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면 뭐하니?’, 아무 때나 찍던 사진 앞에 엄숙해진 건

 

김용명은 사진관을 찾는 처음 보는 어르신들에게 “아버지”라고 불렀다. “내가 무슨 아버지야?”하고 아직 나이가 젊다는 분에게는 곧바로 “형님”이라고 고쳐 불렀다. MBC 예능 <놀면 뭐하니?>에 새롭게 합류한 김용명은 이날 릴레이 콘셉트로 진행된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50년 된 인천의 한 사진관을 찾았다. KBS <6시 내 고향>에서 리포터로 맹활약하던 김용명이었다. 그러니 그가 보는 이들에게 살갑게 다가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에게나 살갑게 부르던 그 ‘아버지’라는 호칭은 어느 영정사진을 찍으러 온 아버님 앞에서 새삼 엄숙해졌다. 홀로 영정사진을 찍겠다고 온 아버님에게 김용명이 놀라며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라고 묻자, 이제 “82세”란다. 그 말에 김용명이 “이렇게 정정하신데” 왜 영정사진이냐고 묻자 아버님이 머쓱하게 “철이 없어서 그렇다”며 허허 웃으신다.

 

머리 정리까지 깔끔하게 하고 오신 아버님에게 사진관 사장님이 마실 걸 대접하며 땀을 잠시 식히는 사이 김용명은 무언가 느낌이 이상했는지 왜 갑자기 영정사진을 찍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소식이 안 좋은 것 같다”며 “기침이 멈춰지지 않고 목소리도 이제 찢어지고 뭐만 하면 어지럽고 그러고 있어서 이제 죽을 준비 해야지”라고 말씀하셨다.

 

화들짝 놀라며 “100세 인생”이라 말하는 김용명에게 아버님은 “젊은 사람은 100세 인생인데 나는 옛날 원시시대에 태어났으니까 어림없다”고 말씀하신다. 안타까운 김용명이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얘기하려던 참에 아버님이 갑자기 속사정을 털어놓으신다. “사실은 전립선암이래요. 소변을 못눠서 그랬더니 수술한다길래 수술 못하게 했거든. 죽으면 식구들 고생 안시키려고 관도 짜놓고 묫자리도 파서 준비 해놓고 좀... 서글퍼.”

 

아버님은 죽어서 새끼들한테 신세를 지고 싶지 않다 하셨다. 그러자 김용명도 갑자기 자신의 사연을 털어놨다. 자신의 아버님도 간경화로 오래 고생하셨는데 그래도 끝까지 싸우고 버티면서 오래 사셨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버님은 그게 자식들에게 못할 짓이라며, “이 나이까지 외상도 안 먹어보고 빌려 보도 안하고 남한테 신세 안지고 살다 갈거야..” 김용명은 더 이상 <놀면 뭐하니?>를 찍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눈물을 슥 훔치고는 아버님에게 그게 신세가 아니라고 설득하려 했다.

 

괜스레 아버님에게서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님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아들 같은 사람”이라며 갑자기 함께 사진을 찍자는 아버님의 제안에 김용명은 눈물이 터져버렸다. “사실 저도 고향다니면 아버님들이 되게 좋아해주시거든요. 근데...” 김용명의 눈물에 아버님도 눈물이 터졌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두 사람은 마치 진짜 부자지간처럼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놀면 뭐하니?>가 굳이 전국의 사진관을 찾아간 건 남다른 이유가 있어서였을 게다. 사진이란 것이 ‘서민들의 호사’라, 특별한 날 특별한 자신 혹은 가족을 기억하고 기록하기 위해 찍던 것이 아니던가. 삶은 늘 지치고 힘들지만, 그래도 좋은 모습으로 살았다는 걸 보이기 위해 애써 우리는 카메라 앞에서 웃음 짓곤 했었다. 그래서 카메라 앞에 서게 되면 어딘지 엄숙한 기분이 들게 된다. 늘 아무렇게나 찍어대던 사진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은 떠나도 남겨지고 기억될 사진이라는 의미에서.

 

김용명이 다시 보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살갑게 다가가 “아버지”라고 말하던 그 모습이 그저 투철한 직업정신의 발로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영정사진을 찍으러 온 아버님을 통해 느껴졌다. 김용명은 길거리에서 만나는 무수히 많은 아버지들에게서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을 느꼈던 것이다.(사진:MBC)

‘의사요한’ 지성과 이세영의 해피엔딩,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

 

때론 해피엔딩이 전혀 만족스럽지 않을 때가 있다. 그건 지금껏 드라마가 달려온 주제의식이 엔딩에 이르러 흔한 ‘사랑타령’으로 끝나버릴 때가 있기 때문이다.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이 딱 그렇다. 통증의학이라는 흥미로운 소재를 가져와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만만찮은 이야기들을 그려왔던 <의사요한>이 마지막회에 이르러서는 차요한(지성)과 강시영(이세영)의 흔한 멜로드라마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사실상 <의사요한>의 마지막회는 사족에 가까웠다. 통증에 대한 임상실험 참가자이자 연구자로서 미국에 간 차요한의 바이탈 기록을 매일 같이 체크하며 기다리는 강시영의 헤어질 듯 다시 만나는 뻔한 이야기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그렇게 3년이란 세월이 흐른 후 다시 나타난 차요한과 사랑을 확인하는 강시영의 이야기. 거기에 <의사요한>이 지금껏 다뤘던 주제의식은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차요한은 자신이 내리는 고통에 대한 마지막 처방전으로서 의사의 역할이 병을 고치는 것만이 아닌 고통을 알아주고 나누는 것이라는 걸 드러냈다.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고통은 우리 안에 살고, 우리 삶은 고통과 함께 저문다. 그 고통을 나누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고통의 무게는 줄고 고통을 끌어안는 용기는 더해질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을 알아주고 나누는 것, 이것이 삶이 끝나야 사라질 고통에 대한 나의 마지막 처방이다.”

 

즉 고통뿐인 삶 앞에서 의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던진 질문에 이 드라마는 호스피스 완화 치료를 답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치료는 완치만이 목적이 아니고 완화도 그 한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 그래서 의사는 환자 옆에서 그 고통을 들여다보며 고칠 수 없다면 그것을 완화해주는 치료를 해주는 것이 응당한 역할이라고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의사요한>은 이 무거울 수밖에 없는 삶과 죽음과 고통에 대한 주제를 다루면서 의식적으로 멜로 라인을 통해 그 무거움을 덜어내려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강시영과 차요한의 멜로 라인이 그렇고, 이유준(황희)과 강미래(정민아)의 멜로 라인 또한 그렇다. 게다가 통증의학과 레지던트들은 상당부분 희화화된 캐릭터로 그려졌다.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는 걸 막으려는 의도적인 구성이고 연출이다.

 

그게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주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사요한>이 지나치게 멜로로 기운 건 오히려 한계로 지목된다. 차요한이라는 캐릭터가 전반적으로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담아내며 잘 살아난 데 비해, 강시영은 의사로서는 너무 감정적이고 또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로 그려진 것도 이런 드라마의 한계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들에 비하면 너무 아쉬운 캐릭터의 면면이 아닐 수 없다.

 

의학드라마는 이제 너무 많아져 특별한 소재나 주제의식 혹은 형식실험을 가져오지 않으면 뻔한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될 정도다. 그러니 의학드라마가 뾰족한 주제를 가져와 끝까지 밀고 나가는 건 그만큼 중요해졌다. <의사요한>은 그런 점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 드라마다. 뾰족한 주제의식을 갖고 오고도 뭉툭한 멜로의 결말로 끝내버렸다는 점에서다.(사진:SBS)

‘의사요한’, 이렇게 깊은 질문을 던진 의학드라마 있었나

 

그는 과연 환자의 생명을 끝까지 살리기 위해 그토록 간절했던 걸까. 아니면 자신과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환자를 통해 자신 역시 살고픈 그 마음을 투영했던 걸까. SBS 금토드라마 <의사 요한>에서 갑자기 의식을 잃은 무통각증 환자 이기석(윤찬영)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차요한(지성)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민태경 과장(김혜은)이 더 이상 지속하는 건 환자에게 고통만 더 가중시키는 거라 막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환자의 어머니가 이제 편하게 보내주고 싶다고 하자 그는 멈췄지만, 절망적인 모습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증상을 갖고 있는 환자 기석이기 때문에 요한은 더더욱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그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어떻게든 그 원인을 찾아 살려내려 안간힘을 썼다. 자신 역시 점점 몸 상태가 나빠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착은 더 컸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은 분명했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도 신의 뜻은 거스를 수 없는 일이니.

 

의사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 또 의사가 할 수 있는 일과 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의사 요한>의 던지는 질문은 꽤 깊다. 생명과 죽음에 대해 이토록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의학드라마가 있었던가. 그것은 아마도 통증의학과 함께 존엄사라는 소재가 갖는 무게감 때문일 지도 모른다.

 

생명이 겨우 유지되고는 있지만 지독한 통증 속에서 버텨내는 것이 과연 환자를 위한 일인가에 대한 질문은 마치 차요한이 안락사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즉 고통을 해결해준다는 안락사 약 케루빔이 전직 장관이었던 이원길(윤주상)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는 분노했다. 이들을 ‘살인자’라고 했다. 이원길은 “죽음이 뭐 그렇게 대단하냐. 누구나 죽는 거 아니냐. 하지만 누구나 평온하게 죽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평온하게 죽는 건 행운”이라 말했지만, 차요한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약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생명에 대한 생각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즉 의사들도 또 환자들도 끝까지 생명을 지키려 애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단지 고통이 있다는 것만으로 쉽게 생명을 지워내게 된다면 그건 생명에 대한 엄청난 혼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의 의학드라마들이 의사를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낸다. 즉 아픈 환자에게 의사란 신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그려내곤 했다는 것. 하지만 <의사 요한>은 의사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 신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러니 의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끝까지 하는 것뿐이라고. 신의 일을 의사가 대신 해선 안된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희망 없이 고통뿐인 환자를 방치하는 것 또한 의사의 일은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이 지점에서 <의사 요한>이 보여주는 의사관에 대한 독특함이 드러난다. <의사 요한>은 의사가 단지 병을 고치고 환자를 살리는 존재가 아니라, 환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에게 가장 이로운 선택을 해줄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통증 속에서 삶을 지연하거나 지연하지 않는 건 환자의 선택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삶은 케루빔 같은 약이 있어 맘대로 끝장낼 수 있는 그런 건 아니라는 것.

 

그래서 이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차요한은 신적인 천재적 의사가 아니라, 한없이 생명 앞에 부족한 의사로 그려진다. 심지어 보통 이하의 무통각증을 겪는 의사라니. 자신의 한계를 환자에게 투영해 더 세심하게 환자의 고통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 차요한이란 존재는 그래서 우리가 죽음 앞에 무력해도 어째서 타인의 고통과 생명에 더 집착하게 됐는가를 잘 그려낸다. 결핍이 만드는 절실함이 때론 가장 인간적인 노력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신의 일 앞에 무력해도 의사(인간)는 의사로서의 일을 끝까지 해야 한다는 것.(사진:SBS)

‘의사요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메시지

 

이 드라마 어딘가 깊이가 다르다. SBS 금토드라마 <의사요한>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의학드라마의 접근이 상당히 표피적이었다는 걸 깨닫게 한다. 대부분의 의학드라마가 보여줬던 건 아픈 환자와 이를 우여곡절 끝에 고치는 의사의 이야기가 대부분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의사요한>은 그 환자의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또 나아가 고통뿐인 삶이 과연 환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같은 지금껏 의학드라마가 던지지 않았던 질문들을 던진다.

 

중증 근무력증을 앓는 격투기 선수의 사례는 이런 질문들을 다차원적으로 담아낸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까를 고민한다는 주형우(하도권)는 어떻게 하면 고통을 줄일까를 고민하는 차요한(지성)에게 우리는 닮았다고 말한다. 주형우는 살아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라면 살아있는 게 아니라 고통일 뿐이라고 하지만, 차요한은 고통이 “살아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링에 올라 싸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증명이라 여기는 격투기 선수 주형우는 연명하는 삶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자신이 쓰러졌을 때 심폐소생술 같은 응급치료를 하지 말아 달라 요구한다. 그는 “죽음을 앞당기고 싶을 만큼 괴롭다”는 속내를 털어놨다. 한때 도저히 손 쓸 수 없어 고통만을 연장시키던 환자를 안락사 시킨 경험이 있는 차요한은 그러나 주형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차요한은 주형우가 말하는 “죽을 만큼 괴롭다”는 그 이야기가 보내는 시그널을 읽어낸다. 그래서 거기부터 시작해 그가 중증 근무력증이라는 걸 알아내고 결국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가 생각하는 고통이란 살아있다는 증거이고, 몸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자 시그널이라는 것. 그래서 고통을 느낀다는 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병을 사전에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몸이 주는 것이라는 의미다. 차요한이 주형우가 말하는 그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해낸 것처럼.

 

그렇다면 과거 차요한은 어째서 환자를 안락사 시킨 걸까. 그것은 고통을 통해 병을 발견하고 그것으로 고칠 수 있다는 희망자체가 사라졌을 때, 과연 통증의학과 의사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담긴 것이었다. 그는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줄여줄 수 없는 고통을 없애주려 한 것이었다. 설령 그 선택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의사요한>은 이처럼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다양하고도 진지한 질문들을 담아내고 있다. 새로운 에피소드로 등장한 극단적인 두 환자의 사례는 그래서 더더욱 흥미롭게 다가온다. 선천적으로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와 아주 미세한 접촉에도 엄청난 통증을 느끼는 환자의 대비. 이 에피소드에서 통증은 다만 피하고픈 어떤 것이 아니라 어쩌면 삶의 증명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주지 않을까. 겉보기엔 무통환자가 훨씬 좋아 보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또 다른 아픔을 전제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의사요한>이 통증의학이라는 분야를 통해 전하는 고통과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나아가 병원 밖에서의 우리네 삶에도 주는 메시지가 적지 않다. 삶에서 느끼는 힘겨움이나 아픔은 우리가 늘 피하고픈 어떤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살아있다는 증명이며 나아가 더 큰 문제를 사전에 해결하기 위한 신호일 수 있다는 것. 의사 역할을 하는 사회가 힘겨움의 신호를 보내는 이들을 외면하면 안 된다는 걸 <의사요한>이라는 의학드라마는 마치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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