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의>, 이병훈 사극의 리트머스 시험지

 

<마의>는 전형적인 이병훈 PD표 사극이다. 이미 MBC 사극의 한 틀을 만들어낸 이병훈 PD가 지금껏 보여준 사극의 정점을 <마의>는 보여준다. 거기에는 운명에 의해 변방으로 내쳐지는 아이가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선한 의지로 노력해 차츰 차츰 중심으로 돌아오는 영웅의 서사가 있다. 마치 옛 이야기에서 문제가 주어지고 그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주인공이 등장하듯, 하나하나의 주인공에게 주어진 미션을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 하다.

 

그리고 그렇게 미션을 푼 주인공은 이른바 포상을 받는다. 이 포상을 통해 인물은 성장한다. 동물을 돌보는 마의라는 당대의 비천한 수의사가 어의가 되는 그 성장 과정을 담는 그 이야기 구조는 이미 이병훈 사극을 통해 여러 차례 봐왔던 것들이다. <허준>이 그렇고, <상도>가 그러하며 <대장금>이 그렇다. 다만 그 각각의 작품 속 인물들의 직업이 다르기 때문에 그 이야기의 양상이 달라지는 것일 뿐, 그 구조는 다르지 않다.

 

<마의> 역시 마찬가지다. 서로 신분은 다르지만 같이 의술을 공부하며 동무가 되었던 이명환(손창민)과 강도준(전노민). 하지만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강도준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이명환과 그로 인해 아이가 뒤바뀌고 버려지게 되는 운명. 그렇게 뒤바뀐 운명을 가진 백광현(조승우)과 강지녕(이요원) 사이에 만들어지는 애틋한 사랑. 이렇게 몇 가지 요소들을 두고 보면 <마의>만의 독특한 색깔이 분명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을 보면 결국 백광현이 성장해 이명환과 맞서는 이야기로서 그 구조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 구조는 이병훈표라고 꼬리표를 달았지만, 어찌 보면 고전적이고 인간 본원의 욕망을 담은 구조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전형적인 영웅 서사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 표현만 달리했을 뿐 계속 반복되어온 서사구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의>가 여전히 작금의 대중들에게 먹힐 것인가의 문제는 이 이야기 구조가 본원적인 것인가, 아니면 트렌드에 움직이는 것인가의 문제일 수 있다. <마의>는 작품으로만 보면 연출이나 대본이나 연기, 그 어느 것에 있어서도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 아니다. 결국 대중정서가 이병훈표 사극의 구조를 여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라는 얘기다.

 

가장 큰 변수는 이제 성인역으로 돌아올 백광현과 강지녕을 연기할 조승우와 이요원에게 있을 수 있다. 비슷한 스토리구조와 캐릭터일 때(그것이 여전히 매력적이지만) 그것을 연기하는 연기자의 역량에 따라 그 효과는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승우와 이요원은 이미 여러 차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검증된 배우들이 분명하다. 하지만 연기자와 작품은 그 궁합에 따라 전혀 다른 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여기에 또 필요한 것이 이병훈 PD의 손길이다. 과연 이병훈 PD는 여전히 건재한 자신의 왕국을 보여줄 수 있을까.

 

<마의>는 사극으로서 한 왕국을 건설한 이병훈 사극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간 사극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기 보다는 정통에서 퓨전으로 퓨전에서 판타지로 이제는 각종 장르물과 뒤섞이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사극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움’을 기대하게 하는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한때 정통사극의 반복으로 지루해진 사극의 틀을 퓨전사극으로 뚫어버린 이병훈 사극. 이제 그 이병훈 사극 역시 변화에 도전을 받고 있다. <마의>, 여전히 매력적인 사극이지만 대중들은 과연 이 고전처럼 되어버린 사극을 받아들일까. 귀추가 주목되는 지점이다.


'무신'이 정통사극을 고집하는 이유

'무신'(사진출처:MBC)

'무신'은 기묘한 조합의 사극이다. 이환경 작가는 '용의 눈물', '태조 왕건' 같은 정통사극의 정점을 찍은 작가로 KBS 사극의 대명사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가 MBC에서 사극을 한다. 알다시피 MBC 사극 브랜드는 정통사극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이병훈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대장금', '허준' 같은 일련의 퓨전사극이 새로운 브랜드가 되었다. 이런 퓨전화되고 허구화된 MBC 사극의 경향은 지금도 여전하다. '해를 품은 달'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무신'은 MBC가 회귀한 정통사극일까. 아니면 정통사극을 쓰던 이환경 작가의 퓨전화일까. 정통사극을 차별점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지금까지의 전개로 보면 후자에 가깝다. 물론 '무신'은 고려시대 역사 속 실존인물인 김준(김주혁)을 다루고 있다. 그는 천민 출신으로 최씨 무인정권의 마지막 계승자인 최의를 타도하고 왕권을 회복한 뒤 10년 간 권력을 장악했던 실제 인물이다. 하지만 김준, 최충헌, 최우, 최향 등등의 역사 속 실존인물들을 빼놓고 보면 그 스토리의 힘은 역사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서사에서 나온다고 볼 수 있다.

그 서사의 전범들은 '글래디에이터', '스파르타쿠스' 같은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또 그 고전이 되는 '벤허'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팔타커스'와도 닿아 있다. 공역장에 끌려간 김준이 쓰러진 동료 노예를 감싸주며 감시관과 대적하는 장면은 '스팔타커스'의 도입부분에 들어있는 장면과 똑같다. 알다시피, 격구장은 콜로세움과 같고, 경기에 광분하는 관람자들이나, 경기 도중 목이 잘려나가는 극한 장면들 역시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다.

물론 이것은 장면 연출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오마주가 가능하다. 실제로 김진민 PD는 "영화 '글레디에이터'와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를 많이 참고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스토리는 어떨까. 흥미로운 일이지만, 스토리 역시 비슷하다. '스파르타쿠스'나 '무신'이나 모두 경기장 밖에서의 정치적인 상황들이 등장하고, 그렇게 엮어진 갈등들이 경기장 안에서 폭발하는 이원적인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경기장 안에서의 사투를 통한 김준이라는 인물의 성장스토리나, 그 안에 들어있는 월아(홍아름)와의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역시 마찬가지다.

'스파르타쿠스'와 '무신'. 역사는 완전히 다른데, 어째서 서사는 같을까. 그것은 이 서사가 그만큼 근원적인 영웅서사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추락과 대결, 성장과 복수의 서사는 그만큼 고전적이다. 그래서 이 서사는 우리네 역사적 영웅을 다루는 사극에서도 단골로 등장하기도 했다. '태조 왕건', '해신', '대조영' 같은 작품은 그 인물의 서사구조가 '글레디에이터'나 '스파르타쿠스'와 거의 유사하다. 하지만 이들 사극들과 비교해 '무신'이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무신'이 훨씬 더 '스파르타쿠스'의 서사와 연출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이 흘러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서사인 만큼 그 파괴력도 막강하다. '무신'은 그래서 일단 그 서사의 힘으로 한 번 빠져보기 시작하면 꽤 깊은 몰입감을 안겨주는 작품이다. 고문 장면, 격구장에서의 사투 장면이 주는 폭력성과 여자 노예들을 물건 다루듯 다루는 장면들은 그것이 '리얼리티'라고 주장하지만, 실상은 반복된 서사가 가진 약점을 시각적인 자극으로 극복하기 위한 의도다. 이것은 과거 고전 영화였던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스팔타커스'보다 다시 돌아온 미국드라마 '스파르타쿠스'가 훨씬 더 수위가 높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의문점이 생긴다. 누가 봐도 역사라기보다는 서사에 훨씬 가까운(물론 실존인물이 있다고 해도) '무신'이 굳이 왜 정통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는가 하는 점이다. 과연 이처럼 철저히 서사의 힘에 의존하는 '무신'을 정통사극이라 부를 수는 있을까. 정통사극이라면 역사적 사실 그 자체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 역사적 사실 자체가 현재적 의미를 환기시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과연 '무신'은 그런 점들을 충족시키고 있을까.

여러 모로 퓨전사극이라는 타이틀이 걸맞아 보이는 '무신'은 왜 정통사극이라 고집할까. 이환경이라는 작가 때문에? 이것은 오히려 '무신'이라는 작품에서 역사를 떼어버리고 나면 어떤 결과로 보일 것인가를 떠올려보는 것이 훨씬 그 질문에 맞는 답일 것 같다. '무신'은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서사를 너무나 충실히 따르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니 역사가 빠져버린다면 '무신'만의 차별점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이 작품의 최대 성과는 이 유사하면서도 본원적이고 강력한 서사구조가 가능한 김준이라는 인물을 우리네 역사 속에서 찾아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퓨전사극 ‘돌아온 일지매’의 실험성과 한계

“빅뉴스입니다. 빅뉴스!” ‘돌아온 일지매’에서 소문을 기록하고 전파하는 역할을 하는 배선달(강남길)에게 차돌이(이현우)가 달려와 이렇게 외쳤을 때, 순간적으로 이 퓨전사극은 현대극과 사극 사이의 경계를 넘어섰다. 하긴 시작부터 도심 속의 일지매를 보여주었으니, 이 조선시대에 등장한 영어는 그다지 대단한 일은 아닐 지도 모른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가 넘어서는 경계는 단지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사극이라고 지칭하기가 애매해진) 장르적으로는 액션과 멜로의 경계를 허물고 있고, 시청 소구층으로는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매체적으로는 만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퓨전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돌아온 일지매’. 그 실험성과 한계를 되짚어보자.

만화 혹은 드라마, 액션 혹은 멜로
드라마 읽어주는 캐릭터로서 책녀가 등장했을 때, 그것은 굉장히 낯설어 보였다. 보통의 사극이라면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통해 극의 진행이 전개되는데 반해, 책녀의 존재는 사실상 ‘책녀 마음대로’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책녀가 청나라로 가자고 하면 청나라로 가고, 일본으로 가라고 하면 일본으로 가는 식의 전지적 작가 시점의 이야기 진행은 지금껏 드라마 속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고우영 화백이 만화의 칸 밖에 깨알같은 글자로 집어넣었던 화백 특유의 목소리의 드라마화였다는 것을 발견하는 순간, 이 드라마가 고우영 화백의 만화에 얼마나 충실하려 하는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드라마는 만화책을 넘기듯 등장인물들의 소개 장면에서 시작하여, “일지매여 비상하라!”같은 만화적 문구로 끝을 맺게 되었다. 만화를 영상으로 그대로 가져오는 연출은 영화라면 이미 익숙한 것이지만, 드라마라면 꽤 참신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 실험적 연출 위에서 사극과 현대극은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얻게 되었다. 만화적 공간 위에는 시간적 조건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만화적 조건 위에 서 있는 주인공 일지매(정일우)는 중성적이다. 일단 외모부터가 그렇다. 산 속에서 그를 처음 본 달이(윤진서)는 그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그래서인지 일지매는 극중에서 여러 번 여장을 한 채 등장한다. 생긴 것뿐만이 아니라 하는 짓도 그렇다. 일지매의 상징으로 매화 가지를 남기는 것은 미적이며 여성적인 취향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여성적인 자태를 가진 일지매는 천하무적의 무공을 연마한 살인무기이기도 하다. 조선의 무술과 청나라의 무술 그리고 일본의 닌자술까지 배운 그는 한 명의 무술인으로서 국적의 경계 또한 허물고 있다. 따라서 이 여성성과 남성성을 모두 갖춘 중성적인 일지매는 그 두 가지 모습을 드라마 속에서 드러내게 된다. 그 하나가 양반들과 벌이게 되는 액션이며, 다른 하나가 월희와 벌이는 멜로다. 구자명이 도적들을 좇으면서 동시에 백매(정혜영)를 좇는 것도 이 드라마가 서 있는 액션과 멜로의 중간지점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돌아온 일지매’, 그 퓨전의 실험성과 한계
‘돌아온 일지매’는 이처럼 경계를 해체하고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서 있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사극과 현대극의 중간지점이며, 만화와 드라마의 중간지점이고, 남성성과 여성성의 중간지점이자, 액션과 멜로의 중간지점이기도 하다. 이러한 퓨전은 그 실험적인 시도만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가치있는 실험성이 드라마의 성공을 가져왔는가 하는 점은 별개의 문제다.

사극의 전통적인 문법이라 할 수 있는 대결구도를 이 드라마는 좀체 세워두지 않는다. 대신 조금은 지루할 정도로 일지매의 탄생과정을 순차적으로 차근차근 드라마는 조명해 보여준다.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버려졌으며 청국을 돌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그 지리한 과정은 지나칠 정도로 병렬적이다. 사건과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지고 그 사건에서 대척점에 있는 적이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그런 전형적인 과정은 이 속에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일지매가 그토록 먼 길을 돌아 세 나라의 무술을 익혔음에도 그다지 초절정의 무공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그 무예를 익히는 과정의 지난함이 삭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병렬적 연결에 일조한 것은 바로 전지적 작가 시점을 갖게 만든 책녀다. 사극과 현대극, 만화와 드라마를 공존시킨 책녀의 존재가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지매가 가진 중성적 느낌 역시 그 남성성과 여성성이 긴밀히 연관되지 못함으로 해서 오히려 드라마를 미지근하게 만들었다. ‘돌아온 일지매’의 멜로적 상황과 액션은 대체로 병렬적으로 흘러왔다. 일지매는 밖으로 나가서 액션상황을 연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멜로상황을 만들어냈을 뿐, 이 안팎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달이의 죽음이 체제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에 따른 리액션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어떤 슬픈 정조로 어른거리는 것은 새로운 슈퍼히어로라는 일지매의 캐릭터를 자꾸만 맥빠지게 만든다.

‘돌아온 일지매’는 여러 모로 문제작이라 할 수 있다. 꽤 많은 실험적인 시도들이 덜컥대지 않고 하나로 묶여져 있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의 성취를 했다고까지 보여진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실험성이 대중들과 호흡하지 못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한계로 지적된다. 낯설음을 재미로 변모시키는 것은 실험성 속에서도 대중적인 정서(익숙함 같은)를 의식했을 때 가능해지는 것이다.

‘일지매’라는 테크노 영웅의 탄생, 그 의미

원작의 ‘일지매’는 천으로 된 복면을 썼다. 하지만 2008년 찾아온 ‘일지매’는 금속과 가죽 느낌의 재질로 만들어진 가면을 쓴다. 갑옷도 화려해졌고 무기도 다채로워졌다. 제작사측은 이 갑옷을 만드는 데만 500만원 가까운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사극의 의복으로서는 파격적일 뿐만 아니라, 비용도 만만찮은 이 갑옷에 ‘일지매’는 왜 그만한 돈을 투여했을까.

‘일지매’, 새로운 테크노 영웅의 탄생
이것은 다분히 현 세대들의 기호를 반영한 결과다. 갑옷은 게임에 익숙한 현 세대들에게는 하나의 아이템에 해당한다. 이 아이템을 입고 작렬하는 음악과 함께 지붕 위를 날아다니는 화려한 가면의 영웅은, 이 시대의 청춘들의 감성이 반영되어 있는 테크노 영웅이다. 그리고 이 지금까지의 사극에서와는 전혀 다른 영웅은 이미 빨간 색안경을 끼고 산발한 머리를 한 ‘쾌도 홍길동’이 등장했을 때부터 예고된 존재다.

‘쾌도 홍길동’은 이미 사극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의상은 물론이고, 영상연출에 있어서도 도발적인 시도를 했다. 밸리 댄스를 추는 기녀들, 자가용으로 묘사되는 가마, 골프를 치는 상류층 양반이 그 속에서는 존재한다. 즉 과거라는 시점을 갖고 있지만 그 속에 현대가 공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코믹 퓨전 사극이라는 기치를 내걸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만화의 기법에 영향을 받은 바가 더 크다.

이처럼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해진 것은 이 사극들이 역사적 사실, 즉 사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같은 사극은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허구이다. 따라서 허구를 변용하는 것은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리지 않을뿐더러, 사실상 무한대로 상상력을 확장시키게 해준다. 그 안에서는 사람이 날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일개 도적이 왕의 권위를 앞지를 수도 있다.

역사가 되려 했던 ‘장길산’, 역사에서 탈주하는 ‘일지매’
그리고 이러한 도발적인 표현은 이 시대 청춘들이 가질만한 기성문법에 대한 반항으로 읽혀질 수 있다. 그것은 역사라는 권위를 뒤집어쓴 정통사극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고, 기득권 세력들만을 위한 역사에 대한 반항이기도 하다. ‘쾌도 홍길동’과 ‘일지매’의 영웅들이 모두 도적이라는 사실은 음미해볼 문제다. 도적은 하나의 풍자이면서, 민초들 혹은 소외된 자들의 대응논리이기 때문이다. 즉 진짜 도적(탐관오리, 부패한 신료들 혹은 왕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은 따로 있다는 것이며, 그들은 그 도적들을 터는 도적, 즉 의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처럼 표현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선택한 허구들은 그 체제 반항적이라는 면에서 청춘들이 가진 감성들과 맞닥뜨린다. 역사란 본래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며, 따라서 약자들은 허구 속에서라도 그 갇혔던 울분을 터뜨리면서 저들만의 역사를 세우는 모반을 꿈꾸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홍명희와 황석영의 원작 소설을 각각 드라마화한 과거의 ‘임꺽정’이나 ‘장길산’도(이들도 모두 도적이다) 이 범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사극들은 최근의 사극들과는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난다.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민중의 역사를 새로이 쓰겠다는 의지를 품은 것이라면,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그런 거창한 의지가 없다. 오히려 역사 자체에서 자유로워지려 한다. 따라서 그 영웅의 양상들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전자가 민중의 영웅을 그리려 했다면 후자는 대중의 영웅을 그린다. 이 새로운 영웅들이 대중의 문화적 코드를 사극 속으로 고스란히 끌어들이고 그 안에서 마음껏 향유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스트모던 사극, ‘일지매’
사극을 하나의 진화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면 민중의 영웅을 그린 ‘임꺽정’이나 ‘장길산’이 리얼리즘에 입각해 있다면, 역사와 허구, 그리고 왕과 민초의 중간쯤에 서 있던 ‘대장금’같은 퓨전사극은 이 양쪽 사이에 낀 모던한 사극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온갖 것들이 해체되고 재결합되어 나타나는 최근에 등장한 ‘쾌도 홍길동’이나 ‘일지매’는 실로 포스트모던하다. 여기에는 시공을 뛰어넘은 문화적 충돌이 곳곳에서 무리 없이 그려진다.

점점 젊어지는 사극 속에는 이 시대 청춘들의 성향들이 녹아있다. 그들은 이념보다는 문화에, 사실이 가진 권위보다는 자유로운 상상력에, 굳어져버린 형식보다는 파괴되더라도 새로운 형식에 더 열광한다. 이들이 이처럼 도발적인 형식으로 기득권을 부정하고 저들만의 영웅을 그리려 한데는, IMF에서부터 현재의 88만원 세대까지 자신들은 원치도 않았고 잘못한 것도 없지만 끊임없이 제기된 불합리한 도전들에서 비롯된 바가 클 것이다. ‘일지매’의 현대와 퓨전된 화려해지고 견고해진 갑옷은 역사에서 벗어나 저들만의 역사를 마음껏 그리고픈 이 땅의 청춘들의 꿈들이 더 간절해졌다는 반증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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