 밝고 학구적인 분위기의 천국지원센터를 보며 그렇게 말한다. 그녀는 죽었다. 그리고 영락없이 지옥에 갈 줄 알았다. 스스로 ‘스릴러로 살았다’고 말했듯, 그녀의 삶은 지독하기 그지 없었고 그래서 시장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오물을 쏟는 일도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험한 일수 일을 해왔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남의 집에 드러눕는 게 일상이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래서 죽으면 지옥에 가는 게 당연하다 여겼는데 웬일로 천국에 가게 됐다. 문제는 천국에서 몇 살로 살거냐는 질문에, 남편 고낙준이 생전 “지금이 가장 예쁘다”고 했던 말만 믿고 “80”이라고 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의 나이 그대로 팔순의 몸이 되어 천국에 먼저 가 있는 남편을 찾아갔는데, 고낙준(손석구)은 젊은 시절의 나이로 돌아가 있었다. 생전에 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됐던 몸도 생생하게 회복되어 이제 달릴 수도 있는 몸으로 바뀌었다. 해숙의 천국행은 순식간에 지옥 같아졌다. “네가 그랬잖아. 네가 이 모습 그대로 다시 만나자며. 왜 나만 이런데? 이딴 게 무슨 천국이야. 이럴 바엔 차라리 지옥이 나았겠다. 이 나쁜 자식아!”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생전에 절절히 사랑했던 해숙과 낙준이 둘다 차례로 죽어 천국에서 다시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다. 당연히 천국이 등장하는 판타지지만, 여기 나오는 천국은 어딘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비슷하다. 처음 천국에 와서 적응이 안되는 이들을 위한 천국지원센터가 있고 그 곳에는 ‘소울리스좌’처럼 AI 안내를 해주는 직원도 있고 그 곳의 수장인 센터장도 있다. 물론 천국이니 현생과는 다른 판타지도 있다. 생전에 사별했던 이들이 다시 만나 살아가고, 먹고 싶은 건 상상만 하면 먹을 수 있다. 물론 생전에 했던 좋은 일이 손에 통장의 돈처럼 쌓여 있어야 가능한 일이지만. 

 

천국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의 현생들이 겹쳐진다. 천국으로 가는 입국심사대 같은 곳에서 한 소방관은 손에 쥔 방독면을 쥐고 놓지 않는다. 그건 화재 현장에서 자신을 희생하며 끝까지 구하려 했던 소녀에게 씌워진 방독면이다. 자신의 죽음보다 소녀의 안위가 궁금한 이 소방관은 쓰러진 자신에게 방독면을 벗어 씌워준 소녀 역시 그 곳에 오게 됐다는 걸 알고 미안함의 눈물을 쏟아낸다. 

 

돈이 없어서 아이를 보육원에 보낸 걸 평생 후회하며 돈을 모았지만 아이에게 전하지 못한 채 죽어 그 돈을 꼭 아이들에게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엄마, 며느리 병수발을 한 시어머니에게 다음생에는 꼭 자기 아이로 태어나달라고 해서 아이와 엄마로 다시 만난 시어머니와 며느리, 앞못보는 시각장애인을 옆에서 돕다 먼저 무지개 다리를 건넌 반려견... 천국의 이야기에는 현생에 그들이 살아왔던 가슴 먹먹한 삶들이 묻어난다. 

 

해숙의 삶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마치 스릴러 속 빚쟁이처럼 살벌하고 독한 그녀의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그것은 모두 평생을 병수발해온 남편 낙준과의 생계를 위한 것이었다. 정작 마음이 소녀 같은 해숙은 그래서 빚쟁이 집에 갔다가 학대 당하는 아이 영애를 끝내 무시하지 못하고 빚 대신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낸다. 독하게 일수를 받아내는 삶을 살았지만, 약하고 착한 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여린 해숙이었다. 그것이 지옥이 아닌 반전의 천국행을 하게 된 이유다. 

 

이처럼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역설의 드라마다. 천국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현생이 계속 떠오르고,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삶이 떠오른다. 죽음이라는 비극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죽음 이후에 계속 이어지는 삶의 희극이 담겨 있다. 본래 희극과 비극은 원근의 차이일 뿐이라던가.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그래서 슬픈데도 웃기고 웃기다가도 슬픈 기묘한 희비극의 풍경들을 펼쳐 놓는다. 

 

<눈이 부시게>로 노년의 삶을 시간여행의 판타지로 엮어 처음에는 웃기다가 그다음에는 설레고 끝내는 먹먹하게 만든 희비극의 역설을 보여준 이남규 작가와 김석윤 감독은, 이번에도 저승과 이승을 오가는 희비극으로 돌아왔다. 역시 <눈이 부시게>에서 손발을 맞춘 김혜자와 한지민, 이정은이 함께하고 여기에 손석구까지 더해진 드라마는 이제 천국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참이다. 실로 걱정없이 살기 좋은 천국이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 곳에 오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더욱 아름다운 그 세계는 현생을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궁금하고 기대되는 대목이다. (사진:JTBC)

‘내가 죽기 일주일 전’, 김민하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뀔 수 있을까

내가 죽기 일주일 전

“봄이 제일 힘들다.” 티빙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에서 정희완(김민하)이 하는 이 말은 역설적이다. 만물이 피어나는 봄을 정희완이 제일 힘들게 여기는 건, 죽은 김람우(공명) 때문이다. 좋아했지만 람우는 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후 희완은 대학을 갔지만 4년 간 세상과 문을 닫고 살았다. 람우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고 탓하며. 모든 게 피어나야할 청춘의 시기에 맞이한 람우의 죽음으로 희완은 그 청춘을 제일 힘든 나날들로 보내고 있다. 

 

“그 중의 4월은 최악이다.” 희완은 그 중의 4월. 그것도 4월1일 만우절을 최악으로 생각한다. 교생선생님을 속이기 위해 람우와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친구들도 선생님도 그들을 바꾼 이름을 부르게 됐고, 나중에는 그들 자신들도 바꾼 이름에 고개가 돌려게 됐던 그 일 때문이다. 물론 그 이름 바꾸기는 희완과 람우 모두 학창시절 가장 재밌던 일이었지만, 람우의 죽음은 그 재밌던 일을 악몽으로 바꿔 놓았다. 희완은 자신이 당첨된 별똥별 보기 천문대 행사에 람우를 대신 보냈다. 평소 별똥별을 보고 싶어하던 람우에게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는 선물이라며. 하지만 그 천문대에 난 화재로 람우가 죽었다. 

 

아름답고 빛나던 삶의 순간들은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는 가장 힘든 기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바로 그 빛나던 청춘의 순간들이 아픈 기억으로 남아 삶의 의지조차 잃어버린 희완 앞에 어느 날 문을 두드리고 찾아온 람우의 이야기다. 람우는 자신이 저승사자라며 대뜸 희완에게 일주일 후에 너는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람우는 그 남은 일주일 동안 그간 못해본 것들,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를 하자고 한다. 2인용 자전거 타기, 클래식 공연 보기, 패러 글라이딩 하기 같은 것들을 하게 되지만 그건 희완이 아닌 람우의 버킷리스트다. 

 

희완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 람우라는 존재는,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이라는 드라마를 하나의 판타지로 보이게 하지만 그건 절망의 끝에 서 있는 희완이 이제 더 이상 못버티겠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처럼 읽히기도 한다. 즉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이제 삶이 너무 버거워 삶을 끝장내려는 희완이 마지막 일주일 동안 람우와의 기억들을 되새기고 남은 이들을 찾아가 하나하나 정리하는 과정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희완 역할의 김민하는 연기의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매력을 발휘하는가를 제대로 보여준다. 김민하의 화장기 하나 없어 주근깨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꾸밈 없는 모습은 희완 그 자체로 보인다. 그 빈 도화지 같은 희완의 모습 위에 김민하는 삶의 생기와 죽음의 허무를 한 인물 안에서 끌어안아 그려낸다. 그래서 이 작품 속 김민하를 보다보면, 청춘의 발랄함과 그 이면을 가로지르는 삶의 유한함이 겹쳐지며 웃다가고 울게된다. 

 

김민하가 연기로 보여주듯 삶과 죽음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연결되어 있다. 학창시절 설레던 사랑과 따뜻했던 우정으로 빛나던 삶은 죽음 앞에서는 더더욱 아련해진다. 정반대로 사라져 버린 죽음 앞에서 삶의 기억들을 더더욱 찬란하다.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은 이 삶과 죽음의 변주를 담아낸다. 그래서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이 드라마는 삶의 활기와 발랄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학창시절 이들이 얼마나 빛났고 행복했던가를 희완은 저승사자로 나타난 람우와 함께 기억해내고, 그 행복한만큼 사라진 시간들의 회한을 느낀다. 

 

드라마는 희완과 그녀의 앞에 저승사자로 나타난 람우가 일주일 간 티격태격하면서 보내는 시간들을 담고 있지만, 그것이 희완의 환영이라고 생각하면 이 밝은 시간들이 얼마나 절절한 아픔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이름을 서로 바꿔 지내며, 서로의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들이다. 이렇게 저승사자로까지 나타나 희완에게서 떼어지지 않는 람우의 모습은 너무나 이해되면서도 아픈 광경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날밤 이후로 나를 용서할 수가 없어. 그런데 네가 내눈앞에 이렇게 나타나 있으니까 순간순간 니가 진짜로 살아 있다고 기대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 왜 옛날처럼 나한테 잘해주 고 웃어주고 나 때문에 니가 죽은 일이 없는 것처럼 구는 건데? 도대체 너 나랑 뭐하고 싶은 거야, 진짜?” 

 

희완은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지만 그런 그녀에게 람우는 말한다. “정희완. 좋아해 희완아. 나 너 많이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해. 미안해 너무 늦게 말해줘서. 내가 널 어떻게 미워해? 니가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많이 보고 싶어서.” 그건 람우가 못다한 말이면서, 희완이 듣고 싶었던 말이었을 게다. 일주일 후에 희완이 죽는다는 람우의 말은, 희완 스스로 일주일만 살겠다는 의미였을 게다.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저승사자로 나타나 람우와 보낸 시간 속에서 희완은 생각대로 끝을 맞이할까. 어쩌면 람우와의 빛나던 기억들이 희완이 놓으려하는 삶의 끈을 다시 쥐게 하지는 않을까. 죽음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고통이지만, 망자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그래도 살게 해주는 희망일 수 있지 않을까. 웃으면서도 눈물이 나고, 그 절망 속에서 다시 희망을 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사진:티빙)

‘조명가게’, 어떻게 공포가 감동으로 바뀔 수 있었을까

조명가게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중환자는 의식이 없는데 어떻게 의지가 생기죠?” 흔히들 의식불명에 빠진 중환자의 가족들에게 의사는 ‘환자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말하곤 한다. 그런데 의식이 없던 중환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사경을 헤매다 살아돌아온 건 어떤 의지 때문이었을까. 강풀 원작의 디즈니+ 드라마 ‘조명가게’가 그리고 있는 독특하고 기발한 세계관은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했을 게다. 그들의 의지는 어쩌면 환자만의 의지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모든 이들의 의지가 더해진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력으로부터. 

 

퇴근 길 버스정류장에 매일 같이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여자, 그 여자가 커다란 트렁크를 끌고 걸어다니는 어두운 동네, 불빛이 하나도 없어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부르며 그 무서운 골목길을 매일 지나가는 학생, 싼 맛에 이사를 왔지만 누군가와 함께 사는 듯한 소름끼치는 집에 갇혀버린 여자... ‘조명가게’가 4회에 걸쳐 펼쳐놓은 세계는 독특한 공포의 공간이다. 어째서 이런 오싹한 일들이 이 동네에서 벌어지고, 사람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이 등장하는지 드라마는 좀체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오싹하고 음사한 동네에 유일하게 따뜻하고 밝은 공간이 존재하는데, 그 곳이 바로 조명가게다. 물론 이 가게 역시 일상적이지는 않다. 야간에 문을 열어 손님이 올 때까지 영업을 하고, 주인 원영(주지훈)은 조명에 눈을 버렸다는 이유로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그 가게에는 한밤중이지만 찾는 이들이 많다. 매일 엄마가 사오라고 시켰다며 백열전구를 사가는 고등학생 현주(신은수)에게 원영은 말한다. 그런 낯선 이들을 만나면 모른 척 하라고. 그리고 도망치라고. 

 

공포물의 색깔이 선명히 묻어나지만 여기 등장하는 낯선 사람들은 어딘가 오싹하긴 해도 연민의 감정 같은 것들을 불러 일으킨다. 누군가를 해코지할 것 같지가 않다. 다만 어떤 비극적 상황 속에 놓여진 이들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오싹함에는 어떤 애틋함 같은 따뜻한 감정이 뒤섞인다. 어둠 속을 헤매는 그들 앞에 환하게 불을 켜놓고 찾는 이들을 기다리는 조명가게가 주는 따뜻함이 더더욱 커지는 것도 그래서다. 

 

오싹한 어둠과 따뜻한 빛의 극단적인 대비. ‘조명가게’의 세계관은 이처럼 이질적인 양극단을 한 작품 안에 펼쳐놓는다. 인간과 낯선 존재들, 빛과 어둠, 삶과 죽음 같들이 겹쳐지면서 공포는 도무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은 감동으로도 이어진다. 파편적으로 보이던 사건들이 하나로 묶여지는 건 영지(박보영)가 일하는 병원 중환자실을 통해서다. 대형 사고로 인해 의식을 잃은 환자들로 가득한 그 곳. ‘조명가게’가 그리고 있는 게 바로 그들의 의식 속이었다는 게 드러난다. 

 

삶과 죽음 사이를 헤매고 다니는 그들은 의식불명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주변환경이나 주변사람들에 영향을 받는다. 같은 중환자실에서 섬망 증세를 보이며 괴성을 지르는 알코올 중독 환자의 목소리에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영지 같은 간호사가 해주는 따뜻한 말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때론 누군가 듣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큰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을 겪다 깨어난 경험이 있는 영지 또한 의식이 없는 중환자가 어떻게 의지를 갖고 깨어날 수 있는 지 궁금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하게 됐다. 매일매일 자신을 위해 기도했던 엄마가 불어넣어준 그 의지가 어쩌면 자신을 살게 해주지 않았을까 하고. “저희 엄마는 그저 매일매일 기도했대요. 저한테 의지를 불어넣고 싶으셨대요. 그래서 생각해요. 어쩌면 나 혼자만의 의지는 아니지 않았을까.” 

 

그 어두운 동네에 밤새도록 불을 환하게 밝히고 찾아오는 손님을 끝까지 기다리는 원영은 이 지점에서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건 사경을 헤매는 이들에게 끝까지 누군가 보내는 삶에 대한 의지이자 응원인 셈이니 말이다. 그래서 ‘조명가게’의 서사는 이 오싹한 공포의 세계를 통과해 뭉클한 휴먼드라마의 감동으로 변모한다. 영지 같은 환자를 위해 진심으로 간호하고 기도하는 어떤 존재들이 꺼져가는 불빛을 계속 지켜내려 애쓰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 드라마 문법으로 보면 이 파편적이고 모호한 사건들의 연속을 거의 4회 분량으로 앞 부분에 배치한다는 건 모험적인 시도가 아닐 수 없다. 4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어렵고 따라서 중도 이탈하는 시청자도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풀의 뚝심이 엿보이는 이 4회 분량의 전반부는 바로 그 파편적인 사건들을 펼쳐놓음으로써 4회 마지막 부분에서의 반전에 더 큰 감동과 임팩트를 선사한다. 첫 공개에 4부까지 모두 공개한 뜻이 여기에 있다. 일단 4회까지 챙겨본다면 ‘조명가게’라는 독특하고 신박하며 오싹하지만 가슴 뭉클한 세계를 만나볼 수 있다. (사진:디즈니+)

‘파친코2’, 가난해도 당당한 한인들, 보기만 해도 먹먹해지는 이유

파친코

“근데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은 아빤 그 큰 집은 그립지 않아.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이 그립지. 진짜 부자는, 모자수야.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란다.” 애플TV+ 오리지널 드라마 ‘파친코2’에서 오랜 감옥 생활 끝에 망가진 몸으로 돌아온 선자의 남편 이삭(노상현)은 아들 모자수가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에 그렇게 답한다. 이삭 역시 그렇게 큰 집에서 살았던 사람이지만 그 곳을 떠나 가난하고 힘겨운 이들을 위해 한 평생을 헌신한 인물이었다. 삶의 불이 점점 꺼져가는 순간에도 그는 남은 사람들을 걱정하고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밀고해 감옥에 보낸 것이 바로 목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불러 용서하려 한다. 목사는 이삭을 질투한 거였다. 부모마저도 자신을 버리고 유일하게 유목사가 자신을 거둬주셨는데 이삭이 나타나면서 그 사랑이 희미해졌고 그래서 밀고했다는 것. 하지만 밀고한 후 그는 후회했다고 했다. “이게 변명이 안되는 거 압니다. 절대 용서 못하시겠지만...” 목사는 그렇게 용서를 구하기조차 어렵다는 걸 안다고 말하지만, 그 순간 이삭은 곧바로 말한다. “용서합니다. 용서합니다.” 

 

옆에서 그 말을 듣던 이삭의 아들 노아(김강훈)은 자신이 믿고 따랐던 목사가 아버지를 밀고한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충격을 받고 어떻게 용서하냐고 절규하지만, 이삭은 말한다. “너희에게 물려줄 거라곤 이 망가진 몸뚱이밖에 없지만 그래도 이건 꼭 기억했으면 한다. 후 목사와 우리들의 운명이 다 같은 처지에 놓인 거야. 노아야. 자비는 선물도 권력도 아니야. 자비는 인정하는 거야. 살려면 항상 대가가 따른다는 거.” 그는 후 목사의 잘못조차 끌어안는 사람이었다. 

 

이민진 작가가 쓴 ‘파친코’ 원작의 첫 문장이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로 시작하는 건 아마도 이 작품이 이삭 같은 당시 한인들의 의연함을 그리려 하고 있다는 걸 말함이었을 게다. 다 같은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던져져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그래서 후목사 같은 이에게도 용서와 자비를 베풀 수 있는 것. 그는 사람에게 중요한 건 버텨내고 살아내는 것이고,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며 그걸 인정하는 것이 바로 자비라고 말한다. 

 

이삭이 자신을 밀고한 후목사를 용서하는 장면은, 땅 주인 한금자(박혜진)를 찾아가 그 땅에 군사시설이 있었고 거기 무수히 많은 이들이 죽어 묻혔다는 사실을 듣고는 그것조차 이용해 아베를 곤경에 빠뜨리려 하는 선자의 손자 솔로몬(진하)의 이야기와 교차 편집된다. 솔로몬은 아베에게 그 땅을 판 후 이 소문을 내면 콜튼 호텔 측에서 개발을 포기할 거라며 당하기만 하지는 않겠다는 복수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조차 이용하려는 솔로몬에 한금자가 혀를 차자 솔로몬은 자책하는 말을 한다. 한금자도 또 선자도 자신을 경멸의 시선으로 보는 게 당연하다고 한다. 

 

“이런 꼴을 볼려고 그렇게 살았나? 네? 다 쓸데 없었다 하시겠죠.” 솔로몬이 그렇게 말할 때 한금자는 저 이삭이 보여준 그 의연한 모습을 드러내며 단호하게 말한다. “후회없어 그렇게 산 거. 충분히 값진 인생이었어.” 한금자도 선자도 또 이삭도 그 모진 세월을 살아내며 그 속에서도 자식들을 키워낸 것만으로도 그 인생은 충분히 값진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이삭이 죽기 직전 선자와 나누는 대사는 인간의 위대함과 고귀함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절감하게 한다. 이삭은 그 상황에서도 이 모든 비극이 자신 때문인 양 용서해달라고 말하고, 이에 대해 선자는 이삭의 삶이 얼마나 숭고했는가를 말해준다. “뭘 용서합니까. 안 계신 몇 년 동안 내한테 와가 당신이 자기들한테 잘해줬다고 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으예.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입니더. 14년 전에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예. 시상은 변했어도 당신은 안변한 거라예.” 그러면서 이삭에 대한 사랑을 드러낸다. “내는 내 남편한테 사랑받고 존중받았으예. 전부 다 받은 거라예.” 

 

죽으면서도 아이들 걱정하는 이삭에게 걱정말라며 남편의 죽음을 직시하는 선자의 눈빛은 강인하다. 그 죽음을 피하지도 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며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릴 뿐이다. ‘파친코’가 우리의 마음을 매혹시키는 건 바로 이 인간의 숭고함이 주는 뭉클함 때문이다. 비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 깊숙이 들어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의연한 그 모습 앞에 누구나 감복하게 되는 것이다. (사진:애플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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