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킥3', 모자이크에 가려진 절묘한 풍자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사진출처:MBC)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하이킥3)'은 왜 굳이 노출 장면에 모자이크를 썼을까. 이런 식의 질문에는 함정이 있다. 질문 자체가 결국 모자이크와 노출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든 노출이든 둘 다 자극적이긴 마찬가지다. 즉 백진희의 치마를 걷어 올리고 드러난 팬티를 끄집어내려 엉덩이를 보여주는 노출 자체도 자극적이지만(물론 이 장면은 실제가 아니라 레깅스를 입고 찍은 장면이다), 그것을 모자이크 처리한 점은 더 자극적이기 때문이다. 모자이크는 상상력을 촉발시킨다.

하지만 노출과 모자이크만 자꾸 떼어내 벌어지는 논란은 어쩌면 방송된 장면 그 자체보다 더 자극적일 수 있다. 전체적인 맥락을 가리고 국소적인 부분에만 집중시키기 때문이다. 왜 청년백수 백진희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사실은 더 중요하다.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한 공간은 다름 아닌 화장실이다. 고시원에서 쫓겨나 박하선의 집에 얹혀사는 그녀는 스스로 투명인간을 자처한다. 살게만 해주면 "없는 것처럼" 살겠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화장실은 거의 유일한 사적인 공간이 아니었을까.

그 누구에게나 최소한 허용되는 사적인 프라이버시의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현실. 백진희의 빵꾸똥꾸(?) 상황은 그런 현실을 화장실 코미디로 풀어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더 기발한 것은 백진희를 그렇게 만드는 인물이 또 다른 현실의 피해자인 안내상이라는 점이다. 빚쟁이에 쫓겨 도망치던 안내상이 우연히 발견한 땅굴로 유사시의 비상구(?)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 옆집 화장실을 뚫게 되었고 마침 거기에 청년 백수 백진희가 있었다는 이 기막힌 설정은 화장실 유머로만 보게 되면 상황이 주는 맥락을 놓치기 쉽다.

집도 절도 없는 안내상 가족이 청년 백수 백진희를 설득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그 자체로는 우습지만 그 상황 자체가 우스운 건 아니다. 이것은 지금 현재 승자 독식 구조의 사회에서 패자가 되어버린 이들이 서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장면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려는 의도는 없지만, 구조 자체가 힘겨운 이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부딪치게 되어있는 이 웃을 수 없는 현실.

학생 백진희와 안내상 가족이 이 시트콤 전반에 병치된 것은 이 두 상황이 거의 같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루 아침에 빚더미에 올라 길바닥을 전전하는 홈리스가 된 상황. 그리고 각각 윤계상의 집과 박하선의 집에 얹혀사는 상황. 화장실을 뚫고 나와 부딪치게 되는 안내상과 백진희는 이 절박한 패자들이 만나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이끌어갈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지점이다. 그들은 함께 공존하는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밟고 올라서려는 안간힘을 쓸 것인가.

시트콤은 물론 웃음을 주는 코미디 장르지만, 또 한편으로 시추에이션(상황)이 환기하는 현실적인 코드들이 중요한 장르이기도 하다. 김병욱 감독의 시트콤이 독특한 것은 이러한 현실적 상황들을 가져오면서도 그것을 슬랩스틱이나 화장실 유머처럼 누구나 볼 수 있는 장면으로 연출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사회적 맥락을 이해 못하는 아이들조차 쉽게 웃을 수 있으며, 동시에 어른들은 그 맥락이 주는 풍자적인 쾌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만큼 시청층이 폭넓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이킥3'의 백진희 장면에 등장한 모자이크 논란은 충분히 예고된 것이다. 그만큼 자극적인 연출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모자이크로 인한 논란이 자칫 '하이킥3'가 본래 의도했던 다른 맥락들까지 모두 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모자이크와 노출이라는 나무가 아니라, 그런 장면이 왜 나왔는가 하는 숲을 볼 수는 없는 걸까.

'방자전', 김대우식 유쾌하고 음란한 도발

'방자전'의 상상력은 음란하다. 아니 어쩌면 이건 전작 '음란서생'에서 이미 싹을 보였던 김대우 감독의 상상력인지도 모른다. '춘향전'을 뒤집는 이 이야기에서 춘향이는 더 이상 정절을 지킨 열녀가 아니고, 이몽룡은 사랑의 맹세를 지킨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다. 변학도는 탐관오리의 표상이 아닌 다만 성적 취향이 변태적인 인물일 뿐이며, 물론 방자도 그저 몽룡과 춘향이 사이에서 메신저 역할을 하던 그 방자가 아니다.

성욕이나 성공 같은 욕망에 솔직하고 그것을 서로 이해할 정도로 쿨한 그들은 더 이상 조선시대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대인에 더 가깝다. 우리가 '방자전'의 등장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이 사극이라는 과거의 지대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현대어법은 미풍양속이란 이름 위에 존속하는 권위의 엉덩이를 쿡쿡 찌른다. 그러니 어찌 보면 '방자전'의 음란함은 지배계층의 눈에는 꽤나 위협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아무리 고전 중의 고전이고, 몇 년 마다 계속 반복되어 리메이크되는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21세기에 같은 정절의 이야기로서 '춘향전'을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시대는 바뀌었고 시선은 사극이 역사를 버릴 정도로 낮아졌다. 게다가 '춘향전'은 역사도 아닌 그저 허구적인 작품일 뿐이다. 따라서 '춘향전'에 내포된 기존 체제에 대한 호의적인 시선을 '방자전'에서 기대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일 것이다.

그러니 '방자전'의 이야기는 철저히 현대적일 수밖에 없다. 몽룡이 춘향의 마음을 달뜨게 하기 위해 구사했다고 주장하는 '차게 굴기'는 '짐짓 일부러 쿨하게 구는' 현재의 연애법이고, 춘향이 몽룡의 마음을 동하게 하기 위해 보냈다는 '은꼴편(은근히 꼴리는 편지)'은 '은꼴사(은근히 꼴리는 사진)' 같은 현대적 은어의 패러디다. 등장인물들의 언어가 현대어법이어서인지 그 사고방식 또한 현대적이다. '방자전'에는 물론 몽룡과 방자 같은 계급이 존재하지만, 그 둘이 춘향을 사이에 두고 경쟁을 벌이는 시퀀스에서 볼 수 있듯이 그 계급이 주는 무게감은 미미하다. 어찌 보면 부모 잘 만난 몽룡과 그렇지 못한 방자를 보는 것만 같다.

'춘향전'이라는 미담의 탄생 뒤에 숨겨진 적나라한 현실을 고발하는 '방자전'은 방자의 시각을 집어넣어 '춘향전'과는 완전히 새로운 김대우식의 도발적인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훼손했다는 우려 섞인 비판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방자전'을 고전과 비견할 필요까진 없을 것 같다. '방자전'은 더 이상 옛이야기가 아니라 작금의 세태를 드러내는 현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성공을 위해 사랑마저도 미담으로 조작하는 현실, 신분상승을 위해 기꺼이 순정을 포기하는 현실,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순정. 그래서 차분히 바라보면 그것 또한 하나의 현대적인 미담으로 보여지는 시선. '방자전'의 음란함은 그 과감한 노출수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음란함 그 자체보다는 그 엄밀한 신분구조 속에서도 음란한 상상을 하는 그 도발이 음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음란함이 통쾌함을 주는 것은 속물근성 가득한 현대적 인물들이 고전을 빌어 뒤틀어지는 풍자가 현대인들의 억눌린 감정을 풀어내주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이다.

'빵꾸똥꾸'에 깃든 사회, 그 의미

난데없는 '빵꾸똥꾸(?)'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악동인 해리(진지희)가 입에 달고 다니는 이 '빵꾸똥꾸'는 올해의 유행어가 될 만큼 장안에 화제가 됐다. 그런데 지난 22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이러한 용어가 폭력적이고, 필요이상 반복적으로 사용됐다며 해당 프로그램에 권고 조치를 했다. 도대체 왜 이 같은 용어에 대해 이처럼 상반된 반응이 나온 걸까.

먼저 사전에도 없는 '빵꾸똥꾸'가 무얼 의미하는 지부터 정확히 알아야 할 것 같다. 시트콤의 내용에 따르면 그 유래는 해리가 어렸을 때 말을 좀 늦게 하게 됐는데, 할아버지인 이순재가 방귀를 뀌는 소리를 듣고는 첫 마디를 '빵꾸똥꾸'라고 말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 그 후로 뭔가 심사가 뒤틀리는 것(행위나 사람 모두 통틀어)을 대하면 해리는 이 말이 습관적으로 터져 나온다. '빵꾸똥꾸'는 적어도 해리에게는 자신만이 가진 욕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빵꾸똥꾸'를 외치는 해리의 모습은 그래서 거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어쨌든 욕의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욕은 그 집에 새로 들어와 식모 생활을 어렵게 하며 살아가는 세경과 신애 자매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진다. '빵꾸똥꾸'는 해리가 처음 신애의 뺨을 올려 부쳤을 때 느껴지던 그 충격처럼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어쩌면 저렇게 독할 수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충격은 조만간 사라져갔다. 그리고 차츰 독하기만 한 아이라고 여겨졌던 해리는 역시 아이다운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빵꾸똥꾸'를 외치면서도 하루만 신애가 보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하고, 신애가 쓰는 동화를 읽기 위해 신애가 하는 일을 도와주며 빨리 쓰라고 욕을 해대는 해리는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이다. 그러니 이 아이가 이렇게 욕을 입에 달고 사는 모습에서 이제는 불쌍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바로 이 지점부터 해리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바뀌었다. 해리를 이해하게 되는 지점에서 해리의 '빵꾸똥꾸'가 의미하는 것이 진짜 무엇인지도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 아이가 입에 담는 욕이 보기 좋을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보기 좋지 않은 것, 그것은 사실 우리가 인정하기 싫은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아이가 무슨 죄가 있을까. 아이마저 욕을 하게 만드는 환경이 문제가 아닐까.

아이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빵꾸똥꾸'는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놓은 사회의 비뚤어진 부분을 거울처럼 비춰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해리가 '빵꾸똥꾸'를 외칠 때마다 이제는 심지어 묘한 카타르시스까지 느끼게 되는 것은 욕이 가진 언어적인 기능과 거의 궤를 같이 한다. 욕과 배설의 즐거움이 같다는 것은 어떤 억압을 대리해 풀어주는 그 기능적 유사함 때문이다.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는 촌철살인의 욕은 심지어 문학적으로까지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빵꾸똥꾸'가 문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용어는 풍자를 웃음의 재료로 삼는 시트콤으로서는 꽤 우회적인 괜찮은 표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도 '빵꾸똥꾸'를 듣고 빵 터졌던 분들은 그 이유가 이 말이 가진 표피적인 의미 이상의 뉘앙스를 순간 느꼈고 또 공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아이들이 무비판적으로 해리의 행동을 따라할 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이라는 것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지붕 뚫고 하이킥'은 정직하게 그런 변화해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 혹은 아이들의 성장을 희망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쩐의 전쟁’의 풍자가 말해주는 것

장태유 PD는 왜 ‘돈의 전쟁’이 아니고 ‘쩐의 전쟁’이냐는 질문에 “쩐이 더 끈끈한 맛이 있지 않냐”고 되물었다. 그렇다. 지금은 돈을 돈이라 표현해서는 어딘지 밋밋할 정도로 돈에 대한 욕망과 박탈감이 많은 시대다. 그래서일까. ‘쩐의 전쟁’이란 드라마가 만화적인 연출로 인해 무겁게 가라앉을 수 있는 심각한 이야기를 최대한 부담을 줄여 가볍게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짠한 느낌이 남는 것은.

웃으면서도 짠한 것, 풍자의 힘
박인권 화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쩐의 전쟁’은 만화 원작을 갖고 있는 작품들이 가질 수 있는 ‘과장의 약점’을 오히려 이용하고 있는 중이다. 박인권 화백의 만화는 리얼리티를 다루면서도 만화만이 갖는 과장을 또한 극적 장치로 활용하고 있는데, 드라마, ‘쩐의 전쟁’ 속에서도 그 심각한 리얼리티와 만화적인 가벼움이 동시에 나타난다.

즉 심각한 상황에서도 웃게 만들고, 웃고 있으면서도 마음이 짠하게 만드는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 그것은 풍자의 힘 때문이다. 풍자는 과장의 기법을 통해 사람들의 웃음을 끌어내지만, 그 과장이 제거됐을 때 드러나는 심각한 현실 때문에 짠한 느낌을 남긴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버지의 유서를 통해 나타난다. 칼처럼 날카롭게 간 카드로 동맥을 끊어 자살한 아버지가 ‘카드 빚 쓰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는 사실은 그 심각한 상황 속에서도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거기에는 자살도구로 쓰인 것이 카드라는 사실과 유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카드 빚’이란 단어 때문이다.

이것은 실제 당사자에게는 엄청난 비극일 수 있지만 그것을 드라마라는 장치 속에서 보는 시청자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웃음을 짓게 만든다. “이게 무슨 유서가 이래?”하며 오열하는 금나라를 보는 시청자들은 웃게 되는 것이다. 그 웃음은 이 과장된 설정에서 비롯되지만 그 현실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다.

이 간극에서 우리는 작가가 전하려는 사회에 대한 비꼼을 공유할 수 있다. ‘오죽 했으면 카드 빚 쓰지 마라’고 유서를 썼을까 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서주희(박진희)가 “남자는 상처를 남기지만 돈은 이자를 남긴다”고 할 때 그 말의 묘미에서 웃음을 짓게 되지만 또한 ‘정말 돈돈 하는 세상’이라고 씁쓸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이유다.

왜 하필 풍자였을까
그런데 왜 하필 풍자라는 장치를 만들어 썼을까 하는 데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풍자란 직접적으로 비판하기 어려운 대상을 언어유희나 과장된 표현으로 비꼬는 기술이다. 즉 듣는 사람에게 그것이 자신을 비판하는지 즉각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쩐의 전쟁’이 풍자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그만큼 민감한 사안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사실적으로 그렸다면 ‘피도 눈물도 없고 오로지 돈만 있는 사채업자’로 그려지는 드라마가 처하게 될 사회적 파장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드라마 후반으로 가면서 나올 ‘진정한 돈을 아는 사채업자’의 이야기에서 “혹 사채업자를 미화하는 것 아니냐”는 삐딱한 시선에 직면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다가는 드라마가 하려는 진짜 이야기는 이상한 오해에 휘말릴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쩐의 전쟁 속에 살아간다
하지만 풍자로 덧대진 악덕 사채업자 마동포(이원종)와 그 부하들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거둬 가는 악독한 캐릭터들이지만, 우리가 이들에게 갖는 우선적인 이미지는 코믹함이다. 풍자라는 안전장치를 단 드라마는 더 신랄하게 상황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다. 신체포기각서를 쓰고 죽었으니 시체를 가져 가겠다거나, 결혼식장에 들어온 축의금을 강탈해가며, ‘사람은 죽어도 빚은 남는다’는 식의 질깃질깃한 빚 독촉을 해대는 사채업자들의 모습이 풍자라는 옷을 입고 고스란히 그려진다.

우리는 그 속도감 있는 풍자의 틀 속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그 웃음 뒤에 남는 짠한 느낌은 사실 그 풍자의 대상 속에 자신도 피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돈, 아니 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살아가기 어렵다는 자조 섞인 웃음이다. 드라마 ‘쩐의 전쟁’은 저네들 사채업자들만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것 또한 자본주의라는 쩐의 세상을 비꼬는 풍자의 장치로 활용되고 있기에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남 일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쩐의 전쟁’ 속에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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