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추락하던 <12>을 되살렸나

 

도무지 기사회생할 것 같지 않았던 <12>이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시즌2로 가면서 줄곧 곤두박질치던 시청률도 반등하고 있고, 무엇보다 시즌3 2회만에 캐릭터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1박2일(사진출처:KBS)'

예능에는 영 소질도 없고 관심도 없을 것 같던 맏형 김주혁은 인제에서 펼쳐진 인기투표를 통해 저조한 인지도로 굴욕을 맛본 이후 예능 열심히 할거야라며 의욕을 불태웠고, 깨알 같은 생활 멘트로 무장한 힙합비둘기 데프콘은 <12> 출연이 꿈이었다며 과한 의지를 드러냈다.

 

<12> 특유의 서열을 삽시간에 무너뜨리고 엉뚱한 발언을 해대는 막내 정준영은 선배들마저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드는 록커의 매력을 드러냈고, 까불이 김준호 역시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개그맨보다 더 웃기는 김주혁에게 전부 묻혀버렸다며 하소연을 해댔다.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새 매거폰을 잡은 유호진 PD의 캐릭터가 확실하게 세워졌다는 점이다. 어딘지 마광수 교수를 연상케 하는 맥없는 이미지를 풍기지만 의외로 독한 야생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유호진 PD는 혹한기 입영캠프에서 벌어진 이른바 야생5덕 테스트를 통해 보여주었다.

 

구덩이 하나를 파 놓고 무려 50여분에 가까운 방송 분량을 뽑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성과로 보인다. 처음에는 삽질로 땅을 파게 만들고, 그 다음에는 거기에 물을 채우고, 그 물에 얼음을 들이부은 후 등목을 시키고, 그 구덩이를 제자리 뛰기로 넘게 하는 일련의 복불복 게임은 그간 맥락 없이 때 되면 벌어지곤 하던 복불복의 묘미를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똑같은 복불복 같지만 거기에는 특유의 야생 분위기가 살아났고, 무엇보다 유호진 PD와 새로운 MC들 간의 팽팽한 긴장감이 있었다. 복불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때는 여지없이 PD를 놀리는 MC들의 도발이 있었고, PD 역시 이건 성공할 수 없을 거야라며 미션을 던지는 독함이 돋보였다. 게다가 <12> 공인 국제심판(?) 권기종 조명감독의 얄미운 까지 합세하면서 복불복은 시즌1의 느낌을 재현해내기에 충분했다.

 

이것은 <12>의 핵심적인 재미가 PDMC들 사이의 갈등과 대결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시즌1에서 독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던 이명한 PD와 강호동의 대결구도가 그랬고, 이어 바톤을 이어받은 나영석 PD는 좀 더 아기자기한 밀당으로 이 대결을 심리전으로 이어가기도 했다. 강호동이 잠정은퇴 선언을 하고 빠져나갔을 때는 나영석 PD가 더 독하게 밀어붙임으로써 특유의 야생 분위기를 이끌기도 했다.

 

결국 핵심적인 키는 야생의 분위기에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만들어내는 건 PD의 역할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유호진 PD의 첫 발은 <12> 본연의 색깔을 꽤 제대로 짚어냈다고 여겨진다. 여기에 유호진 PD가 편집을 통해 보여준 훨씬 디테일해진 MC들의 리액션들은 그네들의 행동 이면에 담겨진 심리를 포착하게 해줌으로써 단순한 게임조차 흥미진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제 중요해진 건 여행이다. 복불복을 통해 특유의 야생 분위기를 되살려낸 것은 <12>의 긴장감을 되찾아냈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그것 자체만으로는 이 프로그램의 본질에 닿아있다 말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복불복은 말 그대로 양념일 뿐 주재료는 여행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즌3의 시작을 독한 복불복으로 꾸려낸 것은 잘 선택한 전략이다. 그것이 어쩌면 새로운 멤버들의 캐릭터를 좀 더 빨리 확실하게 끄집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렇게 구축된 캐릭터들 속에 깔려있는 관계의 심리가 여행이라는 낯선 체험으로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고민할 시점이다.

 

만일 이렇게 어렵게 구축된 관계의 심리가 빠져버린다면 자칫 시즌2의 함정에 빠질 위험도 있다. 매번 여행지를 바꿔가며 비슷한 복불복을 제 아무리 독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캐릭터 관계 속에서의 맥락을 발견할 수 없고 여행지와의 관계도 없다면 굳이 계속 프로그램을 볼 이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12> 시즌3는 어렵싸리 부활의 불씨를 되살려 놓았다. 이제 그 불씨에 여행의 참맛을 덧붙여 활활 태워야 할 시점이다. 여행지 소개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여행지에 너무 집착할 필요도 없다. 그보다 중요한 건 여행이 주는 특유의 감성과 정서를 회복시키는 일이다. 과연 <12>은 이 궁극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한껏 높아진 기대감만큼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1박2일>, 제2의 전성기를 위한 전제조건들

 

<1박2일>이 시즌3를 선포하면서 누가 남고 누가 떠나느냐에 이목이 집중됐다. 이수근, 유해진, 성시경, 김종민은 하차를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엄태웅과 차태현은 잔류할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이목이 집중된 것은 새로운 멤버로 누가 들어갈 것인가다. 항간에는 장미여관의 육중완, 샤이니 민호 그리고 존박이 새 멤버 물망에 올랐다고 하지만 결정된 것은 없다.

 

'1박2일(사진출처:KBS)'

이렇게 멤버 교체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은 <1박2일>이라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캐릭터 의존도가 크기 때문이다. 매번 어떤 장소로 가서 하룻밤을 지내는 형식의 반복이지만 그 과정에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이 그저 단발의 웃음으로 사라지지 않고 묶어두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캐릭터다. 일일이 <1박2일>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만, 이를테면 이수근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 많은 사건들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수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과거 경북 영양에서 현지 주민과 하룻밤을 지냈던 미션이다. 허름한 시골집, 불빛도 별로 없는 어두운 그 곳에서 현지 주민과 함께 하룻밤의 교감을 마치고 떠나는 길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이수근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큰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처럼 김종민 하면 <1박2일> 초창기에 혼자 낙오하던 장면이 떠오르고, 김C 하면 혹한기 대비 캠프에서 한겨울에 홀라당 벗고 박스에 의지하던 모습이 떠오르며, 강호동 하면 입수를 외치며 한 겨울 계곡 얼음물에 뛰어드는 모습이 떠오른다.

 

캐릭터는 단지 인물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1박2일>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러니 하차가 아쉬운 것이고 새 멤버에 대한 기대감이 큰 것이다. 하지만 <1박2일> 시즌3의 경우에는 멤버 교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이 너무나 익숙해진 프로그램 형식이 다시 신선한 느낌을 줄 수 있을 지 고민하는 일이다. 단지 멤버가 바뀌고 제작진이 바뀐다고 이미 익숙해진 프로그램을 참신하게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시즌2가 확인시켜 준 바 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먼저 핵심은 이 프로그램의 소재인 ‘여행’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여겨진다. 과거 <1박2일>이 시작하는 단계에서만 해도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여행은 대중화되기 이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1박2일>로 인해 여행의 트렌드가 바뀐 지 오래다. 이른바 ‘아웃도어’ 열풍이 불고 있는 것. 이 열풍에 그저 편승하는 것으로는 <1박2일>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을 채워주기가 어렵다. 지금까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여행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것. 어찌 보면 이것이 <1박2일>의 진정한 목표일 수 있다.

 

<무한도전>이 여행 버라이어티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1박2일>은 거기에 우리네 팔도의 지역 특성과 아웃도어 개념을 덧붙여 여행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도 더 세분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아빠 어디가>가 아빠와 아이의 여행으로 세분화됐고, <꽃보다 할배>는 어르신들의 여행으로 세분화됐다. 그렇다면 새 시즌을 준비하는 <1박2일>의 여행은 어떻게 과거의 <1박2일>과 또 여타의 여행 버라이어티와의 차별화를 시킬 것인가. 이 질문에 <1박2일> 시즌3의 성패가 달려 있다.

 

<1박2일>의 새 시즌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형식과 스토리텔링을 어떻게 다변화할 것인가다. 복불복은 <1박2일>의 핵심적인 감초지만 이것이 너무 전면에 내세워질 때는 여행 버라이어티로서의 색채가 흐려지는 단점이 있다. 시즌2에서 늘 문제로 지목됐던 것은 과도한 게임이었다. 복불복은 다큐처럼 찍어지는 초창기 리얼 버라이어티의 안전장치처럼 사용됐던 것이 사실이다. 재미에 대한 강박의 소산물이라는 것. 하지만 요즘처럼 관찰예능이 일반화된 상황에서 의도적인 복불복은 ‘리얼’의 느낌을 상당부분 상쇄시킬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다변화는 무엇보다 시급한 사안이다. 이미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했기 때문에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여행의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 대학교를 찾아가 학생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냈던 ‘대학생 생활백서’ 같은 지금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소재 발굴이 절실하다 여겨진다. 여행의 일상화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1박2일>을 기존 여행의 틀로만 한정짓지 않는다면 더 많은 소재와 스토리가 가능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카메라 연출에 있어서도 과거 리얼 버라이어티 방식에서 과감히 벗어나 최근 경향인 관찰 카메라 형식을 도입하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프닝을 위해 일렬로 멤버들을 세워놓고 찍는 방식은 너무 식상해졌다. 좀 더 자연스러운 다큐적인 오프닝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고, 과정을 찍는 방식도 좀 더 현장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형태가 리얼감을 높여줄 것으로 생각된다.

 

모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박중민 EP가 밝힌 것처럼 “친구와 여행은 쉽게 싫증을 느끼지 않을 소재”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늘 여행을 꿈꾸고 또 여행을 다녀와서도 또 다른 여행을 생각하는 욕망과 같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여행이라는 좋은 소재도 똑같은 형식과 스토리만을 반복해서는 진력이 나기 마련이다. 어떤 새로운 이야기와 콘셉트를 가지고 돌아올 것인가. 이것이 <1박2일>에는 멤버 교체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사안이다.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배우를 배우로 만드는 것은 도대체 뭘까. <배우는 배우다>는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고 어찌 보면 너무나 모호한 이 질문을 도발적으로 던지는 영화다. 배우의 존재 근거를 질문하는 영화에 이준이라는 아이돌 스타를 세웠다는 것이 그 도발의 증거다. 왜 하필 이준이었을까.

 

사진출처: 영화 '배우는 배우다'

물론 이준은 <닌자 어쌔신> 같은 영화를 통해 액션 연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준의 연기에서 장점으로 보이는 것은 단순히 말로 전달하는 장면에서조차 그것을 액션처럼 몸으로 보여주는 힘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은 몸의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연기에 있어서 그가 가진 굉장한 자산이다.

 

하지만 이렇게 연기에 대한 타고난 자산을 갖고 있다고 해도 이준은 연기자로서는 여전히 초보에 가깝다. 배우라고 부르기보다는 아이돌 스타라고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그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바로 이 부분에 이 영화가 가진 묘미가 들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배우나 연기 같은 조금은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이거나 혹은 우리네 일상일 수 있다는 것.

 

<배우는 배우다>에서 이준이 연기하는 오영이라는 인물은 연기의 기술은 잘 모르지만 몰입이 뛰어난 친구다. 그래서 서툴게도 연극을 하면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지나치게 빠져들어 극을 망치기 일쑤다. 즉 연극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실제인 것처럼 연기한다는 점이다. 물론 작품을 망치는 위험성이 있지만 연기자로서 이보다 중요한 덕목은 없을게다. 최고의 연기란 연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하지만 그런 오영이란 인물에게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매니저가 달라붙으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영화의 단역 캐릭터를 조역까지 바꿔놓아 말 그대로 일약 스타를 만들어버리자 오영은 진정한 연기가 아니라 마치 스타를 연기하는 인물처럼 바뀌어버린다. 그토록 자신을 밟았던 여배우를 마치 정복하고 복수하듯 정사를 치른 후 그래서 그가 무심코 내뱉는 말은 이렇다. “여배우라고 별거 아니잖아.”

 

정점에 올라 스타가 되자 그는 작품의 캐릭터에 몰두하기보다는 스타가 된 자신에 더 몰입한다.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감독이 바라보는 연기라는 세계가 단지 스크린 안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시점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고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페르소나’라고도 흔히 표현되는 이 가면은 그래서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너무 가면을 오래 쓰다보면 자신의 맨얼굴을 잊게 된다는 점이다.

 

오영은 스타라는 가면을 쓰면서 배우라는 자신의 본래 얼굴을 잊어버린다. 영화를 찍으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스스로 컷을 외치는 건 그가 전혀 배역에 몰입되어 있지 않다는 걸 말해준다. 결국 그는 그렇게 추락한다. 그리고 바닥에 내려와서야 비로소 자신의 맨얼굴을 찾아낸다. 중요한 것은 이 일련의 성공과 추락의 과정을 통해서 그가 배우라는 직업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됐다는 점이다. 어디서 어떤 역할을 하든 ‘배우는 배우다’라고 편안히 말할 수 있다는 것. 마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영화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두 시퀀스가 있다. 그 하나는 오영이 어느 날 우연히 룸싸롱에서 알게 된 조폭 같은 깡다구(마동석)에게 이끌려 억지로 형 동생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스타를 연기하며 살아가던 오영은 갑자기 조폭 영화(이를테면 <영화는 영화다> 같은)의 한 인물을 연기하게 된다. 험악한 분위기에서 굴욕적인 일을 당하면서 그가 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 상황에서는 다른 연기를 하게 되는 우리네 삶을 잘 보여준다.

 

또 한 시퀀스는 마치 오영에게 구원처럼 등장하는 여자 서영희와 길거리에서 만나 즉석에서 벌이는 연기 장면이다. 이 장면은 마치 남녀가 서로 만나고 헤어지는 그 애증의 갈등을 그저 평범하게 일상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와 그녀가 함께 연극에서 했던 연기를 재연하는 것이다. 즉 연기와 일상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이 장면에서는 도대체 어떤 게 연기이고 어떤 게 실제인지 모호하기 이를 데 없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연기적인 행동들이 대부분 이럴 것이다.

 

<배우는 배우다>는 이처럼 연기가 연기자들의 것만이 아니라 누구나 하고 있는 일상적인 것이란 걸 보여준다. 물론 여기서 연기자와 일반인을 가르는 것은 오영이 경험했던 것처럼 실제 연기생활을 통해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그래서 어디서 연기해도 ‘배우는 배우다’라고 얘기할 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경험한 이준은 어떨까. 그는 과연 이 영화를 통해 ‘배우는 배우다’라고 얘기할 수 있는 연기자의 세계로 들어왔을까.

 

영화를 통해서 보면 분명 이준은 신연식 감독이 그려낸 이 치밀한 연기의 세계 속에서 진짜 연기자를 경험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은 투박한 면이 보여도 그는 분명 꽤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아이돌임에도 불구하고 전라 정사 신을 찍었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일이다. 누구나 영화를 보고 나오면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 “이준, 역시 배우는 배우네.” 이것만큼 배우에게 좋은 찬사가 있을까.

분노, 연민, 죄의식까지 <비밀> 지성 연기 놀라워

 

역시 좋은 드라마는 좋은 캐릭터를 통해 좋은 연기자를 재발견하게 한다. <비밀>에서 유독 주목받는 연기자는 황정음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 속에서 미칠 듯이 오열하는 황정음의 눈물 연기는 분명 <비밀>이 재발견한 그녀의 가능성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황정음만큼 놀라운 연기는 지성에게서도 발견된다.

 

'비밀(사진출처:KBS)'

이것은 지성이 연기하는 조민혁이라는 캐릭터가 가진 놀라운 복합심리 때문이다. 이 캐릭터는 지금껏 드라마에서 좀체 보기 힘들었던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내면을 보여준다. 처음에 그 감정은 분노였다.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을 뺑소니 사고로 죽게 한 이가 강유정(황정음)이라고 알게 된 그는 그녀의 남자친구로 하여금 그녀를 심판하게 해 감옥에 보낸다.

 

하지만 감옥에 보낸 것으로 조민혁의 분노는 멈추지 않는다. 가석방을 막기 위해서 일부러 문제를 일으키고 그 과정에서 강유정은 아이를 잃게 된다. 출소한 후에도 조민혁은 스토커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며 사사건건 괴롭히는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처절한 복수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그것이 그녀에 대한 자신의 연민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아채지 못한다.

 

분노가 조금씩 연민이 되는 이유는 강유정이 하는 일련의 행동들, 이를테면 피해자 어머니를 매번 찾아가 끝까지 사죄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자신이 생각했던 파렴치한이 아니라는 의구심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는 모습에서 길바닥에 사고자를 버리고 도망가는 뺑소니범과는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는 것. 대신 그는 강유정의 옛 남자친구인 안도훈(배수빈)을 점점 의심하게 된다. 그녀가 진범이 아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은 복수심과 얽혀 묘한 연민이란 감정의 형태로 생겨난다.

 

그러나 결국 뺑소니 사건의 진범이 안도훈이라는 것을 알게 된 조민혁은 그에게 분노하면서 동시에 강유정에 대한 죄책감을 갖게 된다. 그녀가 저지른 일도 아닌 일로 자신이 그녀를 비극의 끝단으로 밀어부친 것에 대한 죄책감. 조민혁의 죄책감은 그래서 그녀에 대한 극단의 사랑으로 바뀌어나간다.

 

“네가 신경 쓰여서 미치겠어! 그러니까 내 옆에 붙어있어!” 이 대사 한 줄은 실로 조민혁이 갖고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모두 끌어안고 있다. 거기에는 어디로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분노가 깔려 있고 그녀에 대한 한없는 연민과 동정심 그리고 무고한 그녀를 망가뜨렸다는 자신의 죄책감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가 결국 그녀에게 배우는 마지막 감정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지키고 싶은 게 뭐지?”하고 그가 그녀에게 물었던 것. 그녀가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는, 모든 걸 끌어안는 진정한 사랑을 그는 알고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복잡한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연기로 표현해냈을까. 지성이 연기한 조민혁의 초반 모습과 지금 현재의 모습은 거의 180도 달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때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을 죽인 살인자에 대해 분노했던 그가 아닌가. 그런 그가 지금은 그 살인자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극단으로 변화하는 과정이 마치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는 점이다. 지성이 얼마나 다채로운 감정의 결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 있는 연기자인가를 새삼 느끼게 되는 대목이다.

 

<비밀>에는 유독 웃으면서 우는 연기가 자주 보인다. 배수빈이 미친 듯이 웃으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장면에서 실로 악마적인 느낌마저 주었다면, 차도에까지 뛰어들며 비밀을 지키려하는 강유정을 보며 웃으며 눈물 흘리는 지성에게서는 답답함과 연민, 분노, 사랑 같은 다양한 감정들이 묻어난다. 이것은 아마도 이 작품의 작가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작가는 인간이 한없이 흔들리는 갈대처럼 갸녀린 존재라 여기는 게 아닐까.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캐릭터가 있다고 해도 그걸 소화해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황정음은 물론이고 지성, 그리고 배수빈과 이다희까지 이 작품에서 열연하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이 작품의 성공에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하지만 좋은 작품에 좋은 캐릭터 그리고 좋은 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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